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영접하라 (롬15:1-13)
본문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가 있습니다. 그 아이는 자전거를 처음 배우기 때문에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다치기도 하였지만 그것보다도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많은 주의를 들어야만 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이 길로는 가지마라 저기도 위험하니 가지 마라 또 차도에는 아예 가지도 말아라” 등등 세세한 주의를 하는 부모에게 짜증이 난 어린차이는 “아버지 내가 몇 살쯤 되어야 내 마음대로 가고 싶은 곳에 갈 수 있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아버지는 이럴게 대답했습니다.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살아온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단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하고, 또 가고 싶은 곳을 다 가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속해 있는 문화에 얽매여 있고 습관에 묶여 있고 또 자신의 욕망과 체면, 그리고 권위에 매여 자유롭지 못한 것이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한 마디로 말해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롬 8:2에서 “이는 그리스도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해방의 종교)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에게도 매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무엇인가에 얽매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바로 불신앙의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인간답게 그리고 자유롭게 사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가장 멋지게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전 세계인을 감격시킨 '뿌리'라는 책을 기억할 줄 압니다. 그 책의 내용은 온 가족이 노예로 뿔뿔이 헤어져 가는 흑인들의 생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도덕도 윤리도 그들을 외면한고 양심과 생각의 자유조차도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의 처참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오직 자유였습니다. 불구가 되어도 자유를 누리며 죽었으면 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열망하던 자유가 주어 졌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배운 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어서 그 집에서 일을 다시 계속하면서도 노예로 일하던 어제와 자유인으로서 일을 하는 오늘의 처지는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제는 강제로 시킴을 받아 하는 일이요 오늘은 선택을 하여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5:15에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고후 5:13 에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에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사는 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노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길을 택하였기 때문에 기쁘게 일하는 자유로운 노예였습니다. 언젠가 후르시쵸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느 기자가 “미국은 자유의 나라이며 소련은 자유가 없는 나라인데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두 나라 모두 내가 보기에는 자유가 없소. 우리나라는 힘에 의한 노예요, 당신네 나라는 보험의 노예인 것 같소.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소“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험의 나라입니다. 생명 보험, 화재 보험, 자동차 보험, 그리고 교육 보험 등등 월급을 타면 모두 보험금으로 지불되고 맙니다. 그들은 보험의 노예이지만 힘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운 노예인 것입니다. 로마서는 1-11장까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대한 교리의 말씀이고 12-15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다룬 윤리적인 말씀이며 특별히 15장은 로마서의 총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장은 문안 인사로 마치고 있습니다. 롬 14:15의 하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타산에 있어서 형제를 볼 때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형제관입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가 다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은혜면에 더욱 악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 스스로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제는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미국의 히피족들이 포여 사는 마을 입구에 “당신은 나를 이용하여행복하시요. 나도 당신을 이용해서 행복하겠습니다”라고 쓴 대형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이용해서는 참된 기쁨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나의 기쁨이 희생될 때 이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음악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가난한 음악가는 새 예복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생각 끝에 옛날에 입던 낡은 예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안시는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연주할 때는 반드시 예복을 입고 연주합니다.
그런데 지휘자가 연주에 열중하여 팔을 힘껏 휘두르는 바람에 그만 예복이 찢어져 속옷이 보였습니다. 한 곡이 끝나고 두 번째 연주를 하려는 데 사람들이 그 모양을 보고 너무 웃기 때문에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웃옷을 벗은 채 셔츠바람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사람들이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 지휘자는 열심히 지휘를 했습니다. 이때 맨 앞에 있던 백작 한분이 조용히 자기가 입고 있던 예복 겉옷을 벗자 그것을 보고 앉아 있던 사람들도 웃음을 멈추고 하나 둘 모두 웃옷을 벗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날의 연주는 감격스럽게 성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우리는 남의 실수와 잘못을 보며 웃기만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민망함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이 앞서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5장은 로마서 14장에서 계속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고기를 먹는 일입니다. 당시 고기는 전부 우상의 제물로써 일단 제단에 고기를 바쳤다가 그것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며 그것은 우상을 섬긴다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교회의 논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마치 한국교회가 주초문제로 고민하는 것과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롬 14장, 15장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니 식물 문제로 그들을 망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딤전 8:13에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사랑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본문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약한 자 앞에서 약한 자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2에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절제한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약한 심령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심령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사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우리의 생활은 자기부정의 생활인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형제들의 필요와 약점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자유는 우리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들이 찾아와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받아 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에게 유익을 주어 그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기쁘게 받으실 선이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어제는 강제로 시킴을 받아 하는 일이요 오늘은 선택을 하여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고후 5:15에는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고후 5:13 에는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에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여 사는 한 인간의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노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그 길을 택하였기 때문에 기쁘게 일하는 자유로운 노예였습니다. 언젠가 후르시쵸프가 미국을 방문했을 때 어느 기자가 “미국은 자유의 나라이며 소련은 자유가 없는 나라인데 당신은 여기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을 때 그는 ”두 나라 모두 내가 보기에는 자유가 없소. 우리나라는 힘에 의한 노예요, 당신네 나라는 보험의 노예인 것 같소.
그러므로 자유가 없는 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소“ 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사실 미국은 처음부터 끝까지 보험의 나라입니다. 생명 보험, 화재 보험, 자동차 보험, 그리고 교육 보험 등등 월급을 타면 모두 보험금으로 지불되고 맙니다. 그들은 보험의 노예이지만 힘에 의해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에 의해 스스로 선택한 자유로운 노예인 것입니다. 로마서는 1-11장까지는 하나님을 어떻게 믿느냐에 대한 교리의 말씀이고 12-15장까지는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를 다룬 윤리적인 말씀이며 특별히 15장은 로마서의 총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6장은 문안 인사로 마치고 있습니다. 롬 14:15의 하반절에는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해타산에 있어서 형제를 볼 때 먼저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은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형제관입니다. 로마서 15장 1절에서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은 모두가 다 약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식과 은혜면에 더욱 악한 사람들이 있으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위해 우리 스스로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잘 돌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교제는 나를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남을 돌아보는 것입니다. 미국의 히피족들이 포여 사는 마을 입구에 “당신은 나를 이용하여행복하시요. 나도 당신을 이용해서 행복하겠습니다”라고 쓴 대형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강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를 이용해서는 참된 기쁨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나의 기쁨이 희생될 때 이웃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어느 음악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날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가난한 음악가는 새 예복을 장만할 돈이 없어서 생각 끝에 옛날에 입던 낡은 예복을 입고 나왔습니다. 여러분도 안시는 바와 같이 유럽에서는 연주할 때는 반드시 예복을 입고 연주합니다.
그런데 지휘자가 연주에 열중하여 팔을 힘껏 휘두르는 바람에 그만 예복이 찢어져 속옷이 보였습니다. 한 곡이 끝나고 두 번째 연주를 하려는 데 사람들이 그 모양을 보고 너무 웃기 때문에 그는 실례를 무릅쓰고 웃옷을 벗은 채 셔츠바람으로 지휘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뒤에서 사람들이 킬킬거리며 웃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 지휘자는 열심히 지휘를 했습니다. 이때 맨 앞에 있던 백작 한분이 조용히 자기가 입고 있던 예복 겉옷을 벗자 그것을 보고 앉아 있던 사람들도 웃음을 멈추고 하나 둘 모두 웃옷을 벗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그 날의 연주는 감격스럽게 성공하였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얘기입니까 우리는 남의 실수와 잘못을 보며 웃기만 하기보다는 그 사람의 민망함을 감싸줄 수 있는 마음이 앞서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15장은 로마서 14장에서 계속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고기를 먹는 일입니다. 당시 고기는 전부 우상의 제물로써 일단 제단에 고기를 바쳤다가 그것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며 그것은 우상을 섬긴다는 것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가 교회의 논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마치 한국교회가 주초문제로 고민하는 것과 흡사하다 하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롬 14장, 15장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죽으셨으니 식물 문제로 그들을 망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습니다. 딤전 8:13에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희생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사랑한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본문 2절에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약한 자 앞에서 약한 자같이 되었습니다. 고전 9:22에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약한 사람들을 위하여 자기 자신을 절제한 목적은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약한 심령들을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바울은 어떻게 해서라도 다른 사람의 심령을 구원하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사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우리의 생활은 자기부정의 생활인 것입니다.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 형제들의 필요와 약점을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자유는 우리의 쾌락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의 유익과 그리스도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사람들이 찾아와도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받아 들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우리도 서로 서로를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믿음이 강한 우리들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도와 그들의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자기 이웃에게 유익을 주어 그들을 기쁘게 함으로써 덕을 세워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주님이 기쁘게 받으실 선이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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