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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란 무엇을 말하는가? (마28:19-20)

본문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세 분이시다”라는 표현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한국 교회는 지금까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이 숫자적 개념으로 강조되어서 실제적으로 설명하려는 많은 부분들을 놓쳐 버렸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것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했을 때 가장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늘에는 누가 계셨는가 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삼일 간 죽음 아래 계셨다. 그러면 그 삼일 간은 누가 천하 만물을 다스렸는가 이렇게 하나님을 한 분이라고 했을 때 수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 성경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말씀은 오직 하나님만이 참된 신이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만이 唯一하신 신이라는 말이다. 다른 신은 없고 하나님만이 唯一하신 신이라는 뜻이지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뜻은 아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唯一神이지 單一神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시다’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과 성령의 신성, 즉 예수님과 성령이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게 된다. 이것은 단일신론이라 하여 역사 이래 계속 이단으로 정죄되어 왔다. 성경은 우상을 섬기는 것은 이단으로 취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되심을 부인하는 것을 똑같이 이단으로 취급한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여러가지 성경적 증거가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이 말씀을 잘 살펴보면 지금 구한 이가 있고, 그것에 응답하신 이가 있고, 그리고 응답하시는 이가 보내시는 이가 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
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
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
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여기에서도 권세를 주시는 이와 받는 이가 각각 다른 존재로 묘사되고 있고, 세례를 줄 때에도 아버지, 아들, 성령을 구분하여 언급하고 있다.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
이 이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
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6-7)”
예수님은 자신과 아버지를 구분하고 있다.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
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
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 16:7)”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고 예수님에게서도 보내심을 받는다. 결코 동일인이 아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있는 가장 근접된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은 ‘3인격체’ 즉 ‘구별된 3위’이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함께 호칭할 때에 “세 하나님”이나 “삼신”이라고 부르지 않고 삼위라 함이 적절하다. 그것은 또한 하나이면서 셋이라는 숫자적 신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A.D 35년 니케아 회의에서 하나님은 숫자적으로 한 분이 아니라 ‘3 인격체’라는 즉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라는 공식적인 신조가 채택되었다. 이것이 3위일체에 대한 최초의 정통적 신조이다. 또한 이 신조를 기초로 만들어진 찬송이 9장 “거룩 거룩 거룩”이다.
이제 ‘하나’라는 개념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살펴보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요 10:30)”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만약 숫자적으로 하나라는 의미로 하셨다면 너희가 지금까지 믿었던 하나님이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셔야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셨다. 그러면 ‘하나’라는 말의 개념은 무엇인가 영광과, 존귀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모든 신의 속성이 똑같다는 의미이다. 즉 본질에 있어서 하나라는 뜻이다. 이런 의미로 ‘하나’라는 표현이 사용된 증거가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
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6-7)”
우리가 왜 자꾸 ‘숫자적으로 하나이다’라고 고집하는가 하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성과 그 사역에 대한 보호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숫자적으로 한 분이라는 이론이 우리에게 단일신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단일신론이라는 것은 숫자적으로 하나님이 한 분이라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단이다. 단일신론은 역사적으로 양자론과 양태론으로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양자론은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성령을 보내셨으므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은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원래 인간이셨는데 성부 하나님께서 그의 영으로 인간 중에서 독특하게 불러내셔서 아들을 삼으신 자로서 인간이로되 인간을 초월한 자”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신이 아니었고 인간이었는데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함으로 그의 영을 받아 우리가 앞으로 완성될 모습으로 변한 신같은 인간이라고 한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을 피조물로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신 것과 그가 사람으로 오신 것, 이 둘 중 하나라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요, 이단이라고 말한다.
또 단일신론은 양태론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양태론이란 한 분 하나님이 구약시대에는 성부 하나님으로, 신약시대에는 성자 예수님, 현 교회시대에는 성령 하나님으로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는 것이다.
삼위일체에 대하여 가질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또 다른 오해가 있다. 이것 역시 또 다른 양태론에 대한 설명이다. 태양은 하나이지만 빛이 있고, 열이있고, 태양 그 자체가 있듯이 삼위일체가 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청난 오해를 야기시킨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이 각각 1/3이 되어 3분이 모두 모여야 하나가 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모득이다. 3위 하나님은 각각 홀로 완전하시며 부족함이 없으시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동등하게 권위가 있으시며, 전능하시며, 사랑이시고, 거룩하시다. 이것이 왜 이해가 안되는가하면 인간의 이해와 깊이를 넘는 신비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3위 하나님이 각각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
3위의 하나님은각기 구별된 존재이시며, 3위 하나님이 각각 동일한 경배의 대상이시며, 동일한 찬송의 대상이시다. 성경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의 명령이 동등한 권위를 지니고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런 의미로 3위일체란 3인격체이신데 그 본질에 있어서 우열의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부에 있어서 남녀의 차별은 없으되 가정을 남편이 대표하는 것처럼 질서상 1위, 2위, 3위가 있을 뿐 본질에서는 차이가 없다.
3위일체는 신비 중의 신비요 우리가 천국에 갈 때까지는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런 가능한 근접된 설명을 시도하는 이유는 성령 하나님의 신성과 인격이 모호한 것이 그동안 성령운동에 나타난 시행착오들의 근본적 이유였기 때문이다. 결국 삼위일체를 이해하는데 초점을 모아야 할 신비는 숫자적으로 어떻게 하나이면서 셋이냐 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독립된 개체인데 본질이 동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숫자적으로 하나인 본질을 삼위가 공유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별된 삼위의 본질이 어떻게 차이가 없이 동일하냐의 신비인 것이다.
제 2 강 성령과 불로써의 세례(롬 6:3-8)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
령과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12)”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 자신이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5)” 말씀하시므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자신을 말씀하고 있다.
세례란 과연 무엇인가 세례란 동일화, 동질화(idenfication)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공생애를 세례받는 일로부터 시작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영광을 잠시 보류하시고 죄인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죄는 없으신데 죄인인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죄인과 등등시 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세례 요한의 물세례는 원래 우리 인간이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케 하는 자리로 초대하는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요한의 물세례를 받으심으로, 그 물세례 아래 친히 들어가심으로 자신도 죽어 마땅한 인간들과 동등한 위치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시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표하여 그 죄를 한몸에 지고 돌아가셔야 우리 인류의 죄가 속죄되는 것이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인간의 몸을 입지 않으시고 인간과 동등시 되지않는 상태에서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의미로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바 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
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물어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
물로 받으리니(행 2:37,38)”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의 물 세례에 동참하심으로 죄인과 동일시 되었듯이,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의 길에 ‘동참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셨다.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으로 그분과 동일시 됨으로써 우리도 죽음을 이기고 역시 부활할 것이다. 이 시간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세례란 우리를 누구와 연합시켜 어떤 자리로 통과시키는가의 방법이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
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명 뿐이
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
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0-21)”
물은 모든 육체를 그 아래 삼켜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나 배만은 유일하게 물이 없으면 뜨지 못한다. 이와같이 물은 어떤 것에는 사망을 초래하고 어떤 것에는 힘이 되기도 한다. 우리 자체로서는 물로 인해서는 그 아래 삼켜져서 사망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존재들이지만 배 안에 있자 물 위로 뜨게 된다. 우리 때문이 아니라 배 때문에 뜨게 되는 것이다.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고전 10:1-2)”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는 홍해가 있다.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여기에서 모세는 유일하게 홍해를 건널 수 있는 인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스라엘 족속이 모세와 합하여 건너면 무사히 홍해를 건널 수 있다. 이제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표현하고 있다. 불이란 물과 대조를 이루는 말씀이다. 불은 우리 모두를 심판 아래, 사망과 멸망
아래 가두게 하는 역할을 한다. 불은 태우는 것, 즉 가치없는 것을 태우고 생명 아닌 것을 소멸시키는 심판을 말한다. 불이 심판을 의미하는 것은 물이 물 위에 뜰 수 없는 것을 그 아래 삼켜 가두는 것과 같은 부분을 설명한다. 물은 뜰 수 없는 것을 가두는 것 외에 다른 한편 배를 띄운다. 물이 가두면서 또 배를 띄우듯이 동일한 역할을 성령이 감당하신다. 세례를 줌으로써 우리가 나 자신은 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을 자, 심판을 받을 자들이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방주 안에 들어감으로써 물로 말미암아 그것 위에 뜰 것을, 세상으로부터 분리될 것을, 분리된 자들인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친히 주시는 ‘성령과 불’ 세례는 불에 타버릴 것들로 불로 태워 없이 하고 성령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같이 있는 자로서의 그 일이 신앙고백적으로 동참하는 자임을 하나님께서 인치시며 또 우리에게 신앙고백으로 요구하시는 세례인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물이 방주를 띄운 것과 같은 그런 역할을 어떻게 요구하는가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
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
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롬 8:9-10)”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성령이 계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면 둘이 연합이 되어 하나가 되기 때문이다. 성령과 우리가 연합하면 나는 혹시 죄, 저주, 사망 아래 있을 수 있을지 몰라도 성령은 절대로 그러실 수 없기 때문이다. 성령은 우리를 죄와 사망과 저주로부터 꺼내실 보증으로 와 계신 것이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는 것이 밖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고 오직 내가 예수를 믿으며 주라 시인하여 그 앞에 무릎 꿇는 것으로 밖에 확인이 안되는 이런 의미의 성령의 내주가 바로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할 때의 바로 그 성령세례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
성령을 죄와 사망으로 묶을 수 없다.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면 그와 동일시 된 우리 역시 죄와 사망으로 묶을 방법이 없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러 오셨고 또 그 일을 이루셔서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셨으므로 가능케 되었다.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면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고 계신다. 우리가 죄범한 연약한 존재, 죽을 육체로되 우리 안에 계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우리도 또한 살리실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일차적인 성령세례라 한다.
제 3 강 오순절 성령 강림의 의미(행 2:1-4)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
시더라(요 7:39)”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위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아직 저희에게 성령이 계시지 않는다고 했고, 수난 당하시고 부활하신 이후에야 저희를 향하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하신다. 그러나 실제로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것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오순절에 이르러서이다.
성령께서 공식적으로 이 땅에 모습을 드러내며 신자들에게 임하신 것이 하필 이면 오순절이었을까 오늘은 오순절의 의미와 그날에 성령강림의 의미를 살펴보자. 오순절은 성경에 의하면 ‘칠칠절’ 또는 ‘맥추절’이라고 한다. 칠칠절이라고 하는 이유는 유월절부터 일곱 안식일을 지나기 때문이다. 맥추절이라고 하는 것은 그때가 보리 추수기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는 달력에 의하면 정월이 우리의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이다. 이달을 아빕월이라고 한다. 유월절은 4월 첫주쯤이다.
그러므로 맥추절은 5월 말이 된다. 오순절이라는 것은 안식일에서 그 개념이 나온다.
“칠칠절 곧 맥추의 초실절을 지키고 가을에는 수장절을 지키라(출 34:22)”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하여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출 23:16)”
“안식일 이튿날 곧 너희가 요제로 단을 가져온 날부터 세어서 칠 안식일의 수
효를 채우고 제 칠 안식일 이튿날까지 합 오십일을 계수하여 새 소제를 여호
와께 드리되(레 23:15,16)”
우리나라에서 “순”은 열흘의 개념이다. 그래서 오순절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사실 성경은 오십일 보다는 칠칠절, 일곱 안식일. 안식일 자체가 7일이므로 그것을 일곱번 합하여 칠칠절, 이것에 훨씬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
안식일을 출애굽기 20장에 나오는 십계명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께서 온 천하 만물을 만드신 날 수를 기념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쉰다는 것,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레 되는 날 쉼으로써 앞의 엿새 동안에 하나님께서 일을 하셔서 온 천하만물을 만들었다는 신앙고백을 형식화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부부 중에 남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고, 아내는 신자의 상징이 된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질서의 문제이다. 구약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남자를 먼저 지으시고 그 다음에 여자를 지으셨다는 순서상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 성경의 질서를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우리를 만든 창조주라는 신앙의 고백을 형식화하는 것이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이다.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엿새 동안
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
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네 남종이나 네 여종으로 너 같이 안식하게 할
지니라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럼으로 너의 하나님 여
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신 5:12-15)”
여기 안식일의 개념 속에는 우리를 종되었던 곳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을 기념하는 것이 첨가되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이는 너와 너희 대대의 표징이니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인줄 너희로 알게 함이라(출 31:12-13)”
여기에서는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 말한다. ‘거룩’하다는 성경의 원뜻은 ‘구별한다’는 것이다. 이 구별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뜻에서의 구별이다. 종되었던 애굽에서 구원하여 거룩하게 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소유가 되게 한 것을 기념하는 의미에서의 안식일의 개념이 여기서 나오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은 순종치 않아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안식에 관한 것은 사람이 조건을 갖추어 들어오는 것이기 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시려고 하시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말하여 주는 말이다. 안식이 언제 이루어졌는가 하면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이다. 바로 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건과 관계없이 하나님이 태초에 이미 이루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안식일을 지킴으로 일상의 규칙으로 증거하고 있는 것 뿐만이 아니라 거룩케 하는 하나님, 종 되었던 애굽에서 구해낸 하나님인 것을 즐거워 하는 절기로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주신 일의 결과를 감사하며, 즐기며 돌아보는 절기로 안식일이 있는 것이지 안식일을 지킴으로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를 얻는 절기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일 여호수아가 저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
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8-9)”
지금 이스라엘 백성을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꺼내어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으로, 즉 가나안 땅을 안식하는 장소로 하나님께서 일차적으로 설명하셨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전쟁이었다. 즉 이런 일들은 다 장래 일의 그림자로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가나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식으로 이야기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구원을 얻어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 지금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 안식에 들어간 셈이다. 그러나 그 구원을 얻고 완성된 안식은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서야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안식을 누리기보다는 전쟁이 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자 전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세상과 결별하여 늘 영적인 싸움을 해야 한다. 우리도 늘 영원한 안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에 들어간 것에 있어서, 만약 지리적으로, 사건적으로 가나안이 안식의 땅이었다면 더 이상 안식일을 지킬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도 안식일을 계속 지킨 것을 보면 그곳이 목적한 땅이거나, 목적된 장소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은 상징일 뿐이다. 애굽이 아닌 곳, 종 되었던 곳이 아니라 자유민이 되는 것으로의 어떤 상징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 들어가 있는 정도이며, 그와 동행하며, 그가 내 안에 와 계신 정도이며, 약속된 나라를 소유했고, 하나님의 자녀라는 인침을 받았을 뿐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자 젖과 꿀이 흐르는 이야기는 없고 늘 싸우는 이야기 밖에 없다.
안식일을 지키라 명령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가 우리에게준 약속을 절기화 하며, 의식화 규칙화 하신다. 안식일을 지키게 함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소유로 삼아 죄와 악과 더러움과 부패함에서 꺼내어 안식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간섭, 즉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이 더욱 강조된 것이 희년이다.
희년과 오순절의 개념은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안식일을 확대한 것이 안식년이다. 안식년을 더 확대한 절기가 희년이다. 희년은 안식년을 일곱번 반복한 49년 다음 해인 50년째를 말한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년이 일곱번인즉 안식년 일곱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
라 이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
족에게로 되돌아갈지며 그 오십년은 너희의 희년이니 너희는 파종하지 말며
스스로 난 것을 거두지 말며 다스리지 아니한 포도를 거두지 말라 이는 희년
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 너희가 밭의 소산을 먹으리라(레 25:8-12)”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사고 팔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가나안에 들어와서도 제비를 뽑아 전부 땅을 나누어 주었다. 설혹 땅을 팔았다 하더라도 희년에는 반드시 원주인에게 돌려주게 되어 있다. 땅이 있다는 것은 이 사람들에게 영원한 처소가 있다는 뜻이다. 다시 기업이 생겼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외인이되고 타락해서 이방인이 되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 기업이 없고 소망없는 자인데 영원한 처소를 다시 돌려받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땅을 판자가 다시 돌려 받는데 있어서 댓가를 치루는 것이 아니라 희년에는 무조건 아무런 댓가없이 돌려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것을 규례와 절기로 반드시 지키도록하셨다. 규례를 지킴은 이미 있었던 것을 추억하게 하는 의식이지 그 규례를 지킴으로 약속이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아직도 규례를 지키고 있는 것은 앞에서 한 것들이 아직 상징이었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영적으로 실제로 죄와 사망의 종되었던 곳에서 꺼내어 하나님의 자녀삼을 일이 상징화 되어야 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다.
노예로 부렸어도 희년에는 놓아 주어야 한다. 만일 그가 속하여 돈을 내려면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희년까지를 계산하여야 한다. 희년은 종이 풀리는 때이고 기업을 회복하는 때이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고, 배반하고 죄 가운데 빠진 모두를 회복시키는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 표현을 ‘종되었던 것’과 ‘종에서 자유를 얻는 것’으로 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서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성령님이 오순절에 오시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서 어떻게 친히 죄와 사망의 종에서 꺼내셨는가를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죄와 사망의 종노릇 하던 곳에서부터 꺼냄을 받았다는 것이 어떻게 증명되는가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있던 우리에게 성령님이 오실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제 4 강 성령강림 그 자체가 갖는 메세지(요엘 2:28-32)
신약시대의 여러 특징 중 하나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을 부어 주신다고 하는 점이다. 신약시대와 구약시대는 약속된 것이 이루어진 것, 즉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이루어진 것과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분기점으로 나뉘어 진다. 하나님께서 안식일, 안식년, 희년, 맥추절, 칠칠절 등 절기로써도 요구하시고 강조하신 것과 같이, 그가 이루시려는 구원사역은 이제 오순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일로 완성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
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
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이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창 6:1
-3)”
우리는 타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어 영적으로 사망한 자들이다.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영이 함께 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내 신을 부어 주겠다’는 말씀은 이제 신약시대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신이,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존재들로 바뀌어졌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 인간이 하나님을 직접 보면 죽게 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보면 죽는 것이 하나님의 권위와 위엄이 높아서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를 뵐 거룩과 순결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를 볼 수 있고 함께 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성령님이 오순절에 강림하셨다. 오순절이라는 절기를 주어놓고 거기에 맞추어 성령님이 그날에 임하게 하시므로, 오순절이 갖는 의미와 동일한 성령의 임하심, 즉 구원의 사역이 하나님 쪽에서 전적으로 하신 일이요 우리 쪽의 일과 결과가 아님을 확인시켜 주신다. 이것이 오순절 성령강림의 이유이다.
이번에는 성령이 이 땅에 오신것, 그 자체가 갖는 효과 즉 성령의 객관적 사역에 대하여 살펴보자.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
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
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
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
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보지 못함이요
(요 16:7-11)”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사오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요 14:16)”
그가 오신 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는 증거가 된다. 요 14:16의 표현의 초점은 성령께서 이 땅에 계시지 않다는 것의 증거가 된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는 증거가 되는가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
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며(요 1:10-11)”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세상이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다. 예수의 부활하심, 성령이 오심 그 자체가 세상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일이 잘못임을 책망하는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
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
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함이요(요 16:8-10)”
신성 모독죄로 못박아 죽인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그가 말씀하신대로 성령이 임
하셨다는 사실은 세상이 잘못했음을 말씀하는 것이다.
또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무슨 말인가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
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이름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9-10)”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었다면 돌을 버린 사람이 잘못한 것이다. 종교적인 죄목으로 그것도 신성모독죄를 걸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받으셨다면 결국 세상이 틀렸다는 말이 된다. 성령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가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이 그 존귀와 영광의 보좌에 가셔서 성령을 보냈셨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확인해야 하는가
우리가 죄인이었다는 사실,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 세상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성령이 오셨으며, 실제로 그가 계신 것, 이런 것들을 볼 때 그분이 그의 약속에 따라 일을 하셨으며, 또 하실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기뻐해야 한다. 성령강림은 개인적 신자가 갖는 주관적 체험의 문제로써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성령이 오신 그 일, 그 자체의 객관적 증거로도 우리에게 이미 커다란 경계가 되며, 힘이 되며 각성해야 되는 표인 것이다.
제 5 강 성령이 주시는세례로써의 성령세례(고전 12:12-13)
신약시대와 구약시대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성령세례에 의하여 구분된다. 요한복음 1:33을 보면 세례 요한까지는 어떤 의미에서는 구약시대이고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는 신약시대로 구분됨을 알리는 내용이 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에게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세례 요한에 의해 묘사된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큰 특징은 성령의 세례를 주실 수 있는 분이다. 여기서 ‘성령 세례’라고 할 때에 그것은 우리를 성령이 붙잡아서 어떤 다른 곳으로 우리를 이동시키는 것을 말한다. 또 성령세례가 우리가 성령에게로 가는 세례라면 다른 분에 의해서 다른 장소에서 그분과 함께 성령에게로 가는 세례라야 그 표현이 맞는다. 우리는 보통 성령세례라 할 때에 성령에게로 가는 세례, 성령 속으로 들어가는 세례로 많이 이해되고 있다. 그래서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때에 성령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는 것, 우리가 성령님 안에 파묻히는 것, 성령의 충만함이 흘러 넘치는 것으로 보통 인식하고 있다. 우리는 성령세례라 할 때에 예수님이 베푸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이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것 외에 성령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가 있다고 한다. 성령이 세례를 베푸시는 자로서의 ‘성령 세례’가 분명히 있다고 말하고 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
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
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3)”
신약의 내용을 보면 구원에 관한 이야기보다 교회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강조되고 있다. 복음서가 구원에 대하여 쓰고 있다면 구원이 이루어진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후 곧 사도행전에서는 교회가 성립되며 다니면서 복음을 전파하면 할수록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오는 것에 대한 기록이 많이 있다. 여기서 교회는 물론 무형의 교회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 하시는 일에 개개인을 불러 쓰시되 개인 개인을 불러 모아 하나의 몸으로, 신비로운 연합체로 만들어 쓰시는 그런 의미의 교회를 말한다.
구원이라는 작업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큰 일 중 하나가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부터 불러 내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상에서 죽이시는 것, 그것만이 아니라 이제 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모으는 일을 한다. ‘성령세례’라고 할 때에 성령께서 베푸시는 세례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를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덧붙이는 작업을 하신다. 이것이 성령이 베푸시는 세례이다. 구원이 취소될 수 없듯이,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대속 사역으로써 영원히 유효하듯이, 이 성령이 주시는 세례로써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도 동일하게 단 한 번으로 영원히 유효하다. 사도행전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을 기초로해서 이미 교회가 형성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성령께서 이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사 우리 모두 형제요 한 권속이요, 하나된 것을 증거하고 있으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복음은 힘을 얻어 나가고, 구원으로 말미암아 부른 모든 영혼들을 그리스도의 몸, 그 안에서 완성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또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
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위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
라(엡 1:22-23)”
개신교에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그의 몸으로 부름받은 신자들을 총칭할 때 쓰이는 말이다. 로마서 5장에서 우리가 아담 아래 있을 때에 죄와 사망 아래 있었다고 말한다. 6장에서는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와
연합하여 한몸이 되었으므로 생명 안에 있다고 말한다. 이 일이 성령의 사역,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즉 그와 연합시키는 사역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한다. 성령이 주시는 성령 세례에 의하여 우리는 아담으로부터 나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다. 성령은 예수님의 몸으로 부름받은 모든 신자들에게 있어서 생명과 삶을 유지케 하시는 분이다. 사도행전에서 언제나 성령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 8:9)”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며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덧붙이신다. 이제 우리는 죄인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은 내주하신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구원얻는 일에 대하여 우리의 의식이 없듯이,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내시는 일, 그의 몸에 덧붙이시는 일에도 우리의 인식이 없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불신자의 상태에서 신자로 들어오는 데에만 메세지의 내용이 있고 초점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들어온 다음에의 이야기도 너무나 많이 있다. 그 중에 제일 많은 것이 교회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죄인되었던 자리에서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 것까지 밖에 모른다.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신 것’에 대하여는 잘 모른다. 신분적으로 거룩하게 된 것까지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데 수준적으로 거룩에 대하여는 너무나 모르고 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머리로한 그의 영광에 걸맞는 몸을 가져야 한다.
제 6 강 예수님이 주시는 세례로써의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
일반적으로 ‘성령 세례’라 할 때에 우리는 주께서 베푸시는 세례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짐)는 그 부작용으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도 못했고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부분이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
러나리라 하시니(요 7:37-38)”
이상의 말씀 속에는 ‘충만’ ‘풍성’ ‘생수의 강’이라는 표현들이 나온다. 그리고 분명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실 ‘성령 세례’는 성령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와는 구분된다. 성령 세례는 성령이 주시는 세례와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세례로 구분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성령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서의 성령 세례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보내는 세례이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다고 했을 때의 그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는 우리 모든 신자에게 성령이 내주케 되는 의미의 성령세례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다 인식되어지거나 또 눈에 띄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구원얻는 것과는 다른 그 이상의 선물이고 그 이상의 경험이다. 이 차이를 성경에서 살펴보자.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요 15:3)”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저
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저희는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
다(요 17:6)”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
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요 17:14)”
이상을 보면 분명히 제자들은 하나님의 것이요, 그리스도의 것이요, 구원얻은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다음의 말씀들을 또 살펴보자.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
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8-39)”
여기서 성령을 받는 문제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세례로써의 성령 세례가 아니다.
왜냐하면 받을 성령을 가리켜 ‘생수의 강’이라고 묘사했는데 그것이 본인에게 인식되지 않는 정도의 것이라면 그 표현이 너무 과장되었다.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본다면 주를 믿었는데 성령이 안계신 자는 없었다. 그러나 요한복음 7장의 이야기는 주를 믿어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안계신다는 이야기다. 이 성령이 안 계신다는 묘사는 성령이 내주하시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신약시대의 성령의 부어주심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신구약 성경을 막론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성령이 내주해 계신다. 그래서 신.구약의 차이도 성령의 내주에 관한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충만에 관하여이다. 이것이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구분이 된다.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할 것
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요엘 2:28-30)”
중생(성령이 베푸시는 세례+성령의 내주)과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베푸시는 성령세례(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지 못한 자는 구원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는 외적으로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래서 저 사람에게 분명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을 주위의 사람도 알 수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외부적으로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라고 해서 꼭 표적이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분명히 해야할 것은 성경의 약속과 체험과의 관계이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과 체험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따라 중대한 실수를 범하기도 한다. 성경이 약속한 것 중의 몇 가지 체험 때문에 그것만을 가지고 나머지 성경이 약속한 것들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체험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약속하신 것중 체험을 통해 어느 부분을 이해케 함으로써 나머지 부분들은 체험치 않고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 대표적 사건을 보자.
요한복음 20장에 도마가 부활의 현장에 있지 않음으로 의심하는 자가 되었다. 주님은 그에게 나타나셔서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하셨다.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제안하신 것들을 모두 체험할 수 없으므로 일부의 체험이나 간접 경험을 통해서라도 믿는 자들은 복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비약도 잘못을 가져올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고린도후서 12장을 보면 바울이 육체의 가시를 위하여 그것이 없애 주기를 간절히 기도했지만 병이 낫지를 않았다. 무슨 말인가 전자가 체험 몇개를 가지고, 그 체험이 약속을 어떻게 견고케 하며, 하나님이 약속한 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증거로 삼아야 하는데, 그것이 전부가 되어 약속한 것을 모두 버렸다면 후자는 체험한 것 이하로 수준을 낮추는 것이다.
기독교는 쉽게 “나의 이익이나 위해서 무엇을 해달라고 해주는 것이 아니다”하며 분명히 기독교가 갖는 초월성과 기적들을 배제해 버리는 잘못된 견해가 있다. 전자가 광신주의적 오류라면 후자는 이성주의의 오류가 된다.
우리가 분명하게 확인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믿는다라는 말이 갖는 엄청난 내용을 상고해 보아야 한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며 우리와 동행하시며,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주관하시는 이가 우리편이며, 죽은 나사로를 살려 내시고 파도를 꾸짖어 잠잠케 하시는 이가 나의 편이라는 말이 갖는 그 엄청난 내용들을 늘 자기에게 새삼스럽게 확인하여야 한다.
성경에는 뜻밖에도 성령의 부어 주심에 대한 부작용에 대하여 훨씬 많은 지적을 하고 있다. 성령 세례를 받으라는 말씀보다, 받은 성령 세례로 말미암는 그 넘쳐나는 생명력이 잘못 사용되고 있고, 충돌하고 있고, 시행되지 못하는데 대한 지적이 훨씬 더 많다. 특별히 고린도전.후서를 보면 많은 은사들이 그들에게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잘못 사용하였을 때 날카롭게 꾸중하는 것들로 가득 차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열심이 누구보다도 뛰어났던 사람이다. 그는 주와 함께 죽을 것을 장담했다. 그러나 그는 세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원함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신자들이 겪는 가장 큰 아픔은 원함은 있으나 능력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하여 얼마나 방황하며 또한 말라 있는지 모른다.
“이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요 20:19)”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제자들이 유대인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에 나타나신다. 도마는 예수님을 만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21장에서 보면 그들은 갈릴리 바닷가 어부로 되돌아 갔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보면 베드로는 하루에 설교로 5,000명을 회개시킨 사람이 된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도 여전히 겁장이로 머물러 있던 베드로를 무엇이 그렇게 능력있고 용감한 주님의 제자로 바꾸어 놓았는가 결코 부활은 아니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오리라(요 14:18)”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
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가 우리와 함께 하여 모든 것을 지키게 하실 것이다. 진심과 열심은 있으나 지킬 수 없었던 베드로에게 성령이 함께 하심으로 이제 그 진심과 열심을 행할 수가 있었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행 3:
6)”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 5:41)”
이전에도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었고 성령이 내주하시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있는 주의 자녀들인 것이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 주심)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 앞에 겸손히 무릎꿇는 자세를 취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본 몇가지 부작용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하여 얼마나 섣부른 판단을 하였는가 성경에 기록된 신자들의 삶에는 분명한 힘이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간섭이 있었다. 우리의 맥빠진, 힘없는 신앙생활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쁨과 충만한 자신감이 있었다. 우리는 그렇지를 못하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약속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성경의 지적 앞에 우리의 위치와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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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7 강 성령의 부어주심과 성령충만의 차이(요 7:37-39)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 세례(성령의 부어주심)라는 것의 성경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이 말씀에 대하여 오늘은 살펴보기로 하자.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
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
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줄 알라 하셨기에(요 1:33)”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다. 동시에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문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 즉 성령의 부어주심이 내주하심과 동일한 것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라는 것이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
러 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
하시더라(요 7:37-39)”
지금 현재의 상황은 예수님께서 아직 사역을 다 마치지 않으셨기에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 그러면 영광을 받으신 이후, 즉 대속 사역을 이루신 후의 장면들을 살펴보자.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 하여 모인 곳
에 문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
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
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19-22)”
요한복음 7장에 의하면 아직 성령이 안계시는 것이고 지금 여기서는 성령을 받으라고 친히 말씀하신다. 그러나 이 말씀은 부활하신 후 시일이 지난 사도행전의 말씀과 또 다르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
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
으나 너희는 몇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행 1:4-
5)”
이상의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께서 내주하심도, 성령세례도 가능해졌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
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
은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하시니
라(창 6:1-3)”
여기서 하나님은 내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그렇게 된 실제적인 원인은 타락에서부터이다. 우리가 구원을 생각할 때에 타락으로 인하여 우리에게 주어진 형벌에서 어떻게 회복되는가를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다. 성경은 타락한 인간이 아이 낳는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
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 5:1-2)”
여기서 아담이 아들을 낳았는데 더 이상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묘사하지 않고 자기 형상이라고 지적한다. 아담은 타락한 이후로 죄인이 되었고 그가 비록 처음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을지라도 이제 그의 후손들은 타락한 선조인 아담의 모양으로 밖에는 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은 생령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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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그러나 타락으로 인하여 6장에서는 육체가 되었다고 지적하였다. 인간들은 육체가 되었다고 말한다. 영적으로 죽어 하나님과의 교류가 끊어졌고 죄악의 노예가 되어 버렸다. 예수님은 이것을 고치시려고 오셨다. 구원이란 죄의 형벌 속에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지만 그것은 결국 죽은 영혼을 살리시는 것이다. 죽은 영혼을 살리사 마치 태초에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같이 이제 육체가 된 우리, 죄인되었던 우리를 십자가 아래 다 파묻고 새로 지으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20:22의 ‘숨을 내쉬며’라는 단어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는 사역과 예수님께서 이제 타락한 우리를 죄인의 자리로부터 구출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며, 새롭게 창조하시는 사역과 동일하다.
그러나 요한복음 20장의 이것과는 달리 구약의 요엘서에 기록된 바와 같이 구약과 신약을 구별짓는 성령님의 어떤 부어지심을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에서는 어떻게 묘사되었으며, 또한 성령의 내주와는 어떻게 다르며, 성령 충만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보아야 한다.
사도행전 8장을 보자. 빌립의 전도로 사마리아 사람들이 분명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었다는 사실이 니오고, 또한 그들이 믿은 자들인 것을 분명히 확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성령받기를 기도했다. 여기에는 분명한 구별이 있다. 우리가 사도행전 8장에서 분명히 확인하는 바는 빌립의 전도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다. 성경은 언제나 예수를 믿는 자에게 성령이 그 안에 계신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
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롬8:9)”
여기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의 설명은 성령님의 내주하심이다. 그러나 성령은 내주하시나 우리가 모를 수도 있다. 다음을 보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
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롬 8:26)”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성령이 계신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분명히 예수를 믿어서 성령님이 내주하시는 선에서 약속을 중단하고 계시지 않다. 그러나 성령 세례를 강조하는 쪽에서는 성령님의 나타나심이 없으면 아직까지 참다운 신자가 아니라는 오해를 하고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성령의 내주가 전부라고 생각하는 쪽에서도 성령 세례가 사도행전이 기록된 이 시대. 독특한 역사적 시기인 교회가 형성기인 시대에만 필요하였던 하나님의 특별한 예외적인 사건이지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거나 일반적인 약속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바울의 서신서에서는 성령 세례(부어주심)를 받은 것이 이미 보편적인 사건으로 되어 있다. 성경은 신자들이 말할 수 없는 충만함과 확신과 기쁨 속에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분명히 우리의 현재 환경이나 조건보다 더 나쁜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지금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신앙고백과 기쁨에 찬 확신이 기록되어 우리에게 증거되고 있다.
지금까지 성령 세례(부어주심)라는 것이 성령님의 내주와는 달리 분명한 경험이요, 하나님께서 분명히 우리에게 허락하신 축복이요, 모두에게 드러나는 사건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 성령 충만과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다른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
여기 사용된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표현은 권고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사하시는 은사이다. 은사란 베푸시는 쪽에서 주권적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성령 충만을 받으라는 것은 열심히 추구할 것으로 되어 있다. 성령충만은 원래 성경에서 성화의 원리로 요구되고 있다.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에게 허락하시는 것으로 그것을 받는 자에게는 분명한 기쁨이 있고 확신이 있다. 그러나 내용의 진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가지고 있는 것을 더 분명히 하고 확실히 하는 것이지 그것이 성화를 이루는 과정도 성화의 체험도 아니다. 성령 세례를 받으면 성화에 대한 큰 자극과 촉진이 되기도 하지만 그것 자체로서 내용에 있어서나 그 사건에 있어서 성화를 대신하지 않는다.
성령 충만이란 우리가 하나님을 모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모셔 그의 요구와 그의 권면과 그의 명령 앞에 자기를 끊임없이 굴복시키며 순종하며 그리스도의 요구와 원리와 명령을 나의 것으로 삼아 나가는 즉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십자가를 지고가는 문제인 것이다. 술취하지 말라는 것과 성령 충만의 비교는 술취함으로 술이 그 사람을 지배하듯이 성령이 우리를 지배하도록 성령의 휘하에 들어가라는 권면이다. 육체를 따르지 말고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이며 끊임없이 하려고 하지만 실패하곤 하며, 시행착오 속에서, 실패 속에서 다시 울고 회개하고 자기를 낮추고 채찍질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성령 세례는 그런 일에 우리를 더 자극하며 우리를 더 힘있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어떤 간섭이요 어떤 축복인 것이다. 즉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은 불가분리의 단계이다. 더 높은 성화의 단계를 위하여 성령 세례(부어주심)이 필요하다. 우리는 성령 세례(부어주심)와 성령충만의 연결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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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 강 우리에게 일어나는 변화들(행 2:46-47)
성령의 부어주심, 성령 세례는 성화의 과정도 조건도 아니다. 물론 그것은 직접적인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간접적인 효과로서 성화를 촉진하며, 자극케 하는 효과가 있다.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엡 5:18)”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체험과 경험을 주권적으로 주시는 것이다.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성화와 성령충만에 관한 것이다. 성령충만 즉 성화의 결과, 즉 성령의 열매가 있다. 여기는 분명한 사랑이 있다. 성령의 은사는 받았으나 사랑은 없을 수 있다. 성령충만=성화는 반드시 사랑을 소유하고 있다. 이것이 그동안 우리가 ‘성령의 은사’, ‘성령세례’, ‘성령의 나타나심’에 대하여 우리가 부정적인 그릇된 선입견을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큰 이유이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그는 사랑을 소유치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성령 세례나 은사나 성령의 나타나심을 부정할 수는 없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깊으신 뜻대로 행하신다. 우리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그것을 성취해야 하는 것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성화이다. 그러나 성령 세례는 우리의 의지와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쏟아부어주시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왜 주시는가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 세례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증인으로 세우시기 위하여 허락하시는 능력이다. ‘성화’가 개인적인 인품과 신앙 인격에 관한 문제라면 이 ‘성령세례’는 제 삼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의 구원의 사역에 대한 증언을 능력있게 하기 위해서 허락하시는 은혜이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
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증인되는 일에 있어서 이 성령세례는 필수적인 힘의 원리이다. 그러면 이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내적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고 외적으로는 어떤일이 발생하는지를 살펴 보자. 먼저 내적인 면으로는 어떤 일이 발생하는가
첫째는 내적으로 자기의 내면의 세계에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 감지가 생긴다.
즉 하나님 존재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말씀’이라고 설명하고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원하시는 모든 것을 설명하고, 그려내는 것은 ‘언어’ 밖에는 없다. 그러나 언어가 내용에 대하여 잘 설명할 수 있는 것과 우리가 그 내용을 가슴으로 깨닫고, 우리의 모든 전인격을 뜨겁게 하는 그런 힘과는 다르다. 내용을 논리적으로 잘 이해하고 자세히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언어가 가진 힘이지만, 우리 전 인격을 감동시키고, 우리의 가슴을 찌르는 그런 힘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알고 있는 것을 정리하여 지적으로 동의케 할 수 있는 힘을 언어가 가졌지만, 우리의 심령을 파고드는 힘은 언어가 할 수는 없다.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 필요한것이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되는 동시에 자신의 비천함에 대한 자각이 생긴다. 이 두가지는 언제나 동시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알게 되고 거기에 비해서 자신의 처절한 모습을 알게 된다.
둘째로 내적으로 기쁨과 거기에 수반되는 확신이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
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2:46,47)”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
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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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
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의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
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
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
니라(살전 1:2-5)”
우리들이 전하는 복음이 말로만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되었고, 그것을 받을 때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받았다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죽은 생명에게 전달시킬 때 우리를 쓰고 있지만 우리는 그의 손에 붙잡힌 막댓기에 불과하다. 막대기를 쓰는 사람이 없이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성령께서 직접 간섭하셔서 성령의 나타남을 나타내실 수 밖에 없다.
세째로 성령 세례를 받은 본인에게 두드러진 현상 중의 하나는 주를 영화롭게 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행 9:20)”
넷쩨로 빛과 이해가 있다.
빛이라는 말은 어둠을 대신해서 쓴다. 즉 진리에 대해 깨우침이 있고, 비범한 이해가 있다. 하나님에 대하여, 진리에 대하여, 어떤 영적인 밝음을 소유하고 명쾌한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제는 성령세례를 받았을 때 어떤 외적인 현상들이 일어나는가를 살펴 보자.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성령세례를 허락하실 때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과 그의 구원 사역에 대한 증거를 능력있게, 권능있게 하시기 위하여 허락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한 어떤 현상들 효과들 내용들이 있다는 측면에서 외적증거이다. 성령 세례를 받은 본인들에게는 물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고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서 받아
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33)”
우리는 성령의 부어주심의 외적 현상에 있어서 너무 듣는 쪽만 강조하여 방언을 너무 많이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은 방언은 ‘성령세례’의 현상이기보다는 ‘은사’쪽이다. 외적 현상 중에 “얼굴이 달라진다”는 현상도 있다. 모세가 40일 동안 하나님 앞에 올라가서 대면하고 말씀을 받고 내려오자 자신은 몰랐는데 그를 본 사람들이 얼굴을 마주보지 못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마주 대해서 모세의 얼굴에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 신앙이 진전되면 얼굴이 변한다. 성화로써 얼굴이 변한다.
다음에는 말이 달라진다. 말이라고 할 때는 우리가 하는 언어 그 자체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하는 그 말, 즉 그 내용이 능력있게 된다는 것이다. 제자들을 보라.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받음이 없이는 그들의 사역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3년 동안 그 누구보다도 많이 배웠고 준비되어 있었고, 부활을 친히 목격했으되 능력을 입히우기까지는 그들은 증인으로서 그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불가능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그들이 갖고 있는 실력과 방법으로서 실현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성령께서 직접 이 구속 사역과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도리를 듣는 심령을 움직이며 귀를 열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위로부터 능력이 입히울 때까지 그들은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
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행 4:29)”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행
4:33)”
제자들은 분명히 성령으로 힘있게 권능을 부여받아서 그전의 자신들과는 전혀 다른 담대한 모습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 그 담대함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가를 아는 것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들에게 그들만이 아닌 어떤 힘이 있다는 것을 아는데서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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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 하며 심히 떨었노라.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3-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살전 1:5)”
우리는 계시에 대하여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한다. 계시는 내용 면에서 완성되었다. 성경 외에 다른 내용이 또 있다고 하면 이단이 된다. 창세기에서부터 계시록까지가 다 계시인 것이다. 다른 내용이 또 있을 수는 없지만 계시한 내용을 밝히시는 하나님의 간섭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서신서를 보면 성령세례를 받으라는 요구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권면하고 있다. 왜 그런가 성령 세례를 받는 일이 보편화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교인들에게는 성령세례가 있느냐부터 확인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성령 세례로 말미암아 생기는 부작용이 싫어서 가만히 있는 것이 가장 큰 부작용이다. 아무 것도 구하지 않고
그러므로 그런 시행착오를 안 저지르는 자리에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실패한 것이고 가장 비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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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 강 성령의 인침과 성령의 은사(고전 12:4-11)
이번 과에서는 성령의 사역과 성령의 세례가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 보자.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
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본질상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에 초점을 두느냐에 달라진다. 성령세례는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로 하여금 증인의 사역을 감당케 하시는데 훨씬 많은 촛점이 있다.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권능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역을 감당케 된다. 성령의 인치심은 자기의 구원문제,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를 확인하는 ‘확인’ 쪽에 초점을 두고 사용한다.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
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4)”
근본적으로 성령세례와 다를 바가 없지만 ‘확인’쪽에 초점을 맞출 때는 ‘인침’이 된다. 인침이란 보증을 말하며 누구의 소유인가를 표시하는 것이다. 또 다른 의미는 ‘안전보장’을 뜻한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에게 약속된 성경의 약속들이 어떻게 확실한 자들인가를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일, 이런 것에 초점을 맞추어 있을 때 ‘성령의 인침’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글로 쓰고 말로 들어서가 아니라 그냥 알게 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신자가 자신이 구원을 받았음을 확인하는데 가장 놀라운 확신이 있다면 여러가지 중에서 아마도 하나님께서 직접 확인시켜 주는 이 ‘성령의 인치심’일 것이다.
“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어느 때에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예수께서 대
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
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
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 6:25-2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 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들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6-
17)”
인침은 하나님과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지만 그 사건은 어떤 의미에서 주관적이지만은 않다. 즉 인침을 받았다는 것은 옆에 있는 사람도 알 수 있을만큼 외적 현상들이 나타나게 된다.
‘성령의 인침’이 우리에게 이루어진 것은 ‘보증’과 ‘확인’을 위해서라고 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
님이시니라(고후 5:5)”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고후
1:22)”
성령의 인침은 우리에게는 우리가 예전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사랑하고 있는 그런 것들과 비교될 수 없는 훨씬 더 놀라운 직접적인 체험이다. 우리를 회심케 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성령님의 사역을 성령의 간접적인 사역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인치심은 그것보다는 훨씬 더 직접적인 사역이다.
성령의 인치심이 보증이요 도장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 일을 역사 속에서 치밀하게 이루어 놓고 계신다. 성경 어디를 찾아 보아도 성령의 내주와 성령께서 직접 인치시고, 충만하게 부어주시는 성령세례와는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도장이라는 것은 결국 당사자를 위해서라기 보다 제 3자를 위해서이다. 도장을 찍는 다는 것은 사실인 것을 더욱 확인하며, 객관성을 주며 더욱 확실하게 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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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미 있던 것이 더 확실해 지는 것이다. ‘성령세례’ ‘성령의 인침’을 받았다고 해서 달라진 것은 없다. 내용면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아진 것도 없다. 다만 있던 것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을 뿐이다. 받은 자와 받지 못한 자의 우열의 개념은 없다. 성령세례는 ‘성화’와는 다르다. ‘성령세례’나 ‘성령의 인치심’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깊으신 뜻에 따라 주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적인 면에서 남보다 낫거나, 받을만한 수준이 있어서 주신 것이 아니다. 그런 면에서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자가 받은 사람보다 신앙적인 면에서 나을 수도 있다. 그것이 고린도서에 잘 나타난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하며 그를 믿을 때 성령님이 이미 그들 안에 계셨다. 만약 성령님이 안계셨다면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부어주심의 성령세례는 못받았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인하여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세례를 제자들이 최초로 받았다. 이제는 거꾸로 제자들이 성령을 소개한다. 그렇게 해서 성령이 사람들에게 소개된 후에는 그 소개한 사람, 즉 제자들이 아니라 성령님이 사람들에게 인치는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누가 누구에게 줄 수도, 옮겨줄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기도해주고 기다리는 것이지 내가 중개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성령의 인침으로 사도행전에서는 어떤 작용을 했는가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임을 우리에게 깨우치실 때에 ‘이들도 내 백성이다’라는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도 ‘성령의 인침’이 있었고 또 어떤 사람을 사용하여 그 사람을 통하여 성령님이 임하게 하심으로 그 사람으로 ‘하나님이 보낸 자다’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확인시켜 주는 작용을 하였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안수함으로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임함을 보고 그들이 이 성령님이 인치심을 보고 하나님의 자녀가 이제 유대인 뿐만아니라 이방인도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성령 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본질적으로 같다. 그러나 이것이 궁극적으로 무슨 열매를 맺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하나님을 높이며,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간섭하시며, 임하시며 부르고 계신다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제는 성령의 은사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성령의 부어주심으로써의 성령세례와 성령의 인침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의 사역이다. 고린도전서 12장을 보면 성령님이 베푸시는 세례가 있다고 했다. 그 세례는 구원받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교회로 보내 하나되게 하시는 사역이라고 하였다. 성령 세례나 성령의 인침을 받는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뵈옵고 그가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는가를 아는 것이지 능력을 받는다는 차원이 아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는 능력적인 것이다. 이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키 위한 능력이 아니라 교회의 유익을 위한 능력이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
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
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
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전 13:9-12)”
우리에게 은사를 주심으로 우리가 지금 참여하고 있는 약속과 소망이 어떻게 확실하며 대단한 것인가를 확인시켜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그 나라를 소망케 하시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고 예언하는 자는 교회의 덕을 세우나니
(고전 14:4)”
“그런즉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서 방언을 말하고, 계시나 지식이나
예언이나 가르치는 것이나 말하지 아니하면 무엇이 너희에게 유익하리요(고
전 14:6)”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하여 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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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를 구하라(고전 14:12)”
“그러나 교회에서 네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
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것보다 나으리라(고전 14:19)”
모든 초점이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집중되고 있다. 지금 우리 주변을 보면 은사 일변도로 가는데 가장 큰 이유는 능력으로 자꾸만 초점을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우월감을 위해서만 은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은 가장 큰 은사가 사랑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다.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
는데, 그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
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
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4-40)”
우리가 받은 은사가 아무리 크고, 큰 능력을 행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 앞으로 내 이웃에게로 사랑을 쏟아내는 것으로 가지 않는다면 필요없는 것이다. 축복들이 정당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궁극적인 목표로부터 외면케 하고 그 자리로 가는 것을 방해하거든 버려야 한다. 우리가 가진 어떤 것도 하나님을 위해서, 내 이웃을 위해서 필요한 것인가 생각을 해야 한다. 내가 갖고 내 이웃에게 상처를 주며, 방해하는 것이라면 버리겠다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며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주님 발 앞에 꺼내 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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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0 강 성령세례, 어떻게 받을 것인가(엡 3:17-19)
기독교는 성경이 약속한 것을 설명하는 종교이다. 우리가 체험한 것들은 성경이 약속하고 설명하는 것들 중에서 극히 일부분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를 경험하거나 체험하게 되면 성경으로 다시 와서 내가 체험한 부분이 성경에서 약속한 것 중에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지를 깨닫게 된다. 또한 그 체험으로 나머지 체험하지 못한 것들에 대하여도 내 것으로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못박힌 손을 만져본 적이 없지만 도마가 만져본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져본 셈이 되는 것이다. 이럴 때에 조심해야 되는 것은 성경의 약속들에 대하여 나의 수준, 내가 아는 것, 내 상상력을 기준으로 하여 성경 말씀을 제한하려는 무지와 오류가 있다. 또 다른 하나의 오류로서 자기 체험만을 중심으로 놓고서 그 나머지 것들을 제거해 버리는 극단적인 미련한 방법이 있다. 성령세례에 대해서 하나님의 약속들과 권고하심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그 은혜와 약속들을 소유할 것인가를 살펴보려 한다. 또 이런 과정 속에서 근본적으로 정리해야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도 생각해 보자.
성령세례가 하나님의 약속이고 신비스러운 체험이기에 신자들의 갈급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큰 축복이기 때문에 가장 큰 시험에 빠질 오류가 있다.
첫번째 오류는 성령세례를 믿음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언제나 믿고 구하면 당장 내가 구한대로 내 손에 결과가 쥐어진다는 식의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러나 바로 믿으면 된다는 식의 사고방식으로 자신이 받지 못했음에도 받은 것으로 간주하여, 감격을 주체할 수 없어 하는 사람 중에 오히려 자기보다 믿음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것을 받았다고 외적으로 흥분하는 것에 대해 오히려 잘못된 것으로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성령세례는 분명히 성경이 약속한 특별한 하나님의 간섭이며, 특별한 체험이며, 놀랄만한 것이며, 외적으로 나타날만큼 강렬한 것이다. 내가 원인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결과가 나에게 있기에 그 결과가 “나로 말미암지 않았다”라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믿음이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 선물이라는 것과 같이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회개하면 그것이 공식이 되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이고, 우리는 회개할 것 투성이인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 자세를 선하게 보시사 허락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축복을 명령하거나 요구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 그분만이 자신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점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들을 허락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두번째 위험은 ‘안수’라는 방법을 통해서 성령세례(부어주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이다. 사도행전의 기록에서 안수하여 성령이 임하시는 것은 안수하는 자가 준다는 표현이 아니라 이 일은 우리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며 하늘로부터 허락된 것이라는 표현이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설교만 하고 안수를 하지 않았다. 나중에 성령의 임함을 보고 물 세례를 베풀었을 따름이다. 성령은 자기 힘으로, 자기 뜻대로 내려오시는 분이지 누구에 의하여서나, 요구에 의하여 오시는 분이 아니다.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하나님 편에서 주신 것이요, 보냈다는 것이며 우리는 받아야 할 것이지 내가 가서 달라고 하고 빼앗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는가
첫째, 우리는 항상 약속과 목표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능력과 체험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그분에 대하여 인격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 성령의 부어주심을 원하는 그 동기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늘 확인해 보아야 한다.
둘째, 이것과 양립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성령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죄와 죄들로부터 거룩케 되기 위해 애를 써야 한다. 양립될 수 없는 것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자신’ ‘자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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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주인이 되는것, 그것을 떨쳐 버리지 못하는한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세째, 기도하여야 한다.
기도한다는 것은 인간의 방법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큰 상징이다. 기도는 인과율의 방법으로써 동원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우리 자신도 모르게 결과시키고 있다. 우리는 기도로써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소원을 아뢸 뿐이지, 우리의 것을 요구하고 강요할 권리가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성자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방법과 성품과 뜻에 우리 자신을 점점 맞추어 나가기 위해 애쓰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자신에게 확인되는 것은 내가 구할만한 자격이 없고 또한 그것을 얻을 만한 자격도 없다는 사실에 절망할 것이다. 기도하면서 생각할 것 중의 하나는 이 당연한 약속을 내가 받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아직도 내가 양립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포기하고 버려야 될 옛사람을 아직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자문해 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전심전력하여야 한다.
전심전력이라는 말 속에는 정열을 다하라는 것 뿐만 아니라 인내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이것을 얻기까지 포기해서는 안된다.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렘 29:13)”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
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구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
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
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마 7:7-8)”
이는 얻기까지 강청해야 함을 말씀하고 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이것이 얼마나 강렬한 묘사인가를 알아야 한다. “구하는 것”은 처음에 자기가 필요한 것을 아는 때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모습이다. “찾으라”이것은 비슷한 위치를 잡은 것으로 이 근처 어디겠다 하며 대강 위치를 잡은 것이며 “두드리라”는 것은 바로 그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성령의 부어주심이 우리의 가장 소중한, 절실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찾기까지 쉬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완전한 복종과 하나님과 그의 사랑을 알려는 열망과 그의 사랑으로 채워지고 그의 종이 되고 그의 영광을 따라서 살려는 소원으로 이 일을 추구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이며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욕구로 자리잡아야 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
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우리 스스로를 하나님 앞에 긴장시키며 하나님의 약속과 그 오묘하신 영광 앞에서 자신을 조명하며 자신이 누구인가를 확인하며 진지한 기도로 무릎꿇는 아름다운 기초가 확인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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