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부흥 (신17:19)
본문
자고로 교회 존폐가 다 성경에 달린 것이며 오늘날 교회의 참된 부흥을 바랄진대 성서로 돌아가지 아니하면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1세기 한국의 교회사를 통하여 도처에 많은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는 일시적 기분인 부흥도 없지 않았던 것임으로 세월이 흐름에 따라 냉냉한 위치로 되어 버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부흥도 부흥이긴 하지만 아까운 시간만 소비했을 뿐이며 그 부흥에는 향상이 없었습니다. 또 아무리 참된 부흥이 있다 할지라도 그 부흥을 연장시킬 그 무엇이 없다면 마치 불은 불었으나 계속해서 댈 연료가 없는 것과 같아서 몇 달이 못되어 그 분홍의 불도 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겠느냐도 문제려니와 어떻게 하면 그 부흥의 불을 연장시키겠느냐 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부흥을 일으킬 것은 성서요, 그 부흥을 계속케 할 것도 성서이기 때문에 이에 성경적 부흥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모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고 그들의 신앙은 말씀에 의하여 더욱 더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중세기에 이르러 소위 암흑시대를 맞이했는데 즉 성경이 봉쇄당했던 것입니다. 이 때 루터의 개혁운동이 일어나 성서가 개방된 것을 문예부흥이라 합니다. 성서가 붕쇄를 당하여 암혹시대요 성서가 개방되어 부흥시대인 것입니다(느 8:5).
그런데 오늘날은 문화와 인쇄술의 발달로 성서는
1, 200방언으로 번역되 많은 책이 인쇄되고 값싸게 구입하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로 성서 전성시대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왈슨 박사의 말과 같이 “오늘은 성서가 없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아무리 산적했다 할지라도 읽지 않으니 없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힐기야와 같이(왕하 22:8)잃었던 성서를 다시 찾아서 성서적 부흥을 일으킵시다. 성서적 부흥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수만의 집단적 부흥이라는 것보다 신자, 교역자 할 것 없이 개개인이 성서에 돌아가 부흥의 불을 일으키자는 말입니다. 신 17:19에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책은 제사장에 의하여 보관되어 있음을 전 절에서 봅니다. 그 보관된 것을 왕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등사합니다. 신 12:1에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는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수 1:8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이 율법책을 평생토록 옆에 두고 살면서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배우는 일, 그 말씀대로 사는 일을 지시하시고 있습니다. 요 5:39에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이 말씀에 사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 거기 있음입니다. 신 10:12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수 24:14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전 12:13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 8:13에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록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라고 했습니다. 마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잠시 왔다가 가는 이 한 생애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 1:17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고, 벧전 2:17에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그 말씀과 그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1. 사는 날 동안(평생에) 사는 날 동안이라면 평생적 의미이니 더 함축된 의미에서 말한다면 사는 그 날 곧 오늘을 가르킵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은 참 귀한 날입니다. 어제는 지나 갔으니 내 것이 아니요 내일은 미래의 날이니 또한 내 것이 아니요, 살아 있는 오늘만이 내 날입니다.
그러므로 어제를 자랑할 것도 아니요 내일로 미룰 것도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자 만이 값있는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오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마 6:34). “오늘에 살라”이것은 웨슬러가 가장 좋아한 설교제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한 날은 가장 중한 것입니다. 일생을 어떻게 하면 잘 살까 하는 것 보다 한 날을 어찌하면 잘 살까 하는 것이 참된 인생관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 날을 살고자 할 때 상당한 원동력을 요구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 같이 천리길 가려는 자동차나 기차가 연료가 필요함과 같습니다. 우리의 한 날을 살아가는데 동력을 요하는 것이니 그 동력이란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루를 글 읽지 않으면 입에서 가시가 난다”라는 유학자의 말도 있거니와 성도로써 하나님 말씀 없이 한 날을 보낸다면 그것은 바로 공허입니다. 우리 육체를 위하여 하루 세끼 식사를 하듯이 영적 식량인 성경 역시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우리 영은 질식하고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육적 양식은 하루 단식할 수 있으나 영적 양식은 한 날도 먹지 아니할 수 없으니 우리가 사는 그 날까지 그 날 그 날의 새 힘을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항상 곁에 두고 보며 고기가 물을 떠나 서 살 수 없음 같이 성도는 성서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장하는 여자에게 거울과 같은 것으로 우리는 이 거울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약 1:23). 성서는 무사의 검과 같아 우리는 이 검을(엡 6:17)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직업을 다 쉬고 성경만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농부, 상인, 군인, 회사원, 가정주부는 각각 형편을 따라 그 직업 여가를 이용하여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농부여가에 수불석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농사하는 겨를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라는 말로 이 말은 면학가의 말이거니와 우리가 이만치 성경을 사랑하여 읽는다면 우리 영계의 부흥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3. 배우고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요, 배우는 것은 사람 편에 있는 것이니 얻은 바 구원은 그 말씀을 배움으로써 성장하는 것입니다(벧전 2:2).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 11:29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순간적으로 공로없이 얻는 것이거니와 배운다는 것은 시간과 근면을 쌓지 않으면 안됩니다. 반딧불 밑에서, 눈 아래서 독서한다는 옛 근면학가의 말도 있듯이 우리도 그만큼 면학하여 그 보고의 무한경애를 가져야 합니다. 또 배워서 안된다는 것은 두뇌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요 가슴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알되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되 교리적으로, 그리스도를 알되 역사적으로 아는 것이 참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진리를 소화하여 내 것을 삼으며 하나님의 영에 접촉하여 그 오묘를 맛보고, 그리스도를 체험하여 내 생명을 삼는 것이 참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되 배웁시다. 배우되 압시다. 알되 참으로 압시다. 참 알지 못하는 성도는 어제는 뜨거웠으나 오늘은 식어버립니다. 그를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읽읍시다. 배웁시다. 압시다.
4. 이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라 우리가 성경 전 편을 다 배워서 안다고 할지라도 서자서, 아자아(書自書,我自我) 즉 글은 글이요 나는 나로 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심은 성경을 보지 못함을 책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알지 못함을 책망하심도 아니요(마 23:5), 행함이 없는 것을 책 망하신 것입니다. 과연 약한 것이 인간이니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까지 아울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켜 행하십시다. 겸손을 배웠느냐, 희생을 배웠느냐, 자비를 배웠느냐, 화평을, 충성을, 인내를, 사랑을 배웠느냐? 그러면 지켜 행해야 합니다. 성서적 부흥은 참된 부흥입니다. 우리의 사는 날을 빛내기 위하여 성서를 항상 곁에 두고 읽읍시다. 읽어서 얻은 바 진리를 행합시다. 그러면 큰 부흥은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겠느냐도 문제려니와 어떻게 하면 그 부흥의 불을 연장시키겠느냐 하는 것 또한 문제입니다. 그러나 부흥을 일으킬 것은 성서요, 그 부흥을 계속케 할 것도 성서이기 때문에 이에 성경적 부흥을 강조하는 바입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모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살았고 그들의 신앙은 말씀에 의하여 더욱 더 불타올랐습니다. 그러나 중세기에 이르러 소위 암흑시대를 맞이했는데 즉 성경이 봉쇄당했던 것입니다. 이 때 루터의 개혁운동이 일어나 성서가 개방된 것을 문예부흥이라 합니다. 성서가 붕쇄를 당하여 암혹시대요 성서가 개방되어 부흥시대인 것입니다(느 8:5).
그런데 오늘날은 문화와 인쇄술의 발달로 성서는
1, 200방언으로 번역되 많은 책이 인쇄되고 값싸게 구입하여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로 성서 전성시대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왈슨 박사의 말과 같이 “오늘은 성서가 없는 시대”입니다.
왜냐하면 성서가 아무리 산적했다 할지라도 읽지 않으니 없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힐기야와 같이(왕하 22:8)잃었던 성서를 다시 찾아서 성서적 부흥을 일으킵시다. 성서적 부흥이라는 것은 일시적으로 수만의 집단적 부흥이라는 것보다 신자, 교역자 할 것 없이 개개인이 성서에 돌아가 부흥의 불을 일으키자는 말입니다. 신 17:19에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율법책은 제사장에 의하여 보관되어 있음을 전 절에서 봅니다. 그 보관된 것을 왕이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등사합니다. 신 12:1에 “너희가 평생에 지켜 행할 규례는 이러하니라”고 했습니다. 수 1:8에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이 율법책을 평생토록 옆에 두고 살면서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배우는 일, 그 말씀대로 사는 일을 지시하시고 있습니다. 요 5:39에 “너희가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이 말씀에 사는 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길이 거기 있음입니다. 신 10:12에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수 24:14에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전 12:13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 8:13에 “만군의 여호와 그를 너희가 거록하다 하고 그로 너희의 두려워하며 놀랄 자를 삼으라”라고 했습니다. 마 10:28에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것을 두려워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잠시 왔다가 가는 이 한 생애 중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야 합니다. 벧전 1:17에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고 했고, 벧전 2:17에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그 말씀과 그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1. 사는 날 동안(평생에) 사는 날 동안이라면 평생적 의미이니 더 함축된 의미에서 말한다면 사는 그 날 곧 오늘을 가르킵니다. 어제도 아니고 내일도 아닌 오늘은 참 귀한 날입니다. 어제는 지나 갔으니 내 것이 아니요 내일은 미래의 날이니 또한 내 것이 아니요, 살아 있는 오늘만이 내 날입니다.
그러므로 어제를 자랑할 것도 아니요 내일로 미룰 것도 아니라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자 만이 값있는 인생입니다. 인생이란 오늘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인생에게는 오직 오늘이 있을 뿐입니다(마 6:34). “오늘에 살라”이것은 웨슬러가 가장 좋아한 설교제목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한 날은 가장 중한 것입니다. 일생을 어떻게 하면 잘 살까 하는 것 보다 한 날을 어찌하면 잘 살까 하는 것이 참된 인생관입니다. 그러면 오늘 한 날을 살고자 할 때 상당한 원동력을 요구하지 아니하면 안되는 것 같이 천리길 가려는 자동차나 기차가 연료가 필요함과 같습니다. 우리의 한 날을 살아가는데 동력을 요하는 것이니 그 동력이란 무엇입니까? 곧 하나님 말씀인 성경입니다. “하루를 글 읽지 않으면 입에서 가시가 난다”라는 유학자의 말도 있거니와 성도로써 하나님 말씀 없이 한 날을 보낸다면 그것은 바로 공허입니다. 우리 육체를 위하여 하루 세끼 식사를 하듯이 영적 식량인 성경 역시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우리 영은 질식하고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육적 양식은 하루 단식할 수 있으나 영적 양식은 한 날도 먹지 아니할 수 없으니 우리가 사는 그 날까지 그 날 그 날의 새 힘을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2.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항상 곁에 두고 보며 고기가 물을 떠나 서 살 수 없음 같이 성도는 성서를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장하는 여자에게 거울과 같은 것으로 우리는 이 거울을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약 1:23). 성서는 무사의 검과 같아 우리는 이 검을(엡 6:17)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직업을 다 쉬고 성경만 보라는 말이 아닙니다. 농부, 상인, 군인, 회사원, 가정주부는 각각 형편을 따라 그 직업 여가를 이용하여 성경 읽기를 게을리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농부여가에 수불석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농사하는 겨를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 라는 말로 이 말은 면학가의 말이거니와 우리가 이만치 성경을 사랑하여 읽는다면 우리 영계의 부흥은 반드시 올 것입니다.
3. 배우고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 진리를 배워야 하겠습니다. 구원은 하나님 편에 있는 것이요, 배우는 것은 사람 편에 있는 것이니 얻은 바 구원은 그 말씀을 배움으로써 성장하는 것입니다(벧전 2:2).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마 11:29에 “나의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우라”고 했습니다. 구원은 순간적으로 공로없이 얻는 것이거니와 배운다는 것은 시간과 근면을 쌓지 않으면 안됩니다. 반딧불 밑에서, 눈 아래서 독서한다는 옛 근면학가의 말도 있듯이 우리도 그만큼 면학하여 그 보고의 무한경애를 가져야 합니다. 또 배워서 안된다는 것은 두뇌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요 가슴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서를 알되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되 교리적으로, 그리스도를 알되 역사적으로 아는 것이 참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의 진리를 소화하여 내 것을 삼으며 하나님의 영에 접촉하여 그 오묘를 맛보고, 그리스도를 체험하여 내 생명을 삼는 것이 참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읽되 배웁시다. 배우되 압시다. 알되 참으로 압시다. 참 알지 못하는 성도는 어제는 뜨거웠으나 오늘은 식어버립니다. 그를 참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읽읍시다. 배웁시다. 압시다.
4. 이 모든 율법을 지켜 행하라 우리가 성경 전 편을 다 배워서 안다고 할지라도 서자서, 아자아(書自書,我自我) 즉 글은 글이요 나는 나로 산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바리새인을 책망하심은 성경을 보지 못함을 책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을 알지 못함을 책망하심도 아니요(마 23:5), 행함이 없는 것을 책 망하신 것입니다. 과연 약한 것이 인간이니 행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행할 능력까지 아울러 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켜 행하십시다. 겸손을 배웠느냐, 희생을 배웠느냐, 자비를 배웠느냐, 화평을, 충성을, 인내를, 사랑을 배웠느냐? 그러면 지켜 행해야 합니다. 성서적 부흥은 참된 부흥입니다. 우리의 사는 날을 빛내기 위하여 성서를 항상 곁에 두고 읽읍시다. 읽어서 얻은 바 진리를 행합시다. 그러면 큰 부흥은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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