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5:1-15)
본문
예루살렘 성문은 명절에 모여든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명절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양을 파는 장터(혹은 양문)곁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란 "자비의 집" 혹은 "행 랑의 집감람의 집"등으로 불려지고 있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노숙자의 집정도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로부터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 른 자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못은 가끔 (간헐 천수로 말미암아) 물이 솟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질병에 걸렸더라도 낫게 된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천사가 와서 이 물을 동하게 하는 줄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런 병자들이 모여있는 베데스다에 오신 것입니다. 거기서 38년동 안 병들어 거기에 누어 있는 환자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접근하 셨습니다. 그 병자는 아무 이야기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다시 바꾸어 말씀드린다면 "당신은 살고 싶습니까"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이 말씀 붙잡고 은혜 받기로 하겠습니다.
I. 이 질문은 우리 인생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38년된 병자는 기나 긴 세월을 병살이로 보내고 있 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에게도 이름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이름보다는 38년된 병자라고 해야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장기 환자인 그에게는 가족도 발길을 끊었을 것입니다. 친척과 친구는 이미 끊어진지 오래였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인생의 비참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 비참한 인생에게 소원이 한가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살고 싶은 생의 욕구였습니다. 아마도 살고싶은 욕구는 만인이 같을 것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빈부 귀천을 초월한 일일 것입니다. 삶에 대한 욕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입니다. 여기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병자는 죽지 않고 살고 싶어 모진 비바람을 극복하면서 38년 동안을 하루같이 참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살고싶어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에겐 살고 싶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에게 주님 이 다가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속에서 생의 욕구로 충혈 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해 봅니다.
Ⅱ. 인간의 무능함을 고백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병자는 그렇게도 살고 싶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것이 38년 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고싶은 것은 마음 뿐 자기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병자는 말했습니다. "주여 물이 동 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실로 무능한 자신을 한탄하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가련한 고백입니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 38년 된 병자는 자신에게서 도, 타인에게서도, 생존 경쟁 속에서도, 자신 없는 무능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병자는 너무나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람을 강하게 의지하였으나 그토록 의지했던 사람으로 인해 절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46편 3-5절에 보면 "방백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 지 말라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되는 인 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1:24에 보면 "인생은 풀이요,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 고 꽃은 떨어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 보면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 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 사람을 의지하며 살다가 마치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이 절망의 늪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의지하고 산 인생들의 결론입니다.
Ⅲ. 그러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 십니다. 인생들이나를 보고 세상을 보면 절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호소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의지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곁을 다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홀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요5:7) 이 얼마나 절망적인 말입니까! 결사적인 생존 경쟁의 마당에서 도태를 당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패배자의 처절한 비명 같이 들려 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인생들의 실상이고, 실체입니다. 나 를 사랑하고 아끼던 분들이 언젠가 하나둘 내 곁을 떠날 날이 우리 앞에 다 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나 홀로 몸부림쳐야 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한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 베데스다를 향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실패와 좌절과 질병과 가난의 현장에 주님께서 찾아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절망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 그가 38년이나 자리에 누워, 벌써 병이 오랜 줄도 아셨습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곳에! 세상이 외면하고 내어버린 곳에 우리 주님이 찾 아 와 주셨습니다.(요5:6)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찾아 가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무능한 인간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능한 인간, 죄인을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시고 복을 주시는 기독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 참상을 보셨고, 아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처한 형편과 사정을 다 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곧 생명이십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이 생명의 말씀이 들려 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하는 축복의 베데스다 입니다. 그 예수님께로 들어가면 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게 됩니다. 그 예수님께로 들어가기만 하면 앉은뱅이가 걷기 시작합니다. 신령한 베데스다 되 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정결해 집니다.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예수님을 만나 모시기만 하면 입이 열리고 말을 하기 시작 합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베데스다입니다. 물이 동할 때에 그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가 모든 질병에서 치유 받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모든 문제와 모든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축복의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가난한 자가 신령한 베데스다 되시는 예수 품에 안기기만 하면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능하고 비참한 인생일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베 데스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가치 있고 보람되며, 의 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억압받고 불안하게 살던 분이라도 참 자유와 평화와 건강을 얻고 행복이 시 작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병자에게 하시던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주변 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이 축복을 받 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을 들은 사람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간 절히 빕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도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병자들도 들었습니다만 낫고자 하는 욕망이 뜨거웠던 이 병자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 받고자 하는 사람만 은혜를 받았습니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자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 자 하느냐!" 이제 세상에 오직 그분만 하실 수 있는 명령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네 자 리를 들라!" 이 병자가 앉았던 자리는 38년간 찌들은 자리입니다. 묵은 자리 입니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아마도 평 생을 걸어 보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믿고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고통과 가난과 질병과 괴로 움의 심연에서! 아닌 지옥의 고통에서 드디어 탈출하는 통쾌한 순간입니다. 이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명령을 받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는 오늘 그 명령을 받고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 축복 의 자리로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오직 한 분이 계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는 새 출 발을 의미합니다. 이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이요, 회복의 명령이요, 축복의 명 령이요, 새롭게 하는 명령이요, 순종하기만 하면 자손만대에 복을 받는 명령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낫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38년된 베데스다 병자와 같이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다시 말하면 너도 그런 축복을 받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생명을 주고 싶은 창조주 의 명 령입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일어나 걷는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요5:24,25,28) 그래서 요5:9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절망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서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방탕한 어거스틴에게 이 명령을 주어 그를 새롭게 출발시키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2-14절의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성자가 되었습니다. 스펄죤이라는 사람은 이사야 45장 22절의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생명의 신호탄을 그가 16세 때 받고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먼 훗날 그가 이 말씀에 생명을 받았을 때를 회상하기를 "그 당시 나의 마음은 태양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고, 내 지은 죄로 인해 모 든 소망을 잃었던 자였다. 지금까지 나의 최고의 불행은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중국의 초대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요한 복음 19장 30절의 "내가 다 이 루었다"는 말씀에서 생명을 받고 새 출발하였습니다.
D.우빅네는 에베소서 3 장 20-21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 나 생각하는 것에 더욱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는 말씀에서 생명을 받고 새 출발하였습니다. 저 로마의 캐톨릭의 젊은 신부, 마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명을 받 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새 출발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서 물어 보시기를 "너희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실 때에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도 그들처럼 생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속에 있는 이 위대 한 생명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Ⅳ. 살기 위하여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병자가 베데스다에 찾아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은 후에 그 끔찍한 자리를 들고 일어 나 걸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새 출발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죄라고 하는 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질병을 가져다주는 원흉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은혜와 축복을 입었을 지라도 인생은 연약하여 또 죄중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 리고 은혜를 받고도 범죄 하면 더 심한 징계를 받을 것임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과, 이 민족을 위해 서! 그리고 계속적으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죄의 일을 벗어버리고 거룩하 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렇게 우리 대선 교회를 방문하셔서 예배드리는 여러분! 이 세상은 실로 병자들의 세계입니다.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과 벙어리와 앉은뱅이가 법석이는 현대판 베데스다와 같습니다. 이 영계 를 바로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 지 못하는 절뚝발이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 생명의 피가 없어 현기증을 일 으켜 비틀거리는 환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살고싶어서 삶의 욕망을 가지고 가끔 동한다는 베데스다에다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38년이 되어도 그는 고침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있어도 그는 치료받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치료되고 참사는 생명은 베데스다에서 오는 것이 아 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 의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의 억만가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십니다.(요3:16) 그분이 말씀하시 기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 라"라고 하셨으니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여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된 병자가 예수 생명을 받고 고침 받아 새 출발하게 된 것과 같이 그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왜냐하면 그 못은 가끔 (간헐 천수로 말미암아) 물이 솟는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누구든지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질병에 걸렸더라도 낫게 된다는 전설 때문이었습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그 베데스다 연못가에는 수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천사가 와서 이 물을 동하게 하는 줄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이런 병자들이 모여있는 베데스다에 오신 것입니다. 거기서 38년동 안 병들어 거기에 누어 있는 환자를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접근하 셨습니다. 그 병자는 아무 이야기하지 않아도 예수님은 그 사람의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이 질문을 다시 바꾸어 말씀드린다면 "당신은 살고 싶습니까"라는 말이 되겠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이 말씀 붙잡고 은혜 받기로 하겠습니다.
I. 이 질문은 우리 인생의 참 모습을 발견하게 해 줍니다. 오늘 여기에 등장하는 38년된 병자는 기나 긴 세월을 병살이로 보내고 있 었습니다. 아마도 이 사람에게도 이름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의 이름보다는 38년된 병자라고 해야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미 장기 환자인 그에게는 가족도 발길을 끊었을 것입니다. 친척과 친구는 이미 끊어진지 오래였습니다.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인생의 비참함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이 비참한 인생에게 소원이 한가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살고 싶은 생의 욕구였습니다. 아마도 살고싶은 욕구는 만인이 같을 것입니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빈부 귀천을 초월한 일일 것입니다. 삶에 대한 욕구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가장 귀한 것입니다. 여기 베데스다 연못가에 있는 병자는 죽지 않고 살고 싶어 모진 비바람을 극복하면서 38년 동안을 하루같이 참고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는 너무나 살고싶어 베데스다 못가에서 물이 동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에겐 살고 싶은 이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람에게 주님 이 다가 오셔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습 속에서 생의 욕구로 충혈 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해 봅니다.
Ⅱ. 인간의 무능함을 고백케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병자는 그렇게도 살고 싶었습니다.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리는 것이 38년 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살고싶은 것은 마음 뿐 자기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병자는 말했습니다. "주여 물이 동 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내려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실로 무능한 자신을 한탄하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가련한 고백입니까!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여기에 38년 된 병자는 자신에게서 도, 타인에게서도, 생존 경쟁 속에서도, 자신 없는 무능한 인생임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병자는 너무나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람을 강하게 의지하였으나 그토록 의지했던 사람으로 인해 절망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시편 146편 3-5절에 보면 "방백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을 의지하 지 말라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되는 인 생이라"고 하였습니다. 벧전 1:24에 보면 "인생은 풀이요,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아서 풀은 마르 고 꽃은 떨어진다."고 말씀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7장 5절에 보면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사람은 저 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 사람을 의지하며 살다가 마치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이 절망의 늪에서 탄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을 의지하고 산 인생들의 결론입니다.
Ⅲ. 그러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류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 십니다. 인생들이나를 보고 세상을 보면 절망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낙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 그렇습니다. 그를 도와 줄 사람이 없다고 호소합니다. 그는 지금까지 의지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그의 곁을 다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홀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요5:7) 이 얼마나 절망적인 말입니까! 결사적인 생존 경쟁의 마당에서 도태를 당하여 몸부림치고 있는 패배자의 처절한 비명 같이 들려 오지 않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인생들의 실상이고, 실체입니다. 나 를 사랑하고 아끼던 분들이 언젠가 하나둘 내 곁을 떠날 날이 우리 앞에 다 가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어느 날! 나 홀로 몸부림쳐야 할 때가 오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위한 준비는 되셨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아무리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 날 구멍이 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 낙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 가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 베데스다를 향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실패와 좌절과 질병과 가난의 현장에 주님께서 찾아 오셨기 때문에 더 이상 절망하고 낙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께서 그가 38년이나 자리에 누워, 벌써 병이 오랜 줄도 아셨습니다.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는 곳에! 세상이 외면하고 내어버린 곳에 우리 주님이 찾 아 와 주셨습니다.(요5:6) 이것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입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신을 찾아 가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무능한 인간은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무능한 인간, 죄인을 찾아 오셔서 만나 주시고 복을 주시는 기독교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그 참상을 보셨고, 아셨습니다. 지금 이 시간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처한 형편과 사정을 다 알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고 질문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이 곧 생명이십니다. 오늘도 동일하게 여러분에게 이 생명의 말씀이 들려 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들어가고 싶어하는 축복의 베데스다 입니다. 그 예수님께로 들어가면 소경이 눈을 뜨고 빛을 보게 됩니다. 그 예수님께로 들어가기만 하면 앉은뱅이가 걷기 시작합니다. 신령한 베데스다 되 시는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정결해 집니다. 말을 못하는 벙어리가 예수님을 만나 모시기만 하면 입이 열리고 말을 하기 시작 합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축복의 베데스다입니다. 물이 동할 때에 그 못에 제일 먼저 들어가는 자가 모든 질병에서 치유 받는 것처럼, 우리 주님은 모든 문제와 모든 질병과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축복의 베데스다 연못입니다. 가난한 자가 신령한 베데스다 되시는 예수 품에 안기기만 하면 부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드리는
사랑하는 여러분!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능하고 비참한 인생일지라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령한 베 데스다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만나기만 하면 다시 일어 설 수 있습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다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가치 있고 보람되며, 의 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경제적으로 억압받고 불안하게 살던 분이라도 참 자유와 평화와 건강을 얻고 행복이 시 작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병자에게 하시던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주변 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이 축복을 받 은 것은 아닙니다. 주님의 명령을 들은 사람만 그렇게 되었습니다. 저는 간 절히 빕니다.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도 주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많은 병자들도 들었습니다만 낫고자 하는 욕망이 뜨거웠던 이 병자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은혜 받고자 하는 사람만 은혜를 받았습니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는 자가 그것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보고 싶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 자 하느냐!" 이제 세상에 오직 그분만 하실 수 있는 명령을 지금 하고 계십니다. "네 자 리를 들라!" 이 병자가 앉았던 자리는 38년간 찌들은 자리입니다. 묵은 자리 입니다.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리였습니다. 아마도 평 생을 걸어 보지 못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대로 믿고 "일어났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고통과 가난과 질병과 괴로 움의 심연에서! 아닌 지옥의 고통에서 드디어 탈출하는 통쾌한 순간입니다. 이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이 명령을 받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된 병자는 오늘 그 명령을 받고 드디어 일어섰습니다. 고통의 자리에서 벗어나 축복 의 자리로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습니까! 오직 한 분이 계십니다. 베데스다 연못가 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는 새 출 발을 의미합니다. 이 명령은 창조주의 명령이요, 회복의 명령이요, 축복의 명 령이요, 새롭게 하는 명령이요, 순종하기만 하면 자손만대에 복을 받는 명령 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도 낫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38년된 베데스다 병자와 같이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다시 말하면 너도 그런 축복을 받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생명을 주고 싶은 창조주 의 명 령입니다. 그 음성을 듣는 자는 일어나 걷는 축복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요5:24,25,28) 그래서 요5:9에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는 절망에서 생명의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일어나서 걸어갔습니다. 하나님은 방탕한 어거스틴에게 이 명령을 주어 그를 새롭게 출발시키셨습니다. 어거스틴은 로마서 13장 12-14절의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며,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성자가 되었습니다. 스펄죤이라는 사람은 이사야 45장 22절의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 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는 생명의 신호탄을 그가 16세 때 받고 새 출발을 하였습니다. 먼 훗날 그가 이 말씀에 생명을 받았을 때를 회상하기를 "그 당시 나의 마음은 태양을 잃어버린 사람 같았고, 내 지은 죄로 인해 모 든 소망을 잃었던 자였다. 지금까지 나의 최고의 불행은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데 있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중국의 초대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는 요한 복음 19장 30절의 "내가 다 이 루었다"는 말씀에서 생명을 받고 새 출발하였습니다.
D.우빅네는 에베소서 3 장 20-21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 나 생각하는 것에 더욱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라는 말씀에서 생명을 받고 새 출발하였습니다. 저 로마의 캐톨릭의 젊은 신부, 마틴 루터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생명을 받 고 깊은 잠에서 깨어나 새 출발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주님께서 물어 보시기를 "너희가 낫고자 하느냐!"라고 하실 때에 우리가 살기 위해서 우리도 그들처럼 생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속에 있는 이 위대 한 생명을 받으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Ⅳ. 살기 위하여 다시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합니다. 38년 동안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비참한 삶을 살던 병자가 베데스다에 찾아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생명을 받은 후에 그 끔찍한 자리를 들고 일어 나 걸어가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새 출발하는 사람에게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죄라고 하는 것이 인간을 불행하게 만들고 질병을 가져다주는 원흉이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은혜와 축복을 입었을 지라도 인생은 연약하여 또 죄중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그 리고 은혜를 받고도 범죄 하면 더 심한 징계를 받을 것임을 경고하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과, 이 민족을 위해 서! 그리고 계속적으로 평안을 누리기 위해서 죄의 일을 벗어버리고 거룩하 게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렇게 우리 대선 교회를 방문하셔서 예배드리는 여러분! 이 세상은 실로 병자들의 세계입니다. 소경과 절뚝발이와 혈기 마른 자들과 벙어리와 앉은뱅이가 법석이는 현대판 베데스다와 같습니다. 이 영계 를 바로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들로 가득 찼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걸어가 지 못하는 절뚝발이들로 가득 찼습니다. 예수 생명의 피가 없어 현기증을 일 으켜 비틀거리는 환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모든 인생들이 살고싶어서 삶의 욕망을 가지고 가끔 동한다는 베데스다에다 소망을 걸고 있습니다. 그러나 38년이 되어도 그는 고침 받지 못하였습니다. 아니 죽을 때까지 있어도 그는 치료받지 못할 것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치료되고 참사는 생명은 베데스다에서 오는 것이 아 니라 하늘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이 세상에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자신 의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의 억만가지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이 형벌을 십자가 위에서 대신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해 주십니다.(요3:16) 그분이 말씀하시 기를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 라"라고 하셨으니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여 예배하는 모든 분들이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된 병자가 예수 생명을 받고 고침 받아 새 출발하게 된 것과 같이 그런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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