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그럴 때냐 (왕하5:20-27)
본문
나아만이라는 그 이름의 뜻은 “유쾌한 자”라는 뜻합니다. 그는 아람 왕의 군대장관으로 크고 존귀한 자며, 아람을 건국한 유력한 인물입니다 높은 지위에 많은 부와 한 몸에 담은 존경 등 다 이상 바랄 것이 없는 행운아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있는 이 많은 행복의 요소들은 문둥병자라는 한 가지의 결점 때문에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나아만과 같은 유형의 인간들을 많이 발견한 수가 있습니다. 또 나아만과 같은 모습을 내 자신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엘리사는 나아만에게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나아만은 자신의 자존심에 손상함을 느끼고 분노를 금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던 길로 되돌아가려고 하자, 종들이 권고하기를 엘리사가 이것보다 더 심한 일을 하라고 하면 거절하시겠습니까? 한낱 자존심 때문에 문둥병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지금아 그럴 때입니까?라고 했습니다. “지금이 그럴 때입니까?”라는 이 애절한 권고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와 사회와 세계에 던지는 질문이 될 것입니다. 나아만이 치료받는 길은 요단강에게 일곱 번 목욕하는 일입니다. 이 처사는 비합리적이요, 비이성적이었습니다. 그는 순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장벽을 넘어서 나아만은 믿음과 겸손과 복종으로 깨끗해질 수 있었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원래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근본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 이것 없이는 사람들 사이에 교제도 있을 수 없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영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나아만은 믿음과 순종의 교훈을 우리에게 줍니다. 믿음에는 세 가지의 강령이 있습니다.
첫째는 인간에 대한 믿음입니다.
둘째는 자연에 대한 믿음이요.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세 가지 믿음의 관계 속에서 생을 연속성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속에 포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요, 이 땅을 다스리는 주권자요, 모든 가치 가운데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절대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자연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 이 세 가지 가운데서 조화를 이루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개인이건, 사회 건, 국가건 간에, 모든 질서는 붕괴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발견한 때부터 그들의 인격과 도덕 가운데서 예배하는 믿음이 시작되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위험과 곤경에 처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이 주신 힘으로 역경을 뚫고 나갔습니다. 신약에서 믿음은 헬라 원어로 “피스토스”입니다. 피스토스는 동사적 역활입니다. 즉 믿음은 행동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했습니다. 이렇게 언과, 행에 일치한 믿음, 이것이 하나님께서 현대 교회에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말하기를 “무엇이 인간의 위기냐 하면 그것은 불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인간 상호간에, 사회에서 불신하는 것은 인간 최대의 위기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겠습니다. 푸대접이란 누구에게나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의 집 문전에 서 있는 나아만 장군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람 제국의 군대장관이라는 신분에다가 왕의 친서까지 받들고 거기다가 많은 예물까지 가지고 일부러 찾아 온 국빈이므로 엘리사가 국궁 제배하고 나아와서 영접을 했어야 마땅할 것이어늘 초야에 묻힌 일개 약소국의 야인이 코끝도 내밀지 않고 방안에 앉은 채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는 명령만 내리고 있었으니 나아만으로써는 무척 기분의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존심이 심히 상한 나아만은 노기가 충천해서 그대로 귀국을 서두른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목욕해서 될 문제라면 아람에도 요단강보다 더 좋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모한 흥분입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 한 나라의 군대장관으로서가 아니라 일개 문둥병 환자로 엘리사의 문앞에서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이런 경우 나아만처럼 자기가 장관이라는 것만 생각하지 문둥이라는 사실을 잊으므로써 어리석고 경망한 짓을 저지르는 때가 많습니다.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데 자존심이나 찾고 있을 때입니까? 생각을 돌이켜서 자만심을 요단강물에 집어 던졌을 때 문둥병자 나아만은 어린 아이같은 피부를 다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예물을 엘리사가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노소득이나 부정축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를 깨끗이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기적적인 은혜이며, 영광은 하나님께란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할 기회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선물을 사절함으로써 나아만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하도록 하는 일에 성공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흙을 가져다가 쌓은 제단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기를 평생토록 계속한 것입니다. 기도 한 번 해 주고 수표를 받아든 기도상들도 있고, 딸라가 나온다는 바람에 교회를 새 교파로 팔아 먹는 종교 모리배들도 있다고 합니다. 영업적으로 부흥회를 여는 부흥업자도 있고, 선거 때마다 한 몫 보는 치사한 교역자도 있다고 합니다. 모두들 구실이야 그럴듯 하였지만, 그러나 게하시 후예들이여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금을 탐할 때란 말입니까?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첫째는 인간에 대한 믿음입니다.
둘째는 자연에 대한 믿음이요.
셋째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세 가지 믿음의 관계 속에서 생을 연속성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또한 이 세 가지 믿음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속에 포괄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을 창조한 창조주요, 이 땅을 다스리는 주권자요, 모든 가치 가운데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절대자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자연에 대한 믿음, 인간에 대한 믿음 이 세 가지 가운데서 조화를 이루는 인격을 가져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어야 할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개인이건, 사회 건, 국가건 간에, 모든 질서는 붕괴되고 맙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발견한 때부터 그들의 인격과 도덕 가운데서 예배하는 믿음이 시작되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은 위험과 곤경에 처할 때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이 주신 힘으로 역경을 뚫고 나갔습니다. 신약에서 믿음은 헬라 원어로 “피스토스”입니다. 피스토스는 동사적 역활입니다. 즉 믿음은 행동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는 말을 듣고서 이해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했습니다. 이렇게 언과, 행에 일치한 믿음, 이것이 하나님께서 현대 교회에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물리적으로, 신의가 있어야 합니다. 철학자 야스퍼스는 말하기를 “무엇이 인간의 위기냐 하면 그것은 불신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게, 인간 상호간에, 사회에서 불신하는 것은 인간 최대의 위기인 것입니다. 이제 본문의 말씀으로 돌아가서 보겠습니다. 푸대접이란 누구에게나 결코 유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엘리사의 집 문전에 서 있는 나아만 장군의 분노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람 제국의 군대장관이라는 신분에다가 왕의 친서까지 받들고 거기다가 많은 예물까지 가지고 일부러 찾아 온 국빈이므로 엘리사가 국궁 제배하고 나아와서 영접을 했어야 마땅할 것이어늘 초야에 묻힌 일개 약소국의 야인이 코끝도 내밀지 않고 방안에 앉은 채로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는 명령만 내리고 있었으니 나아만으로써는 무척 기분의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자존심이 심히 상한 나아만은 노기가 충천해서 그대로 귀국을 서두른 것이 무리가 아닙니다. 목욕해서 될 문제라면 아람에도 요단강보다 더 좋은 강들이 얼마든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무모한 흥분입니다. 그는 자기가 지금 한 나라의 군대장관으로서가 아니라 일개 문둥병 환자로 엘리사의 문앞에서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이런 경우 나아만처럼 자기가 장관이라는 것만 생각하지 문둥이라는 사실을 잊으므로써 어리석고 경망한 짓을 저지르는 때가 많습니다. 온 몸이 썩어 들어가는데 자존심이나 찾고 있을 때입니까? 생각을 돌이켜서 자만심을 요단강물에 집어 던졌을 때 문둥병자 나아만은 어린 아이같은 피부를 다시 찾을 수가 있었습니다. 나아만의 예물을 엘리사가 받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노소득이나 부정축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이를 깨끗이 거절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은 기적적인 은혜이며, 영광은 하나님께란 돌려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어야 할 기회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선물을 사절함으로써 나아만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하도록 하는 일에 성공하였습니다. 나아만은 이스라엘 흙을 가져다가 쌓은 제단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기기를 평생토록 계속한 것입니다. 기도 한 번 해 주고 수표를 받아든 기도상들도 있고, 딸라가 나온다는 바람에 교회를 새 교파로 팔아 먹는 종교 모리배들도 있다고 합니다. 영업적으로 부흥회를 여는 부흥업자도 있고, 선거 때마다 한 몫 보는 치사한 교역자도 있다고 합니다. 모두들 구실이야 그럴듯 하였지만, 그러나 게하시 후예들이여 지금이 어찌 은을 받으며 금을 탐할 때란 말입니까?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