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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지 질문 (출3:1-12)

본문

창세기 1장과 2절에 기록된 창조의 기록을 살펴보면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창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첫번째 세상의 모든 창조물을 잘 다스리고 보존하여야 할 관리자로 창조되었으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되새겨 볼 때 역력히 증명되어지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다시 말해서 인간은 다른 피조물과는 현저히 다른 인간으로서 가져야할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단지 인간으로서의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가치를 소유하였다고 해서 모두 똑같은 사람일까요 이 질문에 대하여는 우리는 고개를 가로저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이라 해서 모두 똑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우리는 바로 우리의 주변에서 끊임없이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현저히 다른 가치와 목적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며 세상사람들과는 다른 새로운 생명과 삶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우리는 스스로 공언하고 있드시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또한 불리우고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인간이 가져야할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가치관이 있드시 그리스도인에게도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가치관이 있게 마련이며 또한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올바른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가치관은 과연 무엇일까요 또한 그것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요 물론 상당히 어려운 일입니다. 오늘날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보다는 오히려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얼굴과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고 있으며, 우리나라만 하여도 전 인구의 1/4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이나라의 올바른 문화를 선도하기는 커녕 오히려 우리에게 들려지는 수 많은 비리와 부정과 죄악의 소문속에 함께 들려오는 유명한 그리스도인들의 관련사실들이 우리의 자손들에게 그리스도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사실이 오히려 가르치는 자리에 있는 저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자녀들이 그리스도인의 가정임을 자랑스러워하지 못하고 오히려 숨기려 하고 창피해하게끔만드는 이유는 과연 무엇입니까 또한 가르치는 자리에있는 저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들고 있는 이유는 과연 어디있을까요 그것은 우리들의 삶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올바른 위치와 역할 그리고 가치관을 잃어버리고 마치 키가 부러져 바람부는 대로, 파도치는 대로, 표류하는 배와같이 허우적거리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위치와 역할 그리고 참된 가치관을 되찾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그것을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가며 스스로를 세워갈 수 있어야만 합니다.
첫째로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둘째로 나는 지금 무엇을 위해 어떤 방법으로 살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을 의지하여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곳에서 이 세가지의 질문에 대한 해답을 우리에게 이런방법 저런방법을 통해 가르쳐주시고 또 깨우쳐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도 바로 이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모세를 통하여 보여주신 한가지 귀중한 예입니다. 사람을 죽이고 광야로 피신하여 하챦은 목자로서 하루하루 무의미한 삶을 영위하던 모세를 부르시고 붙잡아 주시고 당신의 백성을 인도하는 위대한 역사를 맡기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도구로서 올바른 삶을 살아가기위해 끊임없이 나에게 질문하여야할 그 세가지 질문의 해답을 찾아보고 하나님의 뜻을 겸허하게 깨닫는 시간이 되도록 노력합시다. 과연 나는 지금 어디에 서있습니까 장인 이드로의 양에게 보다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던 모세는 광야서편 멀리 호렙산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너무나도 기이한 현상을 목격하게 됩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놀랍게도 나무는 전혀 타지않고있는 그러한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 기이한 모습이라 자세히 보려고 떨기나무 가까이 가는 순간 커다란 음성이 그를 멈추어 서게 했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께서는 약소 민족의 후예로 태어나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에 살인을 하고도 동족에게 버리받고 도망쳐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모세를 부르셔서 그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거룩한 산 호렙으로 부르셔서 그곳에 서게하시고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모세를 쓰시기 위하여 거룩한 땅에 세우셨드시 나를 당신의 뜻을 이루실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하여 죄에 빠져 죽을 수 밖에 없던 나를 건져 내셔서 거룩함 위에 세우시고 그 길에서 벗어나지 말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나는 지금 바로 이순간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서있습니까 나의 발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향해 얼마나 바삐 나아가고 있습니까 나의 머리와 가슴은 과연 향하지 말아야 할곳으로 얼마나 줄달음질 쳐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나의 발과 가슴과 머리가 거룩함에 거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올해 저는 서귀포교회에 부임하여 목사 임직을 하여 귀한 목사의 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으며, 감사하게도 목사의 첫발을 내딛는 저를 주님의 몸된 대천제일 교회 청년들에게로 처음 불러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귀중한 일을 맡게 하심을 무한한 감격으로 생각합니다. 비록 목사로서는 단 한주일밖에 살지 않았지만 지난 10년간 네곳의 교회에서 혹은 학생들을 혹은 아동부를 청년회를 지도하며 목회사역을 감당해왔습니다. 이런 와중에 저는 오늘날의 교회교육의 문제점을 몇가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오늘날의 교회안의 젊은이들이 너무도 자기일에 바쁜나머지 하나님께드려야 할 시간에 대하여 소홀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니 소홀하다기 보다는 아예 하나님앞에 드려야 할 시간에 대하여는 관심도 없고 신경을 쓰려하지도 않는 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현재 한국교회의 실정을 바라보면 20대의 젊은 그리스도인들중 지교회 청년부에 몸을 담고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청년이 15%에도 채 못미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학생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바쁜지 고3만되면 학생회와는 담을 쌓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심지어 서울의 어떤지역에서는 학생회를 담당하는 전도사가 고3들은 더욱 열심히 예배에 나와야 오히려 좋은학교에 갈수 있다고 말했다가 학부모교우들의 비토를 받아 쫓겨나는 불상사까지도 있었습니다. 물론 어떻게 생각하면 가르치는 위치에있는 제자신이 누워서 침뱉기 같은 부끄러운 사실을 왜 지금 여러분께 고백할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자세가 너무나도 형식적이고 겉치레적이며 즐거움위주라는 점을 깨닫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은 젊을 수록 더욱 심하게 나타납니다. 단지 주일낮 예배 한번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을 향한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심지어 그 한번조차도 제대로 못지키고 결석을 하는 젊은이들이 매우 많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결석한 이유를 들어보면 잠자다가 늦어서, 친구랑 약속을 해서, 학교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중간에 빠져나오기가 힘들어서 등이 거의 대부분의 이유였습니다. 이것은 바로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내가 지금 어디에 서있는가 하는 질문에 주님을 향한 거룩함에 서있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 없는 나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서있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함 속에 요동함이 없이 서있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서의 나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 나 자신에게 우리는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나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거룩한 곳으로 불러 세우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지금 나에게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끊임없는 목적의 연속선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의 목표가 흔히 너무도 인간적인 목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도 많이 봅니다.
요즈음 우리는 신문지상을 통해 아주 재미있는 뉴스를 매일처럼 접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름아닌 한국 불교의 장자종파요, 최대 교종이라 자부하고 있는 불교 조계종의 교권싸움이라는 큰 뉴스거리입니다. 아주 재미있는 것은 불교의 가장 중심교리는 무요 가장 큰 덕을 무욕,무심에 두고있다는 사실과 바로 이 무욕과 무심을 설법하고 가르치는 승려들중에서도 가장 존경을 받아야 할 위치인 종정의 자리를 두고 돈과 권력과 관련된 비리의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가 나타나지만 았았다뿐이지 우리들의 삶속에서도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커다란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고 손가락질하고 욕을하는 바로 나의 모습속에서 그들보다 나을 것이 없는 모습이 또한 너무도 많이 발견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없는자 먼저 돌로치라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우리중 과연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에 그 촛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천하보다도 귀중한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고 또한 그 아드님은 멸시와 박해 그리고 물과 피를 모두 쏟는 참혹한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면서도 끝까지 참아주셔서 아무가치없는 나를 가치있는 자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를 무가치한 자리로 부터 거룩하고 가치있는 자리로 건져주신 그분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과 내가 어떤 방법으로 살고 있는가는 아주 밀접한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빨리 찾아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구원 받게되기를 원하셔서 아드님을 보내주셨고 또한 나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입에서 입으로가 아니라 삶에서 삶으로 전파되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방법으로의 삶을 살아가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의 방법은 한마디로 표현 한다면 여유를 갖는 삶을 의미합니다. 여유를 갖는 다는 의미는 재정적인 풍요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쯤은 참아주는 여유, 한번쯤은 용서해주는 여유, 한번쯤은 손해를 볼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한번쯤 참아주지 못하고, 한번쯤 용서해주지 못하고, 한번쯤 손해보아주지 못한다면 결단코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얻을 수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땅끝까지 이르러 복음의 걸림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노라고 고백합니다. 이 예수의 흔적을 우리도 우리의 삶속에 채워야 합니다.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 원어에 στιγματα란 단어로 이것은 낙인을 의미하는 단어 입니다. 낙인이란 무엇입니까 짐승이나 노예의 소유권을 알리기 위해 그몸에 주인의 상징적 문장을 불로 지져 찍어 놓는 것 아닙니까 예수의 낙인이 찍혔다 함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제 이후로 어디를 가든 무슨일을 하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명령을 준행하며 목숨까지도 그분을 위해 바칠 수 있는 그런 헌신과 결단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자신의 마음대로 살 권한이 없습니다. 종에게는 자신의 일을 할 권한이 없습니다. 종에게는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보전할 권한이 없습니다. 오직 주인의 뜻에 따라 일하고, 살고 생명을 바치며, 그 영광에 대해서는 일절 미련이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내가 나자신의 이익에 집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때 결국 나는 하나님나라의 영원한 거침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저는 아주 재미있는 일을 당한적이 있어 여러분께 소개하고자 합니다. 제가 담당하고 있는 청년회가 아이들만 셋이 살고있는 학생 소녀가장을 매월 한번씩 찾아가서 대화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문구류도 사주고하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그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워낙 빈촌이라 자가용이 있으리라 생각도못하고 컴컴한 가운데 미쳐 뒤를 확인하지 않고 후진을 하다가 한 7,8년은 되었음직한 스텔라 승용차를 받아서 운전대쪽 후렌다를 받아 찌그러졌습니다. 그 차주는 자신이 아는 카 서비스센타에 갖다가 맡길테니 저에게 수리비를 지불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하기로하고 헤어졌는데, 나중에 다 고쳤다고 해서 가보니 수리비가 46만원이 나왔습니다. 기가 막혀서 도대체 앞 후렌다 하나가는데 무슨 수리비가 그렇게 많이 드냐고 했더니 하는 말이 걸작이었습니다. 처음에 후렌다를 갈고 도장을 하고 열처리하느데는 13만원이 나왔는데 다른 부분은 오래되어서 바랜반면에 새로 칠한 부분이 너무선명한게 흉해서 전체 도색을 다시하고 열처리를 다시 했기 때문에 수리비가 많이 나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죽하면 없이 사는 사람이면 이런기회에 새차처럽 보이고 싶었으면 그럴까 하는 생각과 내가 전도사라는 사실을 아는데 전도사가 그런 문제로 싸운다면 하나님 앞에 덕이 안된다는 생각에 그대로 여기 저기서 돈을 구해서 전액을 다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후일 봉사활동을 계속하면서 알게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이 근처 모 교회의 집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얼마나 화가나던지 전도사인 제가 그런일을 당하고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렇게 가증스러웠는데 하물며 당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어떠했을까요 진정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서는 남들이 뒤에서 수군수군할만한 일은 하지 맙시다. 그리고 한발 앞서가 한번쯤 더 참아주고, 한번쯤 더 용서해주고, 한번쯤 더 손해보아주는 삶의 방법을 택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아야만 합니다.
창세기 4장 20절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는 모세의 손에는 하나님의 약속의 증거인 지팡이가 들려져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지팡이는 후에 애굽에 재앙을 내릴 때도, 홍해를 갈를 때도, 반석을 쳐 물을 낼 때도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모세의 손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모세의 사후에 법궤에 넣어져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속에 남아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속에 의지하여야 할 지팡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약속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속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갖추어야할 모든것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임할 모든 약속 역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도 성경의 기록으로 알 수 있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야만 하겠다는 것도 성경에 기록된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에게는 영원한 생명과 천국이 예비되어있다는 사실도 역시 성경에 기록되어진 약속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든 삶은 말씀에 의지하여야하고, 말씀에 근거한 믿음을 가져야 하며, 말씀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순간 많은 욕심과 기만과 거짓과 죄악으로 더럽혀진 나의 마음문을 인자하신 손을 내밀어 노크하시며 준엄한 목소리로 질문하십니다. 네가 서있는 곳은 어디이냐 너는 무엇을위해 어떻게 살고 있느냐 네가 지금 의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 이제 입으로 되뇌이는 응답의 차원에서 벗어나서 진정 예수의 흔적, 예수의 낙인을 몹에 지니고 오직 나의 생명을 나의구주 되신 그분의 영광만을 위하여 삶속에 채워가는 믿음의 청년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청년 그리고 모든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시간 주님의 전에 나올때 망치를 가지고 나오셨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망치가 필요합니다. 망치뿐 아니라 정도 필요합니다. 혹 망치를 가지고 나오지 못하신 분들은 걱정 마십시오. 제가 여러분께 나누어 드리겠습니다. 이제 오늘 이시간 나의 몸에 지닐 낙인을 새기고자 합니다. 또한 나 자신의 무덤에 세울 비석의 묘비명을 새기고자 합니다. 먼저 낙인을 만들 쇠를 모두 듭시다. 아직 결단하지 못하신 분들은 낙인을 새기지 않아도 괜챦습니다.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결단이 가능할 때 스스로 손을들어 새길날이 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시간 우리 모두 마음이 낙인을 새길 수 있는 손과 믿음으로 결단할 수 있기 원합니다.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 우리의 주인의 이름을 새기 겠습니까 돈 명예 지식 학위 권력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주인이 될 자격조차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의 몸에 새길 낙인에 예수 라는 큼직한 두 글자를 새겨 넣읍시다. 다 새기신 분은 낙인을 내려 놓으십시요. 이제 또한 우리는 자신의 무덤에 세울 비석의 묘비명을 새겨 보도록 합니다. 세상 모든 손들이 각자 비석을 새기고 있습니다. 큰손, 아름다운손, 물집이 잡힌손, 고사리 같은아이의 손, 거칠고 갈라진손, 쭈글쭈글한 노인의 손, 이모든 손들이 각자의 묘비명을 새기고 있습니다. 혹은 이 자리에 참여하지 못한 세상의 모든 손들 역시 각자 자신의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여 묘비명을 새기고 있습니다. 우리 한번 고개를 들고 주위를 돌아 봅시다.
내 주의의 많은 사람들은 무엇이라고 묘비명을 쓰고 있습까 또한 이미 새겨져 있는 비석을 보십시오. 거기에 무엇이라 쓰여 있습니까 그럼 나는 과연 무엇이라고 나의 묘비명을 채우렵니까 거기에 나라는 말을 너무 크게 새겨 넣지는 마십시오 나가 너무크면 다른 말을 새겨 넣을 공간이 너무 작아 집니다. 어떤 이들은 이일 저일 망설이다가, 이것을 선택할까 저것을 선택할까 망설이다가 묘비명을 다 새겨넣지도 못하고 생명을 마감한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못 새겨왔습니까 괜챦습니다. 이제부터 바로 새기십시요. 어거스틴은 30년이라는 세월을 자신의 묘비명에 더럽고 추잡한 모든 기록들을 새겼지만 하나님께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고백한 그 순간부터 너무나도 아름답고 찬연한 묘비명을 새겼습니다. 지난 4월 21일은 한국 기독교신앙의 영원한 표상이되는 주기철목사님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감옥에서의 7년여 각고끝에 순교하신 날입니다. 우리는 과연 그분의 묘비명에서 어떤글을 찾습니까 우리의 자녀, 그 자녀의 자녀 그리고 또 그 자녀들이 나의 묘비명을 바라볼 때 이렇게 읽을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평생 나는 어디에 서있는가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의지하고 사는가 질문하며 고민하고 몸으로 실천하여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아간 믿음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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