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고가 가득차리라 (잠3:5-10)
본문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내 물질이나 모든 소유가 가득차 넘치는 것을 소원합니다. 육신의 사람도 소유를 원하고 성령의 사람도 원하고 모든 사람이 다 원합니다. 물질이 풍부해지길 바라고 병든 사람은 건강하길바라며 걱정과 염려가 있는 사람은 평안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질 때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소원을 이루어 주시기 위한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소원을 진실로 사모하며 성령께 우리들의 중심을 불태우면 그 간절한 소망을 들어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9-10절에 “네 재물과 네소산으로 여호와를 공경하면 네 창고가 가득하리라”고 하십니다.
여러분들이 소원하는 것 모두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물질적으로 영적으로 풍성한 삶이 이루어 지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겸손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5절에 보면 “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시며 7절에서는 “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편 10편 17절에서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으니" 그랬습니다. 겸손하면 삶의 부요로 가득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재물도 주시고 영광도 주시고 생명도 주시어서 창고를 가득주십니다. 그 증거로 교만한 사울에게서 재물과 권세와 영광을 빼앗으셔서 겸손한 다윗에게 주셨습니다.
사무엘 상 19장 8-17절을 보면 사울 왕은, 이스라엘 사사가 이제 끝나고 왕으로서는 제일 처음에 된 왕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모든 사람 가운데서 믿음이 있고 의로운 사람을 택해서 왕을 세울려고 할 때에 사울이 제일 그 당시에 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을 왕으로 세웠는데 사울 왕이 전쟁하다가 전쟁에 승리를 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이 시키신 명령을 다 지키지 아니하고, 전멸을 하라고 했는데 아각과 아주 좋은 짐승 얼마를 남겨두었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아말렉 족속을 전멸하라 했느냐 하면 아말렉 족속이 하나님이 인간 구원을 하시는 그 구원에 방해를 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낼 때에 방해를 하였으므로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그 아말렉 족속을 여호와께서 징치를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때에 짐승이나 사람이나 생명 가진 것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몰살을 하라고 하나님이 이렇게 명령했는데 아각과 짐승 몇 마리 좋은 것을 남겨놓고 그가 전쟁하고 난 다음에 자기 비를 세웠습니다. 사울 왕이 이렇게 전쟁에 이겨서 승리했다 하는 비를 세우고 아주 기뻐서 돌아오는데 하나님이 사무엘 선지에게 말씀하시기를 사울왕이 내 말을 순종치 아니하였으니 내가 그를 왕되지 못하게 이제 버렸노라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약시대의 물질의 부요는 영혼의 부를 상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22편 26절에 “겸손한 자는 먹고 배부를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진실로 겸손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즉시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오늘의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8장 14절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하십니다. 교만이 우리의 신앙을 붕괴시키고, 내가 무엇을 가졌다고 우쭐대는 교만, 아무 것도 없으면서도 거들먹거리는 거만, 하나님을 깔보고 자기 자신이 마치 굉장한 존재라도 된 것처럼 착각하며 살아가는 오만이 하나님이 없어도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거할 때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기 전 먼저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다” 과거에 종되었던 것을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과거를 두고 후회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를 돌아보면서 겸손한 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잊지말아야 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기와 위경에서 건져주셨다는 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편하게 지낸 것은 아닙니다. 불뱀 및 전갈의 위험, 물이 없는 건조한 땅,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지키시고 인도해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만나도 내려주셨습니다. 만나를 통해 겸손을 훈련시키셨습니다. 그들은 만나를 얻기 위해 하늘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겸손은 복을 받는 그릇이며 복을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신명기 8장 16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고 하시는 것은 내가 복을 받았다면 그것은 내 재주로 내 능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재물 얻는 능을 주셨고 아이디어도 주셨습니다. 얻게 하시는 능력이 하나님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각해선 안됩니다. 범사에 그를 인정하고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겸손함으로써 모든 것을 창고에 가득채워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부터 “하나님 겸손하게 해 주세요” 하면 반드시 그 이상으로 이루어주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음으로 여호와를 믿고 경외하여야 합니다. 5절 “여호와를 의뢰하고”했으며 9절에서는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포도즙이 넘치리라” 고 합니다.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것은 믿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빌립보서 4장 6-7절에 보면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하십니다. 즉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것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를 끝까지 외면하셨지만 예수님을 믿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끝까지 믿음으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 여인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막11:22-24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를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오늘 본문에서 약속하셨듯이 온갖 아름다운 복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즉 기도하고 찬송하고 예배하는 자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한 부인이 오페라 공연 극장의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어서 그에게 말하기를 지나간 밤 공연에 갔다가 아주 값비싼 다이아몬드 브로우치를 잃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그 지배인은 전화를 끊지 말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수색 작업 끝에 그 불로우치를 찾았습니다.
그래서 그가 다시 전화기로 갔을 때 그 여인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는 그여인이 전화를 다시 해주기를 바랬지만 그러나 그는 아무런 소식도 듣지 못했다. 우리는 “얼마나 이상하고 어리석은 사람인가?”라고 말하겠지만 실은 우리가 그와 같은 태도로 기도하고 있지는 않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에 모든 것을 주님께 고하고 나서 “수화기를 붙들고 기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응답받을 때의 기쁨을 놓치고 끈질기게 기다리는 믿음에 대한 보상을 맛보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다는 사실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시기가 적절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뜻에 완전하게 부합되지 못하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종종 늦추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다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최선을 다했는데도 우리가 바라던 일이 즉시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기다리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때입니다. 우리가 침울해 있거나 죄의 속성인 자기 연민에 빠져 있어서는 안되며 그가 완전하게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가 우리의 간구를 그의 모든 지혜 안에서 응답해 주시며 창고에 가득채워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시128:1-4에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주시는 약속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내실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상에 둘린 자식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한 아브라함이 복을 받고 동방의 의인 욥도 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들의 창고에 복을 가득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끝으로 할일은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합니다. 본문 6절 말씀에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께 충성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인정하는 것 같으면서 자주 부정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지 않고 거두려는 것은 주님을 시험하는 죄입니다.
잠 25장 13절에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 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을 인정하며 충성하는 자 하나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여드리므로 인하여 창고에 가득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이 충만한 자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가운데 충성이 가득하다는 것을 갈라디아서 5장 22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옛날 중국의 순 임금이 신하들을 모아 놓고 항아리에 물을 부으라고 명령을 했답니다. 그런데 밑 빠진 독이라 신하들은 마지못해서 얼마간 물을 길어 붓는 척 하다가 손을 놓고 불평을 했습니다. 그러나 유독 한 신하만은 묵묵히 물을 길어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었습니다. 우물의 바닥이 드러날 정도였지만, 그 신하는 계속 물을 길어서 부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두레박을 우물 속으로 던져 넣었을 때, 무언가 걸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상히 여겨 그 물건을 꺼내었는데, 그것은 바로 금덩어리였습니다. 신하는 그 금덩어리를 임금에게 가져갔고, 임금은 자신의 말에 순종한 이를 위해 넣어둔 상이라며 그 충성스런 신하에게 금덩어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의로우신 주님은 사람이 측량할 수 없는 선물을 우리 앞에 예비하신 분입니다. 신하가 임금에게 받은 은혜처럼,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찾을 수 있고 창고에 가득채워지는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눅19장 17절에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습니다.
주인에게 충성된 종 둘은 다 상당한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서 부지런하고 충성된 사람들은 복되게 하는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충성된 종들은 그들이 한 충성에 비례하여 우선권을 받았습니다.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불손종하지 않고 겸손하고 정직하게 밑천으로 이(利)를 남기기 위하여 힘을 썼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충성하는 사람들은 낮게 시작하기를 기꺼이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엎드릴 줄 아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엎드리는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엎드림은 자신을 낮추는 자세이며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는 자세입니다. 엎드림은 겸손이며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남을 자기보다 높게 여기는 마음의 자세가 겸손입니다. 주어진 것에 자족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억울한 일을 만나도 억울해 하지 않고,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려는 자가 겸손자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그동안 받은 은혜만으로도 오히려 과분해 하는 자세가 겸손입니다 하나님은 엎드려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엎드리면 예전에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엎드리면 아침 이슬이 보입니다. 영롱한 이슬 속에 담긴 우주의 신비를 보게 됩니다. 엎드리면 작은 풀꽃 속에 담긴 하나님의 창조 솜씨를 보게 됩니다. 엎드리면 어려움 중에 있는 사람들의 눈물이 보입니다. 엎드리면 쓰러져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의 아픔이 보입니다. 엎드리면 엎드려 기도하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엎드리면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님의 눈길을 마주 대하게 됩니다. 조금만 낮추어도 모든 것은 달라집니다. 작은 차이를 통해 큰 차이를 만들어 내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조금만 낮추면 행복해집니다. 조금만 낮추면 스스로 만족하게 됩니다. 높은 데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는 원망이 많습니다. 그러나 낮은 데 마음을 두는 사람에게는 감사가 넘칩니다. 눈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그런 까닭에 눈이 높은 사람은 많은 것을 소유했다고 할지라도 실상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부요함은 소유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눈높이에 의해 결정됩니다. 부요함은 마음의 풍성함에 의해 결정 됩니다. 엎드림과 낮음의 절정은 경배에 있습니다. 경배란 하나님 임재의 영광 앞에 엎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예배의 모습 또한 엎드려 경배하는 모습입니다. 계시록 7장 11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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