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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믿음 (히11:7,창6:8-10)

본문

지난 두 시간에 걸쳐서 아벨, 에녹, 노아로 이어지는 믿음은 믿음의 올바른 순서를 보여준다고 하는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특히 에녹은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올바른 믿음을 가졌다는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노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며 그것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는가에 대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노아란 이름은 “안위”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이름에서 볼 수 있는 대로 노아는 당시에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하는 사신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는 삶을 살면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노아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덕택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므두셀라의 손자요 라멕의 아들로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믿음을 배우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노아의 믿음을 보면서 한 집안에서 믿음으로 자녀를 키우면 그 후손을 통하여 계속해서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가족들의 믿음의 본을 보면서 그 믿음을 올바로 키워나갔습니다. 그 결과 믿음의 근거가 무엇인지, 믿음의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믿는 자들이 궁극적으로 이루는 일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오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증거했던 노아의 믿음은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하나님께 나가는 믿음 노아의 믿음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나가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나간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나가는데는 3중의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 나가는 회심이 있고,둘째로는 계속적으로 거듭 반복해서 나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으로서의 나감이 있고,셋째로는 긍극적으로 하나님께 나가는 죽거나 재림 때의 나감이 있습니다. 이 세가지가 이루어질 때 하나님께 나가는 온전한 믿음이 됩니다. 노아는 이런 나감을 온전히 이루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게 나가는 일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가 이 땅의 축복과 내세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해야할 마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져야 합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가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야 합니다. 하지만 인간 편에서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의식적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하나님과의 계속적 교제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은 자기 자신을 부인할 때만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는 간절한 마음으로 찾아야 합니다(잠 8;17). 전심으로 찾아야 합니다(시 119:10). 열심히 찾아야 합니다(시 27:4). 지치지 않고 찾아야 합니다(눅 11:8).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음같이 찾아야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노력이 합해져야 온전한 나감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농사를 짓는 일과도 같습니다. 농사꾼이 파종하지 않고서 어찌 농사가 되겠습니까 그렇다고해서 농사꾼이 파종했다고 풍년이 되겠습니까 농사꾼이 수고함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섭리가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절대적인 섭리와 함께 하나님께로 나가려는 인간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방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입니다. 엡 4:18에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라고 했습니다. 죄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우리의 걸음을 막는 최대의 적입니다. 죄를 버리는 자만이 하나님께 나갈 수 있습니다. 노아는 당대의 죄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2. 행함이 있는 믿음 노아의 믿음은 행함이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창 6:22에 “노아가 그와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무엇보다도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말로만 하는 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 있어야 살아 있는 믿음입니다. 경고하심 노아의 행함이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경고하심에서 시작합니다. 노아는 경고하심을 들을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의 시대는 대단히 부패한 시대였습니다. 창 6:2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혼을 하였고, 6:5,6에 보면 사람의 죄악이 땅에 관영하여 하나님께서 한탄하셨다고 했습니다. 망하기 직전의 도시는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가 홍수로 망하기 직전이므로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름다와 보일지 몰랐으나 그 속에는 죄악이 가득찬 시대였습니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시대를 심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바로 하지 않고 심판하시기 전에 경고하셨습니다. 홍수로 심판하실 것을 경고하셨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홍수는 전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창 2:6) 사람들은 홍수를 믿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고하심이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노아가 아무리 설교를 해도 믿지 않았습니다(벧후 2:5). 그러나 노아는 달랐습니다. 그는 보지 못하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를 믿었습니다. 무엇인지 아직 보지 못한 심판을 믿었습니다. 믿음은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도 계시하신 하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은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 받아야 마땅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위로의 목소리도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은 극도로 피곤하고 지쳐 있었습니다. 죄악이 가득찬 곳에서는 사치와 향락이 범람하여 사람들은 더욱 편한 것 같으나 인간은 속으로 골병들고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입니다.
그들은 심판의 목소리와 함께 위로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창 5:29에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통해서 위로하기를 원했습니다. 노아는 그들과 함께 살면서 경고하심의 목소리도 들었지만 백성을 위로하는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가 있는 때는 하나님의 위로의 목소리가 있는 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경외함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하심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경외하였습니다. 경외한다는 말은 단순히 무서워 떠는 공포가 아니라 존경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모두 두려워하지 않고 있는데 유독 노아의 식구들만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믿음은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것은 좋지만 재미로 끝나면 안됩니다. 그 말씀에 대한 두려움의 반응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양강좌로 받으면 안됩니다. 말씀에 대한 두려움이 없으면 고린도교회의 사람들과 같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부도덕과 방종만이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고후 7:1에서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자”고 하였습니다. 두려움이 있어야 믿음이 온전히 서기 때문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사를 대하는 마음에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목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목사를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교인들을 심방하는 목사로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목사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고후 7:15에서 “저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영접하는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믿음을 본 것입니다. 창 19:14에 보면 롯의 사위들은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전하는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말씀의 깊이를 느끼지 못하고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듣고 도전을 받지 않고 흘리는 사람들도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노아는 심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그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았습니다. 구원은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집니다(빌2:12). 경외함은 구원얻는 믿음의 확실한 열매입니다.
왜냐하면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하고 말씀에 순종하다보면 죄와 구별된 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요일 2:4).
그러므로 세상은 계속 유혹합니다. 호리는 음녀와 같이 유혹합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만듭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혹 앞에서 마치 푸주간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이 어리석게 끌려갑니다(잠 7:22). 육신의 편함을 위해서 합리화하며 끌려갑니다. 마치 정당한 것으로 생각하며 끌려 갑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으로 받았습니다. 보고 따른 것이 아니라 말씀을 경외하므로 믿음으로 보고 따랐습니다. 예비함 노아는 경외하므로 예비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M. Henry는 말하기를 “믿음은 먼저 우리의 생각에 영향을 주고 그 다음에 우리의 행동에 영향을 준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입증해 주듯이 노아는 경고하심을 경외함으로 받았고 곧바로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믿음은 곧 행위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약 2:17,26에서 말하기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수 많은 행위에 있어서 비난을 받는 것은 그들의 행위가 바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믿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살 수 없고 바로 살 수 없기에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노아는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으로 확신하고 보이는 사람들이 비웃어도 믿음의 눈을 가지고 계속 하나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고후 5:7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 했는데 노아는 이 말씀과 같이 행했습니다. 노아는 명하신대로 다 준비하였습니다. 창 6:22에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고 했습니다. 방주가 무엇인지, 홍수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말씀을 따라서 방주를 예비하였습니다. 방주를 짓는 일은 믿음과 인내의 역사요, 경건한 두려움의 수고요, 순종의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람들이 해야 할 의무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사람이 해야 할 의무를 다 감당하였습니다. 노아가 지은 방주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방주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창세기 6장으로부터 9장가지 자세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 때문에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못하지만 본문의 말씀을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약간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주는 장이 300규빗, 광이 50규빗, 고가 30규빗으로 닻도 돗대도 키도 방향타도 없었습니다. 이 안에는 약 2500종의 동물이 들어갔습니다. 양만 들어간다면 125,000마리의 양이 들어갈 수 있는 크기입니다. 역청으로 발랐습니다.
위로만 문이 있을 뿐 창문이 없습니다. 이것은 많은 의미를 줍니다. 닻도, 돗대도, 키도, 방향타도 없다는 것은 암초에 부딪칠 위험이 있다는 것이요, 어디로 갈지를 결정할 자유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청을 바르므로 물이 새어들어오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세상의 물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기름을 발랐다는 것입니다. 문이 위로만 있는 것은 땅의 것을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방주는 가로, 세로, 높이의 비율이 속도를 내기에는 부적합하지만 어떤 파도에도 넘어지지 않도록 안전하게 설계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켜준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방주는 그리스도의 모형이었습니다. 방주를 짓는데 있어서 많은 희생이 치러져야만 했습니다. 물질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시간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비웃음과 조롱도 참아야 했습니다. 70년이 넘는 긴 세월을 내다 보고 참아야 했습니다. 홍수가 내릴지 안내릴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삶 전체를 드려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배를 지으면서 전파했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 허무함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노아는 명령을 따랐습니다. 희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반드시 희생이 따르게 됩니다. 노아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입니까 창 6:8에 이르기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런 일이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악 세상에서 물들지 않고 말씀을 경외하며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3.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인한 축복 노아가 믿음으로 행하므로 어떤 축복을 받았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노아의 믿음의 결과는 모든 사람들이 심판을 두려워할 때에 그 가운데서 축복을 받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것은 이 땅에서 말씀을 따라 온갖 희생을 다 치르면서 살던 성도들이 하늘 나라에 들어갈 때의 모습입니다. 이 축복을 생각하면 흥분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노아는 이 땅에서 믿음을 따라 살다가 결국에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노아가 믿음으로 행했기 때문에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행함은 축복의 원인이 아니라 방편일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행위가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행위는 구원을 이루어준다는 진리와 같습니다. 사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기 전에 이미 구원을 얻은 사람이었습니다(창 6:8,9,14,22). 노아가 받은 축복은 무엇입니까 그 집을 구원 노아의 순종은 자신의 구원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구원을 얻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행 16:31에도 간수의 집이 구원을 받은 사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수 6:22-24에 보면 기생 라합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부모의 믿음 때문에 자식들이 덤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부모의 믿음으로 인해서 자녀들도 그 믿음을 배우게 되었고 그 결과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부모된 우리들은 자녀들의 믿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믿음으로 살도록 분명히 영향력을 행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믿음을 보고 자랍니다. 노아가 믿음을 가진 것도 부모의 영향이었지만 노아의 자녀들이 믿음을 갖고 구원을 받은 것도 노아의 믿음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어떤 믿음의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자녀들이 믿음이 없다고 탓만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의 믿음을 돌보고 책임지고 있습니까 또한 홀로 믿는 짝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없습니까 자기 짝을 구원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고전 7:14에 보면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고 했습니다. 짝믿음은 온전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들이 믿음으로 깨끗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하면서 지금 나의 믿음이 나의 가정의 구원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에 깊은 도전을 받으시고 전 가족이 구원의 기쁨에 참여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정죄 노아가 배를 짓는 동안 세상은 노아를 조롱하고 정죄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국에 노아는 세상을 정죄하고 심판하였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예비하므로써 이미 세상을 정죄하였습니다. 방주를 짓는 행위는 방주 안에 들어오지 않으면 죽는다고 하는 심판을 선언하는 행위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세상을 정죄하였습니다. 노아는 방주를 지으면서 사람들에게 무언의 설교를 계속하였습니다. 세상을 정죄하는 노아에 대해서 벧후 2:5에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했습니다. 노아의 행위는 세상을 정죄하였습니다. 세상을 이렇게 정죄하는 이유는 그들이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먹고 즐기기에 바쁜 나머지 심판의 소리를 거부합니다(마 24:38). 영적인 무관심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이 말씀을 받아 들이지 않을 때 그 죄가 더 크게 됩니다(마 12:41,42).
스펄전은 말하기를 “하나님게서 죄를 벌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 분께서 대속의 보혈로 죄를 용서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조차도 심판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다면 그는 예수의 보혈의 공로를 부인하는 자가 된다는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을 얼마나 듣고 있습니까 이 소리를 얼마나 전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 심판을 얼마나 선포하고 있습니까 노아 당시의 사회나 지금 이 사회나 다를바가 별로 없습니다. 당시에 죄악이 관영하므로(창 6:5) 하나님을 슬프게 하여 하나님의 후회를 낳게 했던 일(창 6:6)은 마귀에게 사로잡힌 결과였습니다(창 6:7). 이것은 패괴한 일이었습니다(창 6:12). 지금 이 시대는 어떠합니까 마 24:37과 눅 17:26-28의 말씀을 상고해 보건대 이 시대는 복음의 가르침을 조롱하고 인구가 번식하며 하나님의 신과 사람이 싸움을 하고 메시지가 거부되며 은혜를 입은 자들을 마귀의 자녀들이 잡아먹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므로 세상을 얼마나 정죄하고 있습니까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 노아는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인해서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창 6:9에는 노아를 가리켜서 당대의 의인이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의인으로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을 예표하는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의의 후사가 되었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임을 확증하는 것이고(창 6:9), 다른 하나는 그 의에 대한 그의 마땅한 자격을 확증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유업을 멸시한 에서와 대조를 이룹니다. 진정한 의는 사람의 행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롬 3:20)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롬 3;22).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저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합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벨과 같이 온전한 예배를 드리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에녹과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순종의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노아와 같이 생활로 말씀을 증거하는 온전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까 우리는 누구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까 의의 후사가 되고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를 세우려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까 양자됨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행하고 세상을 정죄하는 자가 되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즉석시대입니다. 모든 것이 쉽게 빠르게 치러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믿음의 세계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은 인스탄트 식품이 아닙니다. 때로는 노아와 같이 세상의 비난과 조롱을 받으면서도 헌신과 희생을 치러야 하는 어려움도 있습니다. 이것이 온전한 믿음을 향해 가는 성도의 길입니다. 이 모든 일은 은혜를 입을 때 가능합니다(창 6:8,9). 노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므로 이 일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믿음의 후사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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