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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죄악 (창34:18-31)

본문

우리가 용서와 화해의 기도를 할 때 흔히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알고 지은 죄도 용서해 주시고 모르고 지은 죄도 용서해 주옵소서”. 그러나 우리가 지은 죄 중에는 모르고 지은 죄는 거의 없습니다. 마치 모르고 지은 죄처럼 변명할 뿐입니다.
단지 우리의 죄는 들켜버린 죄가 있고 들키지 않은 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고 들키지 않으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자신을 합리화 시킵니다. 양심에 조금 꺼려지지만 쉽게 무시해 버립니다. 증거가 있고, 들킨 것만을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굉장히 뻔뻔해질 때가 많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어떻게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가에는 관심이 없고 어떻게 들키지 않느냐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의 문화와 법도 죄를 짓지 않는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는데 관심이 있어보입니다.
대부분의 죄는 알고 짓는 것이고 들킨 죄보다 들키지 않은 죄가 많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스스로는 합리화시킬 수 있고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를 파괴하는 ‘죄’

죄는 바이러스와 비슷해서 바이러스가 몸을 병들게 하듯이 죄도 인간의 영혼을 좀먹습니다. 그리고 암세포처럼 인간의 영혼을 파멸시킵니다.
죄는 세월이 지나간다고 해서 없어지거나 잊혀지거나 그 영향력이 약화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32편 3절을 보면 죄를 고백하지 않고 계속해서 가지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죄가 우리안에 있으면 살이 아플뿐만 아니라 뼈속까지 아프게 됩니다. 4절을 계속해서 보면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토록 영적으로 깊은 고통을 겪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려고 자꾸만 자기의 생각을 마비시키려고 합니다. 술, 음식, 화려한 옷, 쾌락 등 순간순간 이런 것들을 통해서 자신을 마비시킵니다.
사람들은 정직하게 자기를 보는 것을 두려워 합니다. 그냥 적당히 넘어가지 않고 정직하게 자기 내면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시편 32편 1절은 어떤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가를 말해줍니다. 사람에게 허물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허물의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죄중에 특이한 죄가 하나 있습니다. 보통의 죄는 사람이 주체가 되어서 사람에게 짓는 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짓는 죄가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종교적인 죄’라고 합니다. 가장 악질적이고 무섭고 파괴력이 강한 것이 종교적인 죄, 즉 예수님을 믿으면서 예수 이름으로 짓는 죄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짓는 죄를 가리키시며 이러한 죄에대해서 언급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성전과 율법을 독점하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제일 잘 믿고, 성경에 정통하고, 교회를 가장 잘 섬긴다고 하는 성직자 그룹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위선으로 인한 죄

예수님은 창녀가 죄를 지었을 때는 심하게 분노하시지 않습니다. 세리가 죄를 지었을 때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들 바리세인들과 서기관 무리의 죄에 대해서는 ‘화 있을진저’라는 특별한 말을 사용하셨습니다.
야곱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는데 이 아들들의 죄가 바로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동생 디나가 가나안 땅에 놀러갔다가 하몰의 아들 왕자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수치스러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들은 몹시 분노하여 복수하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자기들의 사랑하는 여동생이 수치를 당했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고 복수심을 갖는 것은 누구에게라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우리들 가정의 일이었다면 우리들이라고 멀뚱멀뚱 쳐다보고만 있었겠습니까? 이런 감정을 가졌다는 것이 잘못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분노하고 복수심에 불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야곱의 아들들은 복수를 행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해서 복수극을 저질렀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자칫 범하기 쉬운 실수입니다. 교회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입니다.
창세기 34장 13절을 보면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과 그 아비 하몰에게 속여 대답하였으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 가해자인 하몰의 아들 세겜과 그 아비 하몰이 야곱의 집에 찾아와서 청혼을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생각은 세겜과 하몰과는 달랐습니다. 그들에게는 사랑하는 여동생이 강간을 당했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고 분노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동생을 아내로 달라는 말을 듣자 겉잡을 수 없는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그들은 속임수를 써서 복수를 하기로 결정합니다.
그 속임수는 일단 결혼을 승낙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조건을 하나 덧붙입니다. 결혼을 하고 싶다면 세겜과 하몰 일족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로 결혼을 시키기 위한 순수한 조건이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창세기 17장 10절에서 14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최초로 할례를 명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대대로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혹 너희 자손이 아니요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무론하고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양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할례는 남자의 성기의 양피를 떼어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언약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복수에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성경의 말씀을 들어서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데 사용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야곱의 아들들의 속임수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에게 말하되 우리는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할례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노니 이는 우리의 수욕이 됨이니라”(창 34:14)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은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18, 19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말을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좋게 여기므로 이 소년이 그 일 행하기를 지체치 아니하였으니 그가 야곱의 딸을 사랑함이며 그는 그 아비 집에 가장 존귀함일러라

야곱의 딸을 사랑했던 세겜은 야곱의 딸을 강간하는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래도 이 남자에게는 괜찮은 면이 보입니다. 그는 책임을 지려고 합니다. 요즘 책임을 지지 않는 남자가 무척 많은 것에 비하면 그래도 괜찮은 남자입니다. 그리고 방법은 나빴지만 그는 디나를 사랑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할례라는 제도를 그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는 디나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는 종교적 굴레를 넘어섭니다. 사랑은 국경을 넘고 종교의 벽을 넘어선다는 식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집에서 굉장히 존귀함을 받는 아들이었다는 표현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의 말이라면 다 받아들입니다.
20, 21절을 보십시오.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이 성문에 이르러 그 고을 사람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사람들은 우리와 친목하고 이 땅은 넓어 그들을 용납할 만하니 그들로 여기서 거주하며 매매하게 하고 우리가 그들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고 우리 딸들도 그들에게 주자

이제 그들은 자기 성의 백성들을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도 세겜이 디나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사랑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청년은 야곱의 아들들의 고약한 제안을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22, 23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 중에 모든 남자가 그들의 할례를 받음같이 할례를 받아야 그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여 한 민족 되기를 허락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들의 생축과 재산과 그 모든 짐승이 우리의 소유가 되지 않겠느냐 다만 그 말대로 하자 그리하면 그들이 우리와 함께 거하리라

그들은 설득을 하면서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름대로의 계산이 있었습니다. 할례만 하면 야곱일족의 재산이 모두 자기들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겜은 디나에게 대단히 반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렵게 어렵게 자기 성안의 모든 남자들을 다 설득시켜서 할례를 받게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성문으로 출입하는 모든 자가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의 말을 듣고 성문으로 출입하는 그 모든 남자가 할례를 받으니라

결국 모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잔인한 복수극이 시작됩니다. 할례는 외과적인 수술입니다. 수술을 받고 나서 3일간은 고통스럽습니다. 그동안은 걷지도 못하고 꼼짝도 못합니다. 바로 그때를 이용해서 야곱의 아들 가운데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나타나서 방어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몰살 시킵니다.
25, 26절을 보십시오.

제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오고

자기의 누이동생이 강간을 당한 것에 하지만 대한 복수극이 엄청난 대 살인극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복수의 본질입니다. 복수라는 것은 당한 것에 비해 가볍게 가하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가 당한 것보다 더 강도가 높게 앙갚음하게 되어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라

그래서 예수님께서 ‘원수를 갚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위한 말입니다.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이 원수를 갚아주십니다.
악인이 죽을 때는 선인에 의해서 죽지 않습니다. 악인은 악인에 의해서 죽습니다. 하나님은 선인의 손에 피가 묻지 않게 하십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의 입이 누군가를 향한 원망으로 더러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손에 피가 흐르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중보기도입니다. 기도는 무력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나아갈 때 하나님이 역사하십니다. 악인이 악인을 죽이게 하는 방법으로 하나님은 역사를 만들어 가십니다.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서방 국가가 원자탄을 가지고 싸웠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뒤따랐겠습니까? 그러나 소련은 스스로 붕괴했기 때문에 쉽게 무너졌습니다. 북한을 붕괴시키는 방법은 남한과 미국의 군사력 증강이 아닙니다. 그들은 안에서 붕괴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원수는 원수들끼리 싸워서 무너집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심판은 하나님께

자신이 복수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자신이 엉뚱하게 당해서 화가나서 복수를 합니다.
그렇다면 복수를 할 때 당한만큼만 할까요? 아닙니다. 하는 김에 본떼를 보여주기 위해서 당한 것에 더 얹어서 갚습니다.
그렇다면 복수를 당한 사람은 자기가 가한 것보다 더 한 것을 당했기 때문에 다시 재복수를 할 때는 더 많은 가해를 합니다.
이런식으로 복수는 갈수록 눈덩어리처럼 가해의 정도가 커집니다. 절대로 해결은 없습니다. 이것이 복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용서하라,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갚아라’.
‘정말로 너가 나를 신뢰한다면 심판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알아라’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심판을 하려고 듭니다. 역사의 주인공이 자기라고 착각을 합니다. 역사의 주인공은 민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심판하자’라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심판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자기 누이 동생이 강간을 당한 것에 대해 살인으로 갚습니다. 강간이나 살인이나 다 죄이지만 종류가 다릅니다. 복수가 거기서 끝나면 그런대로 괜찮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복수극은 언제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기왕에 저지르는 김에 하나를 더 저지르는 것이 복수극입니다.
27-29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여러 아들이 그 시체 있는 성으로 가서 노략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그 누이를 더럽힌 연고라 그들이 양과 소와 나귀와 그 성에 있는 것과 들에 있는 것과 그 모든 재물을 배앗으며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고 집 속의 물건을 다 노략한지라

누이 동생을 욕보인 자를 죽인 것에서 복수가 끝나지 않습니다. 그 후에 야곱의 다른 아들들이 가세를 해서 그 성에 들어가서 물건을 노략질하고 자녀들과 부녀자들까지 잡아들입니다. 이것이 복수극의 결과입니다. 아무리 봐주어도 이들을 잘했다고 말하기 곤란합니다.
여러분,
성경속에 나온 인물들을 보면 위대한 믿음의 인물들이니 칭찬만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성경은 놀랍게도 다윗이든 누구든 그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말하는 성경

여러분,
레위기 19장 17, 18절에도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위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로마서 12장 17절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시므온과 레위를 축복할 때 그들을 ‘잔해하는 기계’라고 표현합니다. 그들이 그런 표현을 들을만큼 디나가 강간을 당한 상황도 잘못된 것이지만 그로 인해 가해진 그들의 복수는 비교할 수 없이 잔인하여 정도를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30, 31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 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들이 가로되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가하니이까

이런 사건이 있은 후에 지금까지 침묵을 지켜왔던 야곱이 등장합니다.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하는 말을 잘 보면 원망과 푸념같아 보입니다. 그 내용은 “너희가 그렇게 행동을 함으로 인해서 나에게 화가 미쳤구나. 이 땅 사람들이 화가 나서 힘을 합쳐서 우리를 죽이려고 할텐데 이제 나는 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야곱의 관심은 늘 자신입니다. 딸이 강간을 당하건, 아들들이 이런 몹쓸 짓을 하건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야곱

야곱의 관심은 오직 자신이 죽게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사람 야곱이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포기하지 않고 믿음의 조상으로 삼아주셨다는데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여러분,
그러나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야곱은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아버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책임을 지고 좋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녀들을 비난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자녀들이 이런 항의를 합니다. ‘
그렇다면 그들이 우리 누이를 창녀처럼 대한 것이 옳습니까?’. 야곱에게는 할 말이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여러 가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딸을 잘 돌봐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상한 남자한테 수치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역할입니다.

하나님께 의뢰해야

다음으로는 아들들을 잘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종교적인 행사를 빙자해서 얼마든지 나쁜 짓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나쁜 짓 하고 거짓말 할 때 그것을 밝히는 사람을 보셨습니까? 절대 자기의 말은 거짓이 아니며 자신의 행위는 영웅적이고 애국자적인 행동이라고 합니다.다들 신앙적이라고 자기를 합리화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들들을 잘 교육시켜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배울 것은 인간은 종교적으로 사기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싸우는 것을 보면 성경가지고 싸웁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며 싸웁니다.
그런데 결과는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복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원수갚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선으로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자녀들의 교육을 잘 시키고 사랑하는 아내가 방황하지 않도록 남편이 자기의 위치를 확실하게 지켜야 합니다.
여러분,
모든 아내들도 남편의 사랑을 확신하면 방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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