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가난한 사람인가 (눅21:1-4)
본문
사람들에게 가장 큰 시험거리는 뭐니뭐니 해도 돈 문제입니다. 정직한 공부원이 돈의 유혹을 받아 공직 비리를 저지릅니다. 정숙한 여인이 돈의 유혹을 받아 몸을 팝니다. 한창 밝게 자라나야 할 청소년이 돈의 유혹을 받아 각종 범죄를 저지릅니다. 돈 때문에 중학교 2학년 학생이 십대 소녀들을 윤락가에 알선하는 일을 하기도 합니다. 농부의 돈의 유혹 때문에 몸에 해로운 줄을 알면서도 채소에 맹독성 농약을 사용합니다. 이 외에도 돈 때문에 저지르는 비리는 많습니다. 오죽하면 성경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6:10)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겠습니까 이러다 보니 성도들은 교회에서 돈 문제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설교자가 이 주제를 건드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나도 자꾸 언급하는 것이 거북스럽지만 본문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현금과 관련해서 밝히지 안을 수 없는 진리를 몇 가지 소개하겠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헌금하시는 것을 지켜보십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헌급하는 것을 보신다는 사실을 두 차례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도 보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헌금에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헌금은 하지 않지만 그 대신 다른 면에서 잘하면 되겠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헌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헌금하는 것을 보기 원하십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자들의 예물과 그 양을 상세하게 적어 놓은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록해 놓으셨겠습니까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왕상3:4).
둘째,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질을 중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 드리는 것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칭찬하시며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과부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녀가 많이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많이 드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드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녀에 앞서 여러 사람들이 헌금을 했지만 그분의 주의를 끌지 못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이 내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도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 근거를 다음 구절에서 제시하셨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의 기준으로 볼 때 헌금의 많고 적음은 그 액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드리고 나서 남은 것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 날 헌금한 부자들은 큰 액수를 드렸지만 남은 것이 여전히 풍족하나 과부의 경우 지극히 작은 것을 드렸지만 남은 것이 없으므로 가장 많이 드린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마리아는 소중히 간직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을 위해서 깨뜨렸습니다. 그것은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따라서 사용해도 되었을텐데 그 전부를 주님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결혼을 위해서 준비해 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정말 “많이” 드린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드리는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남겼는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지 보고 계십니다. 어떤 형편에서 드리는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헌금에 어떠한 희생이 깃들었는지 보고 계십니다. 같은 액수라도 남편의 심한 반대 중에서 드려지는 것과 순탄하게 드려지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믿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도 헌금하기를 원하십니다. 목사에게는 가난한 사람은 헌금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기치 않던 일로 경제적 압박을 받는 사람에게 당분간 헌금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헌금을 적극 반대하는 불신 배우자를 둔 사람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경우를 전혀 고려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말리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떠한 형편에 처했든지 드려야 한다는 것을 그분께서 기정사실로 이해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과부가 빈털털이가 되기를 결코 원치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틀림없이 그녀가 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헌금하는 것을 만류하시지 않은 것은 헌금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복을 받는 길임을 믿으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행하 하나님께서는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분의 일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믿음 분량대로 십분의 일을 드릴 수도 있고 그 이상을 드릴 수도 있고 본문의 과부처럼 전부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와 우리 자신을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가지고 있어도 가난할 수 이쏘 가진 것이 별고 없어도 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드리지 못하는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 과부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다니며 동냥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또 일을 하여 생계에 필요한 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는 헌금하시는 것을 지켜보십니다. 본문은 주님께서 헌급하는 것을 보신다는 사실을 두 차례나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셨습니다. 가난한 과부가 두 렙돈 넣는 것도 보셨습니다. 이것은 그분께서 헌금에 관심을 가지고 계심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헌금은 하지 않지만 그 대신 다른 면에서 잘하면 되겠지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헌금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헌금하는 것을 보기 원하십니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린 자들의 예물과 그 양을 상세하게 적어 놓은 경우가 적지 않게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기록해 놓으셨겠습니까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왕상3:4).
둘째, 예수님께서는 헌금의 질을 중시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 드리는 것에 주목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칭찬하시며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예수님께서 과부를 칭찬하신 이유는 그녀가 많이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 많이 드리는 것에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드리는 사람이 누구인지 관심을 가지신 것입니다. 그녀에 앞서 여러 사람들이 헌금을 했지만 그분의 주의를 끌지 못한 것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많이 내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사실 때문에 그분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도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많이 넣었다고 말씀하신 근거를 다음 구절에서 제시하셨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 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주님의 기준으로 볼 때 헌금의 많고 적음은 그 액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드리고 나서 남은 것에 의해서 좌우됩니다. 그 날 헌금한 부자들은 큰 액수를 드렸지만 남은 것이 여전히 풍족하나 과부의 경우 지극히 작은 것을 드렸지만 남은 것이 없으므로 가장 많이 드린 것이라는 설명입니다. 마리아는 소중히 간직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님을 위해서 깨뜨렸습니다. 그것은 300데나리온 이상의 가치가 있는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조금만 따라서 사용해도 되었을텐데 그 전부를 주님을 위해서 사용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결혼을 위해서 준비해 둔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정말 “많이” 드린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녀의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13)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드리는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남겼는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드리는지 보고 계십니다. 어떤 형편에서 드리는지 보고 계십니다. 우리의 헌금에 어떠한 희생이 깃들었는지 보고 계십니다. 같은 액수라도 남편의 심한 반대 중에서 드려지는 것과 순탄하게 드려지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고 믿습니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도 헌금하기를 원하십니다. 목사에게는 가난한 사람은 헌금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기치 않던 일로 경제적 압박을 받는 사람에게 당분간 헌금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헌금을 적극 반대하는 불신 배우자를 둔 사람에게 적당히 하라고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헌금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경우를 전혀 고려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드리는 것을 아시면서도 말리시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어떠한 형편에 처했든지 드려야 한다는 것을 그분께서 기정사실로 이해하셨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과부가 빈털털이가 되기를 결코 원치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틀림없이 그녀가 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헌금하는 것을 만류하시지 않은 것은 헌금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물질적인 복을 받는 길임을 믿으셨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행하 하나님께서는 전부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십분의 일을 요구하실 뿐입니다. 우리는 개인의 믿음 분량대로 십분의 일을 드릴 수도 있고 그 이상을 드릴 수도 있고 본문의 과부처럼 전부를 드릴 수도 있습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드리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다는 것은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가 누구와 우리 자신을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많이 가지고 있어도 가난할 수 이쏘 가진 것이 별고 없어도 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드리지 못하는 것은 가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드리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헌금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이 과부는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실 줄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저기 다니며 동냥한 것이 아니라 그 후에 또 일을 하여 생계에 필요한 것을 얻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결코 가난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부유한 사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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