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5-25)
본문
사랑의 표현 어느 수필 작가가 한국인의 포장 감각에 대해서 쓴 글을 읽은 일이 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가방 사고’를 하는데 한국 사람은 ‘보자기 사고’를 한다는 말입니다. 보자기는 가방과 달리 크고 작고, 희고 검고를 막론하고 두루 감싸듯이 한국인은 본심을 포장해서 희비애로를 남이 감지할 수 없도록 하는 경향이 크다는 말입니다. 쉽게 말하면 자기 감정 노출을 잘 안 한다는 말입니다.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간에 감정 표현이 매우 인색한 것은 이런 문호적이고, 민족적인 배경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입에 담는 것을 퍽 쑥스러워 하고 심지어는 함부로 사랑한다고 말하면 경솔한 사람처럼 생각하는 버릇이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입에 담지 않는 것이라는 이상한 주장도 있습니다. 아마 이런 것을 일컬어서 포장 감각이니, 보자기 사고니 하는 재미있는 표현으로 설명을 한 것 같습니다. 이와 같이희비애로를 남에게 잘 나타내지 아니하는 심리를 가진 우리가 오늘의 말씀을 읽으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베드로를 향해서 물으시는 주님의 태도가 퍽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으실 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대답을 해야 되는 궁색한 처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느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사랑을 확인하는 질문과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대답을 듣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이적들을 아십니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용기를 얻어서 다시 새 출발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은 대단한 것입니다. 영적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사랑의 고백이 오고 가는 자리에는 엄청난 일들이 일어납ㄴ다. 주님 앞에 엎드려 “주님 사랑합니다” 라는 말 한 마디 하는 곳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어떤 역사가 일어나는지 우리는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점을염두에 두고 오늘 우리가 본문을 읽으면서 성령님의 인도와 성령님의 감동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세 번의 질문 아침 햇살이 따스하게 비치는 해변가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자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 보시면서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의 사랑은 ‘아가파스 메’라는 헬라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보다’ 라는 말은 ‘이것들보다’ 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옳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사람들보다’ 라고 번역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 아침 식사를 마친 6명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들 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로 해석한다면 이것들은 무엇일까요 아마 갈릴리 바닷가에 매어 놓은 고깃배, 그 다음에 아침에 잡은 신선한 고기들, 아니면 사람들이 마음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베드로야, 너 정말 날 사랑하니” 라는 것을 확인하시기 위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자마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 숨을 돌리고 나서 주님이 똑같이 질문하시는 겁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역시 대답했습니다. “주님 아십닏.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이제는 예수님의 질문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또한번 주님이 물으시는 겁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때는 ‘아가파스 메’가 아니고 ‘필레이스 메’ 단어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말로는 다 ‘사랑한다’는 말로 번역합니다만 원문에는 단어가 다릅니다. 베드로가 그 질문을 받자마자 마음에 불안이 생기고 근심이 생겻습니다. ‘왜 이렇게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실까 나를 못 믿어서 그럴까 아니면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지금 건성으로 대답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 베드로는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내 양을 먹이라.”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실 때 왜 아가페으 사랑을 물으셨다가 나중에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무으실까 하는 것으로 심오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장황하게 설명을 합니다만 저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단어가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당시에 사용하던 말은 헬라어가 아니고 아람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람어에서도 그렇게 단어가 구별이 되는지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질문의 이유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야,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세 번이나 이 어색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정도로 그 이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영적 치유를 위해서 며칠 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다음에 주님이 새 계명에 대해서 말슴하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럴 때 우쭐해진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을 바꾸면 “주님, 나는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를 만나자 그의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자기 혼자 살아 남기 위해서 얼굴을 싸고 줄행랑을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여러 날을 통곡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실패자였습니다. 얼굴을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욱이 자기가 부인하던 에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지금 자기앞에 와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으로 고기를 구워서 “이것도 먹어라” 하시면서 자기들을 위해 섬기고 계십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이 못난 놈 같으니” 하고 호통을 치면서 망신을 주든지 꾸중을 했다면 오히려 속이 후련하겠는데, 전혀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시지 아니하고, 자기를 위해 주시닌 우리말로 하면 환장할 노릇입니다. 베드로가 어디 제대로 먹기나 했겠습니까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고개를 떨군 채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는 숯불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그 숯불을 자기가 예수를 부인하던 자리에서 활활 타고 있었던 장작불을 상기하기에 아주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그쳐 묻는 예수님의 질문은 마치 자기가 세 번이나 황급하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것을, 그 악몽 같은 순간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그 질문을 받고 대답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겠습니까 분명히 베드로는 병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다 구멍 나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처절하게 병들고, 처절하게 지쳐 있는 베드로를 향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필이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시몬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옛 이름입니다. 제 생각에는 주님의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지 않니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그 자아는 베드로가 아니고 너의 자아였을 꺼야. 자신만만하고 사랑한다고 소리치던 너의 옛 자아가 나를 부인한 거야” 하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세 번이나 반복하신 이유는 베드로의 과거를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니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사람은 먼저 사랑해야 합닏.
자기가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남보고 사랑하는냐고 묻는 사람은 철면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은 “나는 너무나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세 번 받으면서 예수님의 강한 사랑에 그 심령이 터치되기 시작했습닏. 자기 속에 남아 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가 나무 타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있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는 예수님이 자기를 가장 필요로 하실 때 냉정하게 버렸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세 번하면서 베드로는 치유 받고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입었던 깊은 상처로부터 그는 아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 합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게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치유를 받았는지 베드로의 남은 인생을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전후서를 보십시오. 또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다시 자기 과거를 가지고 씨름하고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모든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씻음 받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받은 사람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치유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마음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 중에 오늘 이 시간 치유 받아야 할 형제자매들이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예수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아보려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형제자매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말씀을 보아도 그 말씀이 마음에 닿지를 않을 거이고, 생각은 온통 사방으로 흩어져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헛된 사랑을 추구하면서 헛된 것에 미쳐서 젊음 바치고, 헛된 것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다가 입은 상처는 세상 사랑 가지고는 치유되지 못합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주긍신 주님의 그 사랑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이 치유 받아야 될 형제자매들이 이 자리에 만흥ㄴ 줄 압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원합니다. 그 말속에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는 심령마다 어떤 상처를 입었든지,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씨름하든지, 어떤 실패를 맛보았든지, 어떤 나락에 떨어져서 고통을 하든지 간에 능력있는 주님의 사랑이 그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베드로처럼 들읍시다. 그리고 고백합시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부끄럽지만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도록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그 고백의 순간마다 우리의 상처가 나음을 입고 아무는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2.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이렇게 놀라운 명령과 함께 부름 받은 것이 사도직인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주님이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느 사도직의 또 다른 한 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한평생 두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전도하는 것이요, 또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고 먹이고 인도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순간, 이 영광스러운 사도직에서 그는 탈락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 내가 주니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세 번 고백하면서 치유 받자마자 그 영광스러운 사도직에 다시 복귀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맡기는 교회를 일컬어서 ‘내 어린 양’ 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양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양이 누굽니까 우리 모두입닏.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양입니다.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입니다.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재림하실 만유의 주되신 그분의 어린 양들입니다. 이 양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맡겼습니다. 양 떼를 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야곱이 양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놓고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면서 눈 붙일 결르도 없이 20년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양들하고 같이 뒹굴면서 사는 생활이니 얼마다 힘든 일입니까 다윗은 어릴 때 양치면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사자나 곰이 양을 훔쳐 가면 자기 생명을 내 놓고 뒤따라가서 사자와 싸우고, 곰과 싸우면서 양을 그 입에서 건져내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양인 교회를 목회 하는 것, 즉 목자로서 교회를 돌보고 먹이고 또 교회를 인도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목회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목회는 밤낮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목사 되겟다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히부르시는 은혜가 있어서 그런 지는 모르지만 목사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겉으로 보면 굉장히 화려해 보일 수도 있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또 교회를 보십시오.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때는 은혜 받고 좋아합니다만, 이 바깥에는 마귀가 연대를 동원해 가지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끌어내어 자기편을 만들던가, 유혹을 해서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으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목사도 끌어내리고 장로도 끌어내리고, 심지어 순진한 어린 아이까지라도 믿음에서 떠나 세상에서 마귀 짓을 할 수 있도록 하려 갖가지 유혹을 합니다. 그와 같은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 보고 양 떼들을 돌보고 마귀에게 끌려 가는 자를 다시 구원해야 되고 유혹에 빠진 자를 치유해야 되는 게 목회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양들을 맡기려고 할 때에 조심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건을 딱 하나 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양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주인의 양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으면 그 양을 자기는 삯꾼처럼 먹일 겁니다.
그러므로 주니껫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양을 맡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당신의 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교역자만 양을 돌보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목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어린 생명들을 돌보는 주일 학교 교사들, 이웃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말슴과 기도로 섬기는 순장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전도인들, 그리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잠을 자지 못하며 씨름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하려고 하는 상담자들,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메말라 잇는 자들에게 이런 저런 모습으로 그들의 상한 심령에 주님의 사랑을 담아 주려고 하는 봉사자들, 이런 모든 사람이 작은 목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자기 양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쓰면 행복할 수 있는 사람, 조금만 손을 내밀면 인생의 새로운 단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목자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양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양들을 돌보는 아름다운 목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기실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도록 사랑은 진정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하고 세 번이나 고백하니까 주님께서는 대단히 엄숙하고 진지한 예언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장래를 놓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베드로는 젊엇을 때에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던진 사람입니다. 젊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자신감이요, 비전이요, 청지기적 정신입니다. 위대한 꿈을 가지고 뚜는 것이 젊은 시절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꿈과 긍지, 자신감을 가지고 뛰어야 합닏. 베드로도 그렇게 뛰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늙을 때가 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면 질병이든지 또는 점점 없어지는 힘의 한계성이라든지, 또 기회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라든지, 원치도 않는 무거운 짐들을 져야 되는 고통으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야, 네가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와서 네 팔을 벌릴 거야.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거야” 하십니다. 이것은 베드록다 십자가에서 순교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순교하게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설에 전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못 박혀 죽습니까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그가 원하는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 잔인하고 끔찍한 십자가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만 그 십자가 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십자가를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울부짖고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약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 말슴대로 그의 말년에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엇지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라면 십자가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지고 걸어갔습니다. 우리의 젊음, 늙음을 어떻게 보내고 싶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힘으로,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베드로처럼 젊은 때를 보내고, 늙을 때를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젊었을 때 주님의 양들을 돌아보는 일에 쓰임 받기를 바라며, 늙었을 때에도 비록 쓸모 없는 몸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그런 멋진 삶을 살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어느 쪽으로 번역해도 옳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 사람들보다’ 라고 번역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베드로와 함께 고기잡이 하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지금 아침 식사를 마친 6명의 제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이것들 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말로 해석한다면 이것들은 무엇일까요 아마 갈릴리 바닷가에 매어 놓은 고깃배, 그 다음에 아침에 잡은 신선한 고기들, 아니면 사람들이 마음을 줄 수 있는 여러 가지 주변에 있는 것들을 가리키시는 것이 아닐까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베드로야, 너 정말 날 사랑하니” 라는 것을 확인하시기 위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자마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그러하외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그 대답을 들은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는데, 조금 숨을 돌리고 나서 주님이 똑같이 질문하시는 겁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 역시 대답했습니다. “주님 아십닏.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이제는 예수님의 질문이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느닷없이 또한번 주님이 물으시는 겁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때는 ‘아가파스 메’가 아니고 ‘필레이스 메’ 단어로 바꾸었습니다. 우리말로는 다 ‘사랑한다’는 말로 번역합니다만 원문에는 단어가 다릅니다. 베드로가 그 질문을 받자마자 마음에 불안이 생기고 근심이 생겻습니다. ‘왜 이렇게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나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실까 나를 못 믿어서 그럴까 아니면 내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내가 지금 건성으로 대답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인가’ 베드로는 불안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님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내 양을 먹이라.” 어떤 성경학자들은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실 때 왜 아가페으 사랑을 물으셨다가 나중에는 필레오의 사랑으로 무으실까 하는 것으로 심오한 해석을 하는 것처럼 장황하게 설명을 합니다만 저는 그런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을 전체적으로 보면 두 단어가 서로 호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당시에 사용하던 말은 헬라어가 아니고 아람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람어에서도 그렇게 단어가 구별이 되는지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질문의 이유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베드로야, 정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세 번이나 이 어색한 질문을 하셨을까요 여기에 진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 가지 정도로 그 이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의 영적 치유를 위해서 며칠 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을 마친 다음에 주님이 새 계명에 대해서 말슴하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그럴 때 우쭐해진 베드로는 자신만만하게이렇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이 말을 바꾸면 “주님, 나는 내 목숨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던져야 하는 위기를 만나자 그의 모든 것은 모래성처럼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하면서 부인하고, 자기 혼자 살아 남기 위해서 얼굴을 싸고 줄행랑을 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베드로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여러 날을 통곡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그는 배신자였습니다. 실패자였습니다. 얼굴을들고 다닐 수 없는 부끄러운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욱이 자기가 부인하던 에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셔서 지금 자기앞에 와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못 박힌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손으로 고기를 구워서 “이것도 먹어라” 하시면서 자기들을 위해 섬기고 계십니다. 차라리 예수님이 자기를 보고 “이 못난 놈 같으니” 하고 호통을 치면서 망신을 주든지 꾸중을 했다면 오히려 속이 후련하겠는데, 전혀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하시지 아니하고, 자기를 위해 주시닌 우리말로 하면 환장할 노릇입니다. 베드로가 어디 제대로 먹기나 했겠습니까 그는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고개를 떨군 채 조금씩 사그러들고 있는 숯불만 쳐다보고 있었을 것이 뻔합니다. 그 숯불을 자기가 예수를 부인하던 자리에서 활활 타고 있었던 장작불을 상기하기에 아주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세 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다그쳐 묻는 예수님의 질문은 마치 자기가 세 번이나 황급하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던 것을, 그 악몽 같은 순간들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그가 그 질문을 받고 대답하면서 얼마나 속으로 울었겠습니까 분명히 베드로는 병자였습니다. 그는 영적으로 병든 사람이었습니다. 믿음도 자신감도 긍지도 용기도 다 구멍 나버렸습니다. 남아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람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이와 같이 처절하게 병들고, 처절하게 지쳐 있는 베드로를 향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하필이면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시몬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가지고 있었던 옛 이름입니다. 제 생각에는 주님의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베드로야, 너 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했지 않니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나를 모른다고 부인한 그 자아는 베드로가 아니고 너의 자아였을 꺼야. 자신만만하고 사랑한다고 소리치던 너의 옛 자아가 나를 부인한 거야” 하는 것을 깨우쳐 주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세 번이나 반복하신 이유는 베드로의 과거를 추궁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주니이 베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시는가를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묻는 사람은 먼저 사랑해야 합닏.
자기가 사랑하지 아니하면서 남보고 사랑하는냐고 묻는 사람은 철면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질문은 “나는 너무나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세 번 받으면서 예수님의 강한 사랑에 그 심령이 터치되기 시작했습닏. 자기 속에 남아 있던 예수님을 향한 사랑의 불씨가 나무 타는 소리를 내면서 타오르고 있는 것을 그는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비록 자기는 예수님이 자기를 가장 필요로 하실 때 냉정하게 버렸지만 예수님은 계속해서 자기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을 가슴 아프게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자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시나이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을 세 번하면서 베드로는 치유 받고 있었습니다.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입었던 깊은 상처로부터 그는 아물고 있었습니다. 그는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유 합니다. 사랑은 잘못된 관게를 회복시켜 줍니다. 이 순간 베드로가 얼마나 완전하게 치유를 받았는지 베드로의 남은 인생을 한번 보십시오. 베드로전후서를 보십시오. 또한 사도행전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다시 자기 과거를 가지고 씨름하고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그는 모든 과거의 실패와 과거의 상처를 완전히 씻음 받고 거기에서 자유함을 받은 사람으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그를 치유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의 사랑의 마음이 그를 일으켰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우리 중에 오늘 이 시간 치유 받아야 할 형제자매들이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세상에 나가서 예수 모른다고 부인하며 살아보려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이 자리에 나와 있는 형제자매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말씀을 보아도 그 말씀이 마음에 닿지를 않을 거이고, 생각은 온통 사방으로 흩어져 제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지금까지 헛된 사랑을 추구하면서 헛된 것에 미쳐서 젊음 바치고, 헛된 것에 쫓겨서 정신없이 살다가 입은 상처는 세상 사랑 가지고는 치유되지 못합니다. 오직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주긍신 주님의 그 사랑만이 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이와 같이 치유 받아야 될 형제자매들이 이 자리에 만흥ㄴ 줄 압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귀를 열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주님의 음성을 우리 모두가 듣기를 원합니다. 그 말속에는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하는 주님의 음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사랑에 터치되는 심령마다 어떤 상처를 입었든지, 어떤 죄책감을 가지고 씨름하든지, 어떤 실패를 맛보았든지, 어떤 나락에 떨어져서 고통을 하든지 간에 능력있는 주님의 사랑이 그를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귀를 기울여 주님의 음성을 베드로처럼 들읍시다. 그리고 고백합시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부끄럽지만 주님 사랑합니다” 라고 고백하도록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면 그 고백의 순간마다 우리의 상처가 나음을 입고 아무는 은혜를 맛볼 수 있습니다.
2. 베드로의 사도직을 회복하기 위해서 베드로는 사도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사도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온 세상에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라.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 이렇게 놀라운 명령과 함께 부름 받은 것이 사도직인데, 오늘 이 자리에서는 주님이 “내 양을 치라. 내 어린양을 먹이라”느 사도직의 또 다른 한 면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한평생 두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하나는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전도하는 것이요, 또 주님 앞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돌보고 먹이고 인도해야 하는 사역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사역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세 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순간, 이 영광스러운 사도직에서 그는 탈락되는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오늘 갈릴리 바닷가에서 “주님, 내가 주니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하고 세 번 고백하면서 치유 받자마자 그 영광스러운 사도직에 다시 복귀하는 축복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맡기는 교회를 일컬어서 ‘내 어린 양’ 이라고 말합니다. 어린 양이 누굽니까 예수님의 교회입니다. 양이 누굽니까 우리 모두입닏. 우리는 모두 주님의 양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의 양입니다. 이 세상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입니다. 장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재림하실 만유의 주되신 그분의 어린 양들입니다. 이 양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맡겼습니다. 양 떼를 치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구약을 보면 야곱이 양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놓고낮에는 더위를 무릅쓰고 밤에는 추위를 당하면서 눈 붙일 결르도 없이 20년을 보냈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양들하고 같이 뒹굴면서 사는 생활이니 얼마다 힘든 일입니까 다윗은 어릴 때 양치면서 경험한 것을 이야기 하면서 사자나 곰이 양을 훔쳐 가면 자기 생명을 내 놓고 뒤따라가서 사자와 싸우고, 곰과 싸우면서 양을 그 입에서 건져내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양인 교회를 목회 하는 것, 즉 목자로서 교회를 돌보고 먹이고 또 교회를 인도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목회는 참 어려운 일입니다. 목회는 밤낮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에는 목사 되겟다는 분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특별히부르시는 은혜가 있어서 그런 지는 모르지만 목사직이 무엇인지 잘 몰라서 그러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겉으로 보면 굉장히 화려해 보일 수도 있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또 교회를 보십시오.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릴때는 은혜 받고 좋아합니다만, 이 바깥에는 마귀가 연대를 동원해 가지고 대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한 사람이라도 끌어내어 자기편을 만들던가, 유혹을 해서 다시 일어설 수 없도록 만신창이를 만들어 놓으려고 벼르고 있습니다. 목사도 끌어내리고 장로도 끌어내리고, 심지어 순진한 어린 아이까지라도 믿음에서 떠나 세상에서 마귀 짓을 할 수 있도록 하려 갖가지 유혹을 합니다. 그와 같은 마귀의 궤계를 꿰뚫어 보고 양 떼들을 돌보고 마귀에게 끌려 가는 자를 다시 구원해야 되고 유혹에 빠진 자를 치유해야 되는 게 목회 아닙니까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양들을 맡기려고 할 때에 조심을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에게나 맡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조건을 딱 하나 겁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양을 맡깁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주인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주인의 양을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적으면 그 양을 자기는 삯꾼처럼 먹일 겁니다.
그러므로 주니껫 사랑하는 자에게 자기 양을 맡깁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니까 당신의 양을 먹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교역자만 양을 돌보는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목자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습니다. 어린 생명들을 돌보는 주일 학교 교사들, 이웃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말슴과 기도로 섬기는 순장들,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버티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항상 복음을 들고 찾아가는 전도인들, 그리고 어려운 인생의 문제를 안고 잠을 자지 못하며 씨름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하려고 하는 상담자들, 아니면 그리스도의 사랑에 메말라 잇는 자들에게 이런 저런 모습으로 그들의 상한 심령에 주님의 사랑을 담아 주려고 하는 봉사자들, 이런 모든 사람이 작은 목자들입니다. 이들이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주님이 자기 양을 맡겼기 때문입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우리가 조금만 신경 쓰면 행복할 수 있는 사람, 조금만 손을 내밀면 인생의 새로운 단맛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목자를 기다리고 있는 어린 양들입니다. 여러분, 이런 양들을 돌보는 아름다운 목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에게 이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기실 것입니다.
3. 베드로가 영광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도록 사랑은 진정한 헌신을 가능하게 합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하고 세 번이나 고백하니까 주님께서는 대단히 엄숙하고 진지한 예언을 하십니다. 베드로의 장래를 놓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베드로는 젊엇을 때에 주님을 위해서 자기를 던진 사람입니다. 젊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은사는 자신감이요, 비전이요, 청지기적 정신입니다. 위대한 꿈을 가지고 뚜는 것이 젊은 시절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꿈과 긍지, 자신감을 가지고 뛰어야 합닏. 베드로도 그렇게 뛰었습니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늙을 때가 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옵니다. 인생의 겨울이 오면 질병이든지 또는 점점 없어지는 힘의 한계성이라든지, 또 기회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라든지, 원치도 않는 무거운 짐들을 져야 되는 고통으 당하게 됩니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베드로야, 네가 나이가 들면 사람들이 와서 네 팔을 벌릴 거야. 그리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갈 거야” 하십니다. 이것은 베드록다 십자가에서 순교할 것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베드로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순교하게 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전설에 전합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세 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내가 어떻게 예수님처럼 못 박혀 죽습니까 나를 거꾸로 매달아 주십시오.” 그래서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그가 원하는 죽음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기를 원한다 할지라도 그 잔인하고 끔찍한 십자가를 원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고 간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습니다만 그 십자가 지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그 십자가를지지 않도록 해 달라고 울부짖고 기도했던 겟세마네 동산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이와 같은 인간의 약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이 말슴대로 그의 말년에 십자가를 지고 죽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어떻게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이엇지만, 주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라면 십자가도 마다하지 아니하고 그것을 지고 걸어갔습니다. 우리의 젊음, 늙음을 어떻게 보내고 싶습니까 주님을 사랑하는 힘으로,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베드로처럼 젊은 때를 보내고, 늙을 때를 마무리하는 아름다운 은혜가 있어야 되겠습니다. 젊었을 때 주님의 양들을 돌아보는 일에 쓰임 받기를 바라며, 늙었을 때에도 비록 쓸모 없는 몸이 될지는 모르지만 내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그런 멋진 삶을 살기 원한다면, 예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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