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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움의 생활화 (신26:1-11,눅17:11-19)

본문

우리나라의 남단에 있는 소록도에 가면 지금도 전국에서 이곳을 찾아와 정착하고 평생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름철에 이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때는 불쾌한 냄새가 예배당에 가득합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그들은 난로를 꺼버리고 창문을 열고 예배를 드리었습니다. 사연을 물은즉 손님 목사님이 오셨는데 자신들의 추한 냄새가 될 것 같아서 손님 목사님이 오실 때마다 이렇게 난로를 끄고 문을 연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들의 인상은 정면으로 보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울 정도로 정상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악수를 하려고 하면 송구해 하면서 겨우 악수를 하곤 합니다. 자신들의 손이 휘어지고 손의 형태마저 없어진 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력을 초월한 예배입니다. 그들의 열심, 그들의 청아한 찬송, 말씀을 사모하는 절박한 심령, 쉼 없는 기도의 함성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만난 그곳에서 만난 어떤 장로님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이 세상에 살면서 감사할 일이 많지만, 제일 감사한 일은 이 병에 걸린 것입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아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그분의 말은 바로 이어집니다.
"저는 이 병이 걸리기 전에 세상에서 남부럽지 않게 가정이나 사업이 남의 앞을 서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즐길 수 있는 것은 모두 즐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히려 지금이 감사합니다. /또는 ☆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세상의 즐거움은 예수님을 알고난 후에 제가 현재 누리는 이 기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병에 안 걸렸으면 이렇게 좋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났겟습니까 그래서 감사하고 마냥 즐겁습니다."
그분의 육신은 상처투성이였으나, 그 분의 신앙은 너무나 푸르렀고 생기가 차고 넘치었습니다.
본문접근 및 재경청
오늘 구약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켜야 할 소중한 규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새로운 땅 가나안에 들어가면 하나님께서 받은 땅에 곡식을 일구어 그 결실의 첫 열매들을 하나님 앞에 바쳐 하나님의 도와주신 사랑 앞에 감사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의 40년 생활 동안 늘 이동을 하느라고 목축을 기르면서 땅의 소산을 차분히 경작하여 먹어보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야 했던 광야는 전혀 토양이나 기후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나안 땅에서 농사를 짓게 될 때 그들은 하나님이 때를 따라 비를 내려주시고 해 빛을 주시는 고마운 사연을 경험하게 되고 감사의 신앙을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이기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말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것을 명령하시었습니다.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즉 여호와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첫 곡식을 이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아뢴 후에 그 모든 예물을 하나님 앞에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드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신약을 통하여 주신 말씀은 구약의 자연 조건에서의 감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삶에서 받은 은총에서 외쳐야 하는 감사의 신앙에 대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일컫는 문둥병은 나균으로 생기는 만성 전염병입니다. 1874년 노르웨이의 한센씨가 나균을 처음 발견한 후부터는 이 병을 한센씨병이라고 이름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서 말씀을 증거 하시던 당시에는 메소포타미아와 동양지역에서는 이 병으로 시달린 사람들이 아주 많았었습니다. 이 병은 아주 불결한 병으로 취급을 받아 그 이름도 "징계"라는 뜻을 갖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병이 천민들에게만 발생된 병이 아니라 유다 왕 웃시야, 모세의 누이 미리 암과 같은 고급 신분의 사람들에게도 걸리게 된 무서운 병임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누구나 이 병에 걸리면 동네에서 격리를 당하고 징계를 받은 죄인으로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기에 이 병에 걸린 사람은 치료를 받아 제사장으로부터 깨끗한 몸이 되었다는 선언을 받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사마리아와 갈릴리 지역 경계를 지나시면서 한 마을에 들어갔습니다. 거기서 나병환자 10명을 만나게 됩니다. 가까이서 감히 만날 수 없던 이들은 멀리 간격을 두고 소리 질러 말을 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때 예수님은 이상할 정도로 예수님은 아무 질문이나 설명이 없이 "제사장들에게 가서 너희 몸을 보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나병이란 하늘이 내리는 병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병이 낫게 된 경우는 제사장의 확인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 열 명의 나환자들은 바로 발길을 옮겨 제사장에게로 가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가는 도중에 모두가 몸이 깨끗해졌습니다. 모두가 기쁨이 충만합니다. 이 때 열 사람은 자신의 몸과 마음의 회복에 뛸 뜻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그 중에 단 한 사람. 그것도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으로 유대인들이 지극히 멸시한 바 있는 사마리아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 기쁨을 주시는 분을 찾아 자신의 고마움을 표현해야 한다는 예의 깊은 결심을 합니다. 그는 자기의 회복된 몸을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는 지체 없이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아홉은 어딜 가고 너 혼자만 왔지 정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밖에는 없단 말인가"
무척이나 괴로운 표현을 하십니다.
당연히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사람들이 그 흔적마저 없을 때 우리 주님의 마음은 별로 편하시지 못했습니다. 섭섭한 마음을 가진 체 그리고는 자기 앞에 엎드려 있는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고마움을 아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때 그 사마리아인은 정상인의 몸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주제부상
오늘의 구약의 말씀 속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이 주신 자연 속에서 얻게 된 결실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아 감사와 찬양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당연한 신앙을 요구하십니다.
신약의 말씀에서는 우리의 눈앞에 고마움을 아는 사람의 행동과 우리 주님의 반응을 뚜렷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사함을 아는 것은 하나의 믿음과 연관된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한 인간이 고마움을 안다는 것은 실로 인간의 삶에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인격, 지식, 따뜻한 인품, 남다른 신앙을 가졌다 하더라도 고마운 사연에 감사할 줄을 모른다면 그 사람은 인간의 모습은 가졌으나 인간으로서는 결격자 입니다. 고마움을 알고, 고마움을 말할 줄 아는 사람이 못될 때 그 인격 그 지식 그 신앙은 별로 그렇게 자랑스럽지는 못한 것입니다. 혹자는 '감사하다'는 표현 '수고했습니다'라는 표현은 속으로 하는 것이지 밖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폐쇄된 동양의 사고를 앞세우겠지요.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입니다. 성경에는 감사 찬송 또는 할렐루야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배의 동기도 감사 때문이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하기 위한 것입니다. 찬송도 감사의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I. 감사라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주제의 정의)
요즈음 세상에서 구경할 수 있는 감사의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자신에게 큰 유익이 될 만한 사람이 아니면 고마운 사연에 대하여 전화 한통화로 간단히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잊어버리는데 이러한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권력과 부가 대단하고 자신의 출세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이 자신에게 적은 것이라도 베풀어주었다면 감사하다는 명목으로 지나치게 표현함으로 뇌물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것은 오늘의 말씀과는 거리가 먼 감사의 뜻입니다. 요즈음은 마음과 행동이 너무나 차이가 많은 감사가 가득합니다. 눈앞에서는 머리끝이 땅에 닿도록 인사를 하고, 지나면 비난과 욕을 해대는 그러한 것은 진정한 감사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신 감사의 원어의 뜻은 받은 복을 찬양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복의 사실을 찬양하고 그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 감사의 깊은 뜻입니다.
오늘의 구약의 말씀에 나타난 감사의 뜻은 자연을 통하여 우리 인간이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대한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복음서에서 말씀하신 감사는 한 인간이 육적인 건강을 회복시켜 주시는 은혜에 대한 감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에서 주신 감사의 사실을 다시 우리의 삶에 적용한다면, 진정한 감사의 뜻은 하나님께 진 빚을 깨닫는 것입니다. 즉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하나의 채무 감에 젖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사회생활 속에서 살아가는 형편을 자세히 보면 우리는 서로 서로 빚진 자입니다. 우리 교우들에게도, 벗들에게도, 형제지간, 부모와 자녀 사이도 우리는 빚을 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생활의 구조는 서로 서로 돕고 사는 가운데 우리의 생활은 이어집니다.
하나님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그 자신도 빚을 지고 사는 인생임을 고백하게 하십니다. 로마서 1장 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그리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서로 빚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느낄 때 우리는 고마움을 항상 마음에 간직하고 "고맙습니다. 수고했습니다"라는 말을 인간 앞에, 하나님 앞에 하게 됩니다.
Ⅱ. 왜 고마움을 표시해야 하는가 (필요성)
여기 고마움의 신의를 지키지 못한 한 가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땅에 이민을 간 한 가정이 있었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전혀 다른 나라에 자신을 책임져줄 친 인척이 없이 이민을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그곳에서 이민 목회를 하고 있는 목사님들에게 신세를 끼치게 됩니다. 목사님은 한 가정을 비행장에서부터 그 대가족을 모시고 와서 우선 자기 집에 머물게 합니다. 그리고 그 집의 형편에 맞는 아파트를 한 달 후쯤 찾아서 우선 독립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동안 운전을 가르치고 직장을 알선하여 안정을 찾게 해줍니다. 목사님은 우선 자신의 교회에 새로운 교인이 생기게 됨을 기쁘게 생각하고 열심히 도와줍니다.
그러나 도움을 받은 가정은 기반을 원만히 닦은 후에는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 교회에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동안 목사님으로부터 진 빚을 언제나 생각하고 항상 머리를 숙이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에게 불편스러운 일이 생겼습니다. 다른 교인들은 전혀 문제로 여기지 아니하는데 이 가정은 남달리 이것을 문제로 삼아서 시비를 계속하다가 이것이 기회이다 하고서 그토록 자신을 돌아보아 주던 목사님에게 고마웠다는 한 마디의 인사도 없이 그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몇 년이 지난 후입니다. 막상 집안 식구 가운데 건강에 문제가 생겨 급작스럽게 입원을 하였으나 보험은 없고 돈도 여유가 없는 긴박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옮긴 교회의 목사님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아무 길이 없었습니다. 너무 급한 형편인지라 고개를 숙이고 다시 첫 번째의 목사님을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를 구하고 도움을 요청합니다. 수만 불의 병원비를 해결 받는 기적 같은 일이 발생하여 어려운 고비를 넘기었습니다. 고마움의 마음이 가득하여 한동안 열심히 그 교회를 봉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정은 1년을 다 넘기지 못하여 다시 배은망덕의 기록을 남기는 행위를 하고서 그 교회를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고마움을 마음에 간직하지 못하고 표현하지 못한 한 가정의 부끄러운 기록입니다.
III. 우리들이 고마움을 생활화하는 데는 구체적인 실천방법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오늘 구약과 신약을 통하여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자연을 주관하시면서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건강을 지켜주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서 감사의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게 됩니다.
먼저, 하나님은 땅에서 얻은 첫 열매를 가지고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하십니다.
(말씀)
오늘 주신 신명기의 말씀에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험준했던 과거를 먼저 회상하게 합니다. 어떻게 해서 그들이 가나안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평화와 기름진 가나안 땅에서의 농작물을 거두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고마운지를 먼저 생각하면서 다음과 같은 절차를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오시며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즉 여호와여 주께서 저에게 주신 이 땅의 첫 곡식을 이제 이렇게 가져왔습니다."
이렇게 아뢴 후에 그 모든 예물을 하나님 앞에 놓고 그 앞에 엎드려 예배드릴 것을 명령했습니다.
(해석)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선택한 민족으로서 독특한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과거가 하나님의 보호가 없었으면 모두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독특한 역사의 기록이었습니다. 오늘의 말씀대로 이집트 이주를 비롯하여 그곳에서의 강제노동으로 시달렸던 그들의 역사는 실로 비참하였습니다. 그들의 울부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구출하여 광야의 40년을 지나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신 드라마와 같은 역사의 기록은 실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한시라도 잊어버릴 수도 없고 잊어서도 안 되는 독특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의 말씀대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어 얻은 첫 곡식은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서 감사의 예배를 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땅에서 하나님이 주신 일기에 의하여 지어진 농사의 첫 열매를 가지고 단순한 연중행사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 민족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회상하면서 드리는 신앙적인 삶을 지속 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적용)
오늘의 이 구약 말씀은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내려진 명령이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들에게도 내려진 명령입니다. 사실, 이 민족도 숱한 역경 속에서 오늘을 지탱해온 민족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 속에 보호받은 민족입니다. 지난 한해를 돌이켜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랑을 듬뿍 받은 우리의 민족이요 개인입니다.
북녘의 땅에서 전쟁을 무기로 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이 나라는 하나님의 보호 속에 오늘을 지탱합니다. 신앙적으로는 하나님의 교회가 왕성한 나라가 되었고 경제적으로는 가난의 수준을 벗어났습니다. 우리의 땅에서는 아직도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곡식이 이 가을도 풍성히 열리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우리의 북녘 땅이 가난과 기근에서 몸부림치는 아픔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마는 필연코 우리의 땅은 통일이 될 것이고 그 통일의 역사는 한반도의 역사를 새롭게 장식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에 펼쳐질 하나님의 손길은 분명히 감사의 사연을 우리에게 주실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의 땅은 해 마다 하나님의 보살핌 속에서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재배할 수 있는 여건이 구비된 나라입니다.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재배하여 먹을 수 있는 아름다운 땅입니다. 그러하기에 오늘의 말씀대로 우리의 민족도 하나님 앞에 우리의 첫 열매를 가지고 와서 하나님의 은총을 기리면서 감사의 예배를 드림이 너무나 마땅합니다.
사실 우리가 받은 모든 삶의 은혜는 값을 지불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은혜에 조금이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내가 마시는 공기에 값을 지불하십니까 마시는 물의 주인에게 값을 지불하십니까 철 따라 주시는 식물의 주인에게 한 푼이라도 그 값을 지불하십니까 지불한다면 모두 그것을 관리하고 키우는 사람의 인건비를 줄뿐 창조주이신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우리는 지불하지 아니합니다.
그러하기에 우리의 감사의 생활이 감사주일이라는 오늘에 끝나지 아니하고 언제나 하나님의 은총에 우리의 마음과 언어는 감사로 가득해야 합니다. 잠자리를 찾을 때는 오늘을 무사히 넘기게 보호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잠을 깰 때는 지난밤을 주의 품에 쉬게 하심을 계속적으로 감사해야 합니다. 즐거운 일을 만날 때는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을 만날 때는 그 어려움을 통하여 새로운 경험과 연단을 쌓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삶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께 감사로서 그 생활이 이어져 간 사람만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성공적으로 이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둘째로, 오늘의 복음서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그의 은총을 입은 사람들이 먼저 마음과 언어와 행동으로 감사의 표현이 있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씀)
오늘의 신약의 본문 가운데 병 고침을 받은 사람은 열 사람이었습니다. 아홉 사람은 자신이 입은 놀라운 은총에 대한 구체적인 감사의 언어와 행동을 보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으로 그 열 명 속에 끼였던 사람은 자기의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되돌아와서, 자신의 병을 낮게 해주신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열 사람이 깨끗해지지 않았느냐
그런데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되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사람 한 명밖에 없느냐 하시면서 감사를 언어와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은 사람들에 대하여 섭섭함을 나타내십니다. 그리고 이 감사를 드리고 있는 사마리아 사람에게 "일어나서 가거라. 고마움을 아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 때 그 사마리아 인은 정상인의 몸으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해석)
그 시대의 나병환자란 천벌을 받은 사람처럼 가장 비참한 병의 소유자로 사회로부터 격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병을 치료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기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불치병 환자들을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린다는 소문은 이 나환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멀찍이 멈추어 서서 소리를 지르면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하고 애걸을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하시었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이 말씀을 믿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 그토록 무섭던 병이 낫게 됨을 경험합니다.
이 순간에 두 형태의 인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은혜를 망각해 버린 유대인과 은혜를 감사하는 사마리아 인이 대조적으로 우리 앞에 보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 주님은 감사하는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을 허락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은혜를 받고도 감사의 마음과 행동과 언어가 없던 아홉 사람을 원망스럽게 찾고 계시었습니다. 주님의 모습이 매우 섭섭한 감정을 갖는 듯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습니다.
(적용)
이 순간 우리는 고마움의 은혜를 베푸신 주님 앞에 돌아와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하지 않은 본문의 아홉 사람의 유대인들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은덕을 알아야 하는데 기본적인 예의마저 없는 인간들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한국인의 고마움의 표현은 마음에는 어떻게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의 언어와 행동으로서의 표현은 미약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잘 분석하여 스스로 들어보시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주시옵소서"의 말은 기도의 문장마다 계속되는데 지금까지 받은 것에 대하여는 "감사 합니다"의 표현이 너무 들리지 않은 것이 우리의 실정입니다.
우리의 고마움의 표현은 좀 이상합니다. 우리 민족은 일반적으로 고마운 사연 앞에는 씩 웃고 지난 것이 고작입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아주 들리지 않은 곳이 바로 우리의 사회입니다. 예를 들어 보십시다.
남편이 한 달 내내 직장에서 긴장하고 땀 흘리고 상사의 눈치를 살펴가면서 일하고 받은 월급봉투를 가지고 집에 온 한국의 남편들은 월급봉투를 건네주는 순간부터 긴장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다 세어 본 부인이 조금이라도 액수가 차질이 생기면 그걸 어디에 썻느냐는 문초가 계속되고 남편은 그것을 해명하느라고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현장에서 월급봉투를 받는 아내의 입에서는 당연히 다음의 언어가 나와야 할 것입니다.
"한 달 동안 당신의 수고가 너무 많았습니다. 우리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참으로 많은 땀을 흘리셨습니다."등등의 고마움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가정에서는 이런 표현이 생활화되지 못한 참으로 신기한 한국 가정의 부인들의 모습입니다.
사실 남편들도 마치한가지 입니다.
정성 들여 맛있는 음식을 해서 저녁상을 차려놓고 옆에 앉아 있는 아내에게 같이 먹자는 말 한마디 없이 혼자서 신나게 먹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어 잘 먹었다"는 한마디의 인사도 없이 신문을 들고 밥상을 일어서는 모습 또한 고마움의 표현이 생활화되지 못한 지극히 보기 싫은 현장입니다. 이러한 순간마다 월급을 반납시키고 싶은 남편의 마음일 것이고 정성껏 해드린 음식을 다시 반납시키고 싶은 아내의 심정일 것입니다. 고마움의 생활화는 지극히 필요한 상식입니다. 인제 우리는 인간의 지위를 따라 고마움을 표현할 것이 아니라 상대가 어떤 인물이던 상관없이 고마움을 즉시 언어와 행동으로 표현합시다.
스콧트랜드의 법률가이며 문학가였던 보즈웰(James Boswell)은 "감사는 훌륭한 교양의 열매이다. 천박한 사람 사이에서는 그 교양의 열매를 찾지 못한다."는 말을 남긴바 있습니다. 우리는 천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느 민족보다 많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제는 지체 없는 감사의 표현으로 교양의 열매를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이 교양의 열매는 인간사회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주렁주렁 열려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언제나 무슨 일에든지 감사로 일관하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말씀)
오늘의 본문 이외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들려주신 감사의 생활에 대한 명령은 성경의 수백 군데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는 모든 일에 기뻐하면서 감사할 것을 다음과 같이 명령하십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들에게 바라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산전 5:18) "모든 일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라"엡5:20)
(해석)
사람이 짜증이 나고 어려운 일을 만나는 순간까지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순간에서 마저 모든 것을 감사로 일관하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바라신 뜻이 바로 우리가 기뻐하고 그리고 삶의 모든 환경에서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차별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만족이 주어질 때까지 감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적은 것이라도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때마다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모든 일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고 그 앞에 엎드려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말씀이 지당함을 우리는 많은 순간 경험합니다. 부정적인 사고에서보다는 긍정적인 사고 속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아야 합니다. 불만스러운 삶의 주인들은 언제나 불만스럽습니다. 모든 것을 짜증스럽게 보는 얼굴은 언제나 그 얼굴에 미소가 없습니다. 슬픈 색깔의 안경을 끼고 사는 사람에게는 모두가 비극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희망과 감사의 안경을 쓴 사람에게는 언제나 즐거운 미소 속에 모든 일이 감사하게 보일 뿐입니다.

(예화)
어느 한 사람이 실토한 고백의 한 부분입니다.
미국에서 백인들 틈에서 십 년이 넘도록 공부를 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백인들보다 적은 키며 황색의 피부색이며 시원스럽지 못한 자신의 용모에 갈등을 느끼면서 강의실에 들어가서 백인들 틈에 앉아 있었습니다.
함께 공부하던 학급에는 6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온 흑인 목사와 황인 백인들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 때에 흑인 목사의 발표가 너무나 충격적이었습니다.
그 목사가 학교에서 시간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7 살난 딸이 수세미로 손등을 피가 나도록 문지르고 있었답니다. 그 때 아빠가 묻습니다. "얘! 무얼 하고 있니" 딸의 대답은 아빠의 마음을 그만 우리고 말았습니다. "아빠 얼마나 내가 문지르면 내 친구들처럼 나의 이 검은 피부가 하얗게 되는 거야"
검정 피부로 인한 숱한 갈등을 느끼면서 살던 아버지가 딸마저 동일한 갈등을 느끼는 모습을 보면서 참지 못하고 딸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었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순간 검정색보다는 훨씬 나은 자신의 황색 피부를 보고 감사를 하게 되었답니다. 그리고 그들의 열악한 삶의 조건보다 훨씬 우월한 조국을 생각하면서 다시 감사를 드렸고, 그 때부터 눈에 언제나 끼어 있던 불만과 갈등의 안경은 벗어지고 새롭게 그의 눈에는 감사의 안경이 끼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감사의 조건을 찾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많이 읽힌바 있는 명심보감에서는 "몸에 한 가닥의 실오라기라도 감았거든 항상 베짜는 여인의 수고를 생각하고 감사하며, 하루 세 끼니의 밥을 먹거든 매양 농부의 노고를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의 눈길로 보면 무엇 하나 고맙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참여하면 거기에 참 행복의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시 우리에게 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립보서 4:6-7
뿐만 아니라 우리 개인의 생활을 돌이켜 보아도 우리의 입에서 감사의 찬양은 울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려운 역경 속에서도 우리의 신앙을 성령 안에서 지속시켜 주신 것을 비롯하여, 우리의 생명이 연장 받은 것, 우리의 생계가 계속되고 있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이며 내게 주신 복입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가 너무 큰데도 용서함 받은 것 이 모두가 감사할 수밖에 없는 사연들입니다.
Ⅳ. 이토록 고마움을 생활화하는 신앙인 에게는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결과가 주어집니다.
고마움을 느끼고 살면서 그 고마움을 언행으로 표현한 자에게는 반드시 더 많은 것이 돌아갑니다. 오늘의 구약말씀대로 실천한 유대백성들은 어느 민족도 받을 수 없는 복을 받고 살았습니다. 오늘의 신약의 말씀대로 아홉의 나병환자는 고마움의 표현 없이 자신들의 길을 갔습니다. 그들은 병은 고쳤지만 그들의 영혼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름 없는 사마리아 인은 고마운 사연을 확인하자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립니다. 그는 더 큰 복을 받았다. 네 믿음이 너의 육체의 병과 영혼을 살렸다는 예수님의 선언이십니다. 하나님은 감사한 자에게 더 큰 복을 내리시고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십니다.

(예화)
드디어 내일이면 선교사로 아프리카로 가게 된 사람이 평생을 꿈꾸던 일이라 너무 기뻐하다가 자동차 사고로 다리를 자르게 되었고 선교사의 꿈은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자르게 된 하나님께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곧 생명을 지켜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면서 그 발에 의족을 달게 되었고 뜻한대로 몇 년 뒤 선교사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다가 식인종에게 잡힙니다. 그는 꾀를 내어 자신의 고무다리를 베어 주었습니다. 선교사의 다리를 맛본 추장은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고기라고 그 선교사를 살려 주었습니다. 그 식인종들은 선교사들의 육신은 모두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게 되었고, 그곳의 어떤 선교사도 손을 대지 아니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사는 자동차 사고 덕분에 이들에게 전도를 하게 되었고 이것이 감사의 조건이 되었다.
결론
인간에게는 말을 할 수 있고 생각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주어져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아무리 잘해도 고마움을 표현하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말과 생각은 자기의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혹자는 그 표현을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사용합니다. 그러나 참 신앙인은 감사의 신앙을 생활화하는데 이 언어와 감정을 사용합니다.
우리가 비록 사업에 성공치 못하고 신체가 건강치 못하여 짐이 무거워 어려움을 당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보다 더 불행한 사람을 쳐다 볼 때 그 감사는 더욱 실감이 납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신령한 능력이 더 해집니다. 마음에는 친절이, 태도에는 온화함이, 인격에는 사랑이 넘치게 됩니다.
오늘 한해를 생각하면서 드리는 감사예배에서 우리는 조용히 마음을 모으고 정신을 모아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아니하는지 경청해 보십시다.
그 때 햇빛과 비를 주어 오곡의 결실을 거두게 해 달라던 그 기도의 주인공들은 어디에 있기에 그들의 감사가 들리지 아니하느냐
그 때 자신이 지은 죄로 인하여 괴로워하면서 눈물 흘려 용서를 구하여 죄 사함 받았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기에 내가 볼 수 없느냐
그 때 건강을 잃고 몸부림치면서 내게 갈급하게 매달리고 건강을 되찾았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때 자식의 입시를 위하여 그토록 애타게 매달려 기도하여 소원을 달성했던 그 부모와 자식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그 때 사업에 실패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구원의 손길을 너무도 애처롭게 내밀어 응답을 받았던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면서 고마움의 믿음을 보이지 아니하느냐
그 때 그 가정에 그토록 많은 어려움을 당하면서 울부짖던 그 사람 가정의 평화를 회복 받았는데 지금 어디에 있으면서 고마움의 머리를 숙이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세상에서 버림받아 인간취급을 받지 못한 병자로서 살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치유를 받아 정상인이 된 다음에, 고마움의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진 아홉 사람의 대열에 자신이 서있지는 아니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소원을 이룩해 주신 주님의 은총이 너무 감사하여 발길을 재촉하여 주님 앞에 찾아와, 머리를 숙이는 한 사람의 사마리아 인에 속하십니까
만일 우리가 고마움을 아는 지성을 가진 그 한 사람, 사마리아 인에 속한다면 이 시간도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거라. 고마움을 아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2. 본 설교가 있기 까지
설교노트를 위한 명상
불란서의 철학자 마르 땡이 미국의 回願이라는 작품에서 "감사는 예의의 가장 아름다운 형태이다" 라고 서술한바 있다. 이 말은 사실인 듯하다. 지성적인 수준이 높은 사람일수록 고맙다는 언어가 풍부하고 선진국의 사회에 발을 디뎌 놓을 때마다 '실례합니다' '감사합니다'의 언어가 보편화 된 것을 보게 된다. 이웃의 섬나라 일본만 가더라도 이러한 현상은 예외가 아니다. 그들의 친절과 바른 예절은 세계인들이 모두 우러러 볼 정도이다.
그러나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는 이 땅의 주인들은 예외인 듯싶다. 외국인들의 눈에 비쳐진 우리들의 모습은 "언제나 화를 낼 준비가 되어있는 인상들"이라고 말을 한다. 예의바른 사람들의 얼굴들이 온화한 미소와 친절을 풍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평가들임에 틀림없다.
무엇 때문일까 허다한 사연이 있겠지만 우리의 의식구조에는 고마움이라는 것이 생활화되지 못한 것이 그 으뜸가는 이유라고 보아진다. 세계의 교회가 우러러보는 우리의 새벽제단에서 마저 "주시옵소서"의 함성만이 들려질 뿐 "감사합니다" 또는 "받으시옵소서"의 단어는 너무나 희미하다. 국민소득이 1만 불을 넘긴 우리들인데 어느 때쯤 넉넉한 마음가짐이 있게 될련지 참으로 기다려진다. 문을 열어주는 순간에도 "감사합니다"를 말하고, 따뜻한 충고를 주어도 "감사합니다"를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생활 속의 표현이 언제쯤 보편화 될지 실로 기다려지는 우리의 현실이다. 이 소망의 실현은 하나님 앞에 쉼 없는 감사를 드리고 이웃끼리 고마움을 생활화하는데 그 열쇠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 고마움의 현실화는 우리 주님이 지금도 찾고 있는 명제라고 마음에 들려진다.
"몸이 깨끗해진 사람은 열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아홉은 어딜 가고."
본 설교에 얽힌 이야기
목회를 하던 시절에 느껴보지 못했던 메시지에 대한 불만이 감사주일이 다가 올 때마다 이 설교자에게는 쌓이게 되었다. 추수 감사주일이 될 때마다 들려오는 메시지는 받은바 은혜를 감사하라는 호령이었다. 그리고 그 감사의 표현은 최대한 물질로 드리도록 하는 언질이 많았고 그 설교는 일련의 교회예산을 보충하는 데 주안점이 두어진 듯한 인상을 받을 때가 적지 아니하였다.
본 설교는 1년 반 전에 2천명의 출석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는 강단을 섬기던 중 감사주일을 앞에 놓고 고민하면서 준비한 설교였다. 평소에 내 자신이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감사절의 메시지는 내 자신은 어떻게 준비하고 구성해야 할지 깊은 고민을 수반하는 기도가 일기 시작하였다. 다행스럽게 교회의 살림을 염려해야 할 당회로부터 예산에 관한 부탁이 없어서 다행스럽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우선적으로 이번의 감사절의 메시지는 삶 속에서 고마움을 느끼는 예의와 인격, 그리고 신앙을 강조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좀더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감사의 신앙이 베이고, 그 신앙이 생활화되는데 주안점을 두기로 하였다. 우선적으로 아내가 정성껏 차려주는 밥상 앞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의 예의 있는 인사가 남편의 입에서 나오고 ,남편의 월급봉투 앞에서 아내가 "처자를 위하여 한 달 동안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한 마음으로 알뜰하게 쓰겠습니다"의 고마움의 인사들이 생활화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메시지를 위한 기도는 계속되었다.
본문과 주제
66권의 성경에서 감사를 위한 말씀은 다양하게 많이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보호 가운데 사는 인간들로서,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성도로서의 당연히 가져야 할 감사의 신앙과 실천은 성경의 한 맥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신학이다.
이 방대한 말씀 가운데서 본문을 선택한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기에 무슨 말씀을 이 감사주일에 운반해 주시기를 하나님이 원하시는지를 여쭙는 기도가 필요하였다. 우선적으로 감사를 요구하신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 주님이 행동적인 감사의 삶과 연관된 가르침이 무엇이었는지를 찾아야 한다는 충동을 일으켰다. 과거에는 이러한 작업을 성구대사전을 가지고 하였으나 이제는 컴퓨터를 사용하는 성경프로그램을 가지고 수월하게 이러한 작업을 펼칠 수 있었다.
그 결과 지금은 비록 소수만이 농경사회에 살지만 그래도 우리의 전통적이고 기본적인 가을의 추수와 관계된 말씀으로서 구약의 본문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건강을 회복한 9 명의 나환자들이 보여준 비인간적인 행위와 한 명의 사마리인이 보여준 고마움의 표현이 바로 우리의 행동적인 감사의 삶과 연관됨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주제는 '행동하는 감사'로 결정이 되었고 이 주어진 본문의 뜻을 헤아리기 시작하였다.
본문과의 대화
구약의 본문이 기록된 신명기는 70인 역에서 '두 번째 율법'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진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율법서이다. 모세가 죽기 전에 가나안의 문전에 서있는 제 2세들에게 과거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정리하여 주었다는 점에서 본서의 가치성은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본서의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그 결과가 강조되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었다. 특별히 하나님과 그 선민들 사이에 성립된 여러 언약들을 종합하였고, 거기에 새로운 언약을 첨가하여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와의 언약을 준비 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본문에서 하나님이 감사의 응답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 이 말씀이 우리의 기본적인 삶의 형태를 밝히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신약의 본문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이탈된 삶의 심성과 그 삶의 양태를 직접 보시면서 언급하신 말씀이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고마움이 생활화되지 못한 인간들과의 만남에서 예수님의 심기가 밝지 못하였다는 점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특별히 당시의 나병에 대한 인식을 비롯하여 그들 스스로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들로서 삶을 이어갔다는 것을 연구한 후에는 실천하는 감사의 생활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마움을 지체 없이 표현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주어진 주님의 관심과 구원의 선언이 깊은 의미를 심어주고 있었다.
본 설교의 목적
본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그 목적의 설정에 생각을 거듭하게 하였다. 본 설교가 운반되어지는 예배에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그 감사에 대한 응답으로 예물을 드리게 되는 것이 주축을 이루게 된다. 추수감사절에 모두가 감사의 찬양을 부르고 정성껏 감사의 예물을 가져오면서 기대하는 심정은 이 예물을 드림과 동시에 자신들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한국인의 종교심상이 발동될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설교자가 초점을 맞춘다면 당연히 목양설교로서 칭찬과 위로와 격려와 복 내려주심을 외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의 설교를 위한 명상에서 밝힌 데로 본 설교자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많이 바치는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오늘 우리의 삶에 감사의 마음과 언어와 그 표현이 얼마나 실현되고 있는가에 깊은 관심을 두어야 했다.
그 결과 본 설교는 교훈적인 설교로 그 목적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구약에서의 하나님은 이 감사의 행위에 무엇을 요구하셨고 신약에서의 주님은 고마움의 행동화에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가에 대한 교훈적인 메시지를 찾게 되었다.
본 설교의 유형과 그 전개형태
설교의 기본 유형은 본문설교와 주제설교와 강해설교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설명한바 있다. 본 설교는 이 세 형태 중에서 본문설교의 기본 유형을 사용하고 있다. 즉, 본문의 이해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주제의 실천에서는 거기에 해당된 본문을 다시 들려주고 그 말씀의 해석을 시도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본 설교는 본문과 그 의미를 최대한 운반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전개형태는 분석설교를 택하였다. 그러나 대지 설교나 상관설교나 분석설교가 빠트릴 수 없는 서론과 본문접근과 본문의 재경청, 그리고 주제의 부상은 기본적인 설교의 공식으로 여기서도 수용하였다. 그리고 분석설교의 형태를 빌어서 본문에서 나온 '행동하는 감사'라는 주제를 좀더 정확하게 정의하려 하였고, '행동하는 감사'가 반드시 필요한 타당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씀을 통하여 '행동하는 감사'의 그 실천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본 설교의 복된 소식의 부분으로서 '행동하는 감사'가 실천될 때 찾아오는 아름다운 결과를 사례를 들어 설명하였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
진정한 설교자는 해를 거듭할수록 한 편의 설교가 완성될 때까지 쏟게 되는 정성은 더욱 힘이 든다. 그 이유는 설교의 연륜이 쌓이면서 자신의 설교에 대한 결함을 볼 수 있는 시각과 판단력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많은 설교신학자들은 설교자에게 이러한 시각과 판단력이 없다면 그 설교자는 이미 설교의 발전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자신이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마저 깨닫지 못하는 위험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지적을 계속하고 있다.
설교의 이론과 실제를 강의해 온 본 설교자에게도 이러한 자신의 결핍은 계속적으로 비추어지고 있다. 이 한편의 설교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그 뒤안길의 준비과정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아쉬움을 안겨준 부분들은 또 하나의 고민을 더해주고 있다.
먼저는, 본 설교는 일반 주일의 설교에 비교하여 3-4분이 더 소요되었다. 추수감사를 지키는 다른 순서가 함께 하고 있는 예배이기에 설교가 좀더 간결하였으면 더욱 효과적일 수 있었을 터인데 오히려 더 긴 설교가 되어서 회중들을 피곤하게 하는 결과가 주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본 설교가 있어진 주일에 시편 교독의 시간에 비록 우리의 교독문에는 수록되지 아니했으나 136편을 교독하였더라면 예배에서의 감사의 감각을 진하게 할 수 있었을 것인데 예배의 순서를 설교자의 임의대로 하지 못했던 그 주일의 예배에 큰 아쉬움을 느꼈다.
셋째는, 본문의 재경청이 본문 전체를 다시 들려주지 못한 체 본 설교와 직접적인 관련을 맺는 부분만을 현대 언어로 다시 듣도록 한 부분에 약간의 아쉬움을 느낀다. 구약 본문의 경우 너무 많은 절수가 되어서 이러한 방법을 써서 하나님의 말씀은 단축시키고 인간의 해석과 적용을 강조한 것이 설교자의 정도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넷째는, 본 주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접근시키기 위하여 시도한 주제의 필요성에서 활용된 부정적 사례가 그 적절성에 만족을 가져오지 못한 점이다. 동기부여의 사례로서 그 적절성이 극대화되는데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다섯째로, 본 설교를 듣는 회중들이 모두가 산업사회에서 직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구약의 본문이 주시는 하나님과 농경사회와의 관계성이 충분하게 엮어지지 못한 점이 시대의 변천과 함께 아쉬움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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