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소원 (롬14:17)
본문
이 세상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또한 그 개인의 사람들이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소원하는 바가 각각 다릅니다. 스위스의 문학자 아미엘 (Amiel )은 말하기를 “물건의 크기와 위대함은 그 요구에 비례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말하라. 그러면 나는 네가 어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신자로서의 소원해야 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1. 육신의 강건함을 소원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평생의 사명과 도달하지 않으면 안될 이상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저 영적인 면만을 완성시킬 것이 아니라 건강에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건강은 우리의 존재에 큰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건강에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잘못 사용할 경우 몸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거나 자기 몸을 가장 귀히 여겨 우상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국한 산 제물로 드리라”하였으며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집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값을 치루시고 산집이니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영과 몸이 모두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은 성령이 거하는 집이요, 그 사용하는 도구임을 기독교인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2. 정신이 건전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정신이 침체될 때 이로 인하여 몸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정신은 그 정신이 거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곳에 있다”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지나친 감정과 열정은 몸을 소모시키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위에 탄 사람이 없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강건한 육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사용해 나갈 정신이 뚜렷하지 못하고 불의한 것이라면 더욱 불행 한일을 일으키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에서 많은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나 건전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좁은 범위에서 편협한 학식으로 이루어진 정신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선택하여 취할 수 있는 능력을 폭넓게 가져야 합니다. 흔히 자신이 소유한 많은 학식을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전한 정신은 수 없이 갈고 닦는데서 성장합니다. 또한 위대한 정신은 위대한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위대하지 못한 정신은 거짓 소망만을 가질 따름입니다. 그리고 비천한 정신은 고통과 고민의 불행에 직면하면 곧 비뚤어지는 연약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정신은 난관에 부딪힐수록 더욱 힘차게 불행을 디디고 넘어서며 일어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칫 잘못 생각하여, 덮어놓고 불행과 불운과 역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으로만 생각해서 그 가운데서 헤어 나오려는 건전하고 투철한 정신이 없습니다.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에 건너갔을 때에 그들은 여러 가지 질병과 혹한과 침입과 방해를 받았으나 불굴의 정신으로 나아가 결국은 큰 번영의 대국을 세운 것입니다. 이씨 조선의 성웅 이순신 장군도 그 패망과 모략의 와중에서도 깊이 그 정신을 자게 보였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올바르고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정신을 갖도록 늘 소원하여야 합니다.
3.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도록 소원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낼 때 “감독은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그보다 더욱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교회 내부에서는 성자처럼 추앙을 받고 사랑을 받지만 교회 밖에서는 이리요, 강도요, 색을 탐하는 자로 멸시를 받는 자가 많이 있을 것을 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이 세상을 떠나서는 존재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상대로 하여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한 사실은 기독교인의 세상에 매우 깊이 연관된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사랑, 희생, 봉사가 외부에 나타날 때 비록 믿지 않은 사람들이더라도 기독교의 그 빛을 보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우리와 맺은 언약과 사랑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의 법도에서 벗어나 자기의 길을 갔지만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뻗침은 그래도 쉴 사이 없이 계속되어 많은 선지자를 보내시고 드디어는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이 멸망 받을 세상에 새 생명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통하여 감동시키사 기록하신 성경을 통해 그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그 신앙에 있어서 불변의 충성을 지닌 자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 지내려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친구라 불렀으며 또한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과 대결해서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 한 선지자입니다. 이런 불변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진 신자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불꽃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은 끝내 사자 굴속에까지 던짐을 받았으나 그의 불변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사 그를 지켰습니다. 초대교회의 수 않은 순교자들은 십자가에서 초와 같이 태움을 망하고 사자에 맹수의 찢김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지켜서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자는 곧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자입니다. 육신을 입고 어려운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신자는 그 소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금력도 권력도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는 건강한 몸을 갖고서, 올바른 정신 아래, 뚜렷이 생활하여 감으로 이웃에게 본이 되도록 하고,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신앙을 지켜서 완전한 신자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1. 육신의 강건함을 소원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기 하나님께로부터 평생의 사명과 도달하지 않으면 안될 이상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저 영적인 면만을 완성시킬 것이 아니라 건강에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건강은 우리의 존재에 큰 구실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건강에 각별히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잘못 사용할 경우 몸을 무책임하게 내버려 두거나 자기 몸을 가장 귀히 여겨 우상화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도 우리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거국한 산 제물로 드리라”하였으며 고린도전서 6장에서는 “여러분의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성령의 집이며 우리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값을 치루시고 산집이니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라”고 했습니다. 신자는 영과 몸이 모두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몸과 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몸은 성령이 거하는 집이요, 그 사용하는 도구임을 기독교인은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2. 정신이 건전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정신이 침체될 때 이로 인하여 몸은 고통을 받게 됩니다. “정신은 그 정신이 거하는 것보다 오히려 그가 좋아하는 곳에 있다”고 어거스틴은 말했습니다. 지나친 감정과 열정은 몸을 소모시키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그 위에 탄 사람이 없는 말과 같습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강건한 육체가 주어진다고 하더라도 이것을 사용해 나갈 정신이 뚜렷하지 못하고 불의한 것이라면 더욱 불행 한일을 일으키게 됩니다. 인류 역사상에서 많은 건강한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 있었으나 건전한 정신을 소유한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를 닦아야 합니다. 좁은 범위에서 편협한 학식으로 이루어진 정신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지식이 늘어감에 따라서 옳고 그름을 선택하여 취할 수 있는 능력을 폭넓게 가져야 합니다. 흔히 자신이 소유한 많은 학식을 인류를 멸망으로 이끄는 일에 사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건전한 정신은 수 없이 갈고 닦는데서 성장합니다. 또한 위대한 정신은 위대한 소원을 갖고 있습니다. 위대하지 못한 정신은 거짓 소망만을 가질 따름입니다. 그리고 비천한 정신은 고통과 고민의 불행에 직면하면 곧 비뚤어지는 연약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정신은 난관에 부딪힐수록 더욱 힘차게 불행을 디디고 넘어서며 일어납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자칫 잘못 생각하여, 덮어놓고 불행과 불운과 역경을 하나님께서 주신 시련으로만 생각해서 그 가운데서 헤어 나오려는 건전하고 투철한 정신이 없습니다. 청교도들이 처음 미국에 건너갔을 때에 그들은 여러 가지 질병과 혹한과 침입과 방해를 받았으나 불굴의 정신으로 나아가 결국은 큰 번영의 대국을 세운 것입니다. 이씨 조선의 성웅 이순신 장군도 그 패망과 모략의 와중에서도 깊이 그 정신을 자게 보였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올바르고
그러므로 우리는 건전한 정신을 갖도록 늘 소원하여야 합니다.
3.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도록 소원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낼 때 “감독은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좋은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나 교회 밖에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면 그보다 더욱 기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인들 중에는 교회 내부에서는 성자처럼 추앙을 받고 사랑을 받지만 교회 밖에서는 이리요, 강도요, 색을 탐하는 자로 멸시를 받는 자가 많이 있을 것을 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이 세상을 떠나서는 존재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을 상대로 하여 세상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에서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추어 사람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한 사실은 기독교인의 세상에 매우 깊이 연관된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사랑, 희생, 봉사가 외부에 나타날 때 비록 믿지 않은 사람들이더라도 기독교의 그 빛을 보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4.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되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우리와 맺은 언약과 사랑을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그의 법도에서 벗어나 자기의 길을 갔지만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뻗침은 그래도 쉴 사이 없이 계속되어 많은 선지자를 보내시고 드디어는 사랑하시는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하여 이 멸망 받을 세상에 새 생명을 허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이러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누구입니까? 그는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통하여 감동시키사 기록하신 성경을 통해 그의 뜻을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성경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완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본 자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새로운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부터 그 신앙에 있어서 불변의 충성을 지닌 자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은 그 외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뜻대로 제사 지내려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하나님께서 그를 친구라 불렀으며 또한 엘리야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과 대결해서 하나님은 참 하나님이신 것을 증거 한 선지자입니다. 이런 불변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가진 신자를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불꽃 속에서라도 하나님을 버리지 않고 신앙을 지켰던 다니엘은 끝내 사자 굴속에까지 던짐을 받았으나 그의 불변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기뻐 하시사 그를 지켰습니다. 초대교회의 수 않은 순교자들은 십자가에서 초와 같이 태움을 망하고 사자에 맹수의 찢김을 당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지켜서 순종하며 하나님을 사랑했기에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의 신앙을 끝까지 지키는 자는 곧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자입니다. 육신을 입고 어려운 이 세상에서 살아나가는 신자는 그 소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금력도 권력도 명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우리들에게는 건강한 몸을 갖고서, 올바른 정신 아래, 뚜렷이 생활하여 감으로 이웃에게 본이 되도록 하고, 칭찬을 받으며, 하나님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고, 그의 뜻을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신앙을 지켜서 완전한 신자로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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