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평화 (렘14:10-18)
본문
1535년 7월 6일 영국 안에는 한 죄 없는 정치지도자 대법관 재상을 지낸 토마스 모러라는 사람이 국왕의 권리를 유린했다는 이유로 처형된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의 국왕은 광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두 가지 이유로 모러를 죽였습니다. 하나는 국왕 헨리 8세가 죽은 형의 부인 즉 형수와 결혼하려는 것을 모러가 직접 반대했다는데 있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영국 교회를 독립시킬 때 그 영국 교회의 최고의 머리에 국왕 자신이 앉으려는데 모러가 이를 반대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모러는 반역죄로 몰려 처형되었습니다. 이 사실 하나에서도 당시 영국은 절대권을 행사하는 국왕의 횡포로 인해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모러가 처형 되기 전에 그는 이상국가(utopia)라는 책을 한권 저술했습니다. 그 내용은 당시 영국 사회, 영국의 절대권에 의해 짓밟힘을 당해 오고 있는 영국 사회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임금과 관리들이 사유 재산과 땅을 소유하려고 분주하고 있는 한 실직자와 농민들은 어떻게 살라는 말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또한 모러는 이상주의 제2편에서는 이상국가의 꿈을 펼쳐 놓았습니다. 내용인즉 온 백성은 사유 재산이 없으며 모두가 농사에 종사하며 사치가 없고 모두 공동 생산을 하므로 공동으로 여가를 즐길수 있다는 것입니다. 300단위 가족으로 공동 식사하며 정치는 선거에 의해서 실시하되 법관은 법의 농간을 부리지 않고 의회는 충분한 토의를 거쳐서 결정하는 곳이라고 꿈꾸었습니다. 이 책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자는 공산주의 선언을 쓴 칼 막스와 엥겔스였습니다. 그들은 공산주의는 모두 함께 평등하게 일하고 분배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아름다운 꿈을 그린 사람들! 그것은 수많은 사람을 미치게 했고 황홀하게 만들었으나, 그러나 한 가지 그 밑바닥에는 "무서운 과오 하나"가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쳐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스며 드는 기능성과 타락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인간 타 락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제도만 바꾸었다고 해서 그 곳에 개혁과 꿈 의 실현이 있을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상주의는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는지는 모르나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 주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유토피아는 값싼 평화의 약속이었습니다. 바로 이 값싼 평화의 약속이 오늘의 세계를 혼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역시 표현과 내용의 차이는 있어도, 성서는 이러한 값싼 평화를 약속하는 자를 불러 "거짓 예언자" 라고 부릅니다.
설교의 본론에 들어갑니다. 주님 오시기 전 600여년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된채 고통을 지냈습니다. 이미 북왕조는 북쪽 나라 앗수르에게 망하였으므로 그 땅은 초토화되어 민족은 노예로 잡혀간 후였습니다. 남은 것은 조그마한 땅 남왕국 뿐이었습니다. 애굽과 남왕국까지 침략하려는 새로운 강대국 바벨론의 야욕은 서서히 예투살렘에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이 사느냐 또 다시 먹히느냐의 운명적 기로에 서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운명 속에서 두 종류의 예언자가 나왔습니다. 한종류의 예언자는 말합니다. "비가 없고 땅이 갈라지며 풀이 없어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앞에 놓고도" 이 예언자들은 말하기를 "너희는 칼을 보지 아니하였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 없이도 하나님은 너희를 축복하시리라는 값싼 평화의 약속이었습니다. 삶의 깊은 변화의 경험없이도, 이 땅의 평화의 축복은 주어질 것이라는 이상주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가 무슨 마음,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값싼 신앙에서 나온 약속이었습니다. "회개없이도 하나님은 평강을 줄 것이니 안심하라"는 예언자, 그리고 "인간의 참다운 변화없이도 계급없는 이상국가는 올 것"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값싼 약속 밑바닥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역사는 회개하는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잊었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삶의 중생의 변화가 없는 한 인간의 권력은 타락했고 빈부차는 극심하여 왔고 착취의 역사 무대에서 계속 난무해 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속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들은 오늘의 공산주의자들과 공통 분모가 같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참 평화의 약속을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는 들어주는 자가 아무도 없는 고독 속에서 40년을 목메여 눈물로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유대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과 계약맺은 백성인데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저버린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유대는 스스로 자기의 존재의 이유와 근거를 포기 하였다는 말입니다. 심판은 그 뒤에 따라온 필연의 운명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의 약속에서 근본으로부터 갈라집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상처받은 아픔을 외면하고 도피하여 다른 아름다운 거짓 으로 메우려고 했으나 예레미야는 민족의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 민족이 외면할 수 없는 엄숙한 책임으로 보았습니다. 유대가 회개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평화를 기다릴 수 없다는 숙연한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극의 소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한데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40년을 눈물로 외쳤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호소였습니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는 자만이 경험하고 약속되는 평화였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그것은 값싸게 회개하는 마음없이 누구에게나 약속되어 있는 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하나님의 뜻앞에 인간의 뜻을 버리고 내어 놓고 맡기는 사람에게는 값없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와 예레미야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하나 더 봅니다. 거짓 예언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평강"은 칼이 없고 기근이 없으며 염병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비극이 없는 상태, 그것이 평화 라는 말입니다. 전쟁도 없고 배고픔도 없으며 병도 걸리지 않은 상태가 평 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합니까? "전쟁 부재", "기아 부재", "병의 부재"가 곧 평화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비극이 부재하면 평화가 온 다는 소극적인 이해를 오랫 동안 습관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참 평화관은 달랐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 죄를 자복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새 마음을 얻었을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무엇 무엇이 없어지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는데에 곧 "믿음"이 살아나는 그 곳에 평화 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비극"은 없어지지 않으며 없이할 수도 없 습니다. 오히려 "비극!" 이것을 이기어 나갈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 힘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을 내어놓고 회개하며 그의 뜻을 듣는 행위입니다. 나는 "용서" 함을 얻습니다. 이 용서는 나얘게 영원한 나라의 소망과 힘을 주십니다. 이 소망과 힘!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이 힘은 다가 오는 모든 비극들을 이기어 가는 창조의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평화! 그것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평화로서 이 땅에 참 평화를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설교의 본론에 들어갑니다. 주님 오시기 전 600여년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단된채 고통을 지냈습니다. 이미 북왕조는 북쪽 나라 앗수르에게 망하였으므로 그 땅은 초토화되어 민족은 노예로 잡혀간 후였습니다. 남은 것은 조그마한 땅 남왕국 뿐이었습니다. 애굽과 남왕국까지 침략하려는 새로운 강대국 바벨론의 야욕은 서서히 예투살렘에 다가 오고 있었습니다. 이제 민족이 사느냐 또 다시 먹히느냐의 운명적 기로에 서 있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 운명 속에서 두 종류의 예언자가 나왔습니다. 한종류의 예언자는 말합니다. "비가 없고 땅이 갈라지며 풀이 없어 동물들이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앞에 놓고도" 이 예언자들은 말하기를 "너희는 칼을 보지 아니하였고 기근은 너희에게 이르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이곳에서 너희에게 확실한 평강을 주시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회개 없이도 하나님은 너희를 축복하시리라는 값싼 평화의 약속이었습니다. 삶의 깊은 변화의 경험없이도, 이 땅의 평화의 축복은 주어질 것이라는 이상주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니 우리가 무슨 마음, 무슨 짓을 해도 용서하시지 않겠느냐" 하는 값싼 신앙에서 나온 약속이었습니다. "회개없이도 하나님은 평강을 줄 것이니 안심하라"는 예언자, 그리고 "인간의 참다운 변화없이도 계급없는 이상국가는 올 것"이라는 공산주의자들의 값싼 약속 밑바닥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역사는 회개하는 인간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이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터전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잊었다는 것입니다. 회개와 삶의 중생의 변화가 없는 한 인간의 권력은 타락했고 빈부차는 극심하여 왔고 착취의 역사 무대에서 계속 난무해 왔다는 사실을 그들은 잊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서속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들은 오늘의 공산주의자들과 공통 분모가 같은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유대 민족의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참 평화의 약속을 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였습니다. 그는 들어주는 자가 아무도 없는 고독 속에서 40년을 목메여 눈물로 외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유대 민족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유대 민족은 하나님과 계약맺은 백성인데 하나님을 배신하고 하나님을 스스로 저버린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오게 했던 것입니다. 유대는 스스로 자기의 존재의 이유와 근거를 포기 하였다는 말입니다. 심판은 그 뒤에 따라온 필연의 운명이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의 약속에서 근본으로부터 갈라집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상처받은 아픔을 외면하고 도피하여 다른 아름다운 거짓 으로 메우려고 했으나 예레미야는 민족의 아픔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 앞에서 그 민족이 외면할 수 없는 엄숙한 책임으로 보았습니다. 유대가 회개하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의 평화를 기다릴 수 없다는 숙연한 비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극의 소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신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한데 있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40년을 눈물로 외쳤습니다. 그것은 회개하라는 호소였습니다.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그가 흑암을 일으키시기 전, 너희 발이 이 흑암한 산에 거치기 전! 너희 바라는 빛이 사망의 그늘로 변하여 침침한 흑암이 되게 하시기 전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돌아오는 자만이 경험하고 약속되는 평화였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그것은 값싸게 회개하는 마음없이 누구에게나 약속되어 있는 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 하나님의 뜻앞에 인간의 뜻을 버리고 내어 놓고 맡기는 사람에게는 값없이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거짓 예언자와 예레미야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을 하나 더 봅니다. 거짓 예언자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평강"은 칼이 없고 기근이 없으며 염병이 없는 상태라고 하였습니다. 비극이 없는 상태, 그것이 평화 라는 말입니다. 전쟁도 없고 배고픔도 없으며 병도 걸리지 않은 상태가 평 화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합니까? "전쟁 부재", "기아 부재", "병의 부재"가 곧 평화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비극이 부재하면 평화가 온 다는 소극적인 이해를 오랫 동안 습관해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의 참 평화관은 달랐습니다. 진정한 평화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돌아가 죄를 자복하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여 새로운 삶을 창조하려는 새 마음을 얻었을 때 진정한 평화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평화는 무엇 무엇이 없어지면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는데에 곧 "믿음"이 살아나는 그 곳에 평화 가 있다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비극"은 없어지지 않으며 없이할 수도 없 습니다. 오히려 "비극!" 이것을 이기어 나갈 힘이 있어야 합니다. 이 힘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나의 삶을 내어놓고 회개하며 그의 뜻을 듣는 행위입니다. 나는 "용서" 함을 얻습니다. 이 용서는 나얘게 영원한 나라의 소망과 힘을 주십니다. 이 소망과 힘!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이 힘은 다가 오는 모든 비극들을 이기어 가는 창조의 힘이 되었습니다. 바로 그 곳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찾습니다. 하나님의 평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평화! 그것은 회개하는 자를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평화로서 이 땅에 참 평화를 약속해 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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