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한복판을 드려라 (롬15:4-6)
본문
세계사는 17-18세기 이후 가속도로 인간 자율의 길로 달리고 있습니다. 종교학에 있어서는 헤알트가 처음으로 종교적 인식에 대한 이성의 충분한 자격을 주장하였고, 도덕학에 있어서는 몽테뉴와 보댕이 계명 대신에 생명 법칙을 내세웠으며 정치학에 있어서는 마키야벨리가 정치를 일반 도덕에서부터 해방시키고 국가 이성의 교설을 수립하였으며 법학에 있어서는 그로티우스가 모든 국민의 법으로서 “만약 신이 없다고 해도 타당한 자연법”을 계시하였습니다. 또 철학에 있어서는 데카르트가 세계는 신의 개입 없이 스스로 운행되고 있는 장치라고 주장하고. 스피노자는 “신은 곧 자연”이라 역설한 이후 인간과 세계는 신의 계율이라는 타율에서 벗어나서 자율을 구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제는 다 컸기 때문에 후견인의 도움도 필요 없고 자기 문제는 자기 힘으로 처리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는 이토록 성숙한 시대와 성인이 된 사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의 도움이나 지시 없이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의 발달은 과거에 사람들이 신만이 지배하고 운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던 자연의 신비를 하나 둘 벗겨버려 인간의 지혜로도 능히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고 자신하게 되었으며 또 의학의 발달은 생명의 연장을 하나님께가 아니라 인간의 손에 의해 조정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점점 하나님의 영역은 인간들의 삶의 복판에서 밀려나기 시작한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를 불신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사실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그들 삶의 한복판이 아니라 맨 가장자리에서 조차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소위 종교인이라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떻습니까 그들의 삶의 한 복판에 하나님이 자리 잡고 계신가요 우리는 얼마만큼의 영역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들의 건강과 재물, 그리고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영역이 몇 평이나 되는 것입니까 입으로는 “주여 주여”하고 있는 성도들이 과연 삶의 한 복판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주님을 부르고 있는 것입니까 불신자의 삶이 하나님의 영역이 못되어서 안타까운 것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부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하나님의 영역이 축소되고 있다는 사실에 몸서리쳐지는 것입니다. 우리들 삶의 한복판에서 이기주의와 교만과 독선이 도사리고 있으며 자기 가족의 호사와 자신의 입신출세만이 도사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는 삶이라면 귀하고 값진 것들, 즉 자녀도 재산도 시간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다가 자기에게 요긴치 않을 때에만 하나님께 드릴 것이며 이것은 불신자보다 더 비열한 삶인 것입니다. 그러다가도 개인이나 가정에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 어려운 문제를 해결키 위하여 평소 때는 찾지 않던 무당을 찾아가듯 교회에 나아가 하나님께 울부짖으며 애걸하는 가짜 신자들을 우리들 주변에서 꽤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더 이상 삶의 한복판을 점령하시지 못하고 그 변두리만을 배회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어린 아이가 배가 부를 때는 엄마 생각을 하지 않다가 배가 고파야 엄마를 찾듯이 많은 교인들이 삶이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여겨질 때에는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삶의 절박한 상황에 부딪혔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성숙한 사회는 그러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를 유치하다고 생각해서 외면해 버릴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삶의 변두리에서 알아왔습니다. 예컨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질병과 고통, 죽음 등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자기 자신이 삶의 한복판에서 건강과 재능을 가지고 부귀와 영화 그리고 명예와 권세를 누릴 때에는 하나님의 설 자리를 제공치 않았던 것입니다. 어째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좋다”고 하시면서, 인간들에게 “자연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면서 창조해 주신 이 땅위의 것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다만 소수의 병약자들,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미성숙한 사람들만을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어째서 기독교는 불행한 사람들이 약한 때를 틈타서 그들을 소위 종교적으로 지배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왜 교회는 인간의 허약한 마음을 정복하고 달콤한 밀어와 축복을 빌고 있어야만 합니까 실존 철학이나 정신 심리 요법으로도 충분히 대치할 수 있는 일들이 교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까. 교회가 담당하는 일이 장례식과 결혼식인 줄 아는 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만 자기 편의대로 이용만 하고 살짝 교회를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왜 있습니다.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서는 자기 목적을 이루었을 때는 하나님을 미련없이 내동댕이치는 식의 교인들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충당되는 보충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체이시지 결코 객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한 구덩이를 그것도 그 인간이 다 자기 것으로 채운 후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구석이나 매워주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의 건강과 재물 그리고 자녀들 중 좋은 것을 자기가 다 차지하고 향유하다가 그것들이 망가졌을 때 비로소 고쳐 달라고 가져오는 사람을 위하여 항상 대기해 있는 심부름꾼으로서 하나님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신앙인이 아니라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장성한 사회 밖으로 밀려 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치 절간이 지리적으로 사회와 유리되어 있듯이 교회가 사회 사람들의 관심에서 얻어지는 날에는 교회도 역시 절간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아들을 달라는 식의 불공을 드리는 곳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도시 한 복판에서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신자들은 조용한 곳에서 고요히 자기 신앙 맥박만을 짚고 누워있는 병자와 같은 신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피를 다른 환자에게 수혈시키기를 자청하는 신자들이며 또 젖을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인이 아니라 자기의 빈약한 젖일망정 굶주리는 다른 어린이들을 먹이려는 훌륭한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째서 여러분들은 건강할 때 그 건강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있다가 그 건강을 해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가지고 오는 것입니까 왜 여러분들은 물질이 넉넉할 때 그 물질을 주님께 드리지 아니하다가 그 물질이 다 없어졌을 때 그것을 보상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습니까 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사지백체가 온전할 때 그것을 가지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쓰지 못하고 그것이 못쓰게 되었을 때 고쳐 달하고 기도하십니까 어째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훌륭한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있다가 그 자녀들이 나쁜 길로 들어섰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까 찌그러지고 못나고 쓸모없는 삶의 변두리 만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고 자기는 온전한 중심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는 성도들이 어찌 성도 이겠습니까 결코 우리 하나님은 변두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버린 것만을 주워 가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좌정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건강, 재물, 훌륭한 학문과 재능, 가문과 전통, 귀여운 자녀들 등 모든 것 위에 관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서 건강도 바치고 재물도 드리고 훌륭한 자녀들까지도 드리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강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강한 자의 책임은 연약한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강한 자인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기를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비방도 받고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역설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의 축복을 근본적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한 가지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미 축복을 받은 우리들의 삶을 그 중심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이 일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삶을 살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손을 벌려서는 않되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가지고 특별히 자기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쓸모 있는 삶의 한복판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하나님을 삶의 변두리에서 알아왔습니다. 예컨대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질병과 고통, 죽음 등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필요로 하고 자기 자신이 삶의 한복판에서 건강과 재능을 가지고 부귀와 영화 그리고 명예와 권세를 누릴 때에는 하나님의 설 자리를 제공치 않았던 것입니다. 어째서 기독교는 하나님이 “좋다”고 하시면서, 인간들에게 “자연을 정복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시면서 창조해 주신 이 땅위의 것의 대부분을 빼앗기고 다만 소수의 병약자들, 죽음의 공포에서 떨고 있는 미성숙한 사람들만을 점령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어째서 기독교는 불행한 사람들이 약한 때를 틈타서 그들을 소위 종교적으로 지배하여야 한다는 말입니까 왜 교회는 인간의 허약한 마음을 정복하고 달콤한 밀어와 축복을 빌고 있어야만 합니까 실존 철학이나 정신 심리 요법으로도 충분히 대치할 수 있는 일들이 교회의 중심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까. 교회가 담당하는 일이 장례식과 결혼식인 줄 아는 자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를 다만 자기 편의대로 이용만 하고 살짝 교회를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왜 있습니다.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팔고서는 자기 목적을 이루었을 때는 하나님을 미련없이 내동댕이치는 식의 교인들이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결코 하나님은 인간의 요구에 충당되는 보충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의 주체이시지 결코 객체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의 한 구덩이를 그것도 그 인간이 다 자기 것으로 채운 후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구석이나 매워주는 일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기의 건강과 재물 그리고 자녀들 중 좋은 것을 자기가 다 차지하고 향유하다가 그것들이 망가졌을 때 비로소 고쳐 달라고 가져오는 사람을 위하여 항상 대기해 있는 심부름꾼으로서 하나님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런 신앙인이 아니라 참된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장성한 사회 밖으로 밀려 나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마치 절간이 지리적으로 사회와 유리되어 있듯이 교회가 사회 사람들의 관심에서 얻어지는 날에는 교회도 역시 절간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결코 아들을 달라는 식의 불공을 드리는 곳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도시 한 복판에서 교회는 그 사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요구하는 신자들은 조용한 곳에서 고요히 자기 신앙 맥박만을 짚고 누워있는 병자와 같은 신자들이 아니라 자기의 피를 다른 환자에게 수혈시키기를 자청하는 신자들이며 또 젖을 달라고 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교인이 아니라 자기의 빈약한 젖일망정 굶주리는 다른 어린이들을 먹이려는 훌륭한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어째서 여러분들은 건강할 때 그 건강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있다가 그 건강을 해친 다음에야 비로소 하나님께 가지고 오는 것입니까 왜 여러분들은 물질이 넉넉할 때 그 물질을 주님께 드리지 아니하다가 그 물질이 다 없어졌을 때 그것을 보상해 달라고 하나님께 울부짖습니까 왜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사지백체가 온전할 때 그것을 가지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데 쓰지 못하고 그것이 못쓰게 되었을 때 고쳐 달하고 기도하십니까 어째서 여러분들은 여러분의 훌륭한 자녀들을 하나님께 바치지 않고 있다가 그 자녀들이 나쁜 길로 들어섰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찾습니까 찌그러지고 못나고 쓸모없는 삶의 변두리 만을 하나님의 것으로 돌리고 자기는 온전한 중심 부분만을 차지하고 있는 성도들이 어찌 성도 이겠습니까 결코 우리 하나님은 변두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들이 버린 것만을 주워 가지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한복판에 좌정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건강, 재물, 훌륭한 학문과 재능, 가문과 전통, 귀여운 자녀들 등 모든 것 위에 관림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위하고 이웃을 위하여서 건강도 바치고 재물도 드리고 훌륭한 자녀들까지도 드리는 그러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기독교인들을 강한 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강한 자의 책임은 연약한 약점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강한 자인 그리스도인은 결코 자기를 기쁘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이웃을 기쁘게 하고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같이 비방도 받고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바울은 역설하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을 가진 자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생의 축복을 근본적으로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들에게는 한 가지 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미 축복을 받은 우리들의 삶을 그 중심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생활이 일어야 할 것입니다. 더 이상 자기 삶을 살지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손을 벌려서는 않되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가지고 특별히 자기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쓸모 있는 삶의 한복판을 그대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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