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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9)

본문

마르틴 루터(M. Luther)는 말하기를 “최고의 순교자는 주기도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만, 성도들 중에 아무런 뜻도 모르고 주문을 외우듯이 주기도문을 외우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는 최고의 순교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이 생각도 없이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또는 이방인처럼 잘못된 기도를 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주님께서는 바른 기도를 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대상을 부름에서 기도하는 마음을 하늘에까지 향상하고는 아버지와 대면하는 심경에서 기도의 본론으로 그 조목들을 진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교의 형식주의를 타파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 산상보훈에서 주님께서 또 새로운 기도의 형식을 보이신 것에 흥미로운 점을 발견합니다. 여기에 종교의 생활이란 형식과 불가분리의 것이며 형식이란 그 자체가 악이 아닐 뿐더러 오히려 필요한 것이며 또는 형식주의를 타파하신 것이지 형식 그 자체가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형식은 중심의 신앙으로 완성된 것이며 또
그러므로써 중심의 신앙을 돕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 했으니 기도의 제 1조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되게 즉 하나님의 이름이 유일의 예배의 대상이 되게 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 합 860명과 대결을 할 때에도 기도하여야 할 조목들이 많았고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위급한 처지를 해결하도록 기도해야 했으나 그의 기도의 요지는 하나님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 되게 하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왕상 18:37). 우리는 여기서 바른 기도를 봅니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의 이름에 대한 관념은 오늘날 우리의 이름에 대한 관념과는 좀 다릅니다. 우리는 그저 이름이라면 뜻이 좋고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좋으면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이름은 흔히 세 자로서 처음 자는 성으로 족보를 가리키고 다음 자는 대개 항렬에 따라 족보의 대수를 가리키기가 보통이며 마지막 한 자로 자기의 이름이 있기가 보편적입니다. 서양인들은 성을 마지막에 쓰는 것이 우리와 좀 다릅니다. 그리고 서양인은 자기 이름을 될 수 있는대로 기독교적 이름을 붙이려 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름을 지을 때 성격, 성질, 영향력, 생활력, 그 인생을 상징하는 이름을 붙이고 그 사람은 그 이름의 뜻대로 인생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령 이삭은 “웃는다”는 뜻입니다. 에서는 “팥죽처럼 붉은 사람,” 야곱은 “발 뒷꿈치를 잡는 사람,”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려 하는 사람,” 아브라함은 “만민의 아버지,” 여호수아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사람,” 모세는 “물에서 건진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옛날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그 사람의 성품과 인격과 생활 전체의 대표가 그 이름이었습니다. 여기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영원히 스스로 있는 자”입니다. 지존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누구에 의해서 존재함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의 신성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문은 십계명 중 제 3계명과 상통한다고 봅니다. 히브리인 사상에 이름이란 그 전체를 표시합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하게 나타내어 주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이름을 소중히 생각했습니다. 레 24:16에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면 그를 반드시 죽이리라”고 율법에 말씀했습니다. 본문 말씀에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시제가 수동태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여길 터이오니 하나님께서 받으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기도문이라기보다 서약문이라 하겠습니다. 이와 같이 기도는 소원의 청구인 동시에 서약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에서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히브리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서 일년에 한두 번만 부르고 히브리 대중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를 때는 입술로만 부르고 소리를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날 여호와란 이름을 잊어버리게끔 되어 히브리 글자에 여호와를 모음 붙임에 따라 “아도나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주여”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을 거룩할 때는 거룩한 붓을 따로 두었다가 그 붓으로만 여호와의 이름을 기록했으며 기입할 때는 정좌하여 기록했습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진의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의 형식적인 그것도 중요하지만 참뜻으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여겨 드려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자연 계시를 통해서, 특별 계시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보고 온 인류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에게 영광, 존귀, 권세, 찬양, 감사를 올려야 할 것입니다. 죄에 묻히고 무지에 묻힌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알려 주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을 믿되 바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세상의 우상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이 많습니다. 또 사람을 우상화시키는 사람도 많습니다. 또는 무신론자들도 있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전지전능하신 창조주입니다. 지혜 권능, 거룩, 공의, 인자, 진실하심이 불변한 하나님입니다. 이런 하나님을 바로 믿어야 합니다.
3. 우리가 참 성도로서 생활할 때 주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 습니다 고전 3:2에 “믿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모르는 분에게 그리스도를 대변하는 편지의 역할을 우리의 생활에서 나타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조심하고 성결하고 정직하고 부지런하고 교양과 희생 봉사가 있어야 하고 겸손히 화평하게 살 줄 알고 모든 면에 모범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말로써 하나님을 거룩히 하여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행동으로써 하나님을 거룩히 하여야 되겠습니다. 우리 성도는 생활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하나님을 일반 사회에 나타내야 합니다.
4. 우리는 무엇보다도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어 야 합니다 근래에 우리 한국 개신교 예배가 왕왕 장터같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성령의 은혜를 잘못 해석한 데서 기인합니다. 그 소란스럽고 불경건한 예배 의식은 시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예배와 성도의 교제에 관련이 없는 광고를 길게 하는 것, 기도나 찬송이 하나님 상대가 아니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 심지어 설교자까지도 때로는 희소적인 태도와 세상 언사로 나서는 것이며. 배우 역할을 하며 무당의 역할까지 하는 것, 다 하나님의 신성을 감소하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5. 우리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겠습니다 우리의 생활,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행동, 우리의 가정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외식의 기도가 아닙니다. 거룩이라는 말은 “항상 분리하여 내 중심에 모신다”는 뜻입니다. 즉 생활 가운데 모셔 들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구약의 교훈과 경고하에 “거룩함의 규례”를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면서 기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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