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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어디 있느냐 (출3:7-9)

본문

창세기는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됐는가를 설명해 주는 책입니다. 먼저 창 1-2장에서는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고,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가를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창 3장에서는 이 세상에 죄가 어떻게 생겨나게 됐는가를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인간의 잘못으로 이 세상에 죄가 생겨나게 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 3장에서부터 이 세상에 죄가 생겨난 이후 어떻게 되었는가를 설명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은 인간이 죄를 짓고난 직후에 어떤 일이 생겼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범죄 이후 본문 7절에 보면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몸을 가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그러자'라는 말은 '죄를 짓고 나자'라는 말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나자마자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이들이 서로를 보니까 벌거벗고 있습니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그것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실상 이들이 벌거벗은 것은 양심이고, 도덕심이고, 인간성입니다. 자기들이 도덕적으로 벌거벗고 있다는 것, 자기들의 양심이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창피하고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도망치고 싶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죄짓기 전에는 모릅니다. 이것이 얼마나 수치스런 일이고, 얼마나 양심에 찔리는 일인지를 모릅니다. 유혹에 눈이 멀기 때문입니다. 먹고 싶은 유혹, 가지고 싶은 유혹, 즐기고 싶은 유혹이 우리의 눈을 멀게 합니다. 그래서 유혹에 빠져서 일단 죄를 짓고 나면, 일단 먹고, 가지고, 즐기고 나면 감당키 어려운 수치심이 몰려옵니다. 양심에 큰 찔림이 옵니다. 가끔 TV 뉴스나 사회 고발 프로그램에서 음란 퇴폐업소를 공개할 때가 있습니다. 카메라가 출동하면 모두가 카메라에 잡히지 않으려고 도망을 치고, 의자 밑으로 숨고, 그렇게도 할 수 없는 사람은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수치를 느끼고 있다는 뜻입니다. 양심에 찔림이 있다는 뜻입니다. 도덕적으로 벌거벗음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카메라가 어느 날 들이닥쳐도 도망칠 일 없고, 숨을 일 없게 살아야 합니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양심에 거리낌없이, 도덕적으로 수치스럽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유혹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영적인 자존심, 도덕적인 자존심을 지킬 줄 알아야 합니다.
창 39장을 보면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셉은 그 유혹에 눈멀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계속해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 우리도 요셉처럼 유혹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유혹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 짓고 나서 눈이 밝아져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 이들이 한 일은 무화과나무 잎을 따서 치마를 해 입은 일입니다. 유혹에 빠져서 일단 죄를 저지른 뒤에 이들이 한 일은 죄를 숨기려 한 것입니다.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덮으려했고 감추려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를 짓고 나면 남들에게 알려질까 봐서 숨기고 감춥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알려질 것 같으면 아니라고 딱 잡아뗍니다. 아담의 후예들의 비겁함입니다. 요즘 정치인들처럼 욕 많이 먹는 사람들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욕을 들어 마땅하다고 생각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대표적인 것이 저질스런 정치 공방입니다. 자세한 내막도 알아보지 않은 채 일단 상대방을 몰아세우고 공격을 합니다. 당한 사람들은 일단 부인합니다. 정치인들이 가장 흔히 쓰는 말이 "사실 무근"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사실로 드러나 망신을 당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무엇을 배울 지 걱정입니다. 우리가 때로 유혹과 싸워 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죄 짓고난 뒤에 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인간을 두 종류로 구분했습니다. 하나는 자기를 의인시하는 죄인과 다른 하나는 자기를 죄인시하는 의인입니다. 의인시하는 죄인이란 사실은 죄를 졌는데 죄를 감추고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죄인시하는 의인이란 지은 죄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받아 그 죄를 해결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 인간은 이미 죄를 저지른 존재들이고 또한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면 범죄 이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 죄를 솔직히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면 의인이 될 수 있지만, 자기 죄를 감추고 의인시하면 죄인으로 그대로 남는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 후에 죄를 감추거나 숨겨서는 않됩니다. 고백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숨기고 감추려 하자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8절에 보면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자기들 가까이 계시다는 것을 확인한 후 급히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습니다. 하나님을 뵈올 면목도 없고, 두렵고도 해서 하나님을 피한 것입니다. 피한다고 피할 수도 없지만 그래도 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범죄한 인간들은 딱한 처지입니다. 신학에서는 이렇게 나무 사이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를 타락이라고 부릅니다. 원 위치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마치 달리던 기차가 궤도를 이탈해서 탈선한 것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인간이 겪는 가장 큰 고통은 죄책감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송스러움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로 묶여 죄책감이 됩니다. 시인 윤동주는 '바람이 불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윤동주는 맑은 영혼으로 바람이 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바람 저 너머 하나님을 보았고, 그 음성을 들었습니다. 윤동주는 맑은 영혼을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바람을 맞고 있는 자기 마음에 괴로움이 있음을 보았고, 그 절규를 들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괴로운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람 저 너머를 다시 바라봅니다. 거기에서 무슨 이유를 찾을 것만 같아서입니다.
사람들 앞에, 세상 앞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떳떳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앞에 세상 앞에 의인 행세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처럼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경외감을 느낍니다. 두렵고 떨림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처음 만나는 사람마다 무섭습니다. 불안합니다. 도망치고 싶습니다. 뿌리깊은 죄책감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문 하나님께서 나무 사이에 숨은 아담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숨박꼭질하는 아이들이 숨은 곳을 찾지 못해서 소리지르는 것처럼 아담의 현 위치를 묻는 질문도 아닙니다. 아담의 영적 상태를 묻는 질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를 묻는 질문입니다. 아담의 영적 현주소를 묻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질문은 아담에게만 던져진 질문이 아닙니다. 제게 던져진 질문이요, 우리 모든 인간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인간에게 최초로 던져진 질문이지만 또한 모든 인간에게 계속되고 있는 질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짓기 전에는 이렇게 묻지 않으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아담 사이의 관계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아담이 하나님을 피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질문이 아니라 꾸지람입니다. 왜 거기 숨었느냐는 책망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질문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빨리 나무 사이에서 나오라는 질책입니다. 이 질문을 그 뜻을 담아서 다시 바꿔보겠습니다.
첫째, 왜 명령을 어겼느냐 아담의 잘못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입니다. 창2:16-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으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아담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엄히 명하셨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절대로 따먹지 말라고.
그런데 아담은 바로 그 명령을 어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시면서 왜 내 명령을 어겼느냐 왜 내 말을 지키지 않았느냐고 책망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아담이 왜 그 명령을 어기게 됐을까요 거기에 사탄의 전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 3:1-6절에 보면 사탄이 하와를 영적으로 뒤흔드는 이야기가 기록되어있습니다. 하와의 욕심을 자극합니다. 하와의 철저하지 못한 믿음을 공격했습니다. 결국 하와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담도 생각 없이 하와의 말을 따라서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여기에 중대한 과오가 있습니다.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탄의 말을 들었고,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에 네가 어디 있느냐라는 질문 뒤에는 이런 책망이 있습니다. 하와야 네가 왜 내 말보다 사탄의 말을 들었느냐 아담아 네가 왜 내 말보다 하와의 말을 들었느냐 우리가 타락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세상에 널려있는 사탄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세상에 널려있는 사람들의 소리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이 사탄의 소리, 사람들의 소리로 가득 차 있다는 점입니다. 암 8:11을 보면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 듣는 일이 그렇게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듯이 애쓰고 노력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타락하지 않고, 탈선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어서 나와라 본문의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라는 질문은 어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청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어있던 아담과 하와를 찾아오셨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 안에는 "왜 그 안에 숨어 있느냐 어서 나와라 내가 용서해 줄 테니 어서 나와라" 이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이 순교자 스데반에 관해서 설교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설교를 듣던 불신자 한 사람이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을 때 도대체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 질문으로 설교는 중단되었고 장내는 조용해 졌습니다. 이 사람은 왜 하나님께서 스데반이 죽도록 내버려두셨는가 하나님께서 정말 스데반을 사랑하셨는가 를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펄전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에게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을 용서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기도했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옵소서" 사랑은 폭력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랑은 용서로 나타납니다. 이 사랑의 용서로 스데반을 죽이는 자리에 있었던 사도 바울의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사랑의 손길로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용서해 줄 테니 어서 나오너라" 그 말씀을 듣고 어서 손들고 나무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담은 용서받을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아담이 네가 어디 있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답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이 용서하시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했습니다. "주여 잘못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그래야 삽니다.
그런데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물으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난 잘못이 없습니다. 다만 하와가 먹으라고 선악과를 주었기 때문에 먹었습니다. 잘못한 것은 내가 아니고 하와입니다.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책임 전가를 했습니다. 그 하와를 하나님께서 내게 보내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어 보내시지 않았으면 이런 일이 없었던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 따지고 항변했습니다. 우리가 용서받지 못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자기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깨달아도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모두가 네 탓이라 손가락질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에게 "하와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 질문에 하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들의 잘못된 습성입니다. 너무도 뿌리 깊어 고쳐지지 않습니다. 자기 잘못이 지적 당하면 늘 핑계를 댑니다. 그래도 않되면 책임을 전가합니다. 자기 잘못을 용기 있게 인정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우리에게 "하와가 어디 있느냐"고 묻지 않으십니다. 하와가 어디 있는지는 하와에게 물으십니다. 변명하고 책임 전가한 아담은 결국 용서받을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처벌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고 한 평생 고생하다가 결국 죽음을 맛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우리의 영적 현주소는 어디입니까 혹 나무 사이에 숨지는 않았습니까 숨었다면 어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 잘못을 구하고 용서를 받으십시오. 주님의 용서를 받으셨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을 잘 지키십시오. 또 다시 "네가 어디 있느냐"는 질문을 받지 않도록 힘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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