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5:25-34)
본문
세계 제2차대전이 끝난 후에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을 묘사하는 말 가운데 우리가 자주 듣게 되는 두 단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절망'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소외'라는 단어입니다. 절망과 소외-그것은 주로 실존주의 철학자들이나 작가들을 통해서 현대인을 묘사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로 많이 씌어졌습니다. 절망과 소외. 전쟁후에 폐허를 디디고 현대인들은 다시 문화를 복구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좀 더 잘 사는 세계가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의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내가 왜 사는지도 모르고 또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또 내일에 대한 어떤 구체적인 희망을 갖지 못합니다. 이것이 절망하고 있는 현대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절망도 비극이지만 더 커다란 비극은 이런 세상에 살면서 나하고는 통할 사람이 없어요.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벽을 경험합니다. 통할 수 있는 인간을 느끼지 못합니다. 갑자기 어저께 제 마누라가 저보고 당신하고 나하고는 잘 통하지가 않아요.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지금 이틀동안 지금까지 혼돈이 계속되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이 설교를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나도 그런 느낌이 있는데 그래서 이유가 뭐냐 그랬더니 이유도 없대요. 그래서 제가 "그것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다." 그랬습니다. 실존적인 고독,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러한 고독을 현대인들은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실 그것이 현대인들 만의 문제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여호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지 못할 때, 창조주의 품에서 살지 못할 때 혹은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나 교제가 흔들릴 때 끊임없이 삶의 장에서 경험해야 하는 삶의 고통-그것은 절망과 소외라고 생각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절망속에, 소외속에 살던 한 여인의 모습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자 우선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절망의 원인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되고 있습니까 이 여자에게 병이 있었지요 자, 본문에 보면 이 여인이 앓고 있었던 병이 무슨 병이 었습니까 혈루증이다 그랬습니다. 피를 쏟는 병, 하혈하는 병입니다. 그러나 이 하혈은 단순한 생리적인 사건이 아니고요, 우리가 특별히 이런 문제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레위기 15장을 집에서 연구해 보십시오. 이 레위기 15장에서는 이 병을 유출병이라 그랬습니다. 특별히 정상적인 생리적인 출혈말고 그 밖의 이유로 출혈하고 있었던 병, 우리가 레위기 15장을 연구해 보면 주로 이런 병들은 성병으로 말미암은 임질같은 그런 질병 때문에 하혈을 하게 되는 그런 케이스가 아니겠는가 라는 이런 추측이 가능합니다. 어쨌든 그 시대로 보아서 난치의 질병을 앓고 있었던 여인의 모습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병을 앓아도 고쳐질 희망이 있다 생각하면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에는 고칠 희망이 없습니다. 여기 이 여인의 절망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본문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26절을 같이 읽어보겠어요.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자, 이런 병을 얼마동안 앓았습니까 12년-25절에 보시면 '열 두해를' 열 둘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만수입니다. 아주 긴 세월을 말할 때 '열 둘', '사십' 이런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12년이나 앓았어요. 희망없이 앓아왔습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받쳤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양의, 한의, 차병원, 경희대학 한방병원, 민간의학 뭐 이런 노력들을 다 받쳐 보았지만 희망이 없었어요. 여기 이 여인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제는 죽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이 여인이 처하고 있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이라는 고통보다 더 커다란 고통은 이 여인이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 이런 혈루증, 소위 출혈병을 앓게 되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종종 이런 사람들은 부끄러운 병이다라고 해서 그 당시 시대의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무지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성 바깥으로 쫓겨나 성 바깥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됐고,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이런 여인과 이혼해도 무방한, 합법화 되었던 그런 시대속에서 이 여인은 철저한 외로움, 아무도 받아줄 수 없는 사회가 버린 사람, 사랑하는 남편도 버리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외면한 이런 철저한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여기 이 여인이 경험하고 있었던 절망보다도 더 커다란 고통, 소외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외경에 보면,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 바깥의 문서들을 모아놓은 외경에 보면, 혹은 교회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이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서 오르실 때 넘어지시고 다시 일어나시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시면서 가실 때 그 얼굴의 땀방울이 핏방을이 되어떨어지고 있었을 때 이 예수님을 조롱과 모욕에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무리들 가운데서 뛰쳐나와 자기 손수건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마에 땅방울을 씻어 주었던 여인, 그랬더니 뜻밖에 그 손수건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여인-베로니카, 이 여인의 이름은 아마도 베로니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이 절망과 소외속에 있었던 이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치료를 받습니다.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자, 이 여인이 치유를 경험했던 전기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치유의 계기-두 가지 결정적인 사실이 이 여인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치료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 이 사건을 본문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본문의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기 매우 중요한 동사가 두 가지가 나옵니다. 자 어떤 단어가 나옵니까 '듣고'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나옵니까 동사 '손을 댔다' touch했다. '듣고 손을 댔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인에게 치료를 가져온 전기가 된 것입니다. 듣고 만졌습니다. 듣고 손을 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치료를 경험합니다.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그러한 사건을 보도하는 대목마다 이 두 가지 단어가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듣고'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믿고'라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시는, 여러분들이 대부분이 잘 아시는, 그러나 어떤 분은 아직도 모르실 요한복음 5장24절 같은 말씀에 보시면 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뭐라 그랬어요) 듣고(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뭐예요) 믿는자는 (자, 듣고 믿는 자는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자, 두 가지 때문에 '듣고 믿었기 때문에' 자, 이 위대한 역사는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인이 뭘 들었습니까 본문의 27절에 보시면 뭘 들었지요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이것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는 전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는 자마다 삶이 바뀔 것입니다. 운명이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뀔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 왜 그래요 여러분, 예수가 복음입니다. 예수가 구원이십니다. 예수가 소망이십니다. 예수가 생명이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가 구원이라는 사실이예요. 예수의 소문을 들었어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지만 이 여인은 병을 고칠 길이 없었습니다.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을 들었어요. 예수가 오신다. 우리 마을을 지나가신다. 예수! 눈이 번쩍 뜨였어요. 예수라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에게 치유를 제공하고, 사람들의 운명과 인생을 바꾸고 계시는 갈릴리 사람, 나사렛 사람, 저 예수! 예수가 오신다.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잎새같은 최후의 희망, 이 여인이 걸 수 있었던 마지막 희망,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갔어요. 그리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들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지금도 예수의 소문은 복음인줄 믿으십니까 믿음은 어디에서 나와요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 예수가 오신다. 내가 그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복음인 줄 믿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 랍비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보편적으로 거리를 다닐 때 옷을 하나 더 입었어요. 겉옷을 입었어요. 그리고 겉옷은 직각처럼 떨어집니다. 귀퉁이에 딱딱하게 된 곳에 수를 달게 되어 있어요. 청색실 끈이 매달립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밀리고 밀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 사람들을 비집고 비집고 들어가서 가까스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가만히 만졌을 것입니다. touch했습니다. 손을 댔습니다. 만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은 이 여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보도합니다. 31절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31절 읽겠습니다. 시작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들이 어떠했습니까 에워싸 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여전히 수퍼스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무리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지나가다가 예수님을 밀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댔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만짐. 전혀 다른 종류의 touch. 이 만짐을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다르게 만진거예요. 이여인은. 어떤 의미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만짐이었습니다. 믿음의 만짐. 어떤 믿음이었어요
자, 28절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의 28절. 다같이 시작.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이러라" 그 예수.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일 수 있는 예수. 나는 저 예수에게 기대를 한다. 그 예수님이 내 삶을 바꿀 수 있고 나를 해방하시고 내 인생에 새로움을 줄 수가 있다. 이 믿음으로touch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만진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게 뭐예요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나를 연결 시키는 것입니다. 연결시키는 것이예요. 자, 결혼식에 서서 부부서약이 이루어집니다. 서약에 깔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바탕에 깔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 나는 이남자를 믿습니다. 나는 이 여자를 믿습니다. 그리고 내 일생을 의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부부서약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그 믿음은 상대방을 나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순간 나는 상대방과 연결되요. 그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앞에 연결되는 그 순간 내가 그를 신뢰하는 그 순간, 당신은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신뢰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찰라 그를 향한 그 믿음이 고백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나는 주님만 믿습니다. 그때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29절 읽겠습니다. "이에 그의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줄을 몸에서 깨달으니라." 순간적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자., 어떻게 병이 나을 수 있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이 설명하죠. 30절에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줄을 아시고" 여러분 부부가 서로를 향한 신뢰를 전제로 결합하는 순간 그순간부터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남편 것이 마누라것이고 마누라 것이 남편것이 되요. 물론 그렇지 못한 집구석도 많이 있더라구요. 문제예요. 문제. 그러나 진정한 신뢰를 바탕으로 결합했다면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요.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생을 의탁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허용하신 놀라운 사실. 주님 안에 있던 능력이 그 믿음의 통로를 타고 상대방에게 흘러가는 것이예요. 저는 동일한 사역이 문자 그대로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인생의 무력함에 시달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touch하고 만지는 그 순간. 예수 안에 있던 능력이 내게 흘러들어올 줄 믿습니다. 인생의 불안과 허무속에 헤메던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지는 그 순간 예수 안에 있던 엄청난 평화가 내가 밀려올 줄 믿습니다 .예수안에 있던 구원이 내게 허락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거예요. 믿음으로 주님을 만진 순간 주 안에 있던 능력이 그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자,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후에 그에게 어떤 요구를 하십니다. 이것은 치유받은 자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예수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내가 예수 믿고 평화를 얻고 예수믿고 고침받아 새로운 삶이 열렸다면 주께서 요구하시는 책임하나가 있습니다. 이 책임을 위해서 주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은 그녀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음이 그녀에게 치유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31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그러나 이 여인은 알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알았어요. 이미 주님의 은혜가 여인에게 전달된 것을 숨길 수 없게 된 이 여인.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나타납니다. 드디어 나타납니다. 자, 3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그 앞에 와서 모든 사실을 여짜오되 "
여러분 성경에 일관성이 있어요. 주님이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일관성입니다. 내가 주의 은혜를 받았다면 구원을 얻었다면 주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반드시 요구하시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역사하신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는 사실이예요. 그것이 전도예요. 그것이 간증인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이루신 사실.사실. 그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은 이웃들에게 전달됩니다. 나는 이것을 숨길 수가 없어요. 종종 교회나오는 어떤 사람들이 공공칠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예수 믿는 것을 숨기겠다' 제가 실제로 어떤 회사의 간부되시는 분을 한분 만났는데 그분 만나자 마자 그분 회사에 우리 교인이 다니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무개 아십니까" 물어보니까 "알죠" 그래요. "저희 교회에 나오십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갑자기 정색을 하시면서 "아. 그분도 크리스챤입니까" 그래요.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땅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주님과 내가 상관없다면 상관없는대로 그대로 계십시요. 그러나 내가 주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 주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정상이예요. 그리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복음은 전파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구원이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생명이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평안이셨습니다. 주님이 나의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그것이 전도예요. 사실 아닌 것을 말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허구입니다. 그것은 소설이예요. 그러나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 그것이 간증이고 그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 절망과 이 소외속에 있었던 내 인생을 바꾸어 주신 주님. 그리고 이토록 충만함과 이토록 삶의 감격을 주신 주님. 그 주님을 나타내십시요. 이것이 크리스챤의 새로운 삶의 출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공개적인 첫번째 고백의 사건. 그것이 바로 침례의 사건이예요. 혹은 세례. Baptist. 침례를 받는다. 나는 예수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시작이예요. 그러나 그 침례라는 의식은 단 한번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장에서 신앙의 고백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거리에서 주께서 나를 고치셨다구요. 예수가 나에게 평안을 주셨다구요.주님이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삶을 이 여인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34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딸아이렇게 부르십니다. 딸아사랑하는 내 딸아 이 여인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먼저 건강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 여인이 병의 치유를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내 삶의 근원이신 예수님 믿음은 이 여인과 예수님을 연결시켰고 그리고 주님과의 빼앗길 수 없는 흔들릴 수 없는 관계속에 들어갔고 그녀는 하나님의 딸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시작합니다. 내 딸아주님의 부르심은 얼마나 감격이었을까요 "내 딸아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평안히 갈지어다" 원문에 보시면 평안히 가라는 말이 "평안을 향해 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직설적으로 번역했으면 더 좋았겠다. 저는 이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더 아름다운 말이예요. 너는 평안의 땅을 향해 가라. 네 인생은 새로워 졌느니라. 이제 평안을 향해 갈지어다. 약속의 땅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갈지어다. "내 딸아 평안을 향해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은 그 평안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내 교회생활. 그많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치료의 체험이 변화의 체험이 없었다면 왜 그럴까요 어떤 사람보면 교회와서 설교한번 듣고 인생이 바뀌어요. 저 그런 사람 여럿 봤어요. 딱 한번 설교듣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요. 근데 어떤 사람은 제 명설교를 듣고도 10년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인이 되고도 설교를 골백번 듣고도 절대로 안바뀌어요. 그리고 어제도 오늘이나 변함없이 그대로 앉아있어요.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한사람은 사람은 설교 딱 한번만 듣고도 바뀌어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예요. 저 말씀속에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생명이 있다. 하나님 어떤 분이신가 이 말씀속에게 내게 오실 주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주님 오늘 이말씀으로 저를 바꾸셔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 말씀을 기다립니다.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주의 진리를 기다립니다. 이 목마른 심정으로 주님께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 말씀을 받아들일 때 믿음을 통해 그 인생이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에 그래요. 저는 찬송부르다가 인생이 바뀌는 사람을 봤습니다. 찬송부르다가. 그럴수 있을까요 찬양하다가 인생이 바뀌어요. "목사님. 저 오늘 찬양하다 인생이 바뀌었어요." 제가 이런 간증 들었어요. 찬양 그 자체가 바꾼 것은 아닐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 그 찬양부르다가 그 가사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예요. 그는 믿음으로 찬양을 부른 것입니다. 그 찬양의 가사가 나의 신앙의 고백이 되었고 내 신앙의 구함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그 찬양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눈물이 흘러요 어떤 사람은 '어 오늘은 이상한 노래 나왔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것은 모르는 건데잘 안불러진다' 그리고 가요. 그냥, 찬양이 아니고 노래예요. 찬양과 노래의 차이가 어디에 있어요 믿음으로 드리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내 기쁨을 드리는 것. 믿음으로 연결된 찬양. 그 찬양은 인생을 바꿀 줄로 믿습니다. 노래 아무리 불러도 인생 안바뀌어요. 감상은 있지만 변화는 없습니다.
전. 기도하다 인생바뀌는 사람 봤어요. 기도하다가 갑자기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요. 기도하다. 기도하다 은혜를 받습니다. 왜그럴까요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주님제가 주님앞에 나옵니다. 주님 제가 제 문제를 내어놓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아시죠 주님만이 내 기도를 들으시지요 주님만이 응답이시지요 주님. 나의 최후의 희망, 나의 마지막 소망되신 주님.저는 주님만을 신뢰해요. 기도하는 순간 성령님이 임하시고 주께서 내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나를 바꾸시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 인생을 바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온지 세월이 오래되니까 기도의 형식을 배웁니다. 머리숙일줄 압니다. 손도 모을 줄 압니다. 경건한 모습을 나타낼 줄 압니다. 그것은 형식입니다. 형식의 기도. 종교에 속한 기도. 그 기도는 인생을 바꿀 수 없어요. 믿음의 기도는 우리를 바꿀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예배하십니까 믿음으로 말씀을 들으십니까 믿음으로 기도하십니까 믿음으로 찬양하십니까 내 인생의 절망과 그리고 소외와 고독을 끌어안고 그러나 주님앞에 오늘 나아오십시요. 오.주님.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했지만 그것이 내 삶을 바꿀 수 없었고 내 삶은 여전히 고통이었습니다.그러나 오늘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집니다. 단 한번의 touch도 단 한번의 만짐도.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그 순간. 주님 안에 있던 능력이 나에게 흘러들어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능력이 흘러 나온다는 것은 주님편에서 보면 능력을 비워내는 것이예요. 여기 십자가가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과 이 아픔을 전제로 주께선 오늘 나를 치유하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이 사랑하는 주님앞에 내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 고통하시는 주님 앞에 오늘 가스펠송의 가사처럼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왜 이 고백이 나왔을까요 그는 우리의 고통 때문에 함께 아파하십니다. 자식이 고통스러워할 때 부모도 함께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 때문에 함께 고통하시며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 오늘 고통중에 있는 인생을 향해서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나는 내 인생의 절망과 그리고 불안과 이 고독을 끌어안고 오늘 사랑하는 주님앞에 나와 오직 그분이 내 희망일 수 있고 오직 그분이 내 사랑일 수 있고 오직 그분이 내 삶의 새로운 날을 줄 수가 있음을 믿고 주앞에 나와 그분을 만지십시오.
그런데 우리가 병을 앓아도 고쳐질 희망이 있다 생각하면 견딜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의 경우에는 고칠 희망이 없습니다. 여기 이 여인의 절망이 있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을 본문은 어떻게 묘사하고 있습니까 26절을 같이 읽어보겠어요.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자, 이런 병을 얼마동안 앓았습니까 12년-25절에 보시면 '열 두해를' 열 둘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만수입니다. 아주 긴 세월을 말할 때 '열 둘', '사십' 이런 숫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12년이나 앓았어요. 희망없이 앓아왔습니다.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받쳤습니다. 요즘식으로 말하자면 양의, 한의, 차병원, 경희대학 한방병원, 민간의학 뭐 이런 노력들을 다 받쳐 보았지만 희망이 없었어요. 여기 이 여인의 절망이 있습니다. 이제는 죽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상태, 이것이 이 여인이 처하고 있었던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절망이라는 고통보다 더 커다란 고통은 이 여인이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에 이런 혈루증, 소위 출혈병을 앓게 되면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종종 이런 사람들은 부끄러운 병이다라고 해서 그 당시 시대의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무지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성 바깥으로 쫓겨나 성 바깥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전에 접근하는 것도 금지됐고, 회당예배에 참석할 수도 없었습니다. 가정에서도 남편이 이런 여인과 이혼해도 무방한, 합법화 되었던 그런 시대속에서 이 여인은 철저한 외로움, 아무도 받아줄 수 없는 사회가 버린 사람, 사랑하는 남편도 버리고, 사랑하는 자식들도 외면한 이런 철저한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었습니다. 여기 이 여인이 경험하고 있었던 절망보다도 더 커다란 고통, 소외의 고통을 경험하고 있었던 여인의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외경에 보면, 성경은 아니지만 성경 바깥의 문서들을 모아놓은 외경에 보면, 혹은 교회 전승에 의하면 이 여인의 이름이 베로니카라고 합니다. 베로니카라는 여인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향해서 오르실 때 넘어지시고 다시 일어나시고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시면서 가실 때 그 얼굴의 땀방울이 핏방을이 되어떨어지고 있었을 때 이 예수님을 조롱과 모욕에 찬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무리들 가운데서 뛰쳐나와 자기 손수건을 가지고 예수님의 이마에 땅방울을 씻어 주었던 여인, 그랬더니 뜻밖에 그 손수건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얼굴의 흔적이 새겨졌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남긴 여인-베로니카, 이 여인의 이름은 아마도 베로니카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이 절망과 소외속에 있었던 이 여인이 예수님 만나고 치료를 받습니다. 새 삶을 살게 됩니다. 자, 이 여인이 치유를 경험했던 전기는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치유의 계기-두 가지 결정적인 사실이 이 여인에게 치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 여인에게 치료의 새로운 전기를 만든 이 사건을 본문은 이렇게 보도합니다. 본문의 2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여기 매우 중요한 동사가 두 가지가 나옵니다. 자 어떤 단어가 나옵니까 '듣고'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 다음에 어떤 단어가 나옵니까 동사 '손을 댔다' touch했다. '듣고 손을 댔다.' 이것이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바로 이것이 여인에게 치료를 가져온 전기가 된 것입니다. 듣고 만졌습니다. 듣고 손을 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복음서를 읽다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났을 때 구원을 받습니다. 치료를 경험합니다. 인생이 새로워집니다. 그러한 사건을 보도하는 대목마다 이 두 가지 단어가 어김없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듣고'라는 단어와 또 하나는 '믿고'라는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잘 아시는, 여러분들이 대부분이 잘 아시는, 그러나 어떤 분은 아직도 모르실 요한복음 5장24절 같은 말씀에 보시면 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뭐라 그랬어요) 듣고(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뭐예요) 믿는자는 (자, 듣고 믿는 자는 어떤일이 일어납니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자, 두 가지 때문에 '듣고 믿었기 때문에' 자, 이 위대한 역사는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에 나타난 여인이 뭘 들었습니까 본문의 27절에 보시면 뭘 들었지요 예수의 소문을 들었다. 이것이 여인의 운명을 바꾸는 전기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는 자마다 삶이 바뀔 것입니다. 운명이 달라질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뀔 것입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 왜 그래요 여러분, 예수가 복음입니다. 예수가 구원이십니다. 예수가 소망이십니다. 예수가 생명이십니다. 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가 구원이라는 사실이예요. 예수의 소문을 들었어요. 할 수 있는 모든 방법,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했지만 이 여인은 병을 고칠 길이 없었습니다. 미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소식을 들었어요. 예수가 오신다. 우리 마을을 지나가신다. 예수! 눈이 번쩍 뜨였어요. 예수라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에게 치유를 제공하고, 사람들의 운명과 인생을 바꾸고 계시는 갈릴리 사람, 나사렛 사람, 저 예수! 예수가 오신다.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지막 잎새같은 최후의 희망, 이 여인이 걸 수 있었던 마지막 희망, 예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듣고 어떻게 했습니까 그 다음에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갔어요. 그리고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들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지금도 예수의 소문은 복음인줄 믿으십니까 믿음은 어디에서 나와요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 예수가 오신다. 내가 그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지금도 복음인 줄 믿습니다.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다. 랍비라고 불리워지는 사람들은 그 당시에 보편적으로 거리를 다닐 때 옷을 하나 더 입었어요. 겉옷을 입었어요. 그리고 겉옷은 직각처럼 떨어집니다. 귀퉁이에 딱딱하게 된 곳에 수를 달게 되어 있어요. 청색실 끈이 매달립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밀리고 밀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예수를 만나야 한다. 어떻게든 만나야 한다' 사람들을 비집고 비집고 들어가서 가까스로 예수님의 옷자락을 가만히 만졌을 것입니다. touch했습니다. 손을 댔습니다. 만졌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은 이 여인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본문의 정황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게 보도합니다. 31절 다시한번 읽어보세요. 31절 읽겠습니다. 시작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들이 어떠했습니까 에워싸 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에워싸고 있었어요. 예수님은 여전히 수퍼스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만나고 싶어했습니다. 인산인해였습니다. 무리들이 붐비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지고 있었고 어떤 사람은 지나가다가 예수님을 밀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손을 댔지만 전혀 다른 종류의 만짐. 전혀 다른 종류의 touch. 이 만짐을 예수님은 즉각적으로 느끼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다르게 만진거예요. 이여인은. 어떤 의미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믿음의 만짐이었습니다. 믿음의 만짐. 어떤 믿음이었어요
자, 28절 읽어보겠습니다. 본문의 28절. 다같이 시작.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이러라" 그 예수. 어쩌면 내 인생의 마지막 희망일 수 있는 예수. 나는 저 예수에게 기대를 한다. 그 예수님이 내 삶을 바꿀 수 있고 나를 해방하시고 내 인생에 새로움을 줄 수가 있다. 이 믿음으로touch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만진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이란게 뭐예요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나를 연결 시키는 것입니다. 연결시키는 것이예요. 자, 결혼식에 서서 부부서약이 이루어집니다. 서약에 깔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바탕에 깔린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 나는 이남자를 믿습니다. 나는 이 여자를 믿습니다. 그리고 내 일생을 의탁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향한 신뢰를 바탕으로 부부서약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믿는 순간 그 믿음은 상대방을 나와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순간 나는 상대방과 연결되요. 그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내가 주님앞에 연결되는 그 순간 내가 그를 신뢰하는 그 순간, 당신은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그를 신뢰하는 바로 그 순간, 그 찰라 그를 향한 그 믿음이 고백되는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나는 주님만 믿습니다. 그때 어떤 사건이 일어났습니까 29절 읽겠습니다. "이에 그의 혈루의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줄을 몸에서 깨달으니라." 순간적으로 병이 나았습니다. 자., 어떻게 병이 나을 수 있었습니까 그 다음 구절이 설명하죠. 30절에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줄을 아시고" 여러분 부부가 서로를 향한 신뢰를 전제로 결합하는 순간 그순간부터 부부는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됩니다. 남편 것이 마누라것이고 마누라 것이 남편것이 되요. 물론 그렇지 못한 집구석도 많이 있더라구요. 문제예요. 문제. 그러나 진정한 신뢰를 바탕으로 결합했다면 모든 것을 공유하게 되요. 주님 제가 주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자기 일생을 의탁하는 바로 그 순간. 주님께서 허용하신 놀라운 사실. 주님 안에 있던 능력이 그 믿음의 통로를 타고 상대방에게 흘러가는 것이예요. 저는 동일한 사역이 문자 그대로 지금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 순간. 인생의 무력함에 시달리던 사람이 예수님을 touch하고 만지는 그 순간. 예수 안에 있던 능력이 내게 흘러들어올 줄 믿습니다. 인생의 불안과 허무속에 헤메던 사람이 예수님 앞으로 달려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지는 그 순간 예수 안에 있던 엄청난 평화가 내가 밀려올 줄 믿습니다 .예수안에 있던 구원이 내게 허락됩니다. 이 사건이 일어난거예요. 믿음으로 주님을 만진 순간 주 안에 있던 능력이 그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자,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후에 그에게 어떤 요구를 하십니다. 이것은 치유받은 자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예수믿고 구원을 얻었다면 내가 예수 믿고 평화를 얻고 예수믿고 고침받아 새로운 삶이 열렸다면 주께서 요구하시는 책임하나가 있습니다. 이 책임을 위해서 주께서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주님은 그녀가 예수님을 신뢰하고 믿음이 그녀에게 치유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날 것을 요구하십니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31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그러나 이 여인은 알았습니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알았어요. 이미 주님의 은혜가 여인에게 전달된 것을 숨길 수 없게 된 이 여인.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보시니" 나타납니다. 드디어 나타납니다. 자, 3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그 앞에 와서 모든 사실을 여짜오되 "
여러분 성경에 일관성이 있어요. 주님이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일관성입니다. 내가 주의 은혜를 받았다면 구원을 얻었다면 주의 은혜를 경험했다면 반드시 요구하시는 한가지가 있습니다. 주께서 내게 역사하신 그것을 나타내야 한다는 사실이예요. 그것이 전도예요. 그것이 간증인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이루신 사실.사실. 그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받은 사람들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복음은 이웃들에게 전달됩니다. 나는 이것을 숨길 수가 없어요. 종종 교회나오는 어떤 사람들이 공공칠 크리스챤이 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예수 믿는 것을 숨기겠다' 제가 실제로 어떤 회사의 간부되시는 분을 한분 만났는데 그분 만나자 마자 그분 회사에 우리 교인이 다니는 것이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무개 아십니까" 물어보니까 "알죠" 그래요. "저희 교회에 나오십니다" 그랬더니 이분이 갑자기 정색을 하시면서 "아. 그분도 크리스챤입니까" 그래요. 제가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땅으로 기어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숨기고 있었던 거예요. 오늘날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주님과 내가 상관없다면 상관없는대로 그대로 계십시요. 그러나 내가 주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 주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 구원을 체험한 사람이라면 우리는 나타날 수 밖에 없어요. 그것이 정상이예요. 그리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복음은 전파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구원이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생명이셨습니다. 주님이 내게 평안이셨습니다. 주님이 나의 삶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는 것. 그것이 전도예요. 사실 아닌 것을 말하려고 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허구입니다. 그것은 소설이예요. 그러나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 그것이 간증이고 그것이 전도인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내게 어떤 일을 하셨는지 이 절망과 이 소외속에 있었던 내 인생을 바꾸어 주신 주님. 그리고 이토록 충만함과 이토록 삶의 감격을 주신 주님. 그 주님을 나타내십시요. 이것이 크리스챤의 새로운 삶의 출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공개적인 첫번째 고백의 사건. 그것이 바로 침례의 사건이예요. 혹은 세례. Baptist. 침례를 받는다. 나는 예수 믿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새로운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고백하는 시작이예요. 그러나 그 침례라는 의식은 단 한번이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의 장에서 신앙의 고백은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우리의 직장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거리에서 주께서 나를 고치셨다구요. 예수가 나에게 평안을 주셨다구요.주님이 나에게 새로운 삶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바로 이 삶을 이 여인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지막 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34절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 딸아이렇게 부르십니다. 딸아사랑하는 내 딸아 이 여인은 예수님을 신뢰하고 먼저 건강을 얻었습니다. 저는 이 여인이 병의 치유를 위해서만 예수님을 믿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해서 내 삶의 근원이신 예수님 믿음은 이 여인과 예수님을 연결시켰고 그리고 주님과의 빼앗길 수 없는 흔들릴 수 없는 관계속에 들어갔고 그녀는 하나님의 딸이 되는 놀라운 경험을 시작합니다. 내 딸아주님의 부르심은 얼마나 감격이었을까요 "내 딸아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평안히 갈지어다" 원문에 보시면 평안히 가라는 말이 "평안을 향해 가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직설적으로 번역했으면 더 좋았겠다. 저는 이렇게 생각이 들었어요. 더 아름다운 말이예요. 너는 평안의 땅을 향해 가라. 네 인생은 새로워 졌느니라. 이제 평안을 향해 갈지어다. 약속의 땅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갈지어다. "내 딸아 평안을 향해 가라"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저와 여러분은 그 평안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약속의 땅을 향해 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하다면 내 교회생활. 그많은 연륜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치료의 체험이 변화의 체험이 없었다면 왜 그럴까요 어떤 사람보면 교회와서 설교한번 듣고 인생이 바뀌어요. 저 그런 사람 여럿 봤어요. 딱 한번 설교듣고 인생이 완전히 바뀌어요. 근데 어떤 사람은 제 명설교를 듣고도 10년 20년 역사를 자랑하는 교인이 되고도 설교를 골백번 듣고도 절대로 안바뀌어요. 그리고 어제도 오늘이나 변함없이 그대로 앉아있어요. 그 차이가 어디에 있을까요 한사람은 사람은 설교 딱 한번만 듣고도 바뀌어요. 그것은 믿음의 차이예요. 저 말씀속에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는 생명이 있다. 하나님 어떤 분이신가 이 말씀속에게 내게 오실 주님의 말씀을 기다린다. 주님 오늘 이말씀으로 저를 바꾸셔야 합니다. 주님. 제가 이 말씀을 기다립니다.그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제가 주의 진리를 기다립니다. 이 목마른 심정으로 주님께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이 말씀을 받아들일 때 믿음을 통해 그 인생이 새로워질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받기 때문에 그래요. 저는 찬송부르다가 인생이 바뀌는 사람을 봤습니다. 찬송부르다가. 그럴수 있을까요 찬양하다가 인생이 바뀌어요. "목사님. 저 오늘 찬양하다 인생이 바뀌었어요." 제가 이런 간증 들었어요. 찬양 그 자체가 바꾼 것은 아닐 것입니다. 찬양의 가사, 그 찬양부르다가 그 가사속에서 주님을 만난 것이예요. 그는 믿음으로 찬양을 부른 것입니다. 그 찬양의 가사가 나의 신앙의 고백이 되었고 내 신앙의 구함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갑자기 그 찬양속에 임하시는 주님을 경험하고 눈물이 흘러요 어떤 사람은 '어 오늘은 이상한 노래 나왔다.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것은 모르는 건데잘 안불러진다' 그리고 가요. 그냥, 찬양이 아니고 노래예요. 찬양과 노래의 차이가 어디에 있어요 믿음으로 드리는 것.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내 기쁨을 드리는 것. 믿음으로 연결된 찬양. 그 찬양은 인생을 바꿀 줄로 믿습니다. 노래 아무리 불러도 인생 안바뀌어요. 감상은 있지만 변화는 없습니다.
전. 기도하다 인생바뀌는 사람 봤어요. 기도하다가 갑자기 인생이 완전히 달라져요. 기도하다. 기도하다 은혜를 받습니다. 왜그럴까요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그래요. 믿음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주님제가 주님앞에 나옵니다. 주님 제가 제 문제를 내어놓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아시죠 주님만이 내 기도를 들으시지요 주님만이 응답이시지요 주님. 나의 최후의 희망, 나의 마지막 소망되신 주님.저는 주님만을 신뢰해요. 기도하는 순간 성령님이 임하시고 주께서 내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나를 바꾸시는 은혜를 체험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내 인생을 바꿀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온지 세월이 오래되니까 기도의 형식을 배웁니다. 머리숙일줄 압니다. 손도 모을 줄 압니다. 경건한 모습을 나타낼 줄 압니다. 그것은 형식입니다. 형식의 기도. 종교에 속한 기도. 그 기도는 인생을 바꿀 수 없어요. 믿음의 기도는 우리를 바꿀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믿음으로 예배하십니까 믿음으로 말씀을 들으십니까 믿음으로 기도하십니까 믿음으로 찬양하십니까 내 인생의 절망과 그리고 소외와 고독을 끌어안고 그러나 주님앞에 오늘 나아오십시요. 오.주님.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했지만 그것이 내 삶을 바꿀 수 없었고 내 삶은 여전히 고통이었습니다.그러나 오늘 주님 앞에 나아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집니다. 단 한번의 touch도 단 한번의 만짐도. 내가 믿음으로 주님을 만지는 그 순간. 바로 그 순간. 그 순간. 주님 안에 있던 능력이 나에게 흘러들어올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능력이 흘러 나온다는 것은 주님편에서 보면 능력을 비워내는 것이예요. 여기 십자가가 있어요. 주님은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가난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그가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고통과 이 아픔을 전제로 주께선 오늘 나를 치유하기 위해 기다리십니다. 이 사랑하는 주님앞에 내 모든 고통을 끌어안고 함께 고통하시는 주님 앞에 오늘 가스펠송의 가사처럼 고통가운데 계신 주님왜 이 고백이 나왔을까요 그는 우리의 고통 때문에 함께 아파하십니다. 자식이 고통스러워할 때 부모도 함께 고통스러워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고통 때문에 함께 고통하시며 십자가를 짊어지신 주님. 오늘 고통중에 있는 인생을 향해서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나는 내 인생의 절망과 그리고 불안과 이 고독을 끌어안고 오늘 사랑하는 주님앞에 나와 오직 그분이 내 희망일 수 있고 오직 그분이 내 사랑일 수 있고 오직 그분이 내 삶의 새로운 날을 줄 수가 있음을 믿고 주앞에 나와 그분을 만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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