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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서머나 교회 (계2:8-11)

본문

인간이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데는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사람 저 사람 좋은 점만을 선택해서 자기 인생의 삶의 가는 길에 반영을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예 한 사람을 모델로 정해 놓고 그분의 언행과 그 분의 철학과 그분의 모습까지도 모방하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이 나보다 더 위대하고 내가 갖고 싶은 나의 이상적 삶의 소유자들을 본받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적인 심성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고 이상을 정하고 나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보여주신 이상적인 교회를 본 받아 우리의 교회가 그러한 교회가 되어 보겠다고 노력하고 나아갈 때 더욱 더 발전할 수 있고, 또 원하던 새로운 이상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서탑교회의 여러분은 어떤 교회가 여러분이 따라야 할 교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본문접근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인 계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를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재미있는 것은 일곱 교회가 세 가지의 형태로 분류됩니다.
에베소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와 버가모 교회 이 세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데 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 이 두 교회는 책망만 받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 이 두 교회는 칭찬만 받습니다. 다시 말하면 세 형태의 교회가 우리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신 세 유형의 교회, 즉 칭찬과 책망을 받은 교회, 책망만을 받은 교회, 칭찬만을 받은 교회 이 셋 중에 어느 교회를 서탑교회가 따르고자 하는 이상적인 교회로 하고 싶습니까 모두가 다 칭찬만을 받은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피아 교회를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로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칭찬을 받은 교회가 바로 오늘 서머나 교회입니다. 계시록은 주님께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을 때 그에게 계시하시면서 일곱 교회에 주로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 가운데서 오늘의 본문은 서머나 교회를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다시 한 번 우리의 현대 언어로 풀어서 경청하십시다.
본문의 재경청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죽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겪은 힘든 핍박의 환난과 어려운 궁핍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유하다. 네가 유대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네가 장차 받을 수난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보아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여 넘어뜨리려고,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감옥에다 집어넣을 것이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씌어 주겠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승리하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본문의 해석
이 말씀의 뜻을 좀더 터득하기 위하여 서머나 교회를 다시 한 번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소아시아 서해안의 중요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서머나 도시는 경제적으로 환경 적으로 아주 발전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해안도시입니다. 특별히 당시에 지배국으로 있었던 로마는 이 서머나를 자랑스러운 도시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로마가 볼 때는 그들이 어찌나 인간성이 좋고 어찌나 로마에 충성을 다하던지 그야말로 모범된 식민지 도시였습니다.
이 도시에 복음이 들어온 후에 소수의 교인들이 있었습니다마는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공동체, 곧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로마에 바쳤던 충성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모든 충성을 바치게 됨으로 문제가 발생되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세력은 이들이 로마를 버리고 하나님을 향하여 새로운 종교심에 불이 붙은 모습을 보면서 심한 핍박을 가하였습니다. 모든 경제적인 제재도 가하기 시작하여 견디기 힘든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 주님은 그들의 충성이 너무나 갸륵하기에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이미 하고 있는 그 충성을 계속해서 죽도록 충성해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적극적인 말씀을 해 주고 계십니다. 참으로 귀한 말씀과 약속이 주어진 교회입니다.
주제 부상
오늘의 서탑교회가 서머나 교회와 비슷한 과거를 생각하면서 제2의 서머나 교회가 될 수만 있다면 하는 바램을 갖는 것은 무리가 아닙니다. 가능한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서머나 교회처럼 적극적인 칭찬만을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 한번쯤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우리 주님이 서머나 교회에 어떻게 칭찬하셨고 무엇을 부탁하셨는지를 경청하면서 우리도 그러한 교회로 탈바꿈하겠다는 의지만 세워진다면 하나님의 허락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론
교회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있는 이 건물이 교회가 아닙니다. 건물은 예배당이라고 이름합니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희생을 통하여 죄 사함을 받은 무리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배하는 공동체가 되어 있는 것을 교회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여 있는 그 모임을 가리켜서 교회라고 이름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어느 때 어느 나라에 있는 교회를 막론하고 기본적으로 그 교회의 주인은 인간이 될 수 없고 하나님만이 그 교회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성장과 실패가 전부가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2의 책임은 그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 모두가 핵심적인 일군들로서 책임을 갖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인 교회가 인간적인 영광과 이익을 추구할 때 그 교회는 사양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할 교회가 인간들의 불의한 생각대로 살아간다면 그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책망 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교회가 일차적인 자신들의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 교회를 사랑하시고 칭찬하시고 성령을 통하여서 힘을 주시고 계속적인 큰 역사를 그 교회를 통하여서 이룩하십니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에 그 인간의 집단은 언젠가 파멸을 가져오게 됩니다. 인간이 주인이 되어서 내가 하나님이라고 부르짖는 이단 사이비 교회들의 출현은 곧 그 파멸이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교회는 하나님이 주인이시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해서 모이는 하나님 백성들의 모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이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를 비롯한 모든 교인들은 이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자신의 건강까지 버리면서 불철주야 땀과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오늘 우리에게 보여주신 서머나 교회는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칭찬하는 이상적인 교회입니다. 오늘 하나님은 그 교회를 통하여 오늘 우리에게 의미 깊은 메시지를 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이 교회는 외적인 내적인 어려움이 있었고 또 그러한 어려움이 계속적으로 다가올 교회로 우리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말씀)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실상은 네가 부유하다한 자니라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몇 사람을 감옥에 가두어 둘 것이고, 너희가 또 다른 환난을 당할 것이라
(해석)
서머나 교회가 적잖은 환난과 궁핍 속에서 몹시도 시달렸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서 몹시도 시달렸던 교회입니다. 그러나 그 시달림은 그날로 끝나지 않고 훗날에도 고난이 계속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가 하나님을 섬기는 개인이 왜 환난과 궁핍과 같은 어려움을 당해야 하는 어려운 질문을 종종 던지게 됩니다. 이것은 지극히 단편적인 질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켜서 가나안까지 가는 길은 불과 두 주간이면 갈 수 있는데 40년을 늘 배회시키면서 연단을 시키고 계셨습니다. 그 숫한 환난과 궁핍과 피곤과 방황을 경험하게 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자를 더 튼튼히 키우시고자 하는 차원이 높으신 하나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적용)
독일에서 나치 정권이 유대인을 600만을 학살했다는 기록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분노를 터뜨리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섬기는 그 민족이 그렇게 학살당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진하고 그 아팠던 그 죽음과 그 피를 통해서 모든 유대 민족은 더욱 더 깊은 각성을 하면서 오늘 전 세계를 지배하는 민족으로서 등장되고 있습니다.
수난과 고통의 현장에서 많은 백성들은 때로는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다고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나를 버리실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 앞에 뭘 잘못을 했기에 나에게는 시련이 주어질까 우리 교회가 왜 이렇게 어려움을 당하게 될까 하는 때도 많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다음의 예화에서 충분히 주어지고 있습니다.

(예화)
오대양 육대주라고 하는 데 육대주 중에 아마 저 아메리카라는 미국이 있는 캐나다, 남미가 있는 그 대륙이 가장 복 받은 땅 중의 하나로 보이고 있습니다. 사실 그 땅은 원래는 우리 황인종에게 주어졌습니다. 백인종에게 준 땅이 아닙니다. 우리 황인종이 있으면서 그저 즐기고 살면서 마야 문명과 같은 아름다운 문화를 가지면서 살았습니다마는 그 거대한 땅을 개척하기에는 힘이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백인들이 점령하고 지금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수로 남아있는 토착민인 그 황인들을 지금은 인디언이라 부릅니다. 그들의 세계를 가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다 우리와 같은 몽골리안들이기 때문에 얼굴의 생김새도 우리와 똑같이 생겼습니다. 생활하는 풍습도 어쩌면 우리와 똑같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훈련시키는 이야기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해가 지는 저녁이면 아들을 보통 10살 미만 때에 아들을 업고 산으로 갑니다. 아주 깊은 산 중에 맹수가 우글거리는 산으로 데리고 가서 넓은 바위 위에 앉혀 놓습니다. 그리고 “너는 여기서 밤을 새워야 한다”는 엄격한 규율을 줍니다. 이 아들은 세상에 사랑하는 내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버릴 수 있을까 원망하고 그리고 얼마나 아버지에 대해서 원망을 거듭하면서 눈물 흘리고 소리 내어 무서워서 밤새도록 울부짖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약간의 달빛이 있는 날에 그 행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그 아들을 버리고 집으로 간다고 하면서 갑니다만 사실은 그 아버지가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아들이 못 알아보는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서 그 튼튼한 활에 화살을 꼽고 밤새도록 당기고 있습니다. 만약에 맹수가 나타난다면 즉시 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아들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무관심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회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서 전심전력을 마음과 뜻과 성품을 모두 어서 예배하는 무리들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버리시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어려움을 모르고 살아가다가 뜻밖의 사건에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러기 때문에 이모저모로 훈련을 시키시고 연단을 시킵니다만 결코 버리시지 않으십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개인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연단을 통해서 성숙은 이룩됩니다. 하나의 교회가 성장해 가는 데에 순풍의 돛을 달고 그저 죽죽 전진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그렇지 않습니다. 때로는 숱한 어려움과 수난과 시험 속을 헤쳐 나아가야 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픔과 고통은 반드시 성장을 위한 것이고 결코 파멸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보다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에 훈련을 시키시고 여기에 낙심되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지기 때문에 그 관계를 이으시려고 하나님은 오히려 더 몸부림을 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개인 우리의 교회가 감당할 수 없는 훈련을 시킨 적이 없습니다. 서탑교회도 그러한 훈련을 받은 교회입니다.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어서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않으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케 하시느니라.
그러기 때문에 이 수난의 현장을 어떻게 슬기롭게 이겨나갈 것이냐 하는 지혜를 구하는 것이 이 연단 속에서 가져야 할 우리의 자세입니다. 로마의 풍자시인 펄시어스 “편히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옳은 말입니다. 편히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닙니다. 편히 살아온 사람은 어느 어려운 역경 속에서 쉬이 무너집니다. 에머슨의 저술에서 재미있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의 수난은 유대인이 세계의 지배자들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유대인의 학살을 쳐다보면서 하는 말입니다. 옥토 속에서 바람 없이 쑥쑥 자란 큰 아름의 나무가 태풍이 불면 힘없이 넘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평소에 태풍을 만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릴 때부터 태풍을 만나 나무는 비록 땅이 얕고 흙이 얇다 하여도 강인한 뿌리를 가지고 이겨내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상이 될 수 있는 서머나 교회는 초대 기독교의 가장 극심한 핍박과 환난과 궁핍의 환경을 헤쳐 나왔던 교회였습니다. 그 시련의 장을 그들이 넘길 수 있었기에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그토록 이상적 교회로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서탑교회가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개인으로서 하나님 앞에 어려움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더 밝은 내일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요 훈련의 과정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를 통해서 인내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고 계십니다.
(말씀)
네가 유대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9)
야고보서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니라.(약 1:4)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도다. (약 5:11)
(해석)
서머나 교회는 그 핍박을 견디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 환난을 견디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그 궁핍을 견디는 인내가 있었습니다. 서머나 교회는 그 심한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도 주님을 향한 믿음 그 하나를 위하여 인내에 인내를 쌓으면서 수많은 날을 보내었습니다. 그 길고도 험한 길을 믿음 안에서 인내의 힘으로 지탱하였던 교회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그들의 무서운 인내의 힘을 보시면서 칭찬을 아끼시지 아니했습니다.
(적용)
인내가 없는 개인은 망합니다. 인내가 없는 민족은 파멸합니다. 인내가 없는 교회도 허물어지게 됩니다. 인내를 당하지 못한 채 쉽사리 넘어지게 돼 버린 사람들을 우리의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왜 그렇게 많이 무너지게 될까 우리의 한국인의 성격이 너무 급한 것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단숨에 해결하고 성취하려는 급한 성격이 우리의 모순인 것 같습니다. 좋다 나쁘다 하는 흑백의 논리가 가장 심한 곳이 어쩌면 우리의 성격입니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는 화를 금방 금방 내고 그리고 내 마음대로 될 때는 웃음을 터뜨리는 너무 흑백 논리가 심한 우리의 민족입니다. 여기 인내가 부족한 우리 민족의 성격을 잘 묘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화)
어느 신문에서 흥미 있는 한 기사를 볼 수 있었습니다. 기사가 아니라 만든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자동차가 신호등 앞에서 그만 시동이 꺼지고 고장이 났습니다. 바짝 뒤쫓아 오던 자동차들이 비껴 나가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같이 서있게 되었습니다. 너무 오래 시간이 소요되니까 다 시동을 끄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고장 난 차 뒤에 서게 된 차는 일본사람이 탄 차였고, 그 다음 차엔 중국 사람이, 그 다음 차엔 한국 사람이 탄 차였답니다. 일본 사람은 상황을 보더니 아 이거 저 차가 고쳐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구나 하면서 즉시 계산기를 내가 지고서 두들겨 가면서 열심히 거기서 사무를 보더랍니다. 그 다음 중국 사람은 신문을 보는 척 하더니 그만 신문을 얼굴에 덮고서는 코를 골면서 한숨을 잘 자더랍니다. 그 다음 우리 한국 사람이 탔는데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우리 한국사람 말입니다. 대답을 다 하시고 계신 것 같습니다. 엔진도 끄지 않고 빵빵 경적을 누르면서 수리를 재촉하고 있었답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현장을 묘사한 이야기 이었습니다.
확실히 급한 성격입니다. 단번에 일확천금을 노리는 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입니다. 프랭클린 같은 사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합니다.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은 그가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말을 바꾸면 인내할 수 없는 사람은 그가 바라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인내가 없는 곳에서는 결코 성취가 없습니다.
참을 줄 모르는 인간의 결점은 언제나 실수를 합니다. 마라톤을 하는 현장에서 출발하는 사람들은 많습니다만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면서 땀을 흘리고 참고 견디는 사람이 선수가 됩니다.
우리의 서탑교회 성도들도 남다른 인내를 하였습니다. 이제 그 인내를 계속하면서 연단을 쌓고 미래를 구상하는 슬기가 필요합니다. 오늘의 불편을 견딜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남의 모든 사람들이 하지 못한다는 일을 할 수 있는 인내를 가지고 참고 나가야 합니다. 나의 일들이 풀리지 않은 오늘 속에서 미소를 잃지 않는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가 나의 희망대로 되지 않는 시점에 넉넉한 인내와 협동이 필요합니다. 진정 하나님의 말씀대로 인내하는 자가 인내하는 교회가 복되다는 말씀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서머나 교회를 통하여서 충성이 있는 교회의 모습을 오늘 우리에게 보여 주고 계십니다.
(말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10)
(해석)
충성이란 무엇입니까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굳은 신앙을 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의 주인을 굳게 신뢰하고 그에게 신실하게 나아가는 것을 충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믿음이라는 말과 충성이라는 말은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충성이란 말이 서머나 교회에 내려진 이후에 이 말씀의 실천자들은 참으로 심각하리만큼 실천적 행동을 가져왔습니다.
로마의 정부에 최선을 다 기울였던 이 서머나의 사람들 중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예수 그리스도 앞에 그 충성을 다 바쳤습니다. 그럴 때에 로마가 그대로 놓아둘 리가 없습니다. 핍박의 손을 가합니다. 156년경 서머나 교회의 목사님이었던 폴리캅은 순교의 역사에 으뜸가는 기록은 남겼습니다. 그는 오늘의 본문을 자기의 생명을 던져 지켰던 훌륭한 목회자였습니다.
로마의 핍박 속에 복음을 전하다가 여러 번의 경고를 받다가 마지막에선 그 경고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자 그를 붙잡아서 취조를 하고 이제사형장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워낙 86세의 노구에 존경을 받은 몸이기에 취조관이 동정을 하면서 한마디 말을 합니다. “이 순간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겠다고 한마디만 하십시오. 그러면 그 생명을 건질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의외였습니다. “내 나이 86년동안 주 하나님을 섬겼는데 내가 잘못을 저질러도 내가 실수하여도 내가 불충성해도 내가 죄 속에 빠져도 한번도 나를 모른다고 부정하지 않았는데, 나를 한번도 외면하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감히 나를 구원한 왕 중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할 수 있겠느냐” 그러면서 순교의 형장으로 끌려가서 높은 장대에 매달려서 장렬한 순교의 죽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습니다.
(적용)
오늘 우리에게는 폴리갑이 당하였던 그러한 핍박이나 환난이 없습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물질만능과 육체를 즐겁게 해주는 모든 죄악의 세력입니다. 핍박이나 환난이 가득한 시대보다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 발전된 물질문화 가운데서 청순한 나의 신앙의 정조를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교회를 먼저 생각하는 우리의 신앙에 무서운 변질이 확산되어가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순결이 고지식한 신앙생활이 파괴되는 무서운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현대는 지극히 이기주의가 팽창해 있는 시대입니다. 나에게 유익이 있을 때에 충성의 냄새를 풍기고 충성의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익이 없고 더 이상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면 서슴없이 떠나버리는 야속한 인간 세계가 바로 오늘입니다. 비록 과거에 많은 사랑을 받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여도 오늘 내게 도움이 되지 아니하면 교회를 미련 없이 떠나 버리는 비정한 세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를 사랑하는 그 손길로부터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언제 한번 그 자비의 손길을 우리로부터 외면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깊은 죄악에 빠져서 신음할 때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실수로 모진 환난 속에 빠져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태만하여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때도 한번도 우리를 버리시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십자가 위에서 그 붉은 피를 흘려주시고 그 살을 찢겨 주시면서 우리를 붙잡아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충성 어린 그 꿋꿋한 충성의 도는 우리한테는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신실하게 지금까지 간수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서머나교회 감독 폴리캅의 말대로 우리가 살아 온 동안 한번도 주님이 나를 모른다고 하신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나 하나의 생명과 유익을 구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간순간 주님을 모르는 행동을 주님을 외면하는 행동을 해야 하는지요 가슴 아픈 사연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충성된 종과 충성된 교회를 바로 서머나 교회와 같은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오늘의 서탐교회가 제 2의 서머나 교회로서 주님 앞에 나타날 좋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충성의 의미를 가슴에 안고 어려웠던 과거처럼 오늘도 내일도 행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입니다.

(결론)
오늘 이 서탑교회가 제2의 서머나 교회가 되어 보려는 의지를 세워보시지 않겠습니까 이 교회가 최선을 다 기울일 때 오는 21세기에 제 2의 서머나 교회로 이 중국 땅에 우뚝 설 수 있습니다. 이 교회는 특수한 사명을 부여받은 교회입니다. 200만의 조선족이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는 교회입니다. 200만의 조선족을 그리스도의 품으로 인도해야 할 사명이 주어진 교회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여러분을 좋은 목사님과 함께 그 모진 과정에서 훈련을 시키시어 오늘에 이르게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비전이 필요합니다. 거대한 비전과 희망을 가지고 일어서야 합니다. 복음의 십자군들로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가슴에 품고 행진해야 할 교회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에게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땀 흘려 충성하는 교회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입지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충성을 다한 교회가 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 모두의 손에 들고 우렁찬 감격과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그러한 날은 필연코 여러분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연단을 위하여서 시련을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그 가운데서 인내를 키우면서 성숙되어 집니다. 그리고 거기서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는 충성을 보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교회가 부흥의 길을 걷고 있는 이 순간에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거듭하여 오늘 말씀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2. 본 설교가 있기까지
이상적인 교회를 흠모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는 공동체로서의 교회가 그 본래의 모습을 상실한다는 것은 실로 마음 아픈 사연이다. 교회가 지속해야 할 기본적인 사명과 그 모습들이 퇴색될 때 교회의 몰락은 언제나 다가왔고 한 시대는 암흑의 시대로 진입한 것을 보게 된다. 교회가 시대의 변천이 가져온 파도에 휩쓸리어 그 방향을 상실할 때는 교회는 미래를 보지 못한 체 쉬이 침몰된다. 사실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진 교회의 발자취는 이러한 침몰의 역사를 빠짐없이 우리 앞에 보여주고 있다.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의 타락과 침몰을 막기 위한 대 각성부흥운동들이 발생하였고 그 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새로운 세기를 지탱하는데 동력을 유지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교회가 다시 시대의 조류에 의하여 시들어지고 회생되지 못할 때 하나님은 교회의 촛대를 옮겨 새로운 지역에서 개혁된 모습의 교회를 지속시키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이 땅에서 확산시키시는 교회의 역사를 중단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그 교회의 상을 찾아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어 보겠다는 의지를 오늘의 교회가 필요로 한다. 그 의지가 실현되어 이상적인 교회로 오늘을 지탱할 수 있다면 진정 그 교회는 오는 세기에 하나님의 뜻을 펼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설교에 얽힌 이야기
중국의 요령성의 심양에는 우리 조선 민족의 역사적인 교회가 있다. 그곳에는 일찍이 백영엽 목사에 의하여 1913년에 세워진 서탑교회가 있다. 이 교회는 일제시대의 신사참배를 피하여 박형룡 박윤선 목사 등이 5년에 가까운 기간 이곳에 머물면서 서탑교회의 성경학교를 기초로 근처에 만주신학교를 1949년 설립한 바도 있다.
이 교회의 목회자는 오애은 목사로서 중국의 문화혁명당시 교회를 지키다가 숱한 핍박과 아픔을 당한 분이다. 공산치하에서 강제노동을 하다가 풀려나 2년여의 목회를 하다가 다시 문화혁명이 발발하자 1966년 강제노동의 현장에 끌려가서 1978년까지 자동차부속 공장에서 일을 하는 등 15년간의 수난을 당한 바 있는 여자 목사이다. 문화혁명 기간이었던 1966년 8월 23일에는 교회 간판이 쪼개어지고 성경이 불태워지는 등 이 공산치하의 박해를 당하다가 1978년 성탄전야에야 회복이 된 교회이다.
회복 후 첫 예배에 신앙의 생명을 끈길 지게 지켜온 23명의 교인들이 감격의 예배를 드린 후 교인들이 계속적으로 모이기 시작하여 지금은 1500의 제적교인과 1000명이 넘는 출석교인을 가지고 있는 교회이다. 1993년 경제여건이 그렇게도 어려운 가운데서도 본 교회 교인들이 먼저 3분의 1 이상을 부담하고 해외의 교회들이 참여의 손길을 펴서 지금은 심양에서 가장 좋은 교회건물을 갖게 된 교회이다.
필자가 봉직하고 있는 장신대는 이 교회에 있는 동북신학원 조선족 반에 교수들이 찾아가 일주일간씩 집중강의를 하고 있다. 그 때마다 서탑교회의 강단에서 설교를 하게 된다. 필자 역시 맡겨진 강의를 위하여 가기 때문에 사순절의 다섯 번째의 주일에 설교를 해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회중에 대한 관찰과 분석
한국의 교회와는 다른 특수한 경험을 겪은바 있는 교회이며 한국과는 다른 환경에 있는 교회에 어떤 말씀을 운반해야 할지 필자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염려와 두려움을 안고 기도가 시작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말씀을 기다리는 회중의 분석을 먼저 할 필요를 느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차별된 정황들을 요약하였다.
먼저는, 이 교회의 위치는 중국의 동북 지역의 중심지인 심양에 자리 잡고 있으며 12억의 인구 가운데서 200만의 소수민족으로 건제한 우리의 민족이다. 그리고 이 교회의 역사는 1913년부터 지금까지 83년간 신앙을 지켜온 교회라는 점이었다.
둘째는, 대표적인 공산주의 국가로서 특별히 1966년부터 1978년까지 있었던 문화혁명 기간에 이 거대한 땅에 기독교를 미신적인 종교로 규정하고 혹독한 핍박을 쏟은 관계로 문을 닫아야 했던 쓰라린 경험을 가진 교회라는 사실이다.
셋째는, 이 교회의 목회자가 연약하게 보인 여성목사이지만 그 혹독한 문화혁명의 와중에서 핍박을 받고 강제로 공장에서 노역을 하면서도 신앙과 생명을 지켜온 분으로 조선족의 정신적인 지도자로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넷째는, 이 교회의 회중들은 젊은 층보다는 대부분이 오래 전부터 신앙생활을 해오다가 자신들의 목사와 함께 숱한 핍박과 삶의 불이익을 감수해온 현대사에 보기 드문 경험을 소유한 채 중국 땅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아온 특수한 조선족 회중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상과 같은 회중들의 분석이 끝이 나자 이제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이들을 찾아가 무슨 말씀을 운반해야 할 것인지를 조용히 구할 수 있게 되었다.
본문과 주제의 선정
운반해야 할 메시지가 담긴 본문을 찾는 데는 크게 어려움이 따르지 아니하였다. 66권의 성경에는 이상의 분석에서 나타난 교회를 하나님이 일찍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계시록에 나타난 7교회는 이 지상의 교회의 예표들로서 그 중에 바로 오늘의 회중에게 말씀을 운반할 메시지가 담겨있는 두 교회의 모습이 있다. 그 두 교회는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였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칭찬과 사명을 부여받은 서머나 교회에 주어진 말씀이 더욱 서탑교회와의 관련이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그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의 현상과 목회자인 폴리갑 목사의 굳은 신앙의 절개가 서탑교회의 목회자와 비슷한 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결과 본문의 선정은 어렵지 않게 결정이 되었다. 그리고 주제도 주님이 서머나 교회에게 주신 말씀 가운데서 마지막으로 강조하신 ‘충성’의 부탁이 운반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 주제가 되어야 한다는 확신이 서기 시작하였다.
본문과의 대화와 적용
주어진 말씀의 뜻은 어릴 적부터 들어온 설교들을 통하여 많이 익숙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특유한 회중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확인하고 그들에게 운반해야 할 설교자에게는 자신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정도로서 메시지를 구성하여 운반한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일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러하기에 새롭게 말씀을 펴고 원어 성경과 각각 달리 번역된 여러 권의 성경과 석의를 위한 책들을 펴들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하신 말씀의 뜻을 찾기에 노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다.
먼저는, 계시록에 언급된 7교회의 형태는 셋으로 분류되는데 그 첫 형태는 칭찬과 책망을 모두 받게 되는 교회로서 에베소 교회, 두아디라 교회, 버가모 교회 , 그리고 버가모 교회가 언급되었고, 그 두 번째 형태는 혹독한 책망만을 받은 교회로서 사데교회와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그리고 세 번째의 형태는 순수한 칭찬과 위로와 희망의 말씀을 받게 되는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였다.
둘째는, 서머나라는 곳은 오늘의 터키의 이즈미르(Izmir)라는 곳으로 추정되고 이 성업은 해발 160m의 파구스산 기슭의 만 변경을 따라 둘러 싸여 있는 항구도시로서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셋째는, 이러한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은 심성이 지극히 고왔고 로마의 식민지로서 충성을 다 하였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 충성은 로마의 인정을 받아
B. C. 20년 황제 티베리우스를 위한 신전 건설의 특권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넷째는, 이 교회의 성도는 주로 유대인 개종자들로서 이 도시의 부유함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가난한 가운데서도 황제숭배를 거부하고 박해를 받으면서 끝까지 신앙을 고수한 그리스도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에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다.
다섯째는, 이 교회의 목회자였던 폴리갑에 대한 기록이 인상적이었다. 그가 주검의 형장에서도 자신의 생명의 부지에 연연하지 않고 장엄한 순교를 당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은 주님을 향한 충성심에 새로운 세계를 펼쳐 보였다는 사실이었다.
끝으로, 이곳에서 깊은 메시지를 주고 있는 충성이라는 단어는 헬라어에서는 믿음과 동일한 어휘라는 사실을 보면서 믿음과 충성의 도의적 해석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롭게 충성의 의미가 단순한 인간적인 정성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신앙의 정성임을 알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은 본문과의 대화는 바로 말씀을 전해야 할 회중을 향한 적용이 선명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말씀의 내용과 유사한 부분이 많은 회중들이기에 다음과 같은 적용들이 가능하였다.
먼저는, 오늘의 말씀을 운반 받아야 할 회중들은 사탄의 무리들에 의하여 환난과 궁핍을 이미 받은 쓰라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둘째는, 그들의 인내와 충성은 시대의 발전과 신앙의 자유와 물질의 풍요와 함께 시들어질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마치 에베소 교회처럼 첫 사랑을 버릴 위험성을 언제나 경계하고 그 아름다웠던 기록을 보유해야 한다.
셋째는, 장차 그들에게 더 밝은 미래가 올지 아니면 다시 어두운 시대가 올지 모르기에 죽을 때까지 충성을 다하여 세계 교회의 귀감이 되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면류관을 받아야 한다.
설교의 목적과 그 전개형태
한편의 설교가 두 가지의 목적을 안고 메시지를 운반한다는 것은 권장할 수 없는 일이다. 성공적인 설교는 한 가지의 목적을 뚜렷하게 설정하고 그 목적이 정확하게 보여지도록 함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그러나 본 설교를 위하여 주어진 본문은 두 가지의 목적을 운반할 수밖에 없는 메시지가 실려 있다. 먼저는 주님이 서머나 교회가 당한 환난과 궁핍을 잘 알고 있다는 말씀과 그들을 가리켜 부유한 성도들이라는 말씀 등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약속 등은 모두가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는 메시지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다가올지 모르는 미래를 대비하여 죽도록 충성하라는 말씀은 엄한 명령으로 주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우는 그 설교의 목적은 위로에 초점을 맞추고 마지막의 명령은 약속된 미래로 메시지를 운반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러한 본문의 특수한 메시지를 받아 본 설교에서는 말씀 속에서 강조되어진 부분들을 대지설교 형태로 전개하게 되었다. 각 대지에서는 설교자의 견해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성삼위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서 그분의 말씀이 대지로 제시되는 기초적인 설교 상식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대지마다 제시된 말씀을 강해적인 성격을 가지고 해석하면서 말씀과 현장과의 접목을 시도하였다.
3. 본 설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
먼저는, 본 설교가 너무 분석적이어서 회중들과의 만남에 시원스러운 결과를 주지 못하는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 비교하여 교육수준이 낮은 그 회중들의 현실을 고려해야 하는 설교자의 관찰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을 수 있다고 본다.
둘째는, 인내의 메시지를 적용하는 두 번째의 대지에서 사용된 예화는 한국인의 성격을 분석하는 예화이지 신앙을 위하여 참고 견디는 아름다운 인내의 예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그 적절성에 문제가 있다고 본다.
셋째는, 모든 설교가 갖추어야 할 ‘복된 소식’을 본 설교에서는 충분히 운반하지 못한 오류를 가지고 있다. 본 설교의 본문에는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너에게 주리라“는 복된 소식이 분명하게 제시되었는데 설교자에 의하여 그 소식을 결론으로 대치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독립된 대지로 이 생명의 면류관의 의미를 해석해 주고 그 기쁨을 사례를 들어서 적용해 주어야 함이 마땅한데 그러한 과정을 생략하는 모순이 보인다.
넷째는, 본 설교의 오류라기보다는 운반하는 순간에서 설교자가 어렵게 느껴졌던 부분의 고백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곳의 회중들은 원래 장로교의 전통대로 말씀을 진지하고 조용하게 받은 성도들이었다. 현재의 목회자도 그러한 설교의 분위기와 전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 그러나 수많은 한국의 설교자들이 그곳의 강단에서 ‘아멘’의 응답을 비롯하여 ‘할렐루야’ 와 ‘주여! 삼창’등을 열심히 연습을 시키어서 필요 없는 아멘의 응답이 습관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특히 본 설교는 “(나는).원합니다” “(나는).바랍니다” “(나는).축원합니다.
”"(나는). 믿습니다“의 표현이 전혀 없는데도 전혀 어울리지 않은 아멘의 응답이 자주 나옴으로 말씀을 전하는데 대단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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