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닷의 진술에 대한 욥의 대답 (욥9:1-35)
본문
본 장에서는 욥의 인생관과 그의 신관이 고백되어 있습니다.
1. 욥의 인생관(1-3절) 2절에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의 인생관은 인생은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은 욥의 인생관만이 아니라 전 기독교의 인생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내산과 갈보리산이 있는데 이것은 율법과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은 인간은 죄인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갈보리산은 우리에게 죄인임을 알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해결해 주십니다. 갈보리산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으로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2. 욥의 신관(4-11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무한합니다. 우주를 보십시오. 별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저 놀랄 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강팍한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을 대항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도 하나님을 거역하다 망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대항하러 다메섹까지 갔다가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사울을 향하여 부르실 때 그는 예수님께 항복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욥 9:5에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욥 9:6-10에 하나님께서는 땅도 태양도 지배하십니다. 욥 9:11절에서 욥이 하나님을 인격적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살아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발견한 것입니다.
(1)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에게 말씀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2)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인간들에게 오셨습니다.
(3)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임재하십니다.
3. 욥의 진술(12-35절)
(1) 나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구나(12-20절)로 고백했습니다. 욥은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계속 싸울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말했었는데 그는 여기에서 그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롭겠느냐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느냐” (4:17절)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시했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파악할 수도 없고 반대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12절에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와 같은 욥의 진술은 욥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일반화된 대중들의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분간하시지 못하는 것 같다(21-24절)고 고백 했습니다. 12-20절까지는 재판장인 하나님께 대한 욥의 항변입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도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셈입니다. 21절에서 이제 욥의 관심사는 달라집니다. 이제는 그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이나 그 운명의 결국에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22-24절). 이것은 단순히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둘 다 결국에는 죽고 만다는 정도의 항의가 아닙니다. 옳음과 그름 사이에 왜 정당한 심판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욥은 항의한 것입니다. 욥은 계속 항의합니다. “세상이 악한 자의 손 안에 들어 있고 재판관의 재판이 정의를 짓밟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렇게 되게 한 이가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냐”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과장된 말을 하였지만 욥 자신도 과장된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는 그의 항의에서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심각성을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욥에게서 우리는 솔직한 신앙을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당한 대답을 하실 때까지, 악의 세력이 무디어질 때까지 욥의 질문은 쉬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3) 나와 하나님 사이에 판결할 자가 없구나(25-35절)라고 고백 했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욥의 문제가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욥의 마지막이 성큼 다가 섰습니다. 욥은 자기 문제를 잊을 수도, 과소평가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의 순결을 입증할 수 있는 절망 뿐입니다. 눈 녹은 물과 양잿물로 씻은들 자기를 정죄한 그 하나님이 그것을 알아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2절은 흔히 신약 성서의 진리를 앞질러 예비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사실 욥은 자기 문제를 정확하게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해결책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욥은 자기가 고난 당하는 날들이 길어지자 하나님께서 속히 나타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원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욥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았던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고난을 종식시키고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도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며 아울러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1. 욥의 인생관(1-3절) 2절에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의 인생관은 인생은 철저하게 죄인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 죄인이라는 것은 욥의 인생관만이 아니라 전 기독교의 인생관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인생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시내산과 갈보리산이 있는데 이것은 율법과 십자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시내산은 인간은 죄인임을 알게 해 주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예수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갈보리산은 우리에게 죄인임을 알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 죄를 해결해 주십니다. 갈보리산은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으로서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신 것입니다.
2. 욥의 신관(4-11절)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은 무한합니다. 우주를 보십시오. 별들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창조능력은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는 그저 놀랄 뿐입니다. 이스라엘에게 강팍한 애굽 왕 바로는 하나님을 대항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바벨론도 하나님을 거역하다 망했습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대항하러 다메섹까지 갔다가 예수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사울을 향하여 부르실 때 그는 예수님께 항복하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욥 9:5에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여”라고 했습니다. 욥 9:6-10에 하나님께서는 땅도 태양도 지배하십니다. 욥 9:11절에서 욥이 하나님을 인격적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살아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발견한 것입니다.
(1) 구약시대에는 선지자들에게 말씀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2) 신약시대에는 예수님께서 성육신하셔서 인간들에게 오셨습니다.
(3)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는 성령께서 우리 마음 속에 임재하십니다.
3. 욥의 진술(12-35절)
(1) 나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구나(12-20절)로 고백했습니다. 욥은 인간에게는 하나님과 계속 싸울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에 대해 말했었는데 그는 여기에서 그것을 그 자신에게 적용시키고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롭겠느냐 하시겠으며 전능하신 이가 어찌 공의를 굽게 하시겠느냐” (4:17절)고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욥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표시했습니다. 인간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자기를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욥은 계속해서 인간은 하나님을 파악할 수도 없고 반대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12절에 “하나님이 빼앗으시면 누가 막을 수 있으며 무엇을 하시나이까 누가 물을 수 있으랴”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은 이와 같은 욥의 진술은 욥 자신의 것이 아니라 일반화된 대중들의 견해를 표명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욥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간구하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공의로운 심판을 받기 원했던 것입니다.
(2) 하나님께서 옳고 그름을 분간하시지 못하는 것 같다(21-24절)고 고백 했습니다. 12-20절까지는 재판장인 하나님께 대한 욥의 항변입니다. 이제 욥은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는 철두철미하게도 하나님의 신성을 모독하고 있는 셈입니다. 21절에서 이제 욥의 관심사는 달라집니다. 이제는 그에게 세상 돌아가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올바른 사람이나 악한이나 그 운명의 결국에는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22-24절). 이것은 단순히 선한 자나 악한 자나 둘 다 결국에는 죽고 만다는 정도의 항의가 아닙니다. 옳음과 그름 사이에 왜 정당한 심판이 없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점을 욥은 항의한 것입니다. 욥은 계속 항의합니다. “세상이 악한 자의 손 안에 들어 있고 재판관의 재판이 정의를 짓밟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그렇게 되게 한 이가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냐”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도 과장된 말을 하였지만 욥 자신도 과장된 행위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경우는 그의 항의에서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심각성을 표출되고 있는 것입니다. 욥에게서 우리는 솔직한 신앙을 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타당한 대답을 하실 때까지, 악의 세력이 무디어질 때까지 욥의 질문은 쉬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3) 나와 하나님 사이에 판결할 자가 없구나(25-35절)라고 고백 했습니다. 세월은 유수와 같아 욥의 문제가 아무런 해결도 보지 못한 채 어느덧 욥의 마지막이 성큼 다가 섰습니다. 욥은 자기 문제를 잊을 수도, 과소평가 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의 순결을 입증할 수 있는 절망 뿐입니다. 눈 녹은 물과 양잿물로 씻은들 자기를 정죄한 그 하나님이 그것을 알아줄 리 만무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2절은 흔히 신약 성서의 진리를 앞질러 예비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사실 욥은 자기 문제를 정확하게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해결책이 하나님에 의해 주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이제 욥은 자기가 고난 당하는 날들이 길어지자 하나님께서 속히 나타나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시기 원했습니다. 이를 위하여 욥은 하나님을 갈망하며 찾았던 것입니다. 이런 자세가 바로 고난을 종식시키고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도 문제에 직면하게 될 때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며 아울러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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