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을 대비하라 (창47:1-12)
본문
일출도 물론 아름답지만, 서산 낙조는 더 아름답습니다. 인생이 긴 것 같지만 잠깐입니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이라 고 했던가요 인생은 그 만큼 쉽게 늙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세월을 화살, 흐르는 물(流水)로 비유를 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인생의 화살은 날아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내 인생의 물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를 살 것입니까 죽음을 먼저 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종말론적인 삶 이 됩니다. 죽음을 대비한 다음에는 노년을 대비해야 합니다. 노 년은 죽음의 전 단계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 무리 하는 가장 중요하고 아름다운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중 요한 기간을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얼떨결에 맞이할 수는 없습니다. 종말론적인 삶이 되면 어떤 형편에든지 삶을 넉넉하게 끌 어안을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일생은 파란 만장한 일생이었습니다. 소년기의 야곱은 형 에서에 대한 질투심으로 자랐습니다. 청소년이 되어서는 형 에서 의 축복을 가로채고 도피의 길에 오릅니다.(창27-28장) 청년기의 야곱은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도피하는 동안 각고의 세월을 보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 라헬을 얻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정 렬도 불태웁니다.(29-31장) 장년기에 접어들어서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기 위해 에서와의 극적인 화해를 합니다. 이 를 위해 압복강에서 여호와 하나님과 목숨을 건 투쟁의 기도를 합니다.(32-33장) 그러나 이런 인생의 상승곡선에도 불구하고 가정에 불어닥친 문제들로 고통을 당합니다. 바로 세겜 땅에서 외동딸 디나가 강간 을 당하고, 막둥이 요셉은 친형들에 의해 인신매매를 당하게 됩니다.(34-37장) 이제 야곱은 노년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요셉을 잃어버리고, 열 한 아들과 살다가 큰 흉년을 당합니다. 이 과정 에서 에굽에서 총리대신이 된 막내둥이 요셉과 해후하게 됩니다. (42-43장)
그리고 오늘 47장에서 야곱은 온 가족을 이끌고 요셉 이 있는 에굽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이 에굽의 바로 왕 앞에서 지나온 인생을 말하는 대목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 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 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47:9) 그렇지요. 이렇듯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에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과 열한 아들이 이런 야곱의 일생을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 지나온 백삼십년의 일생을 이 순간 열 두 아들은 다 기억을 한 것입니다. 일백삼십년 동안 험악한 세월 을 보냈다고 합니다. 야곱 인생의 황혼입니다. 이제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다 축복하는 노년을 보냅니다.(49장) 그리고는 요셉에 게는 절대 형의 허물을 용서하고 잘 대해 주라고 명령합니다.(창 50장) 끝까지 가장의 권위와 지혜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 서 파란만장한 야곱의 삶은 고이 나래를 접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야곱은 무대 한 가운데서 화려한 주연의 삶 뿐 아니라 요셉이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의 조연의 삶도 잘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무대에서도 조용히 아름답게 내려왔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항상 천년만년 젊을 줄 압니다. 그러나 갑자기 늙음이 찾아옵니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을 해야 할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액스트라나, 아예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지도 모릅니다.
주연이나, 조연, 액스트라, 중에서 사람들은 모두 주연에 시 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대 위를 누비는 연기자는 모두 내려 올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준비가 부족합니다. 저금은 하면서 노년에 대한 정신과 마음의 준비는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노년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선은 젊었을 때에 노년의 시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 모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또 나의 늙음을 준비하는 길이 기도 하고요. 어떤 노인학자가 65세 이상의 노년기의 신체적 특 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피부세포 조직은 건조해지고 그 성장이 느려진다. 기본 신진대사의 비율이 낮아진다. 신경근 육 반응의 속도, 강도, 지속성이 저하한다. 시력과 청력이 약화 된다. 집중적인 신체적 노동후에 심장의 고통의 강도나 비율이 60세 이후에는 특히 낮아진다. 피부의 상처가 낫는데 평균5배의 시간이 더 걸린다. 동맥의 신속성이 낮아지고 경화된다. 뼈는 연 약해지고 유연성이 없으므로 골절이 쉽게 일어난다." 이런 신체적인 변화 이외에도 심리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노인학 자들은 노년의 특징을 '보수성과 비융통성'이라고 했습니다. 무 슨말인고 하니, 변화를 싫어하고, 융통성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 이유를 노인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습니다. "연령의 증가에 따라 신체적 능력과 기능이 저하됨 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과거의 방식에 따라 완전감과 만족감을 가 지려는 태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해를 정확하게 하고 있어야합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사랑은 이해 위에 쌓아 올려지는 성입니다. 이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허구이지요. 두번째는 노년되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고대의 한 랍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멀지않아 나 이를 먹고 노년이 됨을 알고 노년을 향해 심리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의 사회에서도 노년은 패배이고 겨울인 것으로 여김 받습니다.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회란 얼마나 냉혹한 사회일 까요 어리석은 자에게는 노년이 겨울이고 현명한 자에게는 노년이 황금기가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선 젊어지려고 해야 합니다. 유대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었으면서도 늙었고, 어떤 사람은 늙었어도 젊었다" 이 말이 가능한 말입니 까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젊은이를 능가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 니까 세대차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차를 극복 하는 것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같은 세대끼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편합니다. 그러나 이질적인 사람, 이질적인 세대는 노력 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노력해야 동질의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노력해야 문화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노년 세대에게로 가든지, 노년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로 가든지 누군가는 한 쪽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야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떨어져 있고 간극이 있고 거리가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젊은 층이 노년에게로 가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본 폭이 좁고 지금 바쁜 와 중에 있으니까, 노년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서울 시흥교회에서 고등부 교육 전도사로 섬길 때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한지는 너무오래 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요. 그래서 이 청소년들을 이해해 보려고 밤 밤송을 듣고, 청소년들의 팝송 잡지를 구독해 보고, 노래 테이프를 들어보고 했습니다. 대 화를 유지하려고요. 그랬더니 막혔던 대화가 뚫리고 아이들이 가 까워졌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대화를 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젊은 층들과의 대화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도 젊어 져야 하고, 유연해 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인간에게 성육신 하셨습니다. 이 성육신은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호 흡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늙어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나이는 그냥 먹습니다. 그러나 황혼의 아름다움과 멋을 내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정 문제를 상담하다가 보면 물론 젊은 며 느리가 문제이고 젊은 세대가 문제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부모된 분들, 시어머니 된 분들이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 공부는 노년반이 제일 필 요합니다. 이 노년들이 제대로 되면 가정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반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인생의 경험과 경륜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노년에는 믿음이 더 성장해야 합니다. 대개 노년 에는 성경공부와 믿음의 성장을 본인도 게을리 하고 교회도 배려 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노년은 교회 의 소비 계층이 아닙니다. 분명히 생산의 계층입니다. 그러기 위 해서는 투자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은 봉사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축복하는 삶입니다.
야곱도 창세기 49장에 보니 열두 아 들을 일일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축복하는 삶 이게 황혼의 아름 다움입니다. 서운해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소외의 지대에 몰 두해 있는 것, 이건 축복하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재능과 시간을 다 쓰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황혼의 의무입니다. 야곱도 그리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봉사도 준비해야 합니다. 전문적이면 더 잘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까지는 자신과 가족과 일을 위해 살았으면 이제는 이웃을 위한 자유로운 봉사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노부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복을 만들면서 평생을 살아온 80고령의 노부부가 성공한 아들네 집에서 온갖 호강을 다하며 살 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일없이 사는 것이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들 내외에게 양복을 지을 수 있는 작업실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효심이 남다른 아들 내외라. 어디 가당하기나 한 주문인가요. 완강하게 반대를 하는 겁니다. 하다못해 이 노부부는 남 몰래 탈출해 나와서 갓 신 혼살림을 차린 손녀집으로 향했습니다. 손녀에게 간청을 해서 빈 방에 제봉틀과 재단대를 마련해 놓고 양복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지은 양복으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소일도 하니 즐겁고 보람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모두 시간을 한정하고 무대 위 에서 열심히 연기를 할 뿐입니다. 저 마다의 대사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역할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고통의 연기 를 터질 듯한 가슴으로 해 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쁨과 환희의 연기를 혼신의 힘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저마다 힘겨워하고, 저마다 삶의 애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끝나면 내려 와야 합니다. 무대의 막이 드리워지면 모두가 자기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역할을 그만둬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이고 노년 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의 노년은 바로 현재의 부모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바로 그 지대입니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 셉이 모두 여호와 경외의 길로 같습니다. 자녀들을 축복하는 삶 을 살았지요.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의 말씀을 잘 따랐고, 축복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후히 대접하고 후히 장사지냈습니다. 아브 라함의 생은 바로 이삭이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이삭의 생은 야 곱의 살아간 삶이 되었고 야곱의 마지막은 요셉이 살아갔습니다. 때문에 넉넉한 가슴으로 우리의 노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시퍼렇게 젊을 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푸르게 젊을 때, 이미 노년의 삶을 앞장서 살고 계신 우리의 부모님들을 이런 관 점으로 이해하고 존경하며 배려하도록 해야 합니다. 미래의 나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믿음의 전통, 아름다운 노년의 전통이 이어지도록 합시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을 통해 축복이 이어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노년이 젊음 보다 아름다울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주님, 노년의 시기 인생의 경륜이 보석 처럼 빛나게 해 주십시오. 주님 노년에는 인생의 황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더욱 큰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노년에는 봉사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노년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소망이 더욱 커지게 하여 주옵소 서.
그리고 오늘 47장에서 야곱은 온 가족을 이끌고 요셉 이 있는 에굽 땅에 정착하게 됩니다. 그리고 야곱이 에굽의 바로 왕 앞에서 지나온 인생을 말하는 대목이 바로 본문의 내용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년이 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 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창47:9) 그렇지요. 이렇듯 야곱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에굽의 총리대신이 된 요셉과 열한 아들이 이런 야곱의 일생을 모를 리가 있었겠습니까 지나온 백삼십년의 일생을 이 순간 열 두 아들은 다 기억을 한 것입니다. 일백삼십년 동안 험악한 세월 을 보냈다고 합니다. 야곱 인생의 황혼입니다. 이제 야곱은 열두 아들에게 다 축복하는 노년을 보냅니다.(49장) 그리고는 요셉에 게는 절대 형의 허물을 용서하고 잘 대해 주라고 명령합니다.(창 50장) 끝까지 가장의 권위와 지혜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해 서 파란만장한 야곱의 삶은 고이 나래를 접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과 열조에게로 돌아갔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야곱은 무대 한 가운데서 화려한 주연의 삶 뿐 아니라 요셉이 화려하게 등장한 이후의 조연의 삶도 잘 마무리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무대에서도 조용히 아름답게 내려왔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항상 천년만년 젊을 줄 압니다. 그러나 갑자기 늙음이 찾아옵니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을 해야 할 때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액스트라나, 아예 무대에서 내려와야 할 지도 모릅니다.
주연이나, 조연, 액스트라, 중에서 사람들은 모두 주연에 시 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대 위를 누비는 연기자는 모두 내려 올 때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준비가 부족합니다. 저금은 하면서 노년에 대한 정신과 마음의 준비는 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노년을 준비해야 할까요 우선은 젊었을 때에 노년의 시기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 모를 이해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또 나의 늙음을 준비하는 길이 기도 하고요. 어떤 노인학자가 65세 이상의 노년기의 신체적 특 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피부세포 조직은 건조해지고 그 성장이 느려진다. 기본 신진대사의 비율이 낮아진다. 신경근 육 반응의 속도, 강도, 지속성이 저하한다. 시력과 청력이 약화 된다. 집중적인 신체적 노동후에 심장의 고통의 강도나 비율이 60세 이후에는 특히 낮아진다. 피부의 상처가 낫는데 평균5배의 시간이 더 걸린다. 동맥의 신속성이 낮아지고 경화된다. 뼈는 연 약해지고 유연성이 없으므로 골절이 쉽게 일어난다." 이런 신체적인 변화 이외에도 심리적인 변화도 있습니다. 노인학 자들은 노년의 특징을 '보수성과 비융통성'이라고 했습니다. 무 슨말인고 하니, 변화를 싫어하고, 융통성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는가 그 이유를 노인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 고 있습니다. "연령의 증가에 따라 신체적 능력과 기능이 저하됨 에 자신감이 없어지고 과거의 방식에 따라 완전감과 만족감을 가 지려는 태도가 되기 때문이다." 이게 인생입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이해를 정확하게 하고 있어야합니다.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사랑은 이해 위에 쌓아 올려지는 성입니다. 이해 없이 사랑한다는 것은 허구이지요. 두번째는 노년되기 훈련을 해야 합니다. 고대의 한 랍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멀지않아 나 이를 먹고 노년이 됨을 알고 노년을 향해 심리적인 준비를 해야 한다." 오늘의 사회에서도 노년은 패배이고 겨울인 것으로 여김 받습니다. 패배만이 기다리고 있는 사회란 얼마나 냉혹한 사회일 까요 어리석은 자에게는 노년이 겨울이고 현명한 자에게는 노년이 황금기가 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우선 젊어지려고 해야 합니다. 유대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젊었으면서도 늙었고, 어떤 사람은 늙었어도 젊었다" 이 말이 가능한 말입니 까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젊은이를 능가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 니까 세대차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차를 극복 하는 것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같은 세대끼리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편합니다. 그러나 이질적인 사람, 이질적인 세대는 노력 해야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노력해야 동질의식을 느낄 수 있습니다. 노력해야 문화를 공유할 수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노년 세대에게로 가든지, 노년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로 가든지 누군가는 한 쪽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래야 소통이 가능한 것입니다. 떨어져 있고 간극이 있고 거리가 있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젊은 층이 노년에게로 가기는 사실 쉽지 않습니다. 아쉬울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살아본 폭이 좁고 지금 바쁜 와 중에 있으니까, 노년 세대가 젊은 세대에게로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각고의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제가 서울 시흥교회에서 고등부 교육 전도사로 섬길 때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한지는 너무오래 되어 기억이 가물가물하지요. 그래서 이 청소년들을 이해해 보려고 밤 밤송을 듣고, 청소년들의 팝송 잡지를 구독해 보고, 노래 테이프를 들어보고 했습니다. 대 화를 유지하려고요. 그랬더니 막혔던 대화가 뚫리고 아이들이 가 까워졌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대화를 유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방적인 주입이 아니라 젊은 층들과의 대화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도 젊어 져야 하고, 유연해 져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도 인간에게 성육신 하셨습니다. 이 성육신은 높은 곳에 있는 존재가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젊은 세대를 이해하고 호 흡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늙어서도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은 성장해야 합니다. 나이는 그냥 먹습니다. 그러나 황혼의 아름다움과 멋을 내려면 노력이 필요합니다. 가정 문제를 상담하다가 보면 물론 젊은 며 느리가 문제이고 젊은 세대가 문제인 경우가 태반입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부모된 분들, 시어머니 된 분들이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 공부는 노년반이 제일 필 요합니다. 이 노년들이 제대로 되면 가정의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은 반으로 줄어들 수 있습니다. 인생의 경험과 경륜을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가정의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노년에는 믿음이 더 성장해야 합니다. 대개 노년 에는 성경공부와 믿음의 성장을 본인도 게을리 하고 교회도 배려 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더 강화해야 할 것입니다. 노년은 교회 의 소비 계층이 아닙니다. 분명히 생산의 계층입니다. 그러기 위 해서는 투자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은 봉사의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축복하는 삶입니다.
야곱도 창세기 49장에 보니 열두 아 들을 일일이 축복하고 있습니다. 축복하는 삶 이게 황혼의 아름 다움입니다. 서운해하고 원망하고, 괴로워하고 소외의 지대에 몰 두해 있는 것, 이건 축복하는 삶의 태도가 아닙니다. 넉넉한 마음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지막 재능과 시간을 다 쓰고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황혼의 의무입니다. 야곱도 그리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봉사도 준비해야 합니다. 전문적이면 더 잘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 때 까지는 자신과 가족과 일을 위해 살았으면 이제는 이웃을 위한 자유로운 봉사로 살아야 합니다. 어떤 노부부 이야기가 있습니다. 양복을 만들면서 평생을 살아온 80고령의 노부부가 성공한 아들네 집에서 온갖 호강을 다하며 살 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일없이 사는 것이 지옥보다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들 내외에게 양복을 지을 수 있는 작업실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효심이 남다른 아들 내외라. 어디 가당하기나 한 주문인가요. 완강하게 반대를 하는 겁니다. 하다못해 이 노부부는 남 몰래 탈출해 나와서 갓 신 혼살림을 차린 손녀집으로 향했습니다. 손녀에게 간청을 해서 빈 방에 제봉틀과 재단대를 마련해 놓고 양복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지은 양복으로 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소일도 하니 즐겁고 보람된 나날을 보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모두 시간을 한정하고 무대 위 에서 열심히 연기를 할 뿐입니다. 저 마다의 대사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저마다의 역할에 몰입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고통의 연기 를 터질 듯한 가슴으로 해 내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쁨과 환희의 연기를 혼신의 힘으로 해내고 있습니다.
저마다 힘겨워하고, 저마다 삶의 애환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끝나면 내려 와야 합니다. 무대의 막이 드리워지면 모두가 자기의 무대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역할을 그만둬야 합니다. 이것이 인생이고 노년 입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이 지금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래의 노년은 바로 현재의 부모들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바로 그 지대입니다. 창세기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 셉이 모두 여호와 경외의 길로 같습니다. 자녀들을 축복하는 삶 을 살았지요.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의 말씀을 잘 따랐고, 축복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후히 대접하고 후히 장사지냈습니다. 아브 라함의 생은 바로 이삭이 살아간 삶이었습니다. 이삭의 생은 야 곱의 살아간 삶이 되었고 야곱의 마지막은 요셉이 살아갔습니다. 때문에 넉넉한 가슴으로 우리의 노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렇게 시퍼렇게 젊을 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푸르게 젊을 때, 이미 노년의 삶을 앞장서 살고 계신 우리의 부모님들을 이런 관 점으로 이해하고 존경하며 배려하도록 해야 합니다. 미래의 나의 모습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처럼 믿음의 전통, 아름다운 노년의 전통이 이어지도록 합시다. 그래서 여러분의 가정을 통해 축복이 이어지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우리의 노년이 젊음 보다 아름다울 수 있게 해 주옵소서 주님, 노년의 시기 인생의 경륜이 보석 처럼 빛나게 해 주십시오. 주님 노년에는 인생의 황혼을 잘 마무리 할 수 있도록, 더욱 큰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님, 노년에는 봉사하고 축복하는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 노년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소망이 더욱 커지게 하여 주옵소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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