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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21:1-25)

본문

예수님은 20장에서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모인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셔서 평강을 주시고, 부활 신앙을 심어 주셨습니다. 특히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사명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명을 버리고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을 수습하시는 사건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물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다시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시고, 피로 사신 양 떼들을 부탁하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와서 조반을 먹으라(1-14) 1절을 보십시오. “그 후에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여기서 ‘그 후’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제자들에게 두 번씩이나 나타나신 후를 말합니다. 그 후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한 번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습니다. 그 곳은 디베랴 바다였습니다. 디베랴 바다는 예수님의 대부분의 제자들이 부르심을 받은 바로 그 갈릴리 바다를 말합니다. 그 때에 제자들은 갈릴리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2절을 보시면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갈릴리 어부 출신 제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들이 모여 있을 때 베드로가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는 아직도 인간적인 리더십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을 끄는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가 그 말을 하자 다른 제자들도 찬성했습니다 “우리도 함께 가겠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생활에서 실패하고 실의와 낭패 가운데 낙향한 동료들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의 말을 쫓아 그물을 챙겨서 바다로 나갔습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첫째는 좌절감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 꿈과 이상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메시아 왕국을 꿈꾸며 베드로는 수상직을 바라 보았습니다. 요한과 야고보도 야심만만하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들은 그 꿈만 이루어진다면 예수님께서 마시는 잔도 마시겠다고 했고(마20:22) 베드로는 죽는데 까지도 예수님을 따르며 충성을 다하겠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이만큼 그들은 권력과 부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배와 그물을 버리고, 부친을 배에 버려 두고 예수님을 쫓았습니다. 또 3년 동안 많은 고생을 했습니다. 예수님의 훈련을 받느라고 배도 곯을 때가 많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때도 많이 있었습니다. 하도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비벼 먹다가 바리새인들에게 들켜서 곤욕을 치를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만 가시면 금방이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나라가 건설될 줄로 알았는데 모든 것이 물거품처럼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무참히 돌아가심으로서 그들의 꿈은 좌절되었습니다. 남은 유대인들, 곧 종교 지도자들의 증오심에 찬 눈초리뿐입니다. 그들은 두려움에 떨다가 갈릴리로 도망을 나왔습니다. 그들은 지난 3년을 돌아보면서 후회가 막심했을 것입니다. 또 자기들을 뜨겁게 사랑해 주시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이래서는 안되는데 하면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3년 동안의 세월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갔다고 생각할 때 얼마나 힘이 빠지고,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이 원망스럽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두 번이나 나타나셔서 부활 신앙을 심어 주시고, 사명을 주셨으나 그들이 받은 실망이 너무 컸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깊은 좌절감과 허탈감에 사로잡혀서 갈릴리로 돌아왔습니다. 이들은 마음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해서 다시 그물을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나간 것입니다.
둘째,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이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랐지만 손에 잡은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또 그 동안의 모든 수고가 헛수고였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피해 의식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에게는 현실 문제가 대두되었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문제를 생각하다 보면 3년이 넘도록 헛수고만 하고 있었던 자기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어 보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겼다가 이 모양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내 인생을 내가 책임을 지고 살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됩니다. 내 능력대로 살았으면 지금과 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버리고 자기의 인생 철학과 세상적인 생각을 하며 자기 힘과 기술과 성실로서 인생을 살아가고자 물고기를 잡으러 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던 배와 그물을 다시 챙겨서 바다로 나간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제자들의 심정은 동일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처음 따를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들이 얻어지지 않았을 때 사람들은 예수님을 떠나 옛생활로 돌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따르면 부모님께 효도할 수 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될 것을 기대하면서 신앙생활을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 수록 가정에 핍박이 생기고, 부모님과 예수를 믿지 않을 때 보다 더 관계가 힘들어집니다. 또 친구들로부터 소외를 당하기도 합니다. 또 예수님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바치고, 헌신하는 만큼 눈에 보이는 열매도 없습니다. 또 자기보다 세상 친구들이 더 잘되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에 회의가 생깁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생활이 어리석어 보이고 너무 편협한 생활 같이 보입니다. 예수님께 내 인생을 맡겼다가는 큰 일 나겠다는 불신이 생깁니다. 이렇게 되면 설교 말씀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은혜도 안됩니다. 성경 공부도 하기 싫습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 나름대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말씀도 읽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마음의 중심이 비뚤어지고, 자기 중심적이 되었기 때문에 말씀이 들어올 리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한 발 한 발씩 옛생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자들을 물고기 잡으러 갔다고 합니다. 그러면 물고기를 잡으러 간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까
3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그렇습니다. 그들은 그 밤에 피라미 새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또 헛수고만 했습니다. 옛날 고기를 잡던 실력을 총동원하여 고기를 잡았으나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이 때 이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깊은 절망 가운데 빠졌을 것입니다. 또 깊은 패배 의식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제 한 가닥 남은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마저도 무너져 버렸습니다. 이들은 철저히 절망하고, 인생을 비관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깊은 절망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까 4절을 보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제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이른 새벽에 심방을 오셔서 바닷가에 서 계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자기 연민과 자기 슬픔에 사로잡혀 예수님이 옆에 계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두 번씩이나 만났으나 예수님이 자기들의 신앙 생활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깊은 절망 가운데 빠져 있는 제자들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5,6절을 보십시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얘들아!’ 이 말은 영어로 friends(친구여!)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실패한 제자들에게 친한 친구의 모습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도 아직 예수님이신 줄 깨닫지 못했습니다. 고기를 잡지 못하였다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힐 것이다”(새번역)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다시 한 번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잡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자기들의 기술과 경험의 한계 상황 가운데서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좋은 친구란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어려운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도와주시기 위해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고 따르다가 어려움 가운데 있는 신자들의 좋은 친구가 되십니다. 허물 많고 문제 많은 인생들의 영원하고 진실한 친구이십니다. 우리는 친한 친구가 자기를 배신하고 떠났을 때 친구를 미워하게 됩니다. 또 자기가 많은 희생을 하며 도운 교인들이 떠났을 때 양들을 판단하고 미운 마음을 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잘못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습니다. 속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한 제자들이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하고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찾아 가셔서 고기를 잡아 주시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졌습니다. 제자들이 말씀에 순종했을 때 얼마나 많은 고기가 잡혔습니까 6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가 없었더라” 고기가 너무 많이 잡혀서 그물을 들어 올 리 수가 없었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추위에 떨던 제자들이 그물 속에 튀어 오르는 고기들을 보고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절망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던 제자들에게 한 줄기 희망과 용기가 생겨났을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이 때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무엇을 생각하였겠습니까 디베랴 바다에서 처음 예수님께서 자기들을 부르신 그 부르심을 기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 때도 그들은 밤이 맞도록 한 마리도 못 잡고 힘없이 그물을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깊은데 가서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고백하였고,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그 때 요한과 야고보도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제자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에 이 처음 부르심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말씀에 순종하여 고기를 잡도록 도와주심으로서 주님의 부르심을 심령 깊이 영접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 때 주님의 사랑하시던 제자 요한이 재빨리 고기를 잡아 주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줄을 알아 차렸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시다”고 소리를 쳤습니다. 이 말을 들은 베드로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7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벗고 있다가 주님이시다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에 뛰어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찾아 오셔서 고기를 잡아 주신 것을 깨닫고 그냥 배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기쁘고 반가워서 헤엄을 쳐서 예수님께로 다가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작은 배를 타고 그물을 끌고 육지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숯불을 피워 놓으시고, 떡과 생선을 굽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잡은 고기를 좀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가 가서 그물을 끌어올리니 그 물에 가득한 큰고기가 153마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해서 무엇을 깨달았겠습니까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그들의 실제 생활 속에서 만나고,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연약한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말씀의 능력으로 역사 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육신으로 계실 때와 똑같이 제자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고 계심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주님께서 찾아 오셔서 책망하시지 않고 오히려 고기를 잡아 주시는 것을 생각하며 깊은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허물 많은 베드로와 제자들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이 그물을 끌어올린 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12절을 보십시오. “와서 조반을 먹으라” 예수님은 배고픈 제자들을 위해서 떡과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느라 지치고 피곤한 제자들에게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초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비치 파티를 준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초청의 음성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하고 묻는 이가 없습니다. 제자들은 크고 무한한 사랑으로 품어 주시는 예수님께 감히 가까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우두커니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선도 구워 다가 제자들에게 먹여 주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받으면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말없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 속에는 변함없으신 예수님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뜨거운 감사의 눈물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의 예수님을 배반하고 물고기를 잡고 있었던 이기적이고 죄악 된 자신을 생각하며 회개의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는 대화가 필요 없었습니다 사명을 버리고 떠난 죄악을 책망이라도 하셨으면 좀 덜 미안하겠는데 오히려 극진히 섬겨 주시니 더욱 마음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면 와서 조반을 먹으라고 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부활의 주님이시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첫째,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고 떠났습니다. 제자들은 상황에 따라 예수님을 사랑하기도 했고 또 배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이 사랑은 변함없는 영원한 사랑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구속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없이는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저도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사랑이 없이는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제가 주님을 배반하고 떠났을 때, 나를 돕던 목사님과 동역 자들도 저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저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물고기를 잡다가 심신이 지쳐 있을 때 다시 찾아 오셔서 저를 뜨거운 사랑으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특히 저의 허물과 죄악을 십자가에 대신 지시고 고통 하시는 모습으로 다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죄 없다고 하시고 저를 하늘 나라의 황태자로 영접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 때 돌아온 탕자를 인하여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크신 사랑과 나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사랑으로 품어 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뜨거운 감사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이 때 이 구속의 사랑에 감동이 되어 일생 동안 목사로 살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한 번 택하신 자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는 예수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가끔 내가 내 자신을 볼 때 소망을 발견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또 나는 사명을 감당하기에 너무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 자신에 대해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때 우리는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또 어려운 양 떼들을 바라볼 때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이 목장이 아니면 목장이 없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양 떼들을 끝까지 도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둘째,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용서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배반한 제자들을 용서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장 사랑한다고 장담하던 자였습니다. 죽을지라도 예수님을 배반치 않을 것이라고 맹세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불과 몇 시간 후에 그 약속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을 했습니다. 또 요한과 야고보도 자기들의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예수님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다고 했습니다.(마20:22) 그러나 그들도 도망을 갔습니다. 또 두 번이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사명을 주셨는데 물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또 예수님은 의심이 많으신 도마를 위해서 특별히 심방 하시고, 부활 신앙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러나 도마도 물고기를 잡는 제자들의 명단에 끼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기 스스로도 자기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한 번 부인하고난 후에 통곡하고 울었습니다. 비겁하고 간사하고 이기적인 자신을 생각할 때 죽이고 싶도록 미워지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용서하시고 사랑으로 품어 주셨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예수님께서는 나를 용서하십니다. 내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나를 용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신 구속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앞에 믿음으로 나아가 사죄의 은혜를 덧입어야 합니다.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15-17) 조반을 먹은 후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무슨 질문을 하셨습니까
15절을 보십시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말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는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이 사람들보다 더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처음 질문에는 비교급을 사용하셨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이 말은 베드로가 아직도 예수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다른 제자들과 비교하며 사랑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아직도 자기 과신과 자만심에 찬 마음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질문하신 것입니다. 또한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원어로는 ‘이것들보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사람들을 포함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리고 이성과 힘과 의지를 다하여 사랑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사랑하시는 절대적이고 변함이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이 질문에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합니까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 대답을 보면 베드로가 근본적으로 변화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옛날 같으면 이 질문에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렇고 말고요, 모든 사람들이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만을 사랑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걸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세상의 어떤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하고 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베드로의 대답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신감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진심을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가페오’로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필레오’로 대답을 했습니다. ‘필레오’는 인간의 사랑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진실한 사랑입니다. 베드로는 인간의 연약함을 깊이 깨닫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그는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라고 했을 때 베드로는 극구 예수님의 말씀을 부인하고 받아들이지 안았습니다.(13:38)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훤히 다 알고 계심을 인정하고 예수님께서 다 알고 계십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베드로의 이 고백은 아주 진실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다시 질문을 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 번째 물으실 때는 베드로가 사용한 동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심히 근심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7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했는데도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심으로 베드로를 근심하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있는 죄의식과 절망감을 치료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너무나 반가워서 바다에 뛰어 내려 헤엄을 쳐서 예수님을 맞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 속에는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어두운 생각이 자리를 잡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자학하고 예수님을 볼 때 마음이 떳떳하지 못하고 죄의식 가운데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마음 속에 있는 그 모든 괴로움을 아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씀으로 그 괴로움을 치료해 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동일한 질문에 반복하여 사랑을 고백하는 동안 그 마음의 관계성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피상적으로 돕지 않았습니다. 그의 내면 속에 숨어 있는 죄 문제를 근심할 때까지 반복하여 지적하시고, 사랑을 고백하게 하심으로 깨끗이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참사랑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세 번째 물으실 때도 동일한 대답을 했습니다.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는 끝까지 그 마음의 진실을 말하고, 진실하고 겸손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로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물 많은 제자들을 찾아 오셔서 고기를 잡아 주시고, 떡과 생선을 구워 조반을 먹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제자들을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리스도이시니다. 그러나 이 사랑을 영접하지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고백이란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했다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 경상도 사람들은 사랑의 표현을 하기를 꺼려합니다. 은근하게 사랑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 사람들은 사랑의 표현을 하는데 많이 세련되어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은 부부간에 하루에 세 번 이상 “I love you”라는 고백을 받지 않으면 불안해서 못산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처음에는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어색하고 쑥스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진실하고 겸손한 사랑의 고백을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을 맺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질문하신 이유는 양 떼를 맡기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반복하여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내 어린 양을 먹이라” 16절에는 “내 양을 치라”, 17절에는 “내 양, 내 어린 양”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양들은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께서 피로 사신 양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온 세상을 위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양도 있고, 젊은 양도 있고 성숙한 양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가 사랑의 고백을 한 후에야 부탁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양을 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과의 사랑의 관계성을 맺지 못한 자들은 예수님의 양들을 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 예수님과 관계성을 맺고 있는 목사님들은 양들을 잘 돌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랑의 관계성이 자주 단절되고, 예수님의 사랑을 잘 영접치 않은 사람들은 양들을 잘 돕지 못합니다. 어떤 때는 성경 공부를 시켜 양 떼를 공부시키려고 맡겨 두면 예수님의 양 떼는 만들지 않고 자기 양 떼를 만드는 목자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훌륭한 목자가 되려면 예수님의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예수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함으로 바른 관계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도 양을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표현임을 말해 줍니다. 우리에게 아주 절친한 친구가 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친구가 나의 생명을 구하려다가 도리어 자기가 생명을 잃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내가 그 친구를 사랑하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어린 자식들을 친자식 같이 잘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 친구를 사랑하는 길이요, 그 은혜를 보답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다려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을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많은 양 떼들을 남겨 놓고 가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피로 사신 양 떼들을 내 양으로 영접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로는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양을 치지 않는 자들은 거짓된 신자들입니다. 은혜를 모르는 배은망덕한 자들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양을 치는 일을 아주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리고 할 수만 있으면 양을 치려고 하지 안습니다. 이런 자들은 예수님보다도 자기를 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리 큰 희생을 해도 아깝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헌신하는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됩니다. 이들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고 물질을 쓰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움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진 것을 회개하고 새롭게 주님의 사랑을 영접하고 사랑의 관계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세상에 많은 즐거움이 있겠지만 양을 치는 즐거움이 가장 큰 즐거움입니다 그래서 양을 많이 치는 사람일 수록 즐거움이 더 많습니다. 성경 공부를 하는 여러분도 어서 속히 신앙이 자라고 훈련을 받아 이 양치는 기쁨을 누리며 사는 성경 선생이요, 목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랑의 고백을 들으신 후에 자기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때 때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이 말씀 가운데 젊다는 말은 영적으로 어릴 때를 말하고, 늙다는 말은 영적으로 성숙한 때를 말합니다. 믿음이 어릴 때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다니지만 믿음이 성숙해지게 되면 양 떼들에게 매인 목자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목자의 삶이란 양 떼들 때문에 가고 싶은 데를 가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하고 싶은 일도 많지만 양들과의 약속 대문에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목자의 생활을 동경은 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감당하기는 싫어합니다. 저는 지난 한 해 동안에 고향에 한 번 다녀왔습니다. 이럴 때마다 아버님은 저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어떻게 보면 목사 생활만큼 자유로운 생활이 없습니다. 그런 반면 가장 자유롭지 못한 생활이 목사 생활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양 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로마를 떠나지 못하고, 양 떼들을 원수로부터 지키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도릴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19) 그리고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은 베드로가 물고기를 잡는 생활을 청산하고, 새롭게 양을 치는 목자의 삶을 시작하라는 결단을 요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말은 예수님을 본 받으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10:11) 예수님은 목자장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목자로서 본을 보이셨습니다. 선한 목자 예수님을 본 받아 양을 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가면서 뒤를 돌아보며,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을 하셨습니까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 이 말씀은 다른 사람은 어떻든 너는 나를 본받아 목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목자로서의 부르심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남과 비교하여, 경쟁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남이 양을 안친다고 영향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무리 신앙, 그룹 신앙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예수님과의 단독적인 관계성 속에서 양을 치도록 방향을 주셨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쩌든지 나는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목자의 직분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목자장 되신 예수님께서 어떤 상급을 주십니까 베드로전서 5:4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이 시간 너는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목자의 삶을 결단하실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끝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 신자들의 진실한 친구요, 변함없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을 찬양합니다. 이 예수님께 진실한 사랑의 고백을 드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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