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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거듭나야 하겠다 (요3:1-8)

본문

이렇게 아늑한 방에 우리를 불러 모으시고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나누며 영적인 세계를 향해 나가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이 밤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거듭남의 귀이한 비밀을 가르쳐 주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말씀은 시원한 초여름 밤에 당세의 석학 니고데모와 예수님과 나눈 대화입니다. 니고데모는 박식하고 모든 사람으로 부터 존경 받는 훌륭한 종교지도자요, 정치가였습니다.그러나 거듭남의 진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모든 원하는 것을 가졌지만 내면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시원한 초여름 밤에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장소로 들어가 거듭남의 진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1.네가 거듭나야 하겠다.(1-3) 예수님과 제자들이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어느 집에 모여 있을때 조용하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똑 똑 똑 그 사람은 니고데모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니고데모는 어떤 사람입니까 1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니 유대인의 관원이라” 바리새인은 그 당시 상당히 경건한 유대 종교분파였습니다. 그들은 에스라의 경건한 신앙을 본받아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 치며 노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어릴때 부터 양손에 말씀을 붙이고 다니면서 외우고 또 집 문설주에 말씀을 붙여 놓고 나갈 때나 집에 들어 올 때에 외웠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어기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음죄를 범하지 않기 위해 여자가 앞에 나타나면 눈을 감고 길을 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벽에 이마를 부딪쳐 피를 흘리기도 했습니다. 또 이들은 주일을 범하지 않기 위해 밀이삭도 비벼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밀을 손으로 훝는 것은 탈곡이요,비비는 것은 방아를 찢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의 열성적인 신앙 때문에 백성들은 이들을 존경했습니다. 니고대모는 바리새인 중에서도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10절에서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선생’으로서 라고 말씀 하신 것을 볼 때 그는 그저 일반적인 바리새인과는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는 관원이었는데 이것은 유대인의 최고 권력기구인 산회드린 공회원을 가르킴니다. 이 산헤드린 공회는 70명으로 구성되어있는데 이들은 법을 만들고 종교적인 문제를 관리하고 죽이는 권세까지 있었습니다. 이들은 상당한 권력층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의 상원의원겸 대법관 정도의 지위였습니다. 니고데모는 한마디로 최고급 엘리뜨였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은 조금도 부족할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부러워합니다. 아니 그 정도 까지는 안되어도 그저 대학교수 정도만 되어도,아니 큰 회사 회장만 되어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매님들은 그렇게 큰 것은 안될 줄 알고 아예 바라지를 않습니다. 단지 좋은 신랑감만 만나도 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밤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을까요 아마 낮 시간은 업무로 너무 바빠서인지 모릅니다. 아니면 지체높은 귀족이 갈릴리의 촌 목수 출신의 젊은이를 만난다는 사실이 남보기가 부끄러웠는지도 모릅니다.또 아니면 조용한 밤에 예수님과 나라의 문제를 상의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사도요한이 밤에 찾아왔다고 한데에는 단지 시간만을 말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요한이 사용하는 밤은 종종 사람의 내면의 상태를 나타냅니다. 요한복음 13장 3절에 보면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팔것을 결심했을 때 예수님이 그에게 떡조각을 주며 “네 할일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사도요한은 유다가 떡을 받는 것을 보고 “그가 나가니 곧 밤이러라” 고했습니다. 이것은 시간적인 의미보다 유다의 내면이 밤처럼 어두웠다는 것을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밤에 찾아온 것도 니고데모의 내면의 상태를 말해준다고 볼 수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열성적인 신앙생활과 또 좋은 아파트와 떡뚜꺼비 같은 자식과 여우같은 예쁜 아내와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면에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는 젊은 날 이런 것들만 있어면 참 행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남모르는 노력을 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을 얻었지만 찾아오는 것은 허무 뿐이었습니다. 그의 내면은 밤과 같이 어두웠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를 보고 무엇이라고 하십니까 3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없느니라 ”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야만 한다고 하셨습니다. 거듭나야 하늘 나라를 볼 수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거듭나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거듭난다”는 것은 ‘born again'으로 다시 태어 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을 흔히 중생이라고 합니다. 헬라어로는 'παλιγγενεσια 팔린케네시아'로서 출생하다(γενεσs게네시스)와 새롭게 다시한번(παλιν팔린) 에서 온 말로 영적으로 다시남. 타락되었던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회복됨을 뜻합니다. 고린도 후서 5장 17절에서 바울은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13에서는 “위로부터 난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태어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을 뜻합니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조금더 나은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본성이 완전히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곧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그러한 변화입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잘 말해준 책이 셀 실베스타인의 “꽃들에게 희망을” 이라는 책입니다. 노랑 애벌레는 애벌레 상태가 자신의 모습인 줄알았습니다.그래서 열심히 애벌레 상태로서 행복을 찾아 헤맸습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없었습니다. 그는 애벌레로 머물 존재가 아닌 나비가 되어야 하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먼저 나비가 된 애벌레의 도움으로 나비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참 만족과 행복과 자유가 넘쳐나게 되었습니다. 거듭남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그러한 상태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도 새로운 차원의 삶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것을 발견치못하고 1차원적인 삶에 머물며 몸부림 침니다. 그러나 새로운 차원의 삶을 발견하고 그것을 얻을 때 참 만족과 자유와 행복을 얻을 수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이 거듭남의 세계는 참으로 신비롭고 귀이한 세계입니다. 사람이 거듭나게 되면 구원의 확신에 서게됩니다.요한복음 14:27절에는 주님의 평안이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 가운데 구원의 확신으로 인한 잔잔한 평안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14장에는 “하나님에 대한 산 소망”을 갖게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롬 14:17절에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친다고 하였습니다. 거듭났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그에게 임하게되는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는 옥스포드 대학을 나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리때부터 어머니가 신기해 할 정도로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대학때는 “holy group”이라는 그룹을 만들어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거듭남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목사이며 열성적인 신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마음에 참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러한 그에게 어느날 거듭남을 향해 나갈 수있는 기회를 하나님이 열어주셨습니다. 그가 미국에서 전도여행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라비안교도라는 열성적인 신앙인의 무리를 만난 것입니다. 그들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두려움 없이 기뻐하며 찬양을 부러고 있었습니다. 웨슬레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이 폭풍우가 두렵지않소” 그러자 그들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우리가 무얼 두려워 하겠소” 웨슬레는 목사인 자신의 신앙이 너무 보잘것 없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온 후 고민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올더스게이트 거리를 걷다 가 한 집회에 참석케 되었습니다. 마침 그곳에는 모라비안교도들이 모여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웨슬레가 들어섰을 때 로마서 주석이 울려퍼지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신앙에 있어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거듭남을 경험하게된 것입니다. 그 때를 웨슬레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나는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나의 죄들을, 바로 나의 죄까지도 가져가셨으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을 주셨다.” 웨슬레는 이 거듭남의 체험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와 구주되심을 확신 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거듭남은 사람으로 구원의 확신에 서게 합니다. 또 하늘나라를 소유하게 합니다. 또 영적인 깊은 세계로 들어가게 합니다. 사람이 거듭날 때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수있습니다.
2.물과 성령님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4-8)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비밀을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4절을 함께보겠습니다. “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있삽나이까 ” 니고데모는 거듭남을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이해 하려고 하지 않고 단순히 육적인 차원에서 거듭남을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방법을 자세히 말씀하셨습니다. 5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님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없느니라 ” 물은 회개케하는 말씀(벧전 1:23-25 ; 약 1:18)을 가르킴니다. 말씀을 통해 죄를 회개케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성령님은 성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회개를 하게되면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거듭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의 문제는 영적인 문제이므로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요1:13). 성령님이 거듭나게해야합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신학적으로 많이 않다고 해도 하나님의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시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무리 어릴때 부터 교회에 다니고 비록 모태 신앙 일지라도,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전도사를 할지라도 성령님이 거듭나게 하시지 않으면 거듭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해를 통해서 아는 그러한 차원이 아니라 성령님에 의해서 아는 차원입니다.성령님이 깨닫게하고 변화시키는 차원의 것입니다. 저는 고 1때 친구 때문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다니다가 재미가 없어 나가지 않으려는데 아주 예쁜 자매가 교회에 나오는 바람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자매도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교회에 다닐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교회 다니지 않으려니 왠지 서운했습니다. 3년동안 주일날 빠지지 않고 교회 다닌 것도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한번 다녀봐야 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석하며 설교 말씀을 주의 깊게 들어며 적었습니다. 또 이해를 해 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특히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없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사실을 믿을 수없었습니다. 교회 다니기 위해 믿어보려고 해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친구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 했습니다. ‘갑수야 난 하나님이 계신 걸 도무지 믿을 수 없다. 니 믿어지나 또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히 셨다는 것도 않믿어져.’ 그 때 그친구는 무조건 믿는 거라고 했습니다. 근데 무조건 믿어려는 데도 안 믿어졌습니다. 그래서 중대한 결심을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보고 계시면 믿고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 겠다고 마음 먹었습니다. 그래서 한달동안 기도하기로 결심하고 매일 교회에 나와 기도를 했습니다. 밤에도 기도하고 낮에도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때의 기도의 제목은 “하나님 날 만나 주이쇼” 였습니다. 전 하나님이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시던지 불같은 성령님이나 방언이나 아니면 음성이라도 들여 주시길 기대했습니다. 근데 한달이 다 되어가는 데도 하나님은 나타나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일 주일 남았을 때 하나님은 저가 기대하는 것과는 다를게 저의 심령 가운데 성령님을 부어 주셨습니다. 한참 기도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읽고 있던 사사기 말씀으로 찾아오셨습니다. 사사기의 하나님의 주권을 보여주시며 나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지금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강하게 확신 시켜 주셨습니다. 저는 이 강력한 확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수있었습니다.
3년간 교회를 다니면서 그렇게 믿어보려고 해도 그때는 믿어지지 않았던 하나님이 성령님이 말씀으로 임하시자 강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후 예수님의 사랑과 죄사함의 은혜가 말씀을 통해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결코 인간의 이해로 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거듭나게 해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히 성령님께 거듭남을 구해야합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십니다. 물만이라고 하시지 않고 성령님만이라고 하시지 않고 물과 성령님이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거듭남을 체험하는 사람을 꾸준히 말씀공부를 해오는 사람입니다. 말씀을 공부하는 가운데 거듭남을 체험하는 사람이 수없이 많습니다. 말씀을 공부할때 성령님은 그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조금 전 신옥 자매님과 대화를 나눌때 신옥 자매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말씀을 공부 할 때 때때로 그 말씀이 가슴에 와닺지 않을 때가 있어요. 근데 이상한 것은 생각지 않은 때에 그 말씀이 기억나고 힘을 줘요”. 저도 성경공부를 섬기면서 은혜를 받지못하는 사람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은혜를 받지 않는 것 같은 그 사람도 시간이 지날 수록 변해간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모임이 처음 모여 성경공부를 했던 때가 생각납니다. 영적인 분위 기라곤 찾아볼 수없었고 모이면 형제이야기나 영화이야기를 했었습니다.그때는 정말 암담하고 이런 사람들이 변할 수있을까 한는 회의가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씀공부를 한주 두주 하면서 몇달이 지나니까 조금씩 변화는 것 이었습니다. 요즘 모이면 영적인 분위기가 잡히지 않습니까 이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말씀엔 성령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사람 가운데 변화의 역사를 일어킵니다. 우리가 말씀공부를 쉬지말고 해야할 이유가 여기에있습니다. 또 우리는 말씀을 공부할때 성령님이 역사해 주시도록 겸손히 구해야합니다. 이렇게 구하는 자에게 성령님은 말씀으로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 밤에도 성령님이 말씀을 강하게 확신시켜 주시길 기도해야합니다. 거듭남을 체험하지 못한자에게 거듭남의 세계를 열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또 거듭난 사람들은 더욱 깊은 거듭남의 세계로 들어가게 해달라고 기도해야합니다. 거듭남은 영적인 세계의 문입니다. 거듭난 것은 이제 세상으로 부터 영적인 문에 들어선 것입니다. 이것은 출발에 불과 합니다. 신앙인 중에는 거듭남의 문에 들어 선 것에 만족해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겐 영적인 세계가 열려지지 않습니다. 깊은 영적인 세계를 맞볼 수없습니다. 문에 들어 섯어면 이제 더 깊은 곳으로 들어 가야합니다. 그곳에는 무궁무진한 영적인 보화들이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과 성령님으로 더욱 깊은 거듭남의 세계로 들어가야합니다. 말씀을 깊이 공부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구하는 기도해야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거듭남의 역사를 바람에 비유해서 말씀하셨습니다. 8절을 봅시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못하나니 성령님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 바람은 보이지 않고 어디서 왔는지 알 수없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님으로 난 사람도 언제 어떻게 변했는지 알수없습니다. 단지 변화를 통해 알 수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내면이 변화고 얼굴이 변홥니다.우리 가운데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은 너무나 많습니다. 서재남 형제님을 보십시오. 그는 본래 얼굴이 그렇게 밝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 그는 줄주정꾼 아버지와 sense 없는 어머니 때문에 반황적이 되었고 얼굴과 내면이 상당히 어두웠습니다. 그에게는 구원의 확신이라든지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거듭남을 체험하고난후 믿음에 굳게서게 되었고,얼굴이 아이처럼 변했습니다. 이분은 항상 웃습니다. 또 항상 영적인 삶 속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리는 삶을 살고있습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통해 거듭날때 니고데모가 돈과 명예와 지식와 권력으로 갖질 수없었던 참 자유와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예비하신 거듭남을 위한 잔치의 날입니다. 이 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히 거듭남의 역사를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우리 심령 가운데 은혜로 임재하셔서 우리로 새롭게 변화시켜주시길 기도해야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우리에게 이 밤에도 거듭남의 귀한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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