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영원하신 말씀 (요1:1-5)

본문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 요한은 세상의 구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영원성을 “말씀”이라고 요한복음서 초두에 표현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세 번이나 “말씀”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공관복음(마태, 마가, 누가)이 저술된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이 복음을 기록한 것인 만큼 주 예수의 탄생의 기록은 새삼스럽게 기록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만 “말씀이 우리 가운데 거하였다”고만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은 본문에 예수라는 이름은 쓰지 않고 그저 “말씀”이라고만 대신 표현하였다는 것은 요한복음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그 당시 요한복음의 저자와 독자는 한 가지로 이 “말씀”이란 낱말의 내용을 익숙히 알고 있었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란 뜻은 무엇을 구체적으로 의미하였을까요? 이 말씀이란 말이 구약에 사용된 실레를 든다면 거듭 인간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또한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진리 (헬라어로 '로고스')를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은 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적 탐구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이 로고스 혹은 말씀을 독특한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로고스를 예수 그리스도로 인식하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적 개념과 헬라적 개념을 적절하게 조화시킨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헬라 철학자들이 찾던 궁극적 진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본문 1절의 말씀에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창 1:1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여기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태초에라는 단어는 서로 상통 되는 말씀입니다. 태초라는 말은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는 태초와 초시간적인 영원한 태초로 보는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창세기의 태초는 만유의 시초인 시간과 공간이 시작되는 순간에서 이후의 창조 과정을 말하고 요한복음의 태초는 만유가 존재하기 이전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그런데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는 “말씀” 곧 성자이신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인데 그가 태초에, 즉 만물이 생기기 이전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성자의 신성, 성자의 영원성을 의미하며 성자와 성부와의 인격적 교제가 창조의 근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창조의 과정이나 결과는 성부만이 아니요 성부와 말씀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진 영원하신 교제의 결과였습니다. 바로 유대교와 기독교는 여기에서 갈라지는 것입니다. 유대교는 성부만 이 세상 창조를 믿고 말씀하신 예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는 이 교리를 부정할 뿐 아니라 이 교리를 믿는 기독교인을 이단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이 역사는 사도 바울이 유대인에게 박해받았던 사도행전의 전도일기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3절 말씀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가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 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하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고 하는 것은 만물은 무언가 목적성을 가진 존재, 즉 영어로 말하면 “Becoming” 곧 되어져 가는 존재라고 볼 수 있으며 이 만물의 근원이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만물은 무엇입니까? 만물을 가리키는 용어로 희랍어 본문은 '판타'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 철학에서 너무나도 중요한 단어였습니다. 탈레스(BC 600년)는 이 만물은 물로 된 것이라고 하였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로 된 것이라고 보았으며 아낙시만드로스는 '판타'는 무한으로 된 것이라고 하 였습니다. 또한 파르메니데스는 빛과 어두움으로, 헤라클레이토스는 유전 을 만물로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예수 곧 말씀으로 만물이 이루어졌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명이라는 말은 성경의 원어에 두 가지의 뜻이 출현합니다. 그 하나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을 의미하고(헬라어로 '비오스') 또 다른 하나는 눈에 보이는 생명보다 더 고상한 “성도가 하나님 안에서 계속적으로 누리는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생명”을 의미합니다(헬라어로는 '조에'). 본문의 “생명”은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생명, 빛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장 즐겨 중요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명이라는 단어를 54회, 빛은 23회, 사랑은 60회로 각각 사용되고 있습니다. 5절에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움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 “신령한 일에 감각을 잃은 사망의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어두운 인간 세계에 빛이 비취었다는 말은 원어에는 현재 진행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계속 쉬지 않고 인간 세계에 비치는 계속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선지자를 통해서 비취었고, 신약시대는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직접 비취었으며, 승천 후에는 성령이 계속 비취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라고 탄식합니다. 여기 어두움은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불신앙을 어두움으로 보는 것입니다. 선택받지 못한 자는 그리스도의 빛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깨달음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아니한 것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려온 것을 요약한다면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즉 태초에 말씀이 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었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입니다. 만물은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만물의 주인인 것입니다. 그 안에는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신성이 들어 있고 인류의 구원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 생명이신 말씀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빛이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분의 사랑은 어두운 권세로 가득 찬 이 땅의 처처에 비취셨습니다. 그러나 어두움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스스로 어두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멸망의 자식으로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속에 혹시 그리스도의 빛이 없나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 마음 가득히 차도록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730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