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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라를 찍자 (삿6: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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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고난이 닥치는 것일까요?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치 하나님이 죽어버린 것과도 같은 암담하고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을까요? 그 고난은 우연히 찾아온 것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떤 원인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들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야말로 재수없이 우리에게 닥친 것일까요? 아니면 뭔가 원인이 있기 때문일까요?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하나님이 나타나시지 않을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 상태, 즉 하나님과의 단절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가장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찾아오셨는데, 오셔서 대뜸 구원을 던져주시고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전에 기드온에게 한 가지 요구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의 비극의 원인이 무엇이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능력과 이적으로 조상들을 구원하셨다던 하나님이 이제는 죽어버린 것처럼 침묵하셨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하나님 섬기기를 그만두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마음 편하게 다가오실 수 있었겠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경험한 것은 끔찍한 고통과 비천함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닥치는 환난과 고통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것일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고난이 죄악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고난까지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우리보다 훨씬 탁월하신 하나님 자신의 지혜와 뜻에 따라 우리에게 유익하고 필요한 대로 고난을 당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상관없이 오는 고난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욥에게 닥쳤던 고난은 그의 죄악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더 정확히 깨닫고, 더 성숙한 믿음을 갖게 하시려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건 그렇다 치고, 고난의 또 다른 분명한 이유는 우리의 죄악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징계를 내리시는 것은 우리가 미워서일까요? 아니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일까요? 두 가지 모두겠지요. 그러나 그 징계는 죄악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그 죄악을 깨닫고 그것을 제거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게 하시려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죄악을 제거하기 전에는 고난도 물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속에 내던져진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럴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놀라고 두려워하고 절망하고 분노하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이지요? 우리가 고난에 처할 때, 그 고난의 이유가 무엇인지를 침착하게 파악하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고난 앞에서 괴로워하고 신음하기보다 먼저 그 고난의 원인을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 고난을 맞는 성숙한 모습입니다. 아, 괴롭다. 이놈의 세상 참 더럽네. 내가 뭘 잘못했다고 나한테만 이런 불행이 닥치는 거야? 다른 놈들은 나보다 훨씬 악하게 사는데도 잘만 나가는데. 이런 식으로 고난을 당하는 것은 고난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고난에게 당하는 것이지요. 고난이 우리를 다스리게 내버려두지 말고, 우리가 고난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 고난의 성격을 파악하고,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옳은지, 이 고난 속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올바로 알 수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 고난에 당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이기고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다가올 때, 이 고난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가족적인 것이나 또는 교회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내 인생에 중대한 위기가 닥쳐왔을 때, 또는 우리 교회가 큰 시련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 앞에서 차분히 그 원인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난 앞에서 우리는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의 감추어놓은 죄악을 찾아내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특별수사관입니다.

이스라엘은 그 특별수사관 앞에서도 끝내 자신들의 죄악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더 답답해진 것은 하나님이었어요. 그대로 놔두면 그 고난에 짓밟혀 모두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즉 그들에게 있는 우상을 제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고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주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끝내 우리의 죄악을 숨기려 한다면, 하나님이 직접 그 죄악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스스로 죄악을 깨닫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지요.

기드온은 민족을 구원하기에 앞서 아버지의 집에 있는 우상을 제거하는 개혁자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기드온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촌장쯤 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그 마을의 신전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즉 기드온은 아버지 집의 우상이 아니라 그 마을의 우상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무지하게 어려운 일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마을에 당산나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보통 마을 어귀에 있는 엄청나게 큰 나무가 당산나무인데, 도로를 새로 내기 위해 이 당산나무를 베어야 하는 수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면 난리가 나지요. 동네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반대를 하는 것입니다. 나라에서 국토개발을 위해, 그리고 주민의 편의를 위해 나라의 힘으로 하는 일인데도 반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 당산나무가 잘리는 수도 있지만, 도로계획이 변경되는 수도 많아요. 어쩌다가 당산나무가 베어지고 도로가 새로 뚫리게 된 경우라면, 그 이후에 마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상사의 원인은 당산나무를 벤 것이 되고 말지요.

그렇다면 하물며 한 개인이 그 마을의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는다는 것이 감히 할 일이겠어요?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실제로 이 일이 일어난 후 마을 사람들이 기드온을 찾아 죽이려고 했지 않습니까? 바알은 가나안 지역에서 섬기던 날씨의 신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농사를 짓고 살게 되면서부터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인생을 걸어야 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해서 광야생활 중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던 여호와는 전쟁의 신이었습니다. 다른 민족들과 늘 전쟁을 해야 했을 때는 여호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 정착해서 농사를 짓다보니 자연히 비를 주관한다는 바알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바알에게 비를 내려달라고 빌다가 이제는 드러내놓고 제사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아세라는 성경에서 주로 바알의 배우자로 등장합니다. 이 아세라는 언덕 위에 나무로 깎아 세워졌습니다. 마을 어귀에 세워놓는 장승같은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살아 있는 나무인 경우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당산나무처럼 말이지요. 아세라는 다산의 여신입니다. 아세라 상에게 절을 하면서 아들도 많이 낳게, 농사도 풍년이 들게 해 달라고 비는 것입니다. 온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고 아세라에게 절을 합니다. 이것은 신념보다 강한 신앙이기 때문에 그들의 삶을 지배하는 이데올로기가 됩니다.
그런데 누가 감히 바알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을 수 있겠어요?

일반적으로 개혁은 선한 개념이지만, 아무리 선한 개혁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반드시 저항이 있습니다. 개혁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되지 않은 상태를 선호하는 사람들이지요. 수구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수구세력의 저항이 너무 강하면 개혁이 성공하지 못하고 타협을 하게 됩니다. 지금 김대중 정부의 개혁이 상당 부분 그렇게 되고 있다는 비판이 많지 않습니까?
그런데 기드온이 개혁을 하겠다는 상황을 보세요. 이건 개혁세력과 수구세력간의 긴장과 갈등 차원이 아니에요. 이건 완전히 섶을 지고 불 속에 뛰어드는 꼴인 것입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지요. 힘이 없으면 개혁도 불가능합니다. 김옥균의 갑신정변이 안타깝게 삼일천하로 끝나고 만 이유는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개혁을 위해서는 확실한 지지세력이 있거나 자신에게 힘이 있어야 합니다. 군사정권들이 지지세력이 없어도 초기에는 개혁을 한답시고 힘으로 몰아붙이지 않던가요? 힘이 있어도 수구세력의 저항에 부딪치는 것이 개혁인데, 아무런 힘이 없이 어떻게 개혁을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기드온을 보세요. 붙잡혀 맞아죽을지도 모르는 일을 저질러버리고 말았습니다. 기드온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힘이 없으니까 밤중에 몰래 저질러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물은 엎질러지고 말았습니다. 날이 새면 성난 마을사람들이 기드온을 죽이려고 달려들 것입니다. 기드온에게 힘이 있다면 맞서서 싸울 수 있겠지만, 집안에서도 가장 작은 자라고 스스로 말했던 기드온에게 무슨 대책이 있었겠어요?
그렇다면 무엇이 기드온으로 하여금 마을 전체를 상대로 한 무모한 싸움에 뛰어들게 했을까요? 도대체 기드온이 무엇을 믿고 이런 일을 저질렀겠어요? 무엇을 믿어요? 물론 하나님을 믿었지요. 하나님이 시키신 일이기 때문에, 즉 하나님이 그의 지지세력이었기 때문에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일어날 일은 하나님이 알아서 해야지요. 하나님이 지지세력이었고, 하나님이 배후세력이었으니까.

우리가 모두 하나님을 우리의 지지세력으로, 배후세력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인데, 그 지지세력이 원하는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그 배후세력이 지시하는 명령을 수행하지 못하고 사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수훈에서 읽는 것처럼,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시는데, 오히려 많은 교회들에게서 부패가 발견되고, 기독교 지도자들은 비리에 연루되어 지탄을 받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였다 하면 싸우고,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를 것도 없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과연 하나님이 우리의 지지세력이요 배후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 형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지령을 내리셨나요? 정말 답답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으라고 하신 것은 또한 그를 민족을 구할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는가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이 시험을 통과하면 하나님은 더 크고 위대한 일에 그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마치 벼랑 끝에서 뛰어내리라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야말로 죽으러 가는 길과 같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힘으로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우리의 아세라를 찍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마음 속 깊은 곳에 사랑스러운 여신을 숨겨두고 거기에 절하는 동안,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문 밖에서 서성거리고 계십니다. 그 아세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잊고 삽니다. 그 아세라 때문에 교회도 빼먹습니다. 그 아세라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고, 또 우리가 불러도 대답도 없으십니다. 그 아세라를 찍어버려야 우리에게 다시 찾아오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세라를 찍으라고 하십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습니다. 집안에서 왕따를 당하게 될지,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하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 깡통을 차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세라를 찍으라고 하십니다. 도끼를 들었다가도 남들의 시선이 두려워, 또는 보복이 두려워 다시 내려놓기를 몇 번이나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곁에서 계속 재촉하시는데도, 그리고 그 하나님이 옳다는 것을 알면서도, 또 뒷일은 하나님이 책임지실 거라는 것을 믿는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왜 자꾸만 도끼를 든 손이 떨리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세라를 찍으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셔서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고 하십니다.
그런데 아세라 하나 찍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우리를 보시고 하나님은 앞으로 계획중인 큰 일들을 취소하려 하시지는 않을까요? 우리의 믿음과 충성이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는지, 얼마나 가짜였는지, 이 아세라 앞에서 그대로 드러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아세라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데 못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까워서 못하는 것, 두려워서 못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삶 한 가운데 남아 있는 거대한 아세라 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찍어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냥 찍어 넘어뜨리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으로 불을 태워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라고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빼앗고 삶을 지배하던 그 아세라를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시키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세라 상이 찍혀 넘어지고 불에 타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에 사용될 때, 그곳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때가 바로 하나님이 응답하시는 시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사는 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을 위한 결단, 이것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큰 발걸음입니다. 우리의 아세라가 하나씩 찍혀 넘어질 때마다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께 다가서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버릴 수 있는 믿음과 담대함을 또한 하나님께서 더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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