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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怒)의 신성(神聖) (요2:12-25)

본문

예수께서 성전을 성결케 하신 사실이 마태, 마가, 누가의 공관복음서에 똑같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올라 가셨던 유월절에 행하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만은 주님께서 이 땅에 구원의 사업을 착수하시는 공생애의 첫 유월절에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셔서 하나님의 성전을 깨끗하게 청결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는 공생애에 있어서 첫 유월절과 마지막 유월절 두 번 에 걸쳐 성전을 깨끗케 한 것이라고 봄도 타당하겠으나 대개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동일한 사건을 저자들의 관심의 정도에 따라 배열을 달리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12절에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제들에 대해서 살펴 봅시다. 그리스도의 형제들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 암브로시스터의 견해는 요셉의 전처의 소생이라는 학설이고 둘째, 크리소스톰의 견해는 예수님의 이종 형제들이라고 보며 마리아는 일생을 처녀로 보냈다고 본다. 이것은 천주교에서 아직 고수하는 학설이며 셋째, 터툴리안의 학설로써 예수님의 친동생이라는 말로써 성서 마 13:55의 “이 예수는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그 모친은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느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라는 구절에 근거합니다. 개신교는 세 번째 설을 견지합니다. 13절에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더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각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오순절, 장막절과 함께 3대 절기의 하나이며,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기념하는 일주간의 성대한 제사 기일입니다. 이 절기는 지금 부활절 전 일주일이 해당됩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은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서 장자를 치는 마지막 재앙이 임했을 때에 유월절의 어린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리워 있는 유대인의 집만은 재앙이 넘어가서 죽음을 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유월절에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깨끗케 하심은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구원의 그림자였던 것입니다. 19절에 “그리스도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이라는 말이 14절, 15절, 19절, 20절, 21절 등 5회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대해 잠깐 살펴 봅시다. 성전은 대개 세 가지로 보는데 그 첫째가 솔로몬의 성전입니다. 이것은 솔로몬의 치정 4년에 시작하여 7년 6개월만에 완공한 것인데 (왕상 6:) 목재는 레바논에서 목공은 베니게에서 18만명 인부가 동원되고, 금 10만 달란트, 은 100만 달란트(한화로
1,500억원 상당)로 건축된 것입니다. 이 성전은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왕에 의해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두 번째 성전은 스룹바벨의 성전인데 이것은 스룹바벨, 느헤미야, 에스라가 70년의 바벨론 포로 후에 건설한 것입니다(BC 520-521).
마카비 운동 때에 로마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세 번째 성전은 헤롯의 성전입니다. 이것은 헤롯 치정 18년 BC 19년에 착공하여 9년 후에 봉헌식을 올렸으며 그리스도 복음을 증거하신 해 27년은 성전 건축공사 46년이 되는 해였으며 그 후 계속 진행되어 AD 63년에야 완공을 했습니다. 총 공사 기간은 82년이 걸린 셈입니다. 그러나 이 성전도 7년이 지난 AD 70년에 로마의 군에 의해 완전 파괴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영광과 수치의 민족사와 함께 그 운명을 같이한 것입니다. 본래 성전은 법궤를 안치하고 하나님 여호와께 예배와 기도의 집으로 지은 것이었으나 본문의 요 2:13-17의 말씀처럼 장사의 소굴, 허식, 거만, 시기, 싸움, 도둑의 소굴로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를 본 그리스도는 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성전을 헐라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했습니다. 46년 공사가 진행되어도 완성 못한 이 성전을 사흘만에 다시 짓겠다고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제자들에게는 이해될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리스도 자신이 성전임을 주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후에야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본문 말씀에 집중해야 할 말씀은 아버지 하나님의 집에서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그 존재가 허락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성전으로써 대표된 유대의 성전이 형식주의와 외식의 소굴로 더럽혀짐을 보고 견딜 수 없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도 진노와 분노를 참지 못해 채찍을 만들어 성전에서 장사의 무리를 내쫓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노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예수는 노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간적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혼돈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의 사랑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이므로 그리스도는 자비, 사랑, 인자, 용서, 눈물의 구주라고만 생각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는 틀림없으나 용서와 사랑과 눈물과 자비와 연민만의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약한듯이 보인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비상하게 강한 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엄격한 사랑, 강하고 굳은 사랑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고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연약한 자라고 아는 것은 큰 오해 중에 오해입니다. 그리스도는 노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종종 노했습니다. 전도의 처음부터 예루살렘 성전 앞에서 “아버지 집에 장사 집을 만들지 말라”고 책망했습니다. 이 귀절을 마태복음 21장에는 더 강하게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에 강도의 굴혈을 만드는도다.” 여기 예수님은 결코 유약한 구주가 아니십니다. 실로 여호와의 집을 위한 열심이 그를 노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노하심은 막 3:5에도 볼 수 있습니다. “저희 마음이 완악함을 보시고 노하시사 저희들을 둘러보시며 이르시되.” 또한 제자들의 믿음없는 것을 보시고 노한 것을 우리는 막 9:19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예수의 노함은 수제자 베드로에게도 예외는 아닙니다.
막 8:33에 베드로를 향하여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도 않으며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도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는 허다한 경우에 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노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노한다는 것을 모든 비그리스도인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진노는 기독교인의 행위가 결코 아니라고 하는 자들에게서 자기의 개인의 일에 대해서는 노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자기의 개인의 명예가 상처를 입을 때에 노합니다. 자기의 이익이 손상을 입을 때에 노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졌다고 해서는 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노하는 것은 비기독교인의 행위라고 비방합니다. 타인의 권리가 침해되었다고 해서 노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이 날뛰어 하나님을 믿는 성도를 마구 잡아 죽여도, 사회의 공의가 유린당했다고 해서 그들은 노하지 않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지극히 냉정합니다. 하나님 여호와의 집을 위한 열심은 그들을 삼키지 않습니다. 무엇이 오늘날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사회 양심에 대하여 유약한 관념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분명한 것은 이기심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만의 이익이면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자기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까지도 자기를 위하여 구하기 때문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정의에까지 이르러 노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죄를 미워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랑인 동시에 죄를 불살라 버리는, 불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나훔 1:3의 말씀처럼 벌해야 할 자를 결코 용서하지 않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 의롭게 된 자는 용서해 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분명히 눅 12:10에 “인자를 거역하는 죄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으나 성령을 거스리는 자는 사함을 받지 못하리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죄인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다시금 그 죄가 자리를 잡지 아니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의 뜻을 이해 못하는 많은 무리들은 죄를 깨우치고 회개를 촉구하면 몰인정하다, 무정하다, 무자비하다, 노하는 자라는 이름으로 비방합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죄인을 사랑하되 죄는 미워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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