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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길이 형통하리라 (신30: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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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인사는 최근 몇일동안 수없이 받았고 또한 여러분들도 수없이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인사처럼 무책임한 인사는 없을 것입니다. 복을 주지도 않으면서 복 받으라니,만사형통시킬 능력도 없으면서 만사형통하라니., 사람에게 과연 나누어 줄 수 있는 복을 가지고 있으며 만사형통 시킬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만일 있었다면 사람들은 오늘날 이 모양 이 꼴로 살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옛부터 복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해 왔습니다. 서낭당 고목나무에게 빌어보기도 하고, 돌부처에게 가서 졸라보기도 하고 태양을 신으로 믿고 사정도 해보았습니다. 죽은 조상이 혹 복을 가지고 올까 해서 열심히 제사도 드려보았습니다. 그래도 복이 안오니까 이제는 집안 구석구석에 “福”자를 써놓습니다. 들어오는 대문으로 부터 안방의 장판,건넌방의 문창살,사랑방의 도배지,방석,이불,요,벼개,밥상,수저,밥그릇,국그릇,신발,한복,심지어 방구석에 있는 요강에 까지 福자를 써놓고 흐뭇해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복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거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복이 없는 줄 알고 찾고 있는데 이미 사람은 복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그리고는 생육하고 번성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복을 이미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복은 사람이 선택해야 만이 자기것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선택하므로 이 복을 차버리고 만것입니다. 본문을 보십시오. 복과 화를 네 앞에 두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복을 선택하는 사람은 곧 여호와를 사랑하고 여호와의 율례를 지키는 사람이요 그런 사람에게는 생존의 축복과 번성의 축복과 땅의 축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화를 선택하는 사람은, 즉 마음을 돌이켜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사람은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직접 선언하셨습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복과 화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네 코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복이냐 화냐가 결정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복을 택했을 때는 글자 그대로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상을 섬기고 여호와의 말씀을 멀리했을 때 글자 그대로 저주스럽게 살았습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복을 선택할 수 있는 그 자체부터가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둑질하는 아버지도 자기 자식에게 만은 복받기 위해서는 착하게 살라고 가르칩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망할 길을 가르치시겠습니까 눈을 뜨고 성경을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대로 살면 네길이 형통할 것이라는 말씀 뿐입니다.
연초에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하면 내 길이 형통할 수 있을까”하는 것일 겁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여호와의 율례와 규례를 지키면 네 길이 형통하리라”는 말씀뿐입니다. 율법을 지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며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는 자는 형통하리라고 하셨습니다.(수 1:7-8) 이 말씀은 유명한 철학자가 한말도 아니요 유명한 신학자가 한말도 아니요 유명한 목사님이 한말도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누가 책임지십니까 하나님이 책임지십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을 축복의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크고 작은 모든 복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형상을 입은 존재에게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이렇게 축복하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 신약시대에도 이 축복은 게속 이어집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고 죽으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 주님은 고난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복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노력입니다.
그러므로 복이라는 것은 꼭 돈많이 벌고,건강하고, 자식 잘되고, 며느리 잘보고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가장 근본적이 복은 영적인 복입니다. 다른 복은 영적 복이 잘 됨으로 파생된 복일 뿐입니다. 복이라는 말은 원어로 “율로기아”라는 말입니다. 이는 댓가로 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주어와 동사만 있을 뿐입니다. 주어가 동사할 뿐입니다. 목적어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뿐이지 어떠한 인간의 댓가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복의 하나님이 복을 주심을 기뻐하시니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만 가기만 하면 하나님께서는 “옳다, 복받을 자가 바로 너로구나!” 하시며 소나기 내리시듯 축복을 부어 주십니다. 또한 율로기아라는 말은 좋은 말(Well logos)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축복받기 위해서는 좋은 말을 붇들고 있어야 합니다.
말 중 제일 좋은 말이 어떤 말입니까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이 말씀을 잘 붙들고 있어야 복을 받습니다. 또한 이 좋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계지도를 놓고 보십시오. 부자나라와 가난한 나라가 구분되어질 것입니다. 어느 나라가 복을 받았고 어느 나라가 복을 받지 못했습니까 복음을 들은 나라는 부자 나라이고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는 여전히 가난합니다. 유럽을 보십시오. 사도바울에 의해 복음이 먼저 서양에 들어가니 이렇게 서양이 복을 받지 않았습니까 바울 이 처음에는 인도로 가려고 했습니다만 꿈속에서 성령님의 인도로 마게도냐로 가게 되었습니다. 만일 그 때 바울이 복음을 들고 동양으로 먼저 갔다면 지금쯤의 역사는 동서양이 완전히 바뀌어졌을 것입니다. 서양이 동양보다 복받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같은 유럽이라고 해도 말씀이 자유롭게 들어간 나라와 공산화되어 말씀이 들어가지 못한 나라가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를 보십시오. 복음이 들어오기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가난했습니까 그러나 복음이 들어오면서 부터 가난과 문맹과 질병이 퇴치되더니 지금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내입에서 좋은 말이 자꾸 흘러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여러분 집에 가보면 허옇게 먼지가 쌓여 있기는 하지만 성경은 여러권 있을 것입니다. 저도 성경을 세어보니 각 종류대로 15권씩이나 됩니다. 이렇게 성경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말씀도 수없이 듣고 있습니다. 주일낮부터 시작해서 일주일동안 공식적으로 듣는 말씀이 12번입니다. 서점에 가도 얼마든지 말씀이 널려 있고 다이얼만 맞추면 얼마든지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좋은 말씀이 계속 입에서, 생활에서 흘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로기아”라는 말은 집단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복을 받은 사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복을 받은 야곱이 라반의 집에 들어가니까 라반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복을 받은 요셉이 애급에 들어가니까 애급이 복을 받았습니다. 복을 받은 바울이 로마로 들어가니 로마가 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가는 것에 복이 있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떻게 복을 받았습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바닷가 사람들의 입은 거칩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죽음이 매일같이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도 말이 엉망이었습니다. 원어성경을 보면 제자들의 말에 비어나 속어나 욕설이 많이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그들이 예수님을 만나 3년동안 따라다니다 보니 그 입이 복받는 입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도 입이 바뀌면 복받을 줄 믿습니다.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십시오. 그릇마다 그 입이 다른 것을 봅니다. 큰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큰 사람이 큰 사람이요 생각이 크다는 것은 그 입으로 나오는 말로 알 수가 있습니다. 민수기에 보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탐하기 위해 12명의 정탐꾼을 보냅니다. 이 때 생각이 큰 사람은 두 사람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는 생각이 코딱지 만해서 결국 가나안의 그 큰 복을 받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네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는 이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내 입이 복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복의 말만 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로, 소비적인 말이 생산적인 말로, 소극적인 말이 적극적인 말로, 시험들게 하는 말이 용기를 주는 말로, 낙망케 하는 말이 위로하는 말로, 능력을 일으키는 말, 믿음의 말, 소망의 말, 사랑의 말로 바뀌어야 합니다. ‘일본의 실력’이라는 책을 보니 그들의 꿈은 섬나라 일본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 정복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꿈이 군사적으로 실패하자 그들은 방향을 바꾸어 경제적으로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 꿈이 그들을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 되게 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각 분야별 세계 최고의 민족을 연구하는 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연구 결과를 기업운영에 적용합니다.모 든 분야에서 세계제일이 되겠다는 야심입니다. 저는 이 책을 보고 깜짝 놀랍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영적세계에서도 “축복의 원리”임을 알았습니다. 여러분이 사업하십니까 겨우 먹고 사는 호구지책으로만 생각하신다면 복받기 틀렸습니다. 이제부터 세계 제일이라는 포부를 가지십시오. 직장을 다니십니까 겨우 월급날만 기다리고 아침 출근때마다 짜증만 내고 있다면 복받기 틀렸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 회사를 좌지우지 하는 사람이 된다는 포부를 가지십시오. 공부하십니까 학벌만을 가지려고 공부한다면 복받기 틀렸습니다. 내가 연구하는 분야로는 세계 최고의 석학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지십시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네 시작은 미약하나 네 끝은 창대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또한 “율로기아”라는 말은 부지런하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말은 게으름을 이겨야 복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이 도우시려고 해도 게으른 사람과 게으른 민족은 도우실 수가 없습니다. 자기하나 수신(修身)하지 못하는 사람이 어덯게 제가(齊家) 할 수 있으며 치국(治國)하고 평천하(平天下) 하겠습니까 자기 생활하나 관리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중대한 일을 맡기시겠습니까 어떻게 해서 복음이 들어간 나라가 복을 받았습니까 제일먼저 그 나라가 게으름으로 부터 탈출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일하는 사람을 천히 여기고 방안에서 ‘하늘천따지’ 하는 사람은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 결과 나라꼴이 뭐가 되었습니까 그러나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부터 이러한 관념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게으름이 추방되고 일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만큼이라도 살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요즘 들어 다시 게으른 민족이 되어가고 있는 느낌이라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복받고 싶으면 게으름을 추방해야 합니다. 내 삶에서, 내 가정에서, 내 자녀에게서 게으름을 추방해야 합니다. 온 집안에 할 일이 태산같은데도 집안은 사람사는 집인지 아니면 난지도인지 모르게 쓰레기장을 해놓고, 부엌은 설거지 하지 않아 파리떼가 우글거리게 해놓고, 세탁기안의 빨래는 곰팡이가 슬고 있는데도 “좀 더 눕자” “좀 더 자자” “좀 더 쉬자” 하는 자에게는 가난이 전염병처럼 들어온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이 복받으려면, 우리나라가 복받으려면 부지런히 일하는 가정과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말을 맺습니다. 92년도는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92년도 91년과 같이 말로만 복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말씀드린 원리대로 살아서 92년도는 그야말로 축복의 한 해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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