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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세계 (시119:1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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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가끔 이런 질문을 받곤합니다. "목사님, 많은 제 주위의 성도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체험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저는 도무지 그런 경험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할 수 있을까요" 정말 신앙생활을 하는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체험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그의 뜻을 따라 산다는 것인데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없다면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자체가 감(感)이 잡히지 않으며 신앙생활이 무의미하고 때로는 부담이 되기까지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는데 그 하나님과 만나는 경험을 하는 경우는 다양한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치명적인 질병이 걸려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고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감하는 분이 계시는가 하면 어떤 분들은 사업에 실패하고 혹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는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기기 힘든 그런 고난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첫 서울시장으로 발탁되었다가 7일만에 물러선 김상철변호사도 시장직에서 쫓겨나고서 더욱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였던데 그런 케이스가 바로 이 케이스입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진리와 의미있는 삶을 찾아 영적인 방황을 하다가 하나님에게서 그것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진리로 경험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주여, 제가 당신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내게 안식이 없었나이다." 하고 오랜 영적 방황끝에 하나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한 어거스틴(Augustinus) 이라든가 한국교회신앙의 초석을 놓으신 길선주 목사님 같은 분들이 이런 경험을 한 대표적인 분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정의와 평화를 위한 험난한 투쟁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자 이렇게 극적인 삶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일이 많은데 역시 고난중에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이 제일 보편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여러분께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가까이 있는 방법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성서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쉽고 어려운 것이 없겠지만 성서는 하나님을 가장 쉽게 자주 만날 수 있는 곳이고 그 하나님과의 만남을 영속적으로 가질 수 있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안에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 성서속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세계를 한번 보십시다. 성서를 펼치면 우리의 눈앞에 어떤 광경이 전개됩니까 성서를 펼치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란에 살던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소명이 떨어집니다.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그런데 이 하나님의 소명뒤에 또 하나의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리라." 우리가 또 성서의 다음 페이지를 넘기면 하나님이 이제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가운데서 모세를 만나는 광경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알지 못하는 모세에게 나타납니다. 모세는 당신이 누구냐고 묻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자, 즉 모든 일의 시작이신 창조자이라고 밝히고 그에게 하나의 사명을 맡깁니다. " 모세야, 모세야!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 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할 것이라. 지금 곧 가라!" 그리고선 또 다시 이런 약속을 주십니다. "정녕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또 성서를 펼쳐가면 우리는 가나안 땅에서 심한 압제를 받고 있던 한 농부의 아들 기드온이 오브라 상수리나무아래에 서 있는 것을 만나게 됩니다. 기드온이 이 나무아래에 서 있을 때 주의 사자가 그에게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 너 힘있는 용사여,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기드온은 항변합니다. " 만일 주님께서 우리와 함게 계신다면 어찌하여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닥쳤습니까" 이때 주님께서 그 항변을 가로막으며 다시 말씀합니다. " 자! 가서 너는 미디안 사람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라. 내가 너를 보내지 않았느냐" 또 성서의 페이지를 넘기면 우리는 또 하나님과 만나는 한 사람을 보게 되는데 그는 엘리야입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확신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탐욕과 횡포로 백성위에 군림하던 아합왕에게 저항하고 갈멜산상에서 그의 무리들과 대항을 한 후 그를 잡아죽이려는 왕의 추적을 피해 도망하다 싸리나무 덤불아래서 " 하나님 이제 더 이상 이런 일은 못하겠습니다." 하고 지쳐서 잠이 드는 엘리야를 만나게 됩니다."(왕상 19:5) 한참 자고 있는데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불에 달군 돌에 구워 낸 과자와 물 한병을 준비해놓고 엘리야를 흔들어 깨우면서 "갈 길이 머니 일어나서 먹고 힘을 내어라"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동굴안에 숨어있을 때 하나님이 고요하고 작은 음성으로 그에게 닥아오셔서 다시 용기를 주시며 그의 사명을 일깨우시는 모습을 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엘리야에게 하시는 하나님이 마치 입학시험을 앞두고 밤을 세워 공부하고 있는 자녀에게 간식을 들고 공부방에 들어오셔서 자녀를 격려하며 그의 사명을 일깨우는 어머니의 자상함 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성서속에서 찢어지도록 가난한 과부의 집에 예언자를 통하여 밀가루와 기름을 풍성히 공급하시며 그녀의 아들이 죽었을 때 그 아들을 살려서 다시 어머니의 품에 안겨주시는 일에서 시골 어느 한 구석에서 농사를 짓던 농부 미가를 불러 당신의 말씀을 전하도록 예언자로 삼으시는 주도면밀한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보살핌과 섭리를 보게 됩니다. 성서 어느 곳을 펼쳐도 우리는 이런 하나님이 그림자처럼 인간을 따라다니며 그에게 사명을 일깨우고 동시에 그의 배후의 힘이 되시는 이야기들을 수없이 만나게 됩니다. 성서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어긋나 살 때 우리에게 닥칠 불행에 대한 하나님의 무수한 경고와 질책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길이 어떤 길이어야 한다는 명확한 제시를 하고 그 길을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끈질긴 열심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고와 질책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보다 더 큰 사랑으로 위로로 격려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모든 것을 결국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삶을 살게 하시려는 목적입니다.
스바냐 3:17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심정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우리는 이런 우리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우리의 삶의 모든 구석에서 그 고난과 좌절과 죽음과 심판속에서 구원과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성서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 자신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당신의 구체적인 모습이요. 그에게는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정의가 가득하여서 이 세상에서 미움과 불의에 좌절하는 모든 이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는 분으로 우리가운데 계십니다. 우리는 성서속에서 그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봅니다.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베드로가 그를 만나고 세관에 앉아 있던 세리가 나를 따르라는 음성을 듣고 그의 제자가 됩니다. 간음한 여인이 그를 만나고 그 죄에서 떠나며 나병환자가 그를 만나고 그 치욕의 병을 고침받습니다. 네 사람이 들것에 들고 와야 할 정도로 중병을 앓던 중풍병자가 그를 만나고 나음과 동시에 그 죄사함을 받으며 열 두 해 혈루병으로 시달리던 여인이 그의 옷자락을 마지고 나음을 얻습니다. 그야말로 눈 먼자들이 보게 되며, 절뚝발이가 걸으며, 문둥병자들이 깨끗해지며 귀먹어리가 듣고 죽은 자들이 일어나며 가난한 자에게 기쁜 소식이 이 예수님을 통하여 일어납니다. 그는 마침내 죽음이란 그리고 그것으로 인간의 모든 것이 끝장이 나는 인간의 삶에 최대의 벽에 도전하여 부활이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사망권세를 캐트림으로써 인간의 삶은 죽음으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며 죽음같은 세력도 하나님의 생명의 권세를 이기지 못함을 우리에게 그 스스로 보여주셨습니다. 이 메아리는 바울을 통해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란 메아리로 퍼져나갔으며 요한을 통하여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현신이며 그는 세상을 이기는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된다는 메아리로 퍼져나갔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드러내 놓았기 때문에 이제 성서는 그 앞의 역사나 그 뒤의 역사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성서는 그냥 성스러운 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경외하고 잘 모셔야 할 경전이 아닙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우리에게 닥아오시는 몸짓이며 행동입니다. 성서는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이며 보살핌이며 우리를 살리는 권능입니다. 성서에서 나타나는 이야기는 우리가 읽는 신문이나 책처럼 어떤 사건의 보도나 기록이 나 설명이 아닙니다. 성서는 우리에게 닥아오시고 말씀하시고 부르시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이요 행동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인간의 사상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바른 생각을 표현하고자 함입니다. 성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와 어떻게 이야기하십니다. 성서는 우리가 그에게 도달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시는 가를 제시하시는 책입니다. 성서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 인간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성서는 " 주여! 나를 고치시고 나를 위로하여 주소서. 그러면 내가 살겠나이다."하고 부르짖는 병든 세계속에서 용서와 구원의 가방을 들고 죄와 불의로 인한 사상자를 찾아 치료하시는 의사인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내는 하나님의 진단서입니다. 성서를 펼치면 거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와 위로와 경고 바른 가르침을 구하며 그가 하시는 말씀을 들으려 할 때 그 음성은 너무도 분명하게 우리에게 들려집니다. 우리가 참되게 사는 것이 무엇이며 인간의 역사의 현재는 어떠하며 인간의 역사의 미래와 종말은 어떻한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묻고 성서를 펼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통치의 비밀이 알려집니다. 우리가 회의하고 절망하고 슬퍼하고 허무해 할 때 성서를 펼치면 거기에는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한다는 하나님의 약속과 너의 눈물을 씻기고 너의 속에서 새로운 선한 일을 시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계획을 확인하게 됩니다. 성서의 문자는 하나님이 그대로 불러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속에서 살아계셔서 행동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고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신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슨 정보기관의 사찰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씀을 그토록 세밀하게 헤아리며 우리 돌 같은 마음에 감동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 자 이 성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서에서 가장 자주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성서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우리의 잘못을 책망하시며 우리의 허물을 고쳐주시고 우리를 올바르게 사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성서는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지혜를 우리에게 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싶으시면 그 속에서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성서를 펼치십시요. 특별히 우리가 생의 좌표를 일고 표류하며 방황할 때, 그리고 생의 용기를 잃고 그 돌파구를 찾지 못할 때 성서를 펼치십시요. 거기에는 우리를 일깨우고 우리3의 자리를 밝혀주며 우리의 갈 길을 제시하며 우리의 속에 있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려 줍니다. 얼마나 이 성서와 함께, 가까이, 있느냐가 하나님을 얼마나 자주 가까이 만나느냐 하는 관건이 될 것입니다. 성서와 더불어 살고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이 되시기를 노력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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