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고와 기독교 신앙 (갈4:12-13)
본문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쓴 편지의 내용입니다. 13절을 보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아마 처음에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을 그냥 지나가려고 하다가 병으로 인하여 부득이 머무는 동안에 그곳 사람들에게 전도한 것 같습니다. 괴로운 병이 오히려 갈라디아 교회를 설립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고후 112:9에서는 자기 몸에 가시가 있어 세번 기도했는데 주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때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기독교의 신앙이 인간의 질병, 궁핍, 곤란, 곧 인간고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하는 일면을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생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있습니다. 죽은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없지만 산 사람에게는 괴로움이 항상 따릅니다. 여기에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고 빈부의 구별도 없습니다. 문명인이나 야만인의 차이도 없고 귀천의 구별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과 고통을 다른 사람보다도 더 많이 받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육체의 고통뿐만 아니라 심리적 고통까지 겸해서 생각해 보면 사실 누가 제일 많은 고통을 받는지는 하나님만 아실 것입니다. 날 때부터 시작하여 살아가는 동안과, 늙어서도 그리고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고통이 함께 하는 것이 인간의 생이 아니겠습니까 기독교신자도 이 고통의 문제에서 예외는 될 수 없었습니다. 신앙으로 이런 고통을 없애 주겠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너희는 환란을 받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러시면서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분명히 주의해서 보아야 할 것은 참으로 신앙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같은 고통이나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는 불신자들과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같은 풀무불이라 할지라도 검불이나 나무가 들어가면 타서 없어지지만 쇠뭉치가 들어가면 더욱 굳은 강철이 되어 나옵니다. 같은 폭풍우라 할지라도 까치나 까마귀는 바람에 밀려 떨어지지만 독수리는 폭풍우를 타고 더 높이 올라가는 현상을 우리가 때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병석에 누워있는 동안에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리하여 갈라디아 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입니다. 간혹 이런 현상을 우리 주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병상에 있는 환자를 종종 심방해 보면 오히려 병상에서 더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기도 합니다. 바울과 실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빌립보에서 전도를 할 때 불쌍한 계집종의 병을 고쳐준 죄로 억울하게 관료에게 잡혀가서 매를 맞고 발에 착고가 채워진 채로 부자유하게 감옥에 갇혀 그날 저녁을 지내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억울하고 분한 일입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며 찬송을 부르자 갑자기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며 발에 있던 착고가 부서졌습니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사랑하는 빌립보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주 안에서 즐거워하라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와 같이 하면 사람의 지각에 뛰어나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라고 말입니다. 이런 옥고 가운데서도 참된 신앙을 가지고 사는 바울에게는 은혜와 평강이 있었고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행 27장에 보면 바울이 마지막으로 로마로 향할 때 그가 모든 사람에게 “지금 그레데로 떠나지 맙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을 듣지 않고 선장의 말을 듣고 출항했습니다. 얼마 동안은 조용히 갔습니다. 그러나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났을 때 그 배는 조난을 당해 십사일 동안이나 해와 달과 별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식량은 내던져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다가 선장과 백부장과 선원들 모두는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만은 정신을 차려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반드시 가이사 앞에 서야겠고 배는 손실을 입었으나 인명은 피해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는, 그는 쓰러진 사람에게 힘차게 외쳤습니다. “두려워 마십시오. 여러분의 생명을 아무일 없이 보존하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내가 들었소” 하며 그들을 위로하였습니다. 스데반은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을 받아 순교했지만 그는 하늘나라와, 하나님의 보좌와, 주님께서 보좌 앞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무리를 향해 “이들은 알지 못하오니 저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라고 간구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나 실라나 스데반의 경험만은 아닙니다. 참된 신앙을 가진 모든 성도의 경험이기도 합니다. 같은 고통, 같은 고난을 받아도 신앙이 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타락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고통과 고난을 통해서 더 높이 비약합니다. 더 큰 일을 합니다. 청교도였던 문필가 밀톤은 실명 후'실락원'을 남겼고, 음악가 베토벤은 재주있고 신앙있는 사람으로서 귀가 먹은 후에 오히려 하늘의 음성을 전하는 위대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대의 수치와 최대의 고통인 십자가에 못박힘을 받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십자가는 오히려 만민을 구속하는 생명과 소망의 십자가를 믿는 신앙을 가진 이에게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것을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신앙이 있는 자들은 고통, 고난, 슬픔, 실패, 빈궁, 고독, 질병, 죽음까지도 이용해서 그리스도의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 4:13에서 “내게 능력을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했습니다. 기독교인의 신앙은 영혼을 하늘로 향하게 합니다. 이미 말한대로 독수리는 폭풍우를 만날 때에 그 날개의 각도를 위로해서 오히려 폭풍우를 타고 더 위로 올라갑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영혼을 위로 향해 높은 각도로 올려놓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과 같은 슬픈 일, 같은 병, 같은 실패를 만날지라도 도리어 새로운 비젼을 얻고 용기를 얻고 새로운 능력을 받아서 실패를 승리로 바꾸며 탄식을 찬송으로 변하게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은 다른 이의 고통과 고난에 동참해서 그들을 구원하게 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왜 고통을 당하는가 하고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시키고 또 우리의 고난과 고통에 동참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속량해 주심으로 인간을 모든 고난에서 구원하여 주십니다. 기억하십시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의 주치(主治)입니다. 우리가 이 십자가로 구원을 얻었으므로 우리도 다른 이들을 고통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힘써야 할 것입니다. 다미앤과 같은 사람은 자기의 집을 떠나 문둥이만 모여사는 모로코의 섬에 들어가서 일생을 그들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앨버트 슈바이처도 역시 고국을 떠나 아프리카에 가서 병원을 차려 흑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봉사를 하였습니다. 참된 신앙은 고통과 고난을 도리어 참고 이기며 큰 축복으로 전환시킵니다. 참된 신앙은 모든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여 사람들에게 봉사합니다. 모든 인간고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우리 주님과 십자가에 대한 참된 신앙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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