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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발자취 (벧전2:18-25)

본문

21절에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세기의 과학자 아인슈타인 박사는 일찍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유를 수호하고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독일에 국가사회주의가 일어났을 때 일단 정성을 다한다는 대학들을 나는 보았습니다. 그것은 대학들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하여 나치즘에 대항하여 일어서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학은 요원의 불과 같이 맹렬하게 타오르는 나치즘 앞에 침묵을 지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음에 나는 독일의 일간신문들의 편집인들과 주필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것은 신문 사설에 자유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주일이 못가 신문도 침묵을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음에는 독일의 대표적인 문학 작가들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들 작품에 자유가 얼마나 고귀하다는 것을 자주 강조 역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나치즘 앞에 잠잠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다만 교회만은 나치스 히틀러 앞에서도 불의에 굳건히 맞서서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고 나섰으니 나는 교회를 주의 깊게 봅니다. 나는 전에는 교회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져보지 못하였으나 지금의 나는 교회에 대한 사랑과 찬양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살아있고 하나님은 교회를 사랑함을 찬양합니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대학도 언론기관도 문필가의 붓대도 다 꺾이고마는 그러한 때에 오직 교회만이 하나님의 진리를 열렬하게 증명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발자취는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가정에서 걸었던 발자취, 교회가 걷는 발자취, 사회의 발자취가 다 남는 것 입니다. 미국 16대 대통령이었던 아브라함 링컨이 흑인을 법적으로 해방시켰다는 이유로 반대자들에 의하여 1865년 4월 14일에 암살당했습니다. 그 유해가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로 옮겨지는 동안 많은 흑인들이 울었습니다. 그 중에 어린아이의 손을 녹 쥐고 있던 한 흑인 여인이 울먹이는 소리로 “내 아들아 잘 보아두어라 저 어른이 너를 위하여 죽으셨단다”라고 했다 합니다. 아브라함의 발자취는 흑인들의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인류에게는 무엇보다 잊지 못할 발자취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발자취입니다. 이 발자취가 어떤가 알아보도록 합시다.
1. 매일 매일 걸어가신 주님의 발자취
(1)
첫째, 주님의 새벽 발자취를 찾아보시기 원합니다. 막 1:35 “새벽 미명에 일어나사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라 했습니다. 밝기 전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나아가서 기도하심이 주님의 새벽 자취입니다.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우리들은 우선 새벽 기도회 자취부터 따라야 하겠습니다. 일어날 때마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 근심부터 하는 일을 개선해야 할 것입니다. 새벽에도 골방에 가서 세상 근심 걱정을 머리에 떠올리기 전에 고요한 맘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새벽기도 시간은 영의 시간이요 제사장 직분의 시간입니다. 개인을 위해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조국을 위해 인류를 위해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의 주간 발자취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막 1:28-29에서 주님께서는 찾아오는 사람에게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저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어 쫓으시더라”고 하셨습니다. 전도하시고 병자를 고치시며 사귀를 내어 좇으시는 봉사의 생활이었습니다. 마가복음 3장부터 6장까지는 예수님께서 너무 바쁘셔서 식사할 겨를도 없을 만큼 봉사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의 생활은 바쁘고 긴장하여야 합니다. 여름에 정자에 앉아 바둑이나 두고 겨울에는 이집 저집을 다니며 장기나 두고 카드놀이나 하며, 다방에 앉아 담배 연기 자욱한 속에서 시간을 보내며 객담과 농담으로, 비평으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보내는 생은 주님의 뒤를 따르는 성도의 생활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자의 생활은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이나 장사하는 일이나 그 모든 생업이 전도와 봉사가 되고 바쁘고 긴장되고 부지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주님의 야간생활은 어떠하셨습니까? 주님께서는 어떤 때에는 밤에 산으로 가십니다. 밤이 깊도록 기도하시다가(마 14:23-25) 제자들과 함께 돌아오시기도 하시고 또 어떤 때는 니고데모를 맞이해 밤이 깊도록 중생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밤은 고요하고 엄숙하여 기도하고 말씀을 상고하기에 좋은 시간입니다. 이 귀한 밤을 어찌 오락으로만 보낼 수 있겠습니까? 어찌 잠만 자고 있겠습니까? 기도의 밤,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는 밤의 시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2. 주님이 가정에 남기신 발자취
(1) 주님께서 30세까지 가정생활을 하신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6장과 마태복음 13장에 예수의 가족이 7명으로 그 형제들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는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기까지 그들과 함께 생활했습니다. 막 3:31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정을 떠나 전도하실 때에도 동생들이 예수님에게 간하기를 다시 가정으로 돌아오시기를 원하였습니다. 예수의 동생들 중에는 다소 불평과 불만이 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그런 중에서도 가정이나 육신의 부모에게 순종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2) 또한 주님은 어려서부터 가정에서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12세의 소년으로 그의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과 해석이 예루살렘에서 내노라하는 선생 랍비, 제사장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3)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 가정집 외에 따로 있음을 기억하셨습니다. 부모가 계시고 형제가 있는 집은 자기의 집이지만 보다 더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고 하나님 말씀을 강론하는 성전 곧 하나님의 집에 자기가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유월절날 예루살렘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부모는 예수를 잃어버려 예수를 찾아 애쓰다가 마침내 성전에 계신 예수를 보고 어머니는 힐책하였습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나와 네 아버지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는 서슴치 않고 “어머니, 왜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년시절부터 그 몸은 어머니 집에 있었으나 그 마음은 아버지의 집 성전을 사모하셨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보여주신 가정의 발자취입니다. 우리도 가정과 사람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고 칭찬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역경을 밟으신 주님의 발자취 주님의 33년의 일평생을 어려운 고비로 일관하였습니다. 그중에도 주님의 겟세마네 동산은 역경의 절경이었습니다. 주님께서도 극도로 번민하신 때가 있었습니다. 요 12:27에 “지금 내 마음이 심히 민망하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사 이 때를 면케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것을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고 기록된 것은 그것을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주님에게 있어서 겟세마네 동산은 고민과 고통의 절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역경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1)
첫째, 기도하셨습니다. 아무와도 의논하시지도 아니하셨고 후회하지도 않으시고 낙심하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오직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하시며 흘린 땀이 마치 핏방울이 되어 흘러내릴 정도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전체를 하나님께 맡기심으로 고통을 대처 했던 것입니다.
(2)
둘째, 일어섰습니다. 예수를 잡으러 왔던 군인 몇 사람에게 예수는 일어나 나아가니 그들은 주님의 위엄에 엎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남기신 자취는 역경 속에서도 후퇴나 머무름이 없이 오직 기도와 전진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생활을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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