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때와 하나님의 때 (갈4:8-11)
본문
출렁이는 사람의 물결, 사람, 사람, 사람들 그리고 또 사람들, 사람들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쁜 것일까? 밤 12시가 넘어도 명동이나 종로 거리에는 한잔 술에 자신의 삶을 던져버린 젊은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향해 “여러분은 죄인입니다. 세상의 향락만을 갈구하는 일의 자식들입니다” 라고 외칩니다. 오늘의 교회가 그들을 향해 세례 요한처럼 외칩니다. 이 젊은이들에게 눈물어린 어조로 그들의 양심을 향해 말합니다. 그들의 눈엔 좌절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엔 죽음이 있습니다. 그들의 눈엔 허무가 있습니다. 뜻없는 시간의 연속, 허무와 좌절만이 물결친다는 이 시간 속에서의 젊은이들, 그것이 그들만의 책임일까요? 희랍어에는 Chronos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간’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흘러가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생명이 있는 사람으로서 이 Chronos를 떠나서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제가 있었고 오늘이 주어졌으며 또 내일이 주어지는 시간입니다. Chronos라는 시간은 의미가 없습니다. 의미가 없더라도 오래 살고 또 잘 살면 되는 시간을 Chronos라고 합니다. ‘인간의 때’인 Chronos는 게오르규가 쓴'제 25시'라는 작품에서 그 정체를 찾습니다. 모리츄라는 루마니아 청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지 않고 스잔나와 사랑에 빠졌는데 스잔나를 좋아하는 루마니아 헌병 구청장이 그를 유대인이라고 거짓 고발하여 그는 강제수용소로 보내어져 고생하게 됩니다. 무섭도록 힘든 노동 속에서 겨우 생명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반년이 지난 어느날 스잔나로부터 이 혼신청서가 날아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 어느날 탈출에 성공한 모리츄는 헝가리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고 다시 독일 노동 수용소로 가게 됩니다. 그곳에서 인류학자인 독일군 대령이 모리츄를 보고 영웅족이라 하여 모리츄는 독일 전쟁사의 영웅이 되어 사진찍히는 독일 군인이 되었습니다. 제 2차 대전이 끝난 후 포로 교환으로 풀려나게 된 모리츄는 13년만에 고향에 돌아와 스잔나와 만났습니다. 스잔나 품에는 모리츄가 알지 못하는 아이도 있었습니다. 서로 붙잡는 순간 13년의 괴로움이 새로운 기쁨으로 변합니다. 그러나 그 기쁨의 시간은 불과 18시간 밖에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외국인 수용소에 감금되도록 명령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단 그에게는 하나의 길 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인 외인 의용병으로 다시 군인을 지망하는 일이었습니다. 징집 장소로 가야 되는 모리츄는 불과 18시간의 재회 끝에 헤어져야만 했던 것입니다. 헤어지는 순간을 사진 찍기 위해 “웃어! 웃어!”를 연발하는 사진사 중위 앞에서 웃어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죽음의 마당으로 가는 운명 앞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게오르규는 바로 이 순간의 장면을'2
5'라고 했습니다. 풀 수 없는 신비의 인간의'때'를 살아온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는 구약 성서 욥기서에 나오는 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흠없는 신앙인, 정직하고 순진한 하나님의 사람'욥'은 하루 아침에 열 자녀를 잃었습니다. 칠천 마리의 양, 약대 삼천 마리, 소 오백 마리, 암나귀 오백 마리도 모두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욥 자신은 무서운 피부질환이 되어 그의 아내도 그를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자기에게는 원인이 있지 않은데도 다가온 시간의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욥입니다. 그러기에 욥은 시적 표현으로 자기 운명에 대해 말하면서 Ch-ronos를 원망하며 불평을 털어 놓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러기에 삶과 시간을 비관적으로 본 기자는 Chronos를 두고 이렇게 읊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Chronos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죽을 때, 울 때, 슬퍼할 때, 잃을 때, 미워할 때, 전쟁할 때를 봅니다. 이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얘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오히려 불교나 염세주의가 더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Chronos 시간을 욥은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사실상 이유없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었으나 욥은 그것을 인과관계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고통속에서도 욥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의로운 일임을 보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인간의 때 속에서도 욥은 인간의 때를 넘어서서 이루시고 또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시간을 의미하는 희랍어 Chronos 외에 또 다른 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을 Kairos라고 합니다. Chronos는 시간은 시간이지만 의미가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기에 Chronos는 동물적 삶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Kairos는 시간 속에 주어지는 의미있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회개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과거가 있었으니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니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회개 하는 순간이 이 순간이기에 이 순간에서 영원과(하나님의 시간) 만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이란 많은 종합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순간 Kairos는 대개 내가 하나님의 때와 만나는 순간이며 하나님의 때와 만남으로 영원을 호흡하게 되는 순간이기에 순간은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순간인 것입니다. 욥은 Kairos를 보고 기다렸습니다. 친구가 뭐라든 아내가 뭐라든 고통가운데서도 Kairoa를 보고 기다리며 소망을 가지고 참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Chronos를 사셨습니다. 말 구유에 나신 일, 목수 생활을 하신 일, 배고픔, 가난, 고독, 억압과 누명, 마지막에는 죄목도 없이 유대인 지도자와 로마인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받은 일, 이 모두는 크로노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때의 비참함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는 마지막 죽음의 크로노스를 앞에 두시고도 “아버지의 구원의 때”를 보셨습니다. 인간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의 때가 다가온 것을 보셨기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들의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C-hronos의 허무함과 좌절을 카이로스의 희망으로 옮기셨던 것입니다. 지루한 Chronos 시간이 새로운 시간인 Kairos시간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바로 이 축복이 우리 앞에 주어졌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란 하나님을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 바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 Chronos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숨막히게 사는 현재의 고통, 좌절, 허무, 무의미, 포기와 같은 것들은 Chronos의 산물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Chronos의 시간을 어떻게 도피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Chronos시간 속에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때(Ka-iros)를 바라보고 기다리며 또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좌절과 허무에서 구원하시려는 Kairos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만이 이 민족과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또 소망하면서 Chronos를 변화시키시길 바랍니다.
5'라고 했습니다. 풀 수 없는 신비의 인간의'때'를 살아온 사람을 기억합니다. 그는 구약 성서 욥기서에 나오는 욥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흠없는 신앙인, 정직하고 순진한 하나님의 사람'욥'은 하루 아침에 열 자녀를 잃었습니다. 칠천 마리의 양, 약대 삼천 마리, 소 오백 마리, 암나귀 오백 마리도 모두 하루아침에 잃고 말았습니다.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욥 자신은 무서운 피부질환이 되어 그의 아내도 그를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습니다. 자기에게는 원인이 있지 않은데도 다가온 시간의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욥입니다. 그러기에 욥은 시적 표현으로 자기 운명에 대해 말하면서 Ch-ronos를 원망하며 불평을 털어 놓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그러기에 삶과 시간을 비관적으로 본 기자는 Chronos를 두고 이렇게 읊었습니다.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Chronos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죽을 때, 울 때, 슬퍼할 때, 잃을 때, 미워할 때, 전쟁할 때를 봅니다. 이것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얘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얘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오히려 불교나 염세주의가 더 옳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Chronos 시간을 욥은 다른 각도에서 보았습니다. 사실상 이유없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었으나 욥은 그것을 인과관계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그 어려운 고통속에서도 욥은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의로운 일임을 보았습니다. 고통스러운 인간의 때 속에서도 욥은 인간의 때를 넘어서서 이루시고 또 진행하시는 하나님의 때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시간을 의미하는 희랍어 Chronos 외에 또 다른 말 하나가 더 있습니다. 그것을 Kairos라고 합니다. Chronos는 시간은 시간이지만 의미가 주어진 시간이 아니었기에 Chronos는 동물적 삶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Kairos는 시간 속에 주어지는 의미있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회개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과거가 있었으니 오늘이 있고, 오늘이 있으니 내일이 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회개 하는 순간이 이 순간이기에 이 순간에서 영원과(하나님의 시간) 만나는 순간을 의미합니다. 이 순간이란 많은 종합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순간 Kairos는 대개 내가 하나님의 때와 만나는 순간이며 하나님의 때와 만남으로 영원을 호흡하게 되는 순간이기에 순간은 나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순간인 것입니다. 욥은 Kairos를 보고 기다렸습니다. 친구가 뭐라든 아내가 뭐라든 고통가운데서도 Kairoa를 보고 기다리며 소망을 가지고 참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모든 Chronos를 사셨습니다. 말 구유에 나신 일, 목수 생활을 하신 일, 배고픔, 가난, 고독, 억압과 누명, 마지막에는 죄목도 없이 유대인 지도자와 로마인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받은 일, 이 모두는 크로노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때의 비참함을 사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는 마지막 죽음의 크로노스를 앞에 두시고도 “아버지의 구원의 때”를 보셨습니다. 인간 하나 하나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구원하시려는 아버지의 영원한 구원의 때가 다가온 것을 보셨기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가 아들의 고통의 십자가를 통해 C-hronos의 허무함과 좌절을 카이로스의 희망으로 옮기셨던 것입니다. 지루한 Chronos 시간이 새로운 시간인 Kairos시간으로 바뀌어졌습니다. 바로 이 축복이 우리 앞에 주어졌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란 하나님을 깨달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아신 바 되어 하나님의 아들로서 Chronos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숨막히게 사는 현재의 고통, 좌절, 허무, 무의미, 포기와 같은 것들은 Chronos의 산물들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Chronos의 시간을 어떻게 도피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Chronos시간 속에서 사랑과 용서와 화해가 실현되는 하나님의 때(Ka-iros)를 바라보고 기다리며 또 소망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르러야 비로소 진정한 기독교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용서로 인간을 좌절과 허무에서 구원하시려는 Kairos가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만이 이 민족과 이 세계를 구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진정 하나님의 때를 바라보고 또 소망하면서 Chronos를 변화시키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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