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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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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 프랭클린 D.루즈벨트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38세의 젊은 나이에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습니다. 비록 선거에 패함으로 그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장래의 대통령 후보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이듬해 그의 39세 때, 인생의 황금기 때 그는 소아마비에 걸려서 자유롭게 걸을 수 없는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애자라는 이유만으로는 상원의원직을 사퇴할 수 없다 했습니다. "자유롭게 걸을 수 없으니 절망이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도 건강하고, 손도 잘 움직인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분야에서도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장애인이 된지 8년 후 그러니까 그의 나이 47세 때, 그는 비록 휠체어를 의지해서 살게되었지만, 주변의 극렬한 반대를 물리치고, 뉴욕 주지사에 입후보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상했떤 대로, 그의 건강 문제가 선거의 큰 이슈가 되었습니다. 곧 기사의 격무에 그는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소문이 일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즈벨트는 용기를 잃지 않고 집요하게 질문 공세를 펴는 기자들에게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지사의 일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머리에 든 것 없이 발로 뛰어 다니는 지사를 구하고 있지 않다. 정말 지사가 해야 할 일은 대부분 두되노동이다. 그러니 휠체어를 탄 나에게 꼭 맞는 일이다."> 그리고 그는 열차와 자동차를 이용해서 광활한 주 전지역을 순회하며 초인적인 선거운동을 펼쳤습니다. 결국 루즈벨트는 그의 건강에 대한 불신을 털어버리고, 선거에서 당당하게 승리함으로 뉴욕 주지사가 되었습니다. 불행한 역경과 재난 가운데서 우리들이 어떠한 자세를 가지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미래도, 운명도 엄청나게 달라짐을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철학자 베르나르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생을 한마디로 정의해야 한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인생은 창조이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것도 없는 무에서 이런 아름다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우리 인간들도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한숨을 찬양으로 바꿔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기적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기적사건입니다. 우리 주님은 38년동안 병으로 신음하고, 절망하던 한심령을 치유하심으로 소망을 창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주의 깊게 읽어내려가면 짙은 구름이 하늘에 드리워진 것 같은 비밀이 곳곳에 산재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본문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이름도 없고, 출신지역도 없습니다. 또 병도 어떠한 병을 앓고 있는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38년동안 누워있다는 말을 유추해 볼 때 중풍병자가 아닌가 짐작할 뿐입니다. 또 본문만 가지고서는 어떤 절기 때 이 일이 이루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은 이 기적이 행해진 때는 오순절이 아니겠는가 추측할 뿐입니다. 마치 어두운 조명 불빛 아래서 희미하게 한 인물을 바라보는 것처럼 오늘의 이야기는 베일에 쌓인 미스테리 사건처럼 보여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속에는 분명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38년된 병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이요, 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병아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아갔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절망이 소망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이란 우리들이 인생에 대해서 다 모른다 하더라도 한가지만은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이 산 소망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영접함으로 우리의 신분이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미래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치욕에서 영광으로 분명하게 바뀌었습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가장 잘 보여준 '구속사역의 결정적 예표'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 동쪽에 '양문'이 있습니다. 그리고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습니다. 이 연못은 지형적인 관계로 바람이 불지 않아도 가끔 물이 파도를 쳤습니다. 그리고 물이 파도를 칠 때 제일 먼저 연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깨끗하게 낫는다는 전설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 많은 병자들이 항상 장사진을 치고,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형기 마른자들이 누워 물이 동함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곳 자체가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축소판 세상입니다. 그러기에 겉으로는 평온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피를 말리는 엄청난 생존경쟁의 싸움이 바로 이 곳, 자비의 집이라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선착순이 통하지 않습니다. 양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두팔 걷어부치고, 죽기 아니면 살기로 싸우는 처절한 싸움 뿐이었습니다. 승자만이 살아남는 비정한 곳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치열한 삶의 현장에 자비하신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때는 유대인의 명절이었기 때문에 예루살렘은 수 많은 사람으로 붐볐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연못을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심코 지나갔습니다. '군중속에 고독'이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많았고, 넘쳐났지만 고통가운데 있는 사람들은 도와 줄 진정한 이웃, 친구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절망의 현장,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절망가운데 허덕이는 불쌍한 한 영혼을 바라보셨습니다. 이 사람은 다름아닌 38년된 병자였습니다. 38년 동안 누워서 살았다는 이것 하나만 생각해도 이 사람이 얼마나 고통의 세월을 보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사람도, 이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어떤 사람도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효험이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물이 동하면 사람들은 서로 먼저 못에 들어갈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연못에 넣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38년동안 매번 실패를 맛보았습니다. 또한 앞날도 기약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철저하게 아픈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고독한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한마디로 소망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 사람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관심있게 지켜 보았습니다. 또한 이 사람의 모든 형편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 병자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생각해 보면 엉뚱한 질문 같습니다. 자기 병 낫고 싶지 않은 환자도 있습니까 네가 낫고자 하느냐 가장 원초적인 질문입니다. 가장 당연한 질문입니다. 또 가장 대답하기 쉬운 질문입니다. "예"라고 대답한 하면 되는 질문입니다. 사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꼭 대답해야 할 질문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예, 아니면 아니오 둘중의 하나입니다. 구원의 결정적 예식인 세례서역도 "예수님을 믿습니까예", 결혼서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사랑하느뇨", "예" 군더더기 말이 필요없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램을 깔때도 물음은 간단합니다. Yes of Not 하나를 선택해서 클릭합니다.
뭐, 이 프로그램을 까는데 있어서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이런 것은 묻지도 않아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적인 대답만 잘하면 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습니까 주님을 사랑합니까 디베랴 바닷가. 예수님과 베드로가 만났습니다. 이때 주님은 중요한 질문을 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질문은 간단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런데 베드로는 "예"라고 대답할 자신이 없엇습니다. 주님을 배반했거든요. 그러다보니 대답이 길어졌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오늘 이 병자의 대답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 주님의 뜻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완전히 동문서답입니다. 그리고 더 비극적인 것은 이 사람은 소원자체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진정한 소원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무엇을 이루었는가 하는 성취보다 무엇을 바라는가 하는 소망입니다. 비록 이룬 것은 없다할지라도 그 무엇인가를 바라는 소원과 소망이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살 의욕과 생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의 상황속에서도 일어설 힘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환자의 문제는 병자체보다는 마음이 더 문제였습니다. 오랜 투병생활로 이 사람은 소망을 잃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마음이 꼬여서 다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나를 못에 넣어줄 단 한 사람이 없다고 불평했습니다. 사실 병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고독입니다.
그러므로 병낫기 위해서는 먼저 고독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병자체 보다 자기를 귀히 여겨주는 사람이 없다고 자신을 비하하고, 자포자기 하는 마음이 더 문제입니다. 사실 환자들은 조그마한 일로 토라지고, 분노하고, 원망합니다. 내가 이렇게 고통받고 있는데 한 사람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서러워합니다. 그래서 자 신의 참 모습을 직시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자신의 소중함을 잃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극단적으로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가까이에서 대화를 나누어 주신 분은 예수님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좌절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찾아오심으로 삶의 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 아닙니다. 소망의 메시지입니다. 치료의 역사압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람에게 소망을 심어 주심으로 치료를 시작하십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치료는 기술적인 치료가 아닙니다. 인격적인 치료를 행하십니다. 단순히 질병만을 치료하지 않았습니다. 마음과 영혼까지도 관심을 가지고 치료하십니다. 엉뚱한 대답을 했지만 우리 주님 한마디 꾸중도 안하십니다. 미신적인 신앙이라고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이 사람에게 있어서는 굉장한 명령입니다. 일어나, 들고, 걸어가라. 이 사람에게는 엄청난 일입니다. 38년 동안 한번도 해 볼일이 없는 일입니다. 안해보았지만 믿고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9절 말씀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주님의 말씀은 권세가 있습니다. 치료의 능력이 있습니다. 죽을 병도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믿고 순종한 이 사람에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병자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순종한 것밖에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여, 자리에게 일어났습니다. 바로 이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38년간 누워 지냈던 이 사람이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이것이 구원이요, 은혜요,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남모르는 어려운 문제로 고민한시는 분 있습니까 중한 병으로, 사업의 실패로, 실직으로 자녀의 문제로 오늘도 눈물지으며, 소망을 잃은 자 있습니까 주님은 애정어린 눈으로 우리의 아픔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굳게 믿고 붙잡았던 사람들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했던 것입니다. 한 신실한 목재소 직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40대 초반에 회사에서 청천벽력 같은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극심한 불황으로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던 회사는 극약처방으로 직원을 해고시켰던 것입니다. 갑자가 실직자가 된 이 중년 남선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여! 해고에 담긴 진정한 의미가 무엇입니까" 기도하는 가운데 이 사람은 건전한 사람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을 시작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전혀 해보지도 않은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적인 사업망을 거느린 호텔 "홀리데인 인"을 창엽한 케몬스 윌슨입니다. 이 사람은 눈 앞에 있는 해고통지서를 놓고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지 않았습니다.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련을 도약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가장 어렵고, 고통스러울 때 주님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그 결과 목재소 직원에서 거대한 사업가로 경영자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서두에 말씀드린 것 같이 오늘의 기적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의 대표적 사건입니다. 38년된 병자는 다름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소망없는 바로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소망을, 소원을 회복시키시고, 치료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믿는자는 다 구원을 받습니다. 오늘도 어려운 문제로 고통받는 우리들을 향해서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질문 앞에 우리는 무어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이 명령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겠습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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