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의 무덤 (민11:31-35)
본문
본 장에는 출애굽한 후 하나님의 광야에서 있었던 어두운 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옥한 애굽 땅에서 살던 백성들에게는 광야생활은 지긋지긋한 생활이었습니다. 저들은 만나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고 애굽 시절의 생선의 맛을 회상하고는 불평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탐욕의 표본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출애굽을 하여 얻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내핍을 각오해야 됩니다. 33절에 “고기가 아직 잇 사이에 있어‥‥‥‥” 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어떤 정해진 날을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포식을 하여 그것을 싫어하기까지 기다리지 아니하시고 그들이 아직도 계속해서 먹기를 탐하고 빈을 그 때 형벌을 내리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까지 형편으로 볼 때 그들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들이 고기를 입에서 씹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들의 무절제를 형벌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탐식 중에 홀연히 놀라게 되었습니다. 시 78:30에 “저희가 그 욕심에서 떠나지 아니하고” 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어느 대식가가 목구멍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삼키다가 숨이 막혀 죽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포식을 해도 먹기를 탐하는 사나운 욕심은 가라앉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받는 형벌이 분명하게 보여 지도록 그들이 그것을 먹고 있던 중에 벌을 내리셨습니다. 34절에 “그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칭하였으니” 라고 했습니다. 후손들이 그들의 조상들을 본받지 않도록 그처럼 큰 죄에 대한 기념물을 남겨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합당하고 건강에 좋은 음식으로 그들을 먹여 오셨습니다. 그러나 합당치 않은 식물을 열망하므로 그들은 자신들에게 해독이 되었고 스스로를 죽이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새겨 후손들이 그와 같은 배은망덕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래 성품입니다. 배고플 때 먹으려는 욕망, 괴로울 때 평안하려는 욕망은 누구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지나칠 때 그 생활은 기브롯 핫다아와가 되는 것입니다. 먹고 더 먹으려는 욕망이나, 가지는 중에 더 가지려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 것입니다. 딤후 6:8-9에 “부하려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발람을 보라. 모압 왕 발락이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가지 않으려다가 많은 보물과 더 높은 귀족을 보내어 간청할 때 가기를 허락했습니다. 발람은 발락이 민 22:18-19에 “그 집의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어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고 말하였으나 실상은 발락이 보낸 황금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나귀의 책망을 들으면서도 돈에 끌려가던 발람은 미디안 사람들과 함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민 31장). 아나니아 부부도 돈 욕심에 무덤을 판 사람이고, 가룟 유다도 돈 욕심에 자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기를 먹고 채소 먹던 생활은 기억하면서 애굽에서의 벽돌 구이와 간역자들의 채찍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작은 불편은 기억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주신 풍성한 은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얻고도 만족을 모르고 육욕에 끌려 다시 애굽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섞여 사는 무리들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과 같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백성들이었습니다. 애굽을 그리워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출된 이스라엘이 저들의 못된 본을 받아 애굽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비록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애굽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현대교회의 타락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는 유명무실한 신자 혹은 배교자의 전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었음에 비해 롯의 처는 세상의 벗입니다. 세상을 사모하는 마음, 육욕을 원하는 마음은 정결함을 받아야 함과 동시에 교회 안에 이방 세계를 구축하려는 불신의 경향임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불평할 수 없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면 감사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의 차이를 보면 그리스도인은 감사조건을 찾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물욕과 명예욕과 정욕 눈이 팔린 세상 사람은 그 욕심의 주머니를 채우지 못해 불평합니다. 우리는 개인, 가정, 교회적으로 당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무슨 일에 불평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욕심의 화신이 된 이스라엘의 종착점은 기브롯 핫다아와는 곧 탐욕의 무덤이었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고기를 먹게 하라”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대량의 메추라기를 주었습니다. 저들은 배불리 먹을 정도가 아니라 과식으로 병들고 목숨을 잃은 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저들은 고기를 요구했고 그리하여 넘치도록 메추라기를 먹게 되어 저들의 소원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주가 되었습니다. 큰 온역의 재앙이 메추라기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장소는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브롯 핫다아와의 교훈을 마치기 전에 꼭 주의하고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곧 이는 한낱 비유요, 오늘도 쓸 수 있는 소설이지 역사의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40년 생애의 기적을 제외하고 나아가서는 모세 5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기껏 그것을 비유나 우화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성화이전(qY-의 사람은 불평의 화신이요 저들의 종착점은 예외 없이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하겠습니다. 400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이요, 부녀자 어린이 합해서 200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맙시다. 애굽에서 출생한 200만 이스라엘 중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케케묵은 애굽의 정신을 일소함이 없이 새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200만 중 두 사람을 제외한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 전부가 광야 생활 중 탐욕의 무덤에 묻혔다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교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탐심은 바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큰 뜻과 탐심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삶을 위한 의욕과 향락을 위한 탐욕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혹이 “돈은 행복의 입구이지 내전은 아니며 명예는 행복의 가치이지 그 내용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욕망의 역사가 문화를 창조한 것도 알지만, 탐욕주의가 문화를 파괴한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20세기 후발에 들어와 인류 과학은 최고도 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과학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열강 특히 공산주의의 탐욕으로 세계 문명은 파괴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라고 하였습니다. 약 1:15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의 말씀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곳 이름을 새겨 후손들이 그와 같은 배은망덕 행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자 하는 것은 인간 본래 성품입니다. 배고플 때 먹으려는 욕망, 괴로울 때 평안하려는 욕망은 누구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욕망이 지나칠 때 그 생활은 기브롯 핫다아와가 되는 것입니다. 먹고 더 먹으려는 욕망이나, 가지는 중에 더 가지려는 것은 무덤을 파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 것입니다. 딤후 6:8-9에 “부하려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구약의 발람을 보라. 모압 왕 발락이 사람을 보내어 이스라엘을 저주하기를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의 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가지 않으려다가 많은 보물과 더 높은 귀족을 보내어 간청할 때 가기를 허락했습니다. 발람은 발락이 민 22:18-19에 “그 집의 은금을 가득히 채워서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내 하나님의 말씀을 기어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고 말하였으나 실상은 발락이 보낸 황금에 눈이 어두웠습니다. 나귀의 책망을 들으면서도 돈에 끌려가던 발람은 미디안 사람들과 함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민 31장). 아나니아 부부도 돈 욕심에 무덤을 판 사람이고, 가룟 유다도 돈 욕심에 자결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고기를 먹고 채소 먹던 생활은 기억하면서 애굽에서의 벽돌 구이와 간역자들의 채찍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작은 불편은 기억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주신 풍성한 은혜는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얻고도 만족을 모르고 육욕에 끌려 다시 애굽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섞여 사는 무리들의 영향이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이스라엘과 같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 백성들이었습니다. 애굽을 그리워한 것은 무리가 아니었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구출된 이스라엘이 저들의 못된 본을 받아 애굽을 그리워한 것입니다. 그들의 몸은 비록 애굽에서 나왔으나 마음은 애굽에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현대교회의 타락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롯의 처가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롯의 아내는 유명무실한 신자 혹은 배교자의 전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벗이었음에 비해 롯의 처는 세상의 벗입니다. 세상을 사모하는 마음, 육욕을 원하는 마음은 정결함을 받아야 함과 동시에 교회 안에 이방 세계를 구축하려는 불신의 경향임을 알아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불평할 수 없도록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기적 속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라면 감사하는 생활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과 세상 사람의 차이를 보면 그리스도인은 감사조건을 찾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물욕과 명예욕과 정욕 눈이 팔린 세상 사람은 그 욕심의 주머니를 채우지 못해 불평합니다. 우리는 개인, 가정, 교회적으로 당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누구를 원망하거나 무슨 일에 불평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동하여 선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불평과 욕심의 화신이 된 이스라엘의 종착점은 기브롯 핫다아와는 곧 탐욕의 무덤이었습니다. 지도자 모세를 향하여 “고기를 먹게 하라”고 아우성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대량의 메추라기를 주었습니다. 저들은 배불리 먹을 정도가 아니라 과식으로 병들고 목숨을 잃은 자가 속출하였습니다. 저들은 고기를 요구했고 그리하여 넘치도록 메추라기를 먹게 되어 저들의 소원은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주가 되었습니다. 큰 온역의 재앙이 메추라기 뒤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장소는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기브롯 핫다아와의 교훈을 마치기 전에 꼭 주의하고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곧 이는 한낱 비유요, 오늘도 쓸 수 있는 소설이지 역사의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광야 40년 생애의 기적을 제외하고 나아가서는 모세 5경의 역사성을 부인하고 기껏 그것을 비유나 우화로 돌려보내고자 하는 사탄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성화이전(qY-의 사람은 불평의 화신이요 저들의 종착점은 예외 없이 “기브롯 핫다아와” 곧 탐욕의 무덤이라고 하겠습니다. 400년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장정만 60만이요, 부녀자 어린이 합해서 200만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지 맙시다. 애굽에서 출생한 200만 이스라엘 중 젖과 꿀이 흐르는 언약의 땅에 들어간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뿐이었습니다. 케케묵은 애굽의 정신을 일소함이 없이 새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200만 중 두 사람을 제외한 애굽에서 난 이스라엘 전부가 광야 생활 중 탐욕의 무덤에 묻혔다고 하는 사실은 놀라운 교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탐심은 바로 조정되어야 합니다. 큰 뜻과 탐심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삶을 위한 의욕과 향락을 위한 탐욕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혹이 “돈은 행복의 입구이지 내전은 아니며 명예는 행복의 가치이지 그 내용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욕망의 역사가 문화를 창조한 것도 알지만, 탐욕주의가 문화를 파괴한 것도 기억해야 합니다. 20세기 후발에 들어와 인류 과학은 최고도 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과학의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열강 특히 공산주의의 탐욕으로 세계 문명은 파괴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우리는 겸손히 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라고 하였습니다. 약 1:15에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교훈의 말씀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