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내 이웃인가 (눅10:25-37)
본문
지난 6일에 경기도 안성에서 40대 독신녀가 자신의 아파트에서 숨진 지 5개월만에 심하게 부패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원래 아파트가 단절된 공간이라고는 하지만 그 아파트는 특이하게 중앙에 복도를 위치시켜서 각 가구가 마주 보도록 지어져 있다고 합니다. 베란다의 빨랫줄에는 여름 옷들이 걸려 있었고 우편함에는 다른 우편함에 비해서 훨씬 많은 우편물이 수북이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관리인이 6개월치 관리비가 밀린 상태에서 전기와 전화마저 끊긴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웃에는 누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 집 옆에 사는 사람들의 이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웃 사촌이란 말도 무색케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공동주택이라도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는 철문으로 닫혀 있어 조그만 틈새를 찾기도 힘듭니다. 언젠가 한밤 중에 같은 집안 사람인데도 안면이 없어 알아보지 못하고 격투하다가 한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집과 집 사이의 경계구조물을 나타내는 우리 말에 두가지가 있다. 담장과 울타리가 그것이다. 담장은 그 쌓는 재료들이 돌과 흙 벽돌과 블록처럼 강구조인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집과 집 사이를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남의 집으로부터 은폐를 하며 침범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적대의식이 밑바닥에 깔린 구조물이다. 이에 비해 울타리는 짓는 재료가 나뭇가지나 지푸라기 풀섭 그리고 탱자나 대나무나 꽃나무처럼 유구조로 집과 집 사이를 상징적으로 가르고 바람이나 말 개 닭들이 오갈 수 있는 정신적인 구조물이다. 손님이 갑작스레 오면 밥그릇도 울타리를 통해 오가고 통사정할 일이 있으면 울타리를 맞대고 울고 웃기도 한다. 울타리에 난 개구멍을 정구멍이라고 한 것도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구멍을 통해 마실도 빠져나가곤 했으니 숨막히는 삼강오륜의 감옥에 뚫린 숨구멍이기도 했다. 곧 이 담장은 도적이 아니면 침범할 수 없는 물리적 차단인데 비해 울타리는 그것을 경계로 존중하는 사람에게만 경계로 작용하는 정신적 차단이다. 도연명의 무릉도원에도 담장은 없고 생울타리이며 새디즘으로 유명한 새드 후작의 이상향 소설인 타모에 섬도 집과 집의 경계는 모두가 꽃나무로 된 생울타리이다. 곧 담장은 악이 지배할수록 높아가고 두꺼워지며 울타리는 선이 지배할수록 얇아지고 꽃이 핀다. 조선조 정조때 실학자인 이덕무는 그의 문집에서 돌담 집은 빈부와는 아랑곳 없이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의 집이요 생울타리 집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의 집이다… 라고 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서울시는 올봄 나무 심을 철을 기해 옆집과의 담장을 헐고 꽃나무 등의 생울타리를 권장하기로 하고 그같은 이웃과의 인심트기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꽃나무를 무상 공급하기로 했다 한다. 뜻은 좋은데 양상군자가 호기라고 무릎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본문은 이웃의 의미를 새롭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그 동기가 무엇이든 예수님께 중요한 질문을 두 가지 했습니다.
첫째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은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을 얼마큼 덜었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 문제는 생활의 질과 관계된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먹는 음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인처럼 유별나게 보신을 즐기는 민족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결한 공업용 돼지 기름을 중국집에서 사용한다고 하고, 고름 우유를 만든다고 하고, 라면 스프에 공업용 뼈를 원료로 넣는다고 하고, 해산물에 유해 색소를 넣는다고 하니까 격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이 영생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이 영생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 밑바닥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26절). 문제에 대한 해답은 율법에 있습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주의를 성경으로 돌리셨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는 율법사란 지위에 걸맞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율법의 핵심이자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기회에 율법 중에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이 율법사가 했던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s and the prophets)"(마22:37-40)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 5:1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결국 율법사의 대답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심으로(28절) 그의 답변이 옳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편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도 증거합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제외하고는 이를 온전히 지킨 사람이 없습니다. 다음 몇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3:10-1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갈2:16)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0-2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니라”(롬7:7)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9-10)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4)
둘째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 율법사는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자신의 대답처럼 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시자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28절). 그는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이웃이 누구인지 다시 질문했습니다. 사실 이웃이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다소 복잡하고 철학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채 내버려졌지만 그곳을 지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제각기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면서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36절) 예수님께서는 이웃에 관한 논의를 이론화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도 실천적인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의무에서 사랑으로, 논쟁에서 행동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유대인과 안면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배척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할 일 없이 빈둥빈둥거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도 만난 유대인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습니다. 바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자기의 돈을 사용했습니다.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하고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이지만 주님의 관심은 “내가 누구의 이웃인가”입니다. 우리의 집과 인접한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인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국한시키지 말고 어려움에 처해 고통당하는 사람도 이웃에 포함시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절).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온 25세의 청년이 4수 끝에 올해 서울대 인문사회계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90년에 고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 대신 돈벌이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전히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공사장에서 지게를 지고 밤에는 책을 잡고 독학을 했습니다. 고교 졸업한 이듬해 91년에 처음 고려대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92년 서울대 정치학과, 93년 서울대 법학과를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했습니다. 제대로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 이 청년은 94년 한 해 동안 일해 모은 2백만원으로 지난 해 입시학원에 등록하여 학업에 전념한 끝에 마침내 수석합격이라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신문기자와의 인터뷰 후에 입시 때문에 1년간 쉰 일을 입학 때까지만이라도 해야 겠다며 공사장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정말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청년입니다. 이 사연을 신문을 통해 본 독지가가 여럿 성금을 보냈습니다. 이들이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던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미 공사 졸업반의 성덕 바우만 군이 백혈병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많은 사람들이 골수를 제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들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어제는 주한 미군 토머스 소령이 한국인 장애아를 입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치료를 위해서 전역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되는 건데.
그런데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이다. 그 부부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관리인이 6개월치 관리비가 밀린 상태에서 전기와 전화마저 끊긴 집안으로 들어갔다가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웃에는 누가 살고 있었던 것입니까 그 집 옆에 사는 사람들의 이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우리는 이웃 사촌이란 말도 무색케 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집집마다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공동주택이라도 안을 들여다 볼 수도 없는 철문으로 닫혀 있어 조그만 틈새를 찾기도 힘듭니다. 언젠가 한밤 중에 같은 집안 사람인데도 안면이 없어 알아보지 못하고 격투하다가 한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도 있었습니다. 집과 집 사이의 경계구조물을 나타내는 우리 말에 두가지가 있다. 담장과 울타리가 그것이다. 담장은 그 쌓는 재료들이 돌과 흙 벽돌과 블록처럼 강구조인 것만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집과 집 사이를 물리적으로 차단하고 남의 집으로부터 은폐를 하며 침범으로부터 방어한다는 적대의식이 밑바닥에 깔린 구조물이다. 이에 비해 울타리는 짓는 재료가 나뭇가지나 지푸라기 풀섭 그리고 탱자나 대나무나 꽃나무처럼 유구조로 집과 집 사이를 상징적으로 가르고 바람이나 말 개 닭들이 오갈 수 있는 정신적인 구조물이다. 손님이 갑작스레 오면 밥그릇도 울타리를 통해 오가고 통사정할 일이 있으면 울타리를 맞대고 울고 웃기도 한다. 울타리에 난 개구멍을 정구멍이라고 한 것도그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개구멍을 통해 마실도 빠져나가곤 했으니 숨막히는 삼강오륜의 감옥에 뚫린 숨구멍이기도 했다. 곧 이 담장은 도적이 아니면 침범할 수 없는 물리적 차단인데 비해 울타리는 그것을 경계로 존중하는 사람에게만 경계로 작용하는 정신적 차단이다. 도연명의 무릉도원에도 담장은 없고 생울타리이며 새디즘으로 유명한 새드 후작의 이상향 소설인 타모에 섬도 집과 집의 경계는 모두가 꽃나무로 된 생울타리이다. 곧 담장은 악이 지배할수록 높아가고 두꺼워지며 울타리는 선이 지배할수록 얇아지고 꽃이 핀다. 조선조 정조때 실학자인 이덕무는 그의 문집에서 돌담 집은 빈부와는 아랑곳 없이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람의 집이요 생울타리 집은 마음에 여유가 있는 사람의 집이다… 라고 했음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서울시는 올봄 나무 심을 철을 기해 옆집과의 담장을 헐고 꽃나무 등의 생울타리를 권장하기로 하고 그같은 이웃과의 인심트기에 동참하는 사람에게 꽃나무를 무상 공급하기로 했다 한다. 뜻은 좋은데 양상군자가 호기라고 무릎치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상황에 처한 우리에게 본문은 이웃의 의미를 새롭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그 동기가 무엇이든 예수님께 중요한 질문을 두 가지 했습니다.
첫째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 건강하고 장수하기를 원하는 마음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인은 먹는 것에 대한 걱정을 얼마큼 덜었기 때문에 건강에 대해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건강 문제는 생활의 질과 관계된 것입니다. 따라서 운동에 관심을 가지며 먹는 음식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인처럼 유별나게 보신을 즐기는 민족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결한 공업용 돼지 기름을 중국집에서 사용한다고 하고, 고름 우유를 만든다고 하고, 라면 스프에 공업용 뼈를 원료로 넣는다고 하고, 해산물에 유해 색소를 넣는다고 하니까 격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이 영생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이 영생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율법사의 질문 밑바닥에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즉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26절). 문제에 대한 해답은 율법에 있습니다. 문제에 대한 해답은 성경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율법사의 주의를 성경으로 돌리셨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읽고 묵상하십시오. 그는 율법사란 지위에 걸맞게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율법의 핵심이자 기초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기회에 율법 중에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으시고 이 율법사가 했던 것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On these two commandments hang all the laws and the prophets)"(마22:37-40)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서 5:14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결국 율법사의 대답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심으로(28절) 그의 답변이 옳음을 인정하셨습니다. 이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편으로는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도 증거합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 그리스도 한분을 제외하고는 이를 온전히 지킨 사람이 없습니다. 다음 몇 구절을 주의 깊게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이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니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 이를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갈3:10-12)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리라”(갈2:16)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0-2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니라”(롬7:7)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롬7:9-10)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갈3:24)
둘째로,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 율법사는 자신 있게 대답은 했지만 자신의 대답처럼 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시자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28절). 그는 그 상황을 벗어나려고 이웃이 누구인지 다시 질문했습니다. 사실 이웃이 누구인지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다소 복잡하고 철학적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예수님께서는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유대인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된 채 내버려졌지만 그곳을 지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제각기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불쌍히 여겨서 돌보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마치시면서 율법사에게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36절) 예수님께서는 이웃에 관한 논의를 이론화하신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도 실천적인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의무에서 사랑으로, 논쟁에서 행동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비유 속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유대인과 안면이 없는 사이였습니다. 같은 동네에 사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받고 배척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할 일 없이 빈둥빈둥거리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나름대로 계획이 있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강도 만난 유대인을 불쌍히 여겨 도와주었습니다. 바쁜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자기의 돈을 사용했습니다. 책임을 떠맡았습니다.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하고 질문했지만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십니다. 우리의 관심은 “내 이웃이 누구인가”이지만 주님의 관심은 “내가 누구의 이웃인가”입니다. 우리의 집과 인접한 사람들이 우리의 이웃인 것은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국한시키지 말고 어려움에 처해 고통당하는 사람도 이웃에 포함시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37절).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것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11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온 25세의 청년이 4수 끝에 올해 서울대 인문사회계 수석을 차지했습니다. 90년에 고교를 졸업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 대신 돈벌이에 나섰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정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이 청년은 여전히 대학 진학에 대한 미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낮에는 공사장에서 지게를 지고 밤에는 책을 잡고 독학을 했습니다. 고교 졸업한 이듬해 91년에 처음 고려대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92년 서울대 정치학과, 93년 서울대 법학과를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했습니다. 제대로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 이 청년은 94년 한 해 동안 일해 모은 2백만원으로 지난 해 입시학원에 등록하여 학업에 전념한 끝에 마침내 수석합격이라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신문기자와의 인터뷰 후에 입시 때문에 1년간 쉰 일을 입학 때까지만이라도 해야 겠다며 공사장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정말 이 시대에 보기 드문 청년입니다. 이 사연을 신문을 통해 본 독지가가 여럿 성금을 보냈습니다. 이들이 그냥 지나쳐도 상관없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던 것 같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미 공사 졸업반의 성덕 바우만 군이 백혈병으로 투병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많은 사람들이 골수를 제공하겠다고 나섰습니다. 이들이 선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어제는 주한 미군 토머스 소령이 한국인 장애아를 입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아이의 치료를 위해서 전역하기로 결심했다는 사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면 되는 건데.
그런데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된 것이다. 그 부부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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