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로 영혼을 얻으라 (눅21:14-19)
본문
눅 21:14-19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연구치 않기로 결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재와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 주어 너희 중에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치 아니하리라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의 말씀은 마지막 때에 성도에게 일어날 무서운 핍박에 대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이 무서운 핍박을 인내로 견디면 영혼을 얻겠다고 우리에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1.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1974년 2월 28일에 고교연합고사 부정 사건으로 세상아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시험 부정사건 자체보다도 경북교육위원회의 김모 교육감의 자살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직접 시험부정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하 직원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 사건으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던 것입니다. 김 교육감의 자살은 매스콤을 위시해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사회의 분위기에 일대 경종을 울린 사건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봅니다. 다음의 어떤 신문 사설은 이 자살 사건을 좀 더 깊이 생각케 해줍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 동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가난을 못이겨 자살하기도 하고, 실연으로 청춘을 포기하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또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허무감을 느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김 교육감의 자살은 이런 것과는 다르게 부하들에 의해 저질러진 죄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이 그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 입시 사건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오점에 대해 자살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책임을 죽음으로만 보상했어야만 옳았을까 인간의 생명이 도의적 책임과 상쇄될만큼 가벼운 것일까 하는 가치 판단의 혼란이 남게 됩니다.…… 교훈치고는 비극적입니다. 부정에는 관련이 없으나 교육자의 양심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부끄럽다는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렇다고 선뜻 지지할 마음은 내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도의적 책임과 상쇄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치를 영혼에 둡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괴롭다고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내함으로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2. 성서로 돌아갑시다 인간의 삶은 어떻게 보면 고난의 역사일른지 모릅니다. 그래서 불교에선 인생은 고통의 바다요 백팔번뇌의 연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현실이기에 인간은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이 고난에 대해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고난의 현실을 잊으려 합니다. 그래서 술이나 마약으로 현실을 도피하려 합니다. 자살도 고난의 도피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치유 방법은 못됩니다. 오히려 영혼을 점점 상하게 합니다. 고난에 대한 또 다른 태도는 적극적으로 대처하려 합니다.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어떻해서든지 이것을 극복하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고난을 극복하려고 인내하는 사람이 영혼을 얻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욥의 생애는 대표적인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친구, 가족들까지 자기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본인도 죽을 병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실망하여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갑절의 축복이 주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내가 인생의 무기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인내는 선한 사람의 무기입니다. 분노와 흥분에 빠지지 말고 인내함은 문제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내의 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말입니다. 사실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이길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기를 이길 수 있다면 그 어떤 외적인 것이 괴롭게 한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3. 신자들이 인내하여야 할 이유
(1) 구약의 약속을 받기 위하여 히 10:36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인내가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환란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어떤 목적이나 이상을 달성하려면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요구되는데 하물며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약속을 기다리는 신앙에 인내가 필요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기다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할 것입니다.
(2)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마 10:32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구원에 있음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의 선행이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얻은 자의 삶에는 이전에는 겪지 아니 하였던 핍박과 고난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얻은 자의 삶에 다가오는 핍박과 고난을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셔서 구원의 기쁨에 참예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강림이 가까왔으므로 약 5:7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인내해야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의 강림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내함은 목적없는 인내함이 아닙니다.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목적있는 인내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내는 의미있는 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인내함을 보상할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의 눈물을 씻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고난과 핍박 중에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어떻게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벧후 1:5-7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 말씀처럼 인내가 한 요소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덕, 그리고 지식과 절제가 선행되어야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인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만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또한 덕이 있어야 합니다. 덕이 무엇입니까 온유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함은 오래 견딜 수 있게 하는 마음의 평화를 제공해 줍니다. 또 인내에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무조건적인 인내가 아니라 인내해야 하는 상황과 때를 분변할 수 있는 지식은 인내할 수 있는 큰 힘을 줍니다. 그리고 인내에는 무엇보다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근신하는 자세입니다. 깨어 각성하는 자세입니다. 절제가 없다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허리를 동이고 바짝 긴장하는 자세만이 인내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아무쪼록 인내하셔서 영혼을 얻는 축복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1.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1974년 2월 28일에 고교연합고사 부정 사건으로 세상아 매우 시끄러웠습니다. 우리에게 충격을 준 것은 시험 부정사건 자체보다도 경북교육위원회의 김모 교육감의 자살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그 자신이 직접 시험부정사건에 아무런 관련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부하 직원에 의해 저질러진 부정 사건으로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자살하였던 것입니다. 김 교육감의 자살은 매스콤을 위시해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습니다. 책임을 지기 싫어하는 사회의 분위기에 일대 경종을 울린 사건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봅니다. 다음의 어떤 신문 사설은 이 자살 사건을 좀 더 깊이 생각케 해줍니다. “사람이 제 목숨을 스스로 끊어 버리는 것은 드문 일입니다. 그 동기는 여러 가지입니다. 가난을 못이겨 자살하기도 하고, 실연으로 청춘을 포기하는 젊은이도 있습니다. 또한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허무감을 느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김 교육감의 자살은 이런 것과는 다르게 부하들에 의해 저질러진 죄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이 그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 입시 사건이 남긴 지울 수 없는 오점에 대해 자살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책임을 죽음으로만 보상했어야만 옳았을까 인간의 생명이 도의적 책임과 상쇄될만큼 가벼운 것일까 하는 가치 판단의 혼란이 남게 됩니다.…… 교훈치고는 비극적입니다. 부정에는 관련이 없으나 교육자의 양심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부끄럽다는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렇다고 선뜻 지지할 마음은 내키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도의적 책임과 상쇄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닙니다. 그와는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가치를 영혼에 둡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할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괴롭다고 버릴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인내함으로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2. 성서로 돌아갑시다 인간의 삶은 어떻게 보면 고난의 역사일른지 모릅니다. 그래서 불교에선 인생은 고통의 바다요 백팔번뇌의 연속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고난이 인간의 삶에 있어서 현실이기에 인간은 고통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개개인이 이 고난에 대해 대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고난의 현실을 잊으려 합니다. 그래서 술이나 마약으로 현실을 도피하려 합니다. 자살도 고난의 도피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치유 방법은 못됩니다. 오히려 영혼을 점점 상하게 합니다. 고난에 대한 또 다른 태도는 적극적으로 대처하려 합니다. 고난의 현실을 인정하고 어떻해서든지 이것을 극복하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내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고난을 극복하려고 인내하는 사람이 영혼을 얻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욥의 생애는 대표적인 고난의 역사였습니다. 모든 재산이 하루 아침에 사라지고 친구, 가족들까지 자기를 버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뿐 아니라 본인도 죽을 병에 걸려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실망하여 하나님을 버리지 아니하였습니다. 참고 인내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결국 그에게 갑절의 축복이 주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인내가 인생의 무기라고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인내는 선한 사람의 무기입니다. 분노와 흥분에 빠지지 말고 인내함은 문제해결의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신자들의 인내를 배워야 합니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내의 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순간까지 말입니다. 사실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은 자기를 이길 수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자기를 이길 수 있다면 그 어떤 외적인 것이 괴롭게 한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3. 신자들이 인내하여야 할 이유
(1) 구약의 약속을 받기 위하여 히 10:36에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도의 신앙생활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근거되어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성도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인내가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환란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내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 생활에서도 어떤 목적이나 이상을 달성하려면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요구되는데 하물며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고 그 약속을 기다리는 신앙에 인내가 필요없을 수 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고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기다린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아브라함에게 주었던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고 견뎌야 할 것입니다.
(2) 구원을 얻기 위하여 마 10:32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인내해야 하는 이유가 구원에 있음을 알려 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결코 값싼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의 선행이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얻은 자의 삶에는 이전에는 겪지 아니 하였던 핍박과 고난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 구원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계속 이 땅에서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원얻은 자의 삶에 다가오는 핍박과 고난을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신앙을 버리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내하는 자가 구원을 얻게 되는것”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셔서 구원의 기쁨에 참예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주님의 강림이 가까왔으므로 약 5:7에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인내해야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주의 강림이 가까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인내함은 목적없는 인내함이 아닙니다. 주의 강림을 기다리는 목적있는 인내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내는 의미있는 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인내함을 보상할 것입니다. 우리의 슬픔의 눈물을 씻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 때문에 우리는 어떠한 고난과 핍박 중에도 인내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어떻게 인내할 수 있겠습니까 벧후 1:5-7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인의 궁극적인 사랑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야고보서 말씀처럼 인내가 한 요소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그 인내를 이루기 위해서는 믿음과 덕, 그리고 지식과 절제가 선행되어야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결코 인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굳건한 믿음만이 어떠한 어려움이라도 견딜 수 있게 합니다. 또한 덕이 있어야 합니다. 덕이 무엇입니까 온유함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온유함은 오래 견딜 수 있게 하는 마음의 평화를 제공해 줍니다. 또 인내에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무조건적인 인내가 아니라 인내해야 하는 상황과 때를 분변할 수 있는 지식은 인내할 수 있는 큰 힘을 줍니다. 그리고 인내에는 무엇보다도 절제가 필요합니다. 근신하는 자세입니다. 깨어 각성하는 자세입니다. 절제가 없다면 인내하지 못합니다. 허리를 동이고 바짝 긴장하는 자세만이 인내하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은 아무쪼록 인내하셔서 영혼을 얻는 축복을 가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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