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 (사7:14)
본문
아하스는 여호와께서 그에게 주시려는 그 징조를 거절하였고, 이사야 선 지자는 그의 패역함과 배은망덕을 질책했습니다. 아하스가 징조를 거역한 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여호와께서 약속하시고 유대인들을 위하여 정하신 그 징조를 주시는 것을 막지는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징조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유다와 다윗의 집에 대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나타내는 일반적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유다는 현재의 환란과 위협이 아무리 커도 버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해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유다 민족의 다윗의 가문에서 이사야가 태어날 것이며 유다의 축복된 자가 있는 한 유다는 멸망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매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그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과 순 결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는 것이며, 더우 기 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 부패로 얼룩되지 않은 거룩한 존재가 될 것이므로 다윗의 보좌를 차지하기에 더없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해 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건은 비록 800년 이후에 이루어질 일이었지만 다윗의 집에는 큰 격려가 되는 징조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자 하시지 않는다는 언질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실상 유다를 투기했고 유다가 멸망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본문은 임마누엘 출생이 이사야시대로부터 800년을 지나 이루어질 것 이라고 예언했을 뿐입니다. 이사야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고 한 것은 여기서 이중 의미를 가진 술어로 사용하였습니다. 곧 임마누엘이란 말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 것이기도 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구세주라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마 1:21-25). 임마누엘은 다윗의 집과 유다 지파를 총애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징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여호와시요, 우리의 주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우리의 맏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를 높이며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주의하여 볼 것은 그가 기적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일인데 이것은 일찌기 듣지 못한 일이요, 다른 유례가 없는 것으로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는 참으로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죄가 없으셨기에 인간이 상실한 옛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 가운데 영광의 소망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또 그의 육신 의 양부모가 서민의 신분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됩니다. 그의 모친은 처녀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여왕도, 여선지자도, 또 큰 부자의 국부라 고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의 혈관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 교육받지 않은 어리석은 여자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지위는 볼 것이 없었으며, 그 약혼자는 가난하였습니다. 새 왕의 탄생을 위한 준비는 실로 빈약하였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 안에, 비애 중에, 생애의 사업 중에, 받아야 할 징벌 중에, 또 우리의 무덤 가운데 함께 하시며, 현재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부활과 승천과 승리와 그리고 빛나는 재림에 있어 서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즉 임마누엘의 주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으로 임마누엘은 실현되었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직 접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멀리만 계시던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었던 독생자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그 때보다 더 영광스런 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섹스피어는 말하기를 성탄은 사람들의 사건에 나타난 커다란 조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는 만민이 다같이 머리를 숙여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 밀물이 넘쳐 날 때와 같이 세계의 조 건은 아들이 나타나기를 절실히 구했고 이 역사의 밀물을 인류는 받아드 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인 모든 조건과 사회적 제반 배경을 돌아볼 때 예수님이 나시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인 실망과 도덕적 암흑에서 모든 사람들은 허덕이다가 지칠대로 지쳤을 때였고, 모든 사람들의 심령이 굶주렸고, 진리에 목말랐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이 색다른 말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인줄 알고 밀려갔던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그 때의 정치는 매우 발달한 시대였습니다. 로마를 중심해서 정치적인 세계는 통일되었습니다. 또한 교통이나 정치나 문화도 통 일을 이루었을 때입니다. 언어로 볼지라도 헬라어만 하면 세계 어디를 가든지 다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 깊이 들어가 보면 정치는 부 패할대로 부패했고 도덕은 타락할대로 타락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헤롯 왕은 세계 역사에서 보기 드문 폭군이었습니다. 헤롯의 대를 이은 제 2세 헤롯도 죄없는 세례 요한을 잡아 죽인 잔인무도한 폭군이었습니다.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정의가 짓밟힘을 당하고 불의가 득세를 하는 때였습니다. 이런 정치 환경 속에 휩쓸려 살고 있는 사회 인심이 얼마나 강퍅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는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심각한 윤락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의 종교는 부패해서 형식과 의식만 남은 시대였습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할 기약이 찼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갈 4:4에 “기약이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도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 가운데 오시기 않으시고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33년간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다가 승천하셔서 지금은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아니하시지만 저 먼 하나님 나라에 가서 계시다가 재림하실 때나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탄생하신 이 후로 계속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울 때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가 넘어지고 쓸어질 때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같이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한 것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한 것처럼 언제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독생자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유다 민족의 다윗의 가문에서 이사야가 태어날 것이며 유다의 축복된 자가 있는 한 유다는 멸망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메시야는 매우 신비스러운 방법으로 태어나는데,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은 그가 이 세상에 하나님의 능력과 순 결을 가지고 태어날 것이기 때문에 비범한 인물이 되리라는 것이며, 더우 기 그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공통적 부패로 얼룩되지 않은 거룩한 존재가 될 것이므로 다윗의 보좌를 차지하기에 더없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해 주리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건은 비록 800년 이후에 이루어질 일이었지만 다윗의 집에는 큰 격려가 되는 징조였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고자 하시지 않는다는 언질이었습니다. 에브라임은 실상 유다를 투기했고 유다가 멸망하기를 원했지만 그렇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본문은 임마누엘 출생이 이사야시대로부터 800년을 지나 이루어질 것 이라고 예언했을 뿐입니다. 이사야가 예수 그리스도를 임마누엘이라고 한 것은 여기서 이중 의미를 가진 술어로 사용하였습니다. 곧 임마누엘이란 말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동시에 그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을 가리킨 것이기도 합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가 곧 구세주라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마 1:21-25). 임마누엘은 다윗의 집과 유다 지파를 총애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징조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으신 여호와시요, 우리의 주이시며,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또한 우리의 맏형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친구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를 높이며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우선 주의하여 볼 것은 그가 기적으로 말미암아 잉태된 일인데 이것은 일찌기 듣지 못한 일이요, 다른 유례가 없는 것으로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주는 참으로 사람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는 죄가 없으셨기에 인간이 상실한 옛 영광을 회복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우리 가운데 영광의 소망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또 그의 육신 의 양부모가 서민의 신분이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도 안됩니다. 그의 모친은 처녀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지 여왕도, 여선지자도, 또 큰 부자의 국부라 고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의 혈관에는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또 교육받지 않은 어리석은 여자도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노래를 부를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인의 지위는 볼 것이 없었으며, 그 약혼자는 가난하였습니다. 새 왕의 탄생을 위한 준비는 실로 빈약하였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은 우리의 성격 안에, 비애 중에, 생애의 사업 중에, 받아야 할 징벌 중에, 또 우리의 무덤 가운데 함께 하시며, 현재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부활과 승천과 승리와 그리고 빛나는 재림에 있어 서 그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즉 임마누엘의 주님은 근본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성육신으로 임마누엘은 실현되었습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멀리 계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직 접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임마누엘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말미암아 멀리만 계시던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와 같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었던 독생자 예수가 이 땅에 태어난 그 때보다 더 영광스런 때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섹스피어는 말하기를 성탄은 사람들의 사건에 나타난 커다란 조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에는 만민이 다같이 머리를 숙여 경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다에 밀물이 넘쳐 날 때와 같이 세계의 조 건은 아들이 나타나기를 절실히 구했고 이 역사의 밀물을 인류는 받아드 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인 모든 조건과 사회적 제반 배경을 돌아볼 때 예수님이 나시지 않을 수 없는 시대였습니다. 정치적인 실망과 도덕적 암흑에서 모든 사람들은 허덕이다가 지칠대로 지쳤을 때였고, 모든 사람들의 심령이 굶주렸고, 진리에 목말랐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저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이 색다른 말을 하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이 자신들이 기다리는 메시야인줄 알고 밀려갔던 것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는 그 때의 정치는 매우 발달한 시대였습니다. 로마를 중심해서 정치적인 세계는 통일되었습니다. 또한 교통이나 정치나 문화도 통 일을 이루었을 때입니다. 언어로 볼지라도 헬라어만 하면 세계 어디를 가든지 다 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부에 깊이 들어가 보면 정치는 부 패할대로 부패했고 도덕은 타락할대로 타락했을 때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헤롯 왕은 세계 역사에서 보기 드문 폭군이었습니다. 헤롯의 대를 이은 제 2세 헤롯도 죄없는 세례 요한을 잡아 죽인 잔인무도한 폭군이었습니다. 공의가 땅에 떨어지고 정의가 짓밟힘을 당하고 불의가 득세를 하는 때였습니다. 이런 정치 환경 속에 휩쓸려 살고 있는 사회 인심이 얼마나 강퍅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는 역사상 가장 처참하고 심각한 윤락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면 그 시대의 종교는 부패해서 형식과 의식만 남은 시대였습니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야할 기약이 찼습니다. 그런고로 사도 바울은 갈 4:4에 “기약이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셨도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 가운데 오시기 않으시고는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33년간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다가 승천하셔서 지금은 우리와 같이 계시지 아니하시지만 저 먼 하나님 나라에 가서 계시다가 재림하실 때나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탄생하신 이 후로 계속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실패하고 울 때 우리를 위로하시고, 우리가 넘어지고 쓸어질 때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같이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임마누엘이라고 한 것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이라는 뜻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그 영광을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라고 한 것처럼 언제나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독생자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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