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아 돌로로자 (마27:27-36)
본문
예루살렘에는 비아 돌로로자(Via Dolorosa)라는 길이 있다. 이 길은 빌라도가 예수님을 재판했던 법정에서부터 골고다에 이르는 약 8백 미터가 되는 길을 가리키는 라틴어이다. 비아는 길을 뜻하고, 돌로로자는 슬픔, 고난을 뜻한다.
그러므로 비아 돌로로자라는 말의 뜻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 밖으로 나가 골고다라는 처형장으로 가신 그 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달리 십자가의 길이라고도 한다. 이 길은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서 빌라도의 법정 자리를 제1지점으로 하여 골고다 언덕 정상을 제14지점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이 길이 지금은 양쪽에 상점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마치 서울의 남대문 시장을 방불케 한다. 주님이 걸어가신 비아 돌로로자 즉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회상하며 그 뜻을 생각해 보자.
첫째로 생각할 것은 왜 비아 돌로로자로 걸어가셔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비아 돌로로자는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이 길이 좋아서 간 것도 아니다. 마 26:39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아셨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코 비아 돌로로자라는 고난의 길은 아니었다. 될 수 있으면 이 길을 피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대치되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버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자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자원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억지로 하지 말자.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비아 돌로로자의 고난은 특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고난은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비아 돌로로자는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예수님은 쇠붙이나 동물의 뼈가 붙어있는 가죽채찍을 맞았다. 한 번 채찍을 칠 때마다 살점이 튀는 무서운 채찍을 맞으셨다. 머리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이 꽉 조여오며 고통을 더한다.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언덕을 올라야 한다. 마침내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십자가에 달리면 대개 사흘 정도 버티나 일주일을 버틴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채찍으로 몰골이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색을 띠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고통을 겪으시다가 운명하셨다. 이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또한, 비아 돌로로자는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그들 중에는 한 때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배반했다. 그리고 삼년 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킨 사랑하는 제자들도 배반하고 도망갔다.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했을 때 받는 정신적 고통이 어떠한지 아는가 가룟 유다는 스승을 팔아 넘겼다. 그것이 정치적 이유든, 돈 때문이든, 여하튼 유다는 스승을 팔아 넘겼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말세가 짙어가니까 선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있긴 하다. 예수님은 제자의 배반이라는 쓰디쓴 고통을 맛보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통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심지어 사람들이 조롱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해도 참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앙으로 고통과 고독을 극복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 최후의 보루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탄식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다. 사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신 철저한 죄인이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고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말했던 것이다. 세상 죄를 진 죄인이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고통의 최고 절정을 맛보셨다.
셋째로 비아 돌로로자는 그 끝이 죽음, 곧 사형에 이르는 길이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비록 현재 고난이 있다 해도 언젠가 이 고난이 밑거름이 되어 성공이 있고 복락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속담에 고생 끝에 낙(樂)이란 말이 있다. 만일 고난 뒤에 낙이 보장되어 있다면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 고생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의 끝에 잔인한 사형대가 준비되어 있고, 죽음이 그 검은 미소를 띠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에 대한 대가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길, 오히려 수고의 대가로 쓴 열매가 기다리고 있는 길, 이것이 바로 비아 돌로로자이다. 그러기에 이 길은 좁은 길이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다. 이 길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요, 전혀 인기나 보상과는 상관없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이러한 절대 절망의 길, 절대 허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다.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은 결코 이 지상에서는 그 끝이 보장되어 있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 우리는 이런 길을 걷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비아 돌로로자 저 너머 또 하나의 길이 있는 것을 보셨다.
그 길은 생명의 길, 부활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사람들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비아 돌로로자의 끝엔 죽음 외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길을 걷다가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면 비아 돌로로자 너머 생명의 길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은 마16:21에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고난과 죽음을 예견하시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아 돌로로자의 고난과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는 생명의 길이 열려 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삶에서는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 어떤 보상이나 기대를 바라지 않는다. 마음을 다 비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빛으로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아 돌로로자라는 말의 뜻은 고난의 길이다. 예수께서 몸소 십자가를 지시고 성 밖으로 나가 골고다라는 처형장으로 가신 그 길을 가리키는 말이다. 달리 십자가의 길이라고도 한다. 이 길은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서 빌라도의 법정 자리를 제1지점으로 하여 골고다 언덕 정상을 제14지점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신 이 길이 지금은 양쪽에 상점이 빽빽하게 들어차서 마치 서울의 남대문 시장을 방불케 한다. 주님이 걸어가신 비아 돌로로자 즉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회상하며 그 뜻을 생각해 보자.
첫째로 생각할 것은 왜 비아 돌로로자로 걸어가셔야 했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비아 돌로로자는 가지 않을 수도 있는 길이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은 이 길이 좋아서 간 것도 아니다. 마 26:39에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이 고난의 길을 걷게 되었는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분명히 아셨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결코 비아 돌로로자라는 고난의 길은 아니었다. 될 수 있으면 이 길을 피하고 싶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시는 것이었다. 예수님 자신의 뜻과 하나님의 뜻이 서로 대치되었다. 이때 예수님은 자신의 뜻을 버렸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자원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십자가를 자원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자원한 것은 십자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 억지로 하지 말자. 기꺼이 하나님의 뜻을 따르자.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둘째로 생각할 것은 비아 돌로로자의 고난은 특이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의 고난은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이다.
비아 돌로로자는 육체적으로 너무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예수님은 쇠붙이나 동물의 뼈가 붙어있는 가죽채찍을 맞았다. 한 번 채찍을 칠 때마다 살점이 튀는 무서운 채찍을 맞으셨다. 머리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이 꽉 조여오며 고통을 더한다. 무거운 십자가를 끌고 언덕을 올라야 한다. 마침내 양손과 양발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높이 달리셨다. 십자가에 달리면 대개 사흘 정도 버티나 일주일을 버틴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채찍으로 몰골이 망가져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사색을 띠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6시간 동안 고통을 겪으시다가 운명하셨다. 이 고통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또한, 비아 돌로로자는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다. 그들 중에는 한 때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은혜를 입은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침묵하고 있었을 것이다. 군중들이 예수님을 배반했다. 그리고 삼년 동안 가르치고 훈련시킨 사랑하는 제자들도 배반하고 도망갔다.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배반당했을 때 받는 정신적 고통이 어떠한지 아는가 가룟 유다는 스승을 팔아 넘겼다. 그것이 정치적 이유든, 돈 때문이든, 여하튼 유다는 스승을 팔아 넘겼다. 이것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 말세가 짙어가니까 선생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학생이 있긴 하다. 예수님은 제자의 배반이라는 쓰디쓴 고통을 맛보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통은 여기서 그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심지어 사람들이 조롱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반을 당해도 참을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이러한 신앙으로 고통과 고독을 극복한 사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이 최후의 보루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이렇게 탄식하셨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27:46).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말이다. 사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신 철저한 죄인이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고서도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1:29)고 말했던 것이다. 세상 죄를 진 죄인이기에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고통의 최고 절정을 맛보셨다.
셋째로 비아 돌로로자는 그 끝이 죽음, 곧 사형에 이르는 길이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비록 현재 고난이 있다 해도 언젠가 이 고난이 밑거름이 되어 성공이 있고 복락을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견딜 수 있을 것이다. 속담에 고생 끝에 낙(樂)이란 말이 있다. 만일 고난 뒤에 낙이 보장되어 있다면 현재의 고난을 기꺼이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 고생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이 슬픔의 길, 고난의 길의 끝에 잔인한 사형대가 준비되어 있고, 죽음이 그 검은 미소를 띠고 기다리고 있었다. 수고에 대한 대가가 보장되어 있지 않은 길, 오히려 수고의 대가로 쓴 열매가 기다리고 있는 길, 이것이 바로 비아 돌로로자이다. 그러기에 이 길은 좁은 길이지, 결코 넓은 길이 아니다. 이 길은 사람들이 찾지 않는 길이요, 전혀 인기나 보상과는 상관없는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하는 자들은 이러한 절대 절망의 길, 절대 허무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다. 예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16:24)고 하신 말씀의 뜻이 여기에 있다.
진리와 생명에 이르는 길은 결코 이 지상에서는 그 끝이 보장되어 있지 않을 때가 많다. 지금 우리는 이런 길을 걷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비아 돌로로자 저 너머 또 하나의 길이 있는 것을 보셨다.
그 길은 생명의 길, 부활의 길이다. 그러나 이 길은 사람들 눈에 쉽게 보이지는 않는다.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비아 돌로로자의 끝엔 죽음 외엔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이 길을 걷다가 돌아서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면 비아 돌로로자 너머 생명의 길을 바라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은 마16:21에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사람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하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이미 고난과 죽음을 예견하시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아 돌로로자의 고난과 죽음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 바로 그 사람에게는 생명의 길이 열려 있다. 이 세상에서, 자기의 삶에서는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받아 들인다. 어떤 보상이나 기대를 바라지 않는다. 마음을 다 비운다. 그때 하나님의 은혜로운 빛으로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을 보게 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진리를 제대로 파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는 죽음 너머에 있는 부활의 길, 생명의 길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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