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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의 밤에 본 비전2 (겔2:1)

본문

오늘 우리는 말씀의 권위가 부재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사실이 당신의 마음 속에 어떤 설레임을 줍니까 교회에 나갈 때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어떤 말씀을 하실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가십니까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또 창조한 만물을 섭리하시는 섭리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가장 영광스러운 특권이 며 또 두려운 일이고, 거룩한 일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1. 서론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에스겔이 하나님으로부터 말씀을 받는 그 상황을 바 라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말씀을 받아야 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 하실 때 우리는 어떤 심정으로, 어떤 자세로 이 말씀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 한 명쾌한 대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그가 내게 이르시되. .
하나님이 이제 에스겔에게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1장의 마지막 부분인 1장 28절에서 주님 앞에 서게 된 에스겔은 먼저 하나님의 영광의 이상(異象)을 목격했습니다. 앞 장에서 그는 보좌에 앉으신 만유를 통치하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숨어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 속에 살아 계셔서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나님, 보좌에 앉으시사 만유를 통치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 을 목격했습니다. 그 영광을 목격했을 때 에스겔은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 까 1장 28절을 보십시오.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
주의 영광의 비전을 목격하자, 그 하나님의 놀라우심과 그 위대하심 앞에 서는 그 순간 에스겔은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엎드렸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에게 이 엎드림은 예배의 가장 적절한 태도입니다. 에스겔은 거룩한 하나님의 영광, 창조주의 영광 앞에 서자마자 엎드렸습니다. 정말 당신이 그 하나님의 위대하신 임재 앞에, 만유를 창조하신 그 하나님 앞에 선다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평소에 존경하던 어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우리 마음 속에는 어떤 설레임과 두려움과 조심 스러움이 있습니다. 인간끼리도 그러한데 하물며 주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오죽하겠습니까 만유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리고 만물을 섭리하 시는 그 하나님 앞에 우리가 선다는 사실은 얼마나 엄숙하고도 두려운 일입 니까 에스겔은 이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자마자 즉각적으로 그분 앞에 엎 드립니다.
그분이 제일성(第一聲)은 무엇입니까 2장 1절을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은 엎드려 있는 에스겔에게 일어나 자신의 말씀을 받도록 요구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의 말씀이 들려오면 일어서서 그 말씀을 받았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한번은 달라스의 제일침례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성경이 봉독되는 순간에 온 성도들이 일어나서 그 말씀을 받고 말씀이 끝나 면 아멘으로 우렁차게 대답하고는 앉았습니다. 참 아름답고 그렇게 인 상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성경적 습관입니다.
느헤미야서 8장 5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학사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저희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 께 경배하였느니라(5,6절).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폈을 때 모든 백성이 일어섰다고 말합니다. 여기 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던 히브리 백성들의 자세를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배를 시작할 때는 몸을 굽히고 땅에 얼굴을 대고 하나님을 경배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순간에는 일어나서 이 말씀 앞에 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얼마나 진지하게 그리고 얼마나 간절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사모하면서 말씀을 받는가 하는 것을 생생하게 볼 수 있는 장면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받을 때 일어서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허하게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 말씀을 실행하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받고 나는 뛸 것입니다. 이 말씀대로 살 것입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삶의 장(場)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일어서서 받았던 것입니다.
2. 본문 연구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에스겔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1절)는 말씀을 받을 때 에스겔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첫째, 하나님의 영광의 비전을 목격했습니다. 보좌에 앉으신 주님의 영광 을 목격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만유를 통치하시는 그 하나님의 영광 을 접하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 하나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렇게 엎드리자마자 주님의 말씀이 들 려옵니다. 말씀이 들려왔을 때 그는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셋째, 일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이제 본문 2절을 보십시오.
말씀하실 때에 그 신(神)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동시에 또 누구의 역사가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 이 펼쳐지고 이 말씀이 전달되는 순간, 동시에 성령이 임재하셨습니다. 이는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전달되고 그리고 그 말씀 과 함께 성령이 임재하셔서 말씀을 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고 그 말씀을 깨우쳐 주십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그곳에 성령님의 임 재가 함께하십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이제 3절과 4절을 보십시오.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 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3절).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패역한 백성 가운데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불순종하는 백성 가운데로 보내시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가 되게 하 셔서 그 백성들 사이에 새로운 역사를 가져올 수 있도록 그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어서 4절을 보십시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 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다는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단순 히 설교를 듣는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받고 나아가야 합니다.
주께서 보내시는 일터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가 되고 또 하나님의 말씀의 성육화(成肉化)된 존재로서 그 말씀을 살아가는 사람이 되 기 위하여 주께서 나를 보내시는 그 삶의 정황 속으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사람마다 보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동시에 듣습니다.
에스겔서 2장의 상황은 이사야서 6장의 상황과 아주 비슷합니다. 이사야서 6장 1절을 보십시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 안에 들어가서 무엇을 봅니까 주님 의 영광의 이상(異象)을 봅니다. 거룩하신 주님을 목격했습니다. 그 주님 앞에서 자기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고 성령의 역사로서 그의 입술이 새로워 짐을 경험하자,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
이사야가 대답합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8절).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는 사람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마다 항상 삶의 장으로 보내시는 음성을 동시에 듣습니다. `내가 이 말씀을 가지 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는다면, 나는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접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참으로 말씀을 받은 사람이라 면, 동시에 이 말씀을 통해서 당신을 보내신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접촉하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내 일터 가운데로 나를 떠미시고 나를 보내시는 주님의 음성을 동시에 접하십니까 에스겔이 말씀을 받던 영광스러운 상황을 본문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명받는 에스겔 하나님께서 이제 파송을 받는 에스겔이 각오해야 할 사역자로서의 책임 세 가지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로, 말씀을 그대로 전하라.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들은 때로 자기의 생각으로 말씀을 채색하고 싶은 유 혹을 받습니다. 우리는 내가 하나님을 도와야만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영광 스럽게 될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의 주장이나 우리의 철학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월한 것처럼 강조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물론 말씀을 설명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지식이 필요 하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말씀을 받는 모든 성도들에게 또 이 말씀을 갖고 사역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을 말씀 그대로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정신 그대로 내 이웃들에게 전달되고 있는지, 말씀을 전하는 통로 인 나로 인해서 혹시 왜곡되고 있지는 않는지 항상 주의해야 합니다.
본문 4절을 보십시오.
이 자손은 얼굴이 뻔뻔하고 마음이 강퍅한 자니라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 내노니 너는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
주께서 에스겔에게 말씀하신 그대로를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 십시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자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너는 내 말로 고할지어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말로 고하라. 네 말이 아니라 나의 말로 고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전해야 할 말씀을 그대로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인상적인 환상 하나를 보여주십니다.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보니 한 손이 나를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 두루마리 책이 있더라.
에스겔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손 하나가 등장합니다. 그 한 손이 에스겔을 향하여 펴지고, 그 손에는 두루마리 책이 있습니다. 3장 1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 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받는 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네가 먼저 이 말씀을 취하고 그 다음에 이 말씀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내가 너에게 전달하는 이 말씀을 그대로 받은 다음에 이 말씀을 취하고 취한 그 말씀을, 네가 경험한 그 말씀을, 네가 체험한 그 말씀을 이웃들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루마리에는 글이 어디에 씌어 있습니까 그가 그것을 내 앞에 펴시니 그 안팎에 글이 있는데. (10절).
보통의 두루마리는 글이 한쪽에만 씌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날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 나타난 이 두루마리는 안팎으로 글이 있었습니다. 겉과 속이 모두 말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첨가될 수 없는 말씀 의 충족성을 계시하기 위한 비전이라고 생각됩니다. 네가 첨가할 것은 없다. 이미 넉넉한 이 말씀 그대로 전하라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탤 것 이 없습니다. 이 말씀 안에 모든 열쇠가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 안에 넉넉 한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전하라는 강력한 계시인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 말씀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 를 동원합니다. 사람의 논리와 사람의 잔꾀를 동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망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우리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보면서 이런 짓궂은 생각을 해봅니다.
`야! 그림 참 멋있다.
그런데 여기에다가 내가 조금만 덧붙이면 더 멋있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서 당신이 그 그림에 선이나 색을 좀더 덧붙인다고 해 봅시다. 그렇 게 하면 그림이 더 아름다워집니까 천만에요. 오히려 그림을 망치는 결과 를 초래합니다. 당신이 덧붙인 선이나 색은 그 그림에 하나도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저도 설교자로서 이따금 유혹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저도 말씀에 덧칠하 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해 보았자입니다. 어떤 때는 성경만 읽 고 설교단상에서 내려오고 싶은 충동이 듭니다. 말씀 그 자체가 얼마나 좋 습니까 말씀 그 자체가 능력과 영광과 위대함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이 말씀을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말씀에 대한 설명은 가능하지 만, 그 설명은 말씀의 정신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것 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왜곡하려는 유혹처럼 무서운 유혹이 없습니다.
내 말을 고하라. 있는 그대로 말씀을 전하라.
말씀을 그대로 전하라는 것이 소명을 받는 에스겔에게 요구하시는 주님의 첫번째 요구 사항입니다.
둘째로,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책임을 다하라.
이 말씀이 전해진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 결과를 너무 의식하지 말고 말씀을 전하는 책임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본문 5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들 가운데 선지자 있은 줄 은 알지니라.
듣든지 아니 듣든지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 패역한 무리들이 이 말씀을 거 절할 것도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스겔을 그들 가운데로 보내십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그것은 그들 자신이 내 앞에서 책임져야 할 사실 이다. 적어도 너는 내가 주는 말씀을 전하는 책임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과를 의식하기보다는 그를 보내신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말씀을 전하는 책임 앞에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역을 결과에 의해서 평가하려는 유혹을 많이 받습니다.
전도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전도에 대한 결과를 의식하 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이거 뭐 결과도 없는데. 괜히 고생만 하고. .' 별의별 생각이 다 듭니다. 그러나 전도를 하는 중요한 이유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물론 결과가 있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또 결과가 있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전도를 하는 중요한 이 유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전도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전도하는 것입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이 말씀을 전하기를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전도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은 결과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에스겔도 인간인데 어떻게 그 결과를 의식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제 가 말씀을 전한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라는 의문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는 자신에게 맡기라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네 책임을 다하라라는 것이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1절 이하를 보시면, 모든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주께서 비슷한 사실을 요구하시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1절).
우리를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을 증거하는 사람으로, 일꾼으로 세워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다음 계속되는 구절에서 이 신비로운 말씀을 전할 책임을 맡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하는 것은 두번째, 세번째 문제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 적어도 저는 충성을 다했습니다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지막날 심판대 앞에서 이웃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이런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저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결과를 의식하기보다는 책임을 다하는 것, 이것이 주님이 에스겔에게 요구 하는 것입니다. 너무 결과를 의식하다 보면 실망이 커집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그 결과가 무엇이란 말인가 대가가 무엇이란 말 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실용주의적인 시대입니다. 모든 것을 이익과 그 결과에 따라 판단합니다. 이 시대적인 영향을 받은 나머지 우리의 신앙 생활도 자꾸 결과를 따지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수요일 저녁에 교회에 나오는 것은 수지가 맞는 일인가 이 한 시간이 혹 시 낭비는 아닌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 앞에 찬미와 사랑을 드리는 이 시간이 무슨 손해란 말입니까 결과를 너무 의식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지경에 빠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십니까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나가서 복음을 전하십니까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이웃들을 섬기십니까 주님 앞에서 책임을 다하는 것, 그 자체가 소중하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로, 고난을 각오하라.
우리가 항상 좋은 멧세지만 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따금 교인 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설교를 하게 되면 꼭 와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목사님! 그런 말씀을 꼭 하셔야 했습니까 물론 어떤 경우에는 설교자들이 의도적으로 어떤 사람을 공격하기 위한 불 순한 동기에서 설교하려는 유혹도 없지 않아 있을 수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전혀 그런 의도가 없었는데도 교인들이 오해하는 경향도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어떤 태도로 말씀을 접하느냐 하는 것이 중 요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멧세지를 전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사람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어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멧세 지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그 멧세지를 있는 그대로 전할 따름입니다.
시대에 따라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어떤 멧세지를 더욱 강조하 도록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부흥의 시대에 하나님은 구원의 멧세지를 많이 강조하십니다. 그러나 핍박의 시대에 하나님은 때때로 심판의 멧세지를 강 조하십니다. 말씀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일꾼들에게는 말씀을 선택할 권 리가 없습니다. 주신 대로 증거할 따름입니다.
에스겔의 경우에는 특별히 심판의 멧세지를 백성들에게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십니다. 본문 2장 10절을 보면, 두루마리 안팎에 써 있는 멧세지 의 내용이 주로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애가(哀歌)와 애곡과 재앙의 말이 기록되었더라.
애가와 애곡과 재앙,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그 시대의 백성들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마지막 심판, 마지막 재앙의 심판의 멧세지를 전하도록, 경 고의 멧세지를 전하도록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런 멧세지를 전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좋은 소식만 전하 고 싶을 것입니다. 그런 심판의 멧세지를 전하는 것이 싫어서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한 선지자도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그 선지나는 바로 요나 입니다. 그러나 설교자에게는 멧세지에 대한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주께서 주신 대로 말씀을 전할 따름입니다.
이제 본문 2절 이하를 보십시오.
말씀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자 손 곧 패역한 백성 나를 배반하는 자에게 보내노라. (2,3절).
이 말씀을 보면,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죄악 가운데에 빠져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6절을 보십시오.
인자야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 그 들을 두려워 말고 그 말을 두려워 말지어다 그들은 패역한 족속이라도 그 말을 두려워 말며 그 얼굴을 무서워 말지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 에스겔이 겪어야 하는 그 고통과 어려움에 관해서 미리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준비시 키기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비록 가시와 찔레와 함께 처하며.
가시와 찔레 속에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찔립니다. 뿐만 아니라 전갈 가운데 거할지라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전갈은 쏘는 것입니다. 이 찔레와 가시가 수동적인 박해의 이미지라면, 전갈은 아마도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 받게 될 직접적인 박해와 고난의 이미지일 것입니다. 주님은 아셨습니다.
이 패역한 백성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경고의 멧세지를 던질 때,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는 종을 더욱 어려움 속에 처하게 하리라는 것 을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 종을 강하고 담대하게 준비시켜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고난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보내실 때에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16절).
오늘처럼 고난이 없는 시대에는 이 고난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복음을 전하던 옛 전도자의 심정을 이해하려면 실제로 나가서 전도를 해보십시오. 길에서, 문에서 냉대와 박대를 받아 보시고 별것 아닌 인간에게 쩔쩔매는 일도 한번 당해보십시오. 그래야 처음 제자들이 이 말씀 을 붙들고 나가서 말씀을 전할 때의 심정과 그들을 보내시던 주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박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박해를 견디도록 도우시는 우리 주 님의 말할 수 없는 위로도 있습니다. 전도할 때에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가 장 깨끗하고 아름답게 순화됩니다. 성화됩니다.
하나님이 소명받는 에스겔에게 하신 세번째 요구 사항은 고난을 각오하 라는 것입니다.
3. 결론
주께서는 에스겔을 선지자로서 그 백성 가운데 보내시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이 말씀을 거절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너를 보내어 이 말씀을 증거했다는 사실 앞에서 그들은 핑계할 수 없을 것이다.
2장 1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人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을 부르실 때 인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셨습니다. 왜 이 호칭을 사용하셨을까요 이 단어를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우리 예수님을 가리켜 인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눅 19:10).
이 복음서에 나타난 인자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구약에 나타난 인자의 뜻 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자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벤아담'이라고 합니다. '벤'이란 아 들을 뜻합니다. '벤야민'(베냐민)이라 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야 민'이란 오른손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벤야민'이란 오른손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아주 권위가 있는, 능력이 있는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벤'이라는 말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아담 '이라는 말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벤아담'이라고 하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담'이라는 말은 흙이라는 뜻도 됩니다. 즉, '벤아담'은 흙의 아들, 사람의 아들입니다. 다 시 말하면 이것은 신(神)과 구별되는 존재로서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제 한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인간을 영광스럽고 아름답게 지으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으로 지으신 것은 아닙니다. 여 전히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사람일 뿐 하나님을 닮은 신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 '아담'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연약함과 제한성을 가진 피조물로서 의 인간을 가리킬 때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에스겔을 '벤아담 '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가 연약함과 제한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그 에게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인자야 내가 네 연약함을 안다.
그가 지금 바야흐로 하나님의 손에 붙들림을 받아 쓰임을 받을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에스겔이 여전히 '벤아담'인 것을, 인자라는 사 실을 아십니다. 그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다시 말하면, 이것은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 에스겔을 통하여 하나님이 놀라 운 일을 하시고자 하는 아름다운 부르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스겔서에 이 인자라는 낱말이 무려 93회나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에 스겔서 연구에 인자라는 단어는 굉장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연약한 사람에게 쓰여지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제 신약성경을 보면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일컬어 이 표현을 쓰신다는 사실입니다.
인자의 온 것은.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예수님은 본래 누구이십니까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 연약하고 제한된 누추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신 이유 를 암시할 때, 제한성을 가진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신 그분의 모습 을 나타낼 때 바로 인자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다니요 이것은 하나님 자신의 낮추심입니다. 어떤 사람은 인자라는 단어 속에서 그리스도의 겸손한 자세를 엿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저자세,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셔서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찾 아오셨습니다. 우리와 동일시되기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를 죄 가운데서 끄집어내시기 위해서 그분이 친히 인간이 되시사 우리 가운 데 찾아오신 것입니다.
인자야.
이 말은 바로 이런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 연약한 인간, 에스겔에게 엄청난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두려운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난제를 맡기셨습니다. 기쁨의 소식이 아니라 심판의 멧세지 를 외쳐야 하는 어렵고도 어려운 과제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에스겔은 이 말씀에 어떻게 응답했을까요 그가 전해야 할 멧세지의 내용은 애가와 애곡과 재앙입니다. 슬픔과 눈물 과 고통의 멧세지였습니다. 이 멧세지를 전하는 그 자체가 고통입니다. 내 백성이 망한다는 소식을 내 입으로 전해야 하는 그 아픔, 이것은 얼마나 커 다란 아픔이겠습니까 이것이 예언자의 큰 슬픔입니다.
이제, 3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받는 것을 먹으라 너는 이 두루마리 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고하라 하시기로 내가 입을 벌리니 그가 그 두루마리를 내게 먹이시며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 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1-3절).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입니까 주께서는 받아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손이 나타나고 두루마리가 펼쳐지고 그리고 말씀이 주어집니다. 그 말씀을 에스 겔이 받아 먹습니다. 그것도 그냥 먹는 것이 아니라 그의 창자에 깊이 채우 라고 말씀하십니다. 심판의 말씀, 재앙의 말씀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심판의 말씀이었습니다. 재앙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삼킨 결과는 꿀같이 달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순종의 즐거움의 표현입니다. 에스겔은 주의 말씀을 순종하여 이 심 판과 재앙의 멧세지를 전달하기로 각오하면서 이 말씀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랬을 때,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커다란 즐거움이 그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둘째, 사역의 보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고통의 멧세지를 전해 야 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쓰시는 하나님, 나를 사용하시는 하나님,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 주신 것에 대 한 감격과 기쁨이 그 마음 속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입니다.
이처럼 핍박의 시대에도 사명의 길을 걸어간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처럼 부흥의 시대, 순경의 시대 속에서 순종하지 못하는 우리 자신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변명하겠습니까 역경의 시대에도 자신에게 주 어질 앞으로의 고난을 각오하면서 그 말씀을 꿀처럼 받아 즐거움으로 그 길 을 가기로 작정했던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이 있었는데, 오늘처럼 마음대로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이 좋은 상황 속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명령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을 수 있습니까 오늘도 우리 하나님은 침묵하시지 않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악한 시대에 사는 우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 수 있습니다. 성경을 펼칠 때마다,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세우신 종들을 통해서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은 내게 말씀하십니다. 이 놀라우신 주님 의 음성을 듣고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그 기쁨과 감격을 아시는지요 주여, 제가 이 말씀을 더욱 가까이하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으로 이 말씀 을 받게 하시고 이 말씀을 순종함으로 살아가는 삶을 제게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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