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초대 교회 (렘5:14-16)
본문
한국에는 제1차 초대 교회가 있고, 제2차 초대 교회가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외국 선교사가 복음을 기선에 싣고 제물포에 도착한 후부터 8,15 광복절 전까지를 제1차 초대 교회라 한다면, 8,15광복 후를 제2차 초대 교회라 하겠습니다. 제1차에서도 최초 30년간을 초엽, 그 후 20년간은 중엽입니다. 제2차 초엽은 8,15광복후 10년간이며, 중엽은 그 후 얼마입니다. 지금이 바로 중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의 가정이 국가나 교회도 말적 징조를 당하게 되면 부패하여 집니다. 한국에 복음이 처음에 들어 오기는 천주교는 임진왜란 때 경남에 주둔한 일본 군대의 풍기가 문란할 때 그 군대 사령관이 자기 부대의 풍기를 정화하기 위하여 그 중 예수 믿는 군인이 섞인 부대의 풍기 좋은 것을 보고 본국에 전도사를 청하니, 일본 정부는 당시 자기 나라에 와 있던 포도아 선교사를 보내어 전도하다가 간 일이 있고, 신교는 홀랜드인 하멜 일행이 표류되어 300년에 한국 땅에서 고생하다가 그 일행 64명중 16명 외는 모두 우리 나라에서 죽고 그들의 사체가 아직도 이 땅에 있습니다. 이준열사가 그 곳 수도에서 선혈을 흘렸고, 그 무덤이 아직 그 곳에 있으며, 그들은 일찍이 우리 나라에 복음을 가지고 왔으며, 그의 군대는
6.26때 우리 나라에 와서 우리를 도와 싸워주었습니다. 그 후 천주교가 정식으로 선교한지도 1795년 4월 5일, 신교는 1884년 4월 5일에 이 땅에 상륙했습니다. 여기 본 설교는 신교 중 장로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장로교가 이 나라에 처음에 복음이 선포되기는 만주에 가서 믿고 온 서상윤 씨가상어아로 장로회 선교사 맹요한 목사에게 1872년에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최초 선교사 알렌 의사의 전도로 믿게된 교우들과 합하여 황해도 송천교회를 설립한 것이 전국모교회입니다(1895년). 100년전 선교사가 이 땅에 처음 들어 올 때는 우리 땅에 비행기는 물론 없었고, 자동차 기차도 없었고, 오직 마상에 복음에 싣고 언어 풍속이 다른 이 나라에서 선교사들이 한국에 다가 탕관을 쓰고 방방곡곡에 답파하면서 갖 배운 서투룬 한국말로 전도하였지만 성령이 같이한지라 교회는 도시나 농촌을 물론하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성경은 만주에 가서 번역해왔고, 예배당은 곡좌에 남녀반이 서로 보이지 않도록 앉았으며, 목사가 부인에게 세례를 줄 때는 포장 밖에서 배풀게 하였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는 미국 남북 장로교파와 영국 자치령인 호주 카나다4파인데 처음에 그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의 선교국은 다르나 다같은 장로교회이니 합하여 한 헌법에, 한총회, 한 신학교로 하기로 의견이 합치되어 그들의 "선교는 백일대계(?)"라는 근본방침을 의논하는 중 교인에게는 주초엄금, 성수주일, 축첩불허, 불신 혼인금지, 제사불허 등을 확정하고 복음을 전하는 중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드물만치 파죽지세로 전도가 잘 되었습니다. 예컨데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는 안식하러 귀국도 못하는데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힘을 얻고 귀국 보고를 했습니다. 그럴수록 본국 교회에서는 열심히 나서서 한국에 전도사업을 확증하여 금일 우리 나라에 널리 섭립된 선교학교 병원 각종 사회사업 기타 각 기관들의 발전을 보게 되는 중 1912 년 제1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제1차 초대에서는 주일에 수십리 가서 예배 보며, 수백리 가서 도사경회 참석했으며, 교인이 한주일만 지키지 않으면 책벌하였습니다. 최초 30년간은 복음의 씨를 뿌렸고 그 후 20년간은 뿌리며 북돋워서 제1회 희년을 전국 교회가 성대히 지키매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이렇게 속히 발전된 원인은 우리 민족이 천연적으로 종교성이 풍부한데다가 국말이라 우국지사들과 전 인심 무슨 새 것을 요구하는 때라 흡수성이 있었고, 한글은 복음 전도하는데 크게 편히하였고, 교인들은 기도 전도 부흥회에 주력하였습니다. 더우기 성경은 문자적 해석 무오설로 받아 지켜졌습니다. 미국 외지 전도국 총무 브라운 박사는 한국 교회를 시찰하고 귀국 보고한 내용은 극구 칭찬하였습니다. 자랑 끝에 쉬 수니다는 격으로, 한국 교회가 50년간은 세상에서 자라다가 외정 말기에 신사참배의 문제로 수많은 교직원과 교인의 투옥과 52명 순교와 그 외 다수 출옥 성도를 내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교회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한국 교회가 금과 옥조로 지키던 신성을 침범 당했습니다. 치리하는 것을 처리회 자체가 범하였습니다. 교회의 내막인 신앙은 무너지고 관권에 아부와 동역자에 대한 밀고와 지방색 시국강연 기타 친일적 행사를 다투어가며 하게 됨에, 내부 분열이 되고 밖으로는 방친이 터진듯이 세파는 홍수 같이 몰려 들어와 교회의 생명선까지 침범하여 계명 제1조를 유린 당하니 이야말로 우리 신앙상 수도가 함락된 셈이었습니다. 내가 아는대로는 선교사는 제2차대전 발달 직전에 다가고 대구에 있던 안두화 목사와 배룻치 의사는 먼저 가족만 미국에 보내고 자기들은 한국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려고 있다가 안목사는 대구서 유치장에서 1개월간 고생하다가 자기 집에 나와 있었고, 베롯치 의사는 본래 자기 집에 감금되어 있다가 미일 민간인 교환시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오자 축하열이 폭발되어 촌촌 면면이 소를 잡고 잔치하며 풍물치고 춤을 춥니다. 한민족 중에 일정에 이중 압박을 받던 우리 기독교회는 더욱 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을 주께 돌리었습니다. 그 때 기쁨이야말로 어찌 말과 붓으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 불신자들도 교회에 나오기를 시작하고 교회는 갑자기 왕성하더니 난데 없는 좌익 바람에,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다 시 나가고, 교회지도자들은 세상 벼슬을 탐하여 서울로 서울로 오르락 내 리락 하는지라 교회는 부진하였습니다. 일본 기독교단이란 이름을 버리 고 노회, 총회란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가족을 데려오지는 못했으나 단신으로라도 오게 되어 교계는 활기를 띠고 정상적 궤도로 진행되어 일본 교단이 결의한 모든 것(주일에 일하는 것, 불신자와 결혼 허락, 신사참배)을 다시 반복하여 나아가는 중 교회가 부흥회를 하며 교역자를 청빙하며 교역자들이 세상 감투의 꿈을 버리고 교회로 돌아와서 성종 소리는 주일 하늘을 높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해방 전 교회가 입은 상처는 너무도 커서 좀처럼 원기가 회복되지 아니하는 때 자유를 오용 목사 몇 사람이 전에 없던 다른 복음을 가지고 와서 조선 신학교에서 교수하다가, 동교생 50여명이 반기를 들고 총회에 진정한 것이 전국 교회에 널리 알려져 조선신학과 해방된 교수를 총회가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총회 안에 조선신학교 지지자가 다수여서 진보 보수하면서 싸움하다가 결국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로 분리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알 수 없는지라 교계의 분열은 심각하나 교인은 날로 늘어납니다. 그 후 장로교는 계속 분리되더니 지금은 78교파입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쇠말기에도 살아왔고 지금 새 시대에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한국 교회를 운명도 시켰던 사람이요, 새로 살리기도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교회의 사상이 단순하여 복음을 잘 받았지만 지금은 복잡 다난합니다. 우리가 금일 한국 교회의 신성 정도를 첫 초대만치끌어 올리려면 이때야말로 전 교회가 일심 전력하여 모든 힘,기도, 전도, 성경공부, 물력, 지력, 시간력을 내야 될 것입니다. 혹 선교사들 중 주초를 하는 분이 있다든가, 교인 중 주초를 하며 주초를 한국 교회에 개방해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소리가 있지만 우리는 선배들에게서 깨끗한 복음을 받아 우리 후손에게 깨끗한 신앙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고대광실 집, 논 발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도 안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상속시키는 것은 제일 좋은 유산입니다. 신앙을 많이 소유함도 좋으나 분량보다 신앙의 질이 좋아야 합니다(변덕 안부리는 것, 탈선 안되는 것, 독선 안되는 것, 병적 아닌 신앙들). 한국 교회는 1세기 등에 많이 성장했으나 아직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일찍 복음을 받은지 30년(1912년)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업을 시작하여 현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나는 이 세대를 안고 옛 100년전 우리의 선배들이 복음을 받아 지키고 전하는데 혹자의 말과 같이 시대가 1세기나 차이가 있는지라 우리의 조상들이 혹시나 완고하여 맹목적으로 받지나 안하였는가 하고 엄밀히 생각하여 보았지만 전 초대에 수행하던 조항 중 행정상 몇몇 가지 외는 삭제할 것만 없는 것이 아니라 경감할 것도 발견치 못하였습니다. 진리는 고금이 동일하고 생명은 세대에 따라 변치 않습니다. 남들이 따라 오지 못할만큼 앞으로 앞으로 전진합시다.
6.26때 우리 나라에 와서 우리를 도와 싸워주었습니다. 그 후 천주교가 정식으로 선교한지도 1795년 4월 5일, 신교는 1884년 4월 5일에 이 땅에 상륙했습니다. 여기 본 설교는 신교 중 장로교에 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장로교가 이 나라에 처음에 복음이 선포되기는 만주에 가서 믿고 온 서상윤 씨가상어아로 장로회 선교사 맹요한 목사에게 1872년에 전도를 받고 신자가 되었고, 최초 선교사 알렌 의사의 전도로 믿게된 교우들과 합하여 황해도 송천교회를 설립한 것이 전국모교회입니다(1895년). 100년전 선교사가 이 땅에 처음 들어 올 때는 우리 땅에 비행기는 물론 없었고, 자동차 기차도 없었고, 오직 마상에 복음에 싣고 언어 풍속이 다른 이 나라에서 선교사들이 한국에 다가 탕관을 쓰고 방방곡곡에 답파하면서 갖 배운 서투룬 한국말로 전도하였지만 성령이 같이한지라 교회는 도시나 농촌을 물론하고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성경은 만주에 가서 번역해왔고, 예배당은 곡좌에 남녀반이 서로 보이지 않도록 앉았으며, 목사가 부인에게 세례를 줄 때는 포장 밖에서 배풀게 하였습니다. 한국에 들어온 장로교는 미국 남북 장로교파와 영국 자치령인 호주 카나다4파인데 처음에 그들이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의 선교국은 다르나 다같은 장로교회이니 합하여 한 헌법에, 한총회, 한 신학교로 하기로 의견이 합치되어 그들의 "선교는 백일대계(?)"라는 근본방침을 의논하는 중 교인에게는 주초엄금, 성수주일, 축첩불허, 불신 혼인금지, 제사불허 등을 확정하고 복음을 전하는 중 세계 선교사상 유례가 드물만치 파죽지세로 전도가 잘 되었습니다. 예컨데 아프리카에 간 선교사는 안식하러 귀국도 못하는데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힘을 얻고 귀국 보고를 했습니다. 그럴수록 본국 교회에서는 열심히 나서서 한국에 전도사업을 확증하여 금일 우리 나라에 널리 섭립된 선교학교 병원 각종 사회사업 기타 각 기관들의 발전을 보게 되는 중 1912 년 제1회 총회가 평양에서 열렸습니다. 제1차 초대에서는 주일에 수십리 가서 예배 보며, 수백리 가서 도사경회 참석했으며, 교인이 한주일만 지키지 않으면 책벌하였습니다. 최초 30년간은 복음의 씨를 뿌렸고 그 후 20년간은 뿌리며 북돋워서 제1회 희년을 전국 교회가 성대히 지키매 모두 하나님께 영광 돌렸습니다. 이렇게 속히 발전된 원인은 우리 민족이 천연적으로 종교성이 풍부한데다가 국말이라 우국지사들과 전 인심 무슨 새 것을 요구하는 때라 흡수성이 있었고, 한글은 복음 전도하는데 크게 편히하였고, 교인들은 기도 전도 부흥회에 주력하였습니다. 더우기 성경은 문자적 해석 무오설로 받아 지켜졌습니다. 미국 외지 전도국 총무 브라운 박사는 한국 교회를 시찰하고 귀국 보고한 내용은 극구 칭찬하였습니다. 자랑 끝에 쉬 수니다는 격으로, 한국 교회가 50년간은 세상에서 자라다가 외정 말기에 신사참배의 문제로 수많은 교직원과 교인의 투옥과 52명 순교와 그 외 다수 출옥 성도를 내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는 교회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한국 교회가 금과 옥조로 지키던 신성을 침범 당했습니다. 치리하는 것을 처리회 자체가 범하였습니다. 교회의 내막인 신앙은 무너지고 관권에 아부와 동역자에 대한 밀고와 지방색 시국강연 기타 친일적 행사를 다투어가며 하게 됨에, 내부 분열이 되고 밖으로는 방친이 터진듯이 세파는 홍수 같이 몰려 들어와 교회의 생명선까지 침범하여 계명 제1조를 유린 당하니 이야말로 우리 신앙상 수도가 함락된 셈이었습니다. 내가 아는대로는 선교사는 제2차대전 발달 직전에 다가고 대구에 있던 안두화 목사와 배룻치 의사는 먼저 가족만 미국에 보내고 자기들은 한국 교회와 운명을 같이 하려고 있다가 안목사는 대구서 유치장에서 1개월간 고생하다가 자기 집에 나와 있었고, 베롯치 의사는 본래 자기 집에 감금되어 있다가 미일 민간인 교환시 귀국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해방의 종소리가 울려오자 축하열이 폭발되어 촌촌 면면이 소를 잡고 잔치하며 풍물치고 춤을 춥니다. 한민족 중에 일정에 이중 압박을 받던 우리 기독교회는 더욱 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을 주께 돌리었습니다. 그 때 기쁨이야말로 어찌 말과 붓으로 다 형용할 수 있으랴! 해방 후 미군이 주둔하자 불신자들도 교회에 나오기를 시작하고 교회는 갑자기 왕성하더니 난데 없는 좌익 바람에, 교회에 들어왔던 사람들이 다 시 나가고, 교회지도자들은 세상 벼슬을 탐하여 서울로 서울로 오르락 내 리락 하는지라 교회는 부진하였습니다. 일본 기독교단이란 이름을 버리 고 노회, 총회란 이름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은 가족을 데려오지는 못했으나 단신으로라도 오게 되어 교계는 활기를 띠고 정상적 궤도로 진행되어 일본 교단이 결의한 모든 것(주일에 일하는 것, 불신자와 결혼 허락, 신사참배)을 다시 반복하여 나아가는 중 교회가 부흥회를 하며 교역자를 청빙하며 교역자들이 세상 감투의 꿈을 버리고 교회로 돌아와서 성종 소리는 주일 하늘을 높이 울렸습니다. 그러나 해방 전 교회가 입은 상처는 너무도 커서 좀처럼 원기가 회복되지 아니하는 때 자유를 오용 목사 몇 사람이 전에 없던 다른 복음을 가지고 와서 조선 신학교에서 교수하다가, 동교생 50여명이 반기를 들고 총회에 진정한 것이 전국 교회에 널리 알려져 조선신학과 해방된 교수를 총회가 묵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총회 안에 조선신학교 지지자가 다수여서 진보 보수하면서 싸움하다가 결국 기독교 장로회와 예수교 장로회로 분리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이 알 수 없는지라 교계의 분열은 심각하나 교인은 날로 늘어납니다. 그 후 장로교는 계속 분리되더니 지금은 78교파입니다. 우리는 한국 교회의 쇠말기에도 살아왔고 지금 새 시대에도 걸어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한국 교회를 운명도 시켰던 사람이요, 새로 살리기도 하는 처지에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는 교회의 사상이 단순하여 복음을 잘 받았지만 지금은 복잡 다난합니다. 우리가 금일 한국 교회의 신성 정도를 첫 초대만치끌어 올리려면 이때야말로 전 교회가 일심 전력하여 모든 힘,기도, 전도, 성경공부, 물력, 지력, 시간력을 내야 될 것입니다. 혹 선교사들 중 주초를 하는 분이 있다든가, 교인 중 주초를 하며 주초를 한국 교회에 개방해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소리가 있지만 우리는 선배들에게서 깨끗한 복음을 받아 우리 후손에게 깨끗한 신앙을 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고대광실 집, 논 발을 자손에게 물려주는 것도 안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른 신앙을 상속시키는 것은 제일 좋은 유산입니다. 신앙을 많이 소유함도 좋으나 분량보다 신앙의 질이 좋아야 합니다(변덕 안부리는 것, 탈선 안되는 것, 독선 안되는 것, 병적 아닌 신앙들). 한국 교회는 1세기 등에 많이 성장했으나 아직 신학적으로 정립해야 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일찍 복음을 받은지 30년(1912년)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업을 시작하여 현재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한 말씀 드립니다. 나는 이 세대를 안고 옛 100년전 우리의 선배들이 복음을 받아 지키고 전하는데 혹자의 말과 같이 시대가 1세기나 차이가 있는지라 우리의 조상들이 혹시나 완고하여 맹목적으로 받지나 안하였는가 하고 엄밀히 생각하여 보았지만 전 초대에 수행하던 조항 중 행정상 몇몇 가지 외는 삭제할 것만 없는 것이 아니라 경감할 것도 발견치 못하였습니다. 진리는 고금이 동일하고 생명은 세대에 따라 변치 않습니다. 남들이 따라 오지 못할만큼 앞으로 앞으로 전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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