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렘18:5-10,롬11:1-5)
본문
건국 이후의 최대의 국난이라고 한다. 한국 전쟁보다 더 큰 국난이란 뜻이다.
그렇다면 한국은 지금이 위기이며 치유 받아야 할 대상이다. 성경의 국가에 대한 사상은 국가에 대한 애국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국가를 하나님의 위임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한 신적 위임이 국가이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관심을 가지며 국가에 대한 봉사를 위해 받은 위임은 대리권을 가진다. 예수님도 바울도 국가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였다. 국가가 치유 받고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자.
1. 국가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비유하고 있다. 토기장이의 손은 같은 질흙이지만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어낸다. 진흙은 보잘 것 없지만 이것을 높은 열에 구우면 그릇이 되고, 아름다워지고, 빛이 난다. 진흙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불이 그릇이 되게 한다. 국가란 국민과 국토와 주권이 함께 있어야 되듯이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우리 나라와 우리를 지으셨다.
2. 악에서 돌이키면 국가를 치유하신다.
8절은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라고 한다. 이 한 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약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강한 자만이 돌이키고 양보하는 자는 강한 자이다. 우리가 돌이키면 하나님이 돌아서신다. 우리가 돌아서는 것은 '슈브'란 말로 회개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돌아서심은 '나함'이란 말로 용서를 의미한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대한 순종여부에 달렸다. 국가의 병이란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한다.
3. 그리스도가 국가를 이렇게 치유하신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도덕적 위기를 치유하신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 인간관계의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다. 정치윤리나 봉사정신도 실종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치유하신다.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을 그리스도는 고쳐 주기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그릇된 관행과 생활풍습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분열된 국가를 하나되게 치유하신다.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나라에 임하게 하면 치유된다. 우리 나라를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인정하면 이것이 곧 국가의 치유이다. 예수 믿고 우리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 곧 국가 치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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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8.1 설교방송 (설교요약)
냉수 같은 그리스도인
잠언 25:11-13, 마태복음 10:40-42
성경의 물은 은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다. 비가 은혜의 상징인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며 강도 은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다. 오늘의 본문은 추수철의 눈의 냉기라는 뜻으로 찌는 더위에 레바논의 헬몬산에서 눈을 가져와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더운 여름에 추수하는 성지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눈으로 만든 시원한 냉수를 공급하는 것은 가장 상쾌한 일이다. 충성된 자의 어떤 면이 보낸 자에게 얼음 냉수 같을까
1. 시원하게 하는 사람
충성된 사자는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하였다. 얼음 냉수의 제일 상징은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시원한 것이 무엇일까 시원한 것은 편안한 것을 의미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을 의미하며, 막힘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답답하지 않고 열린 마음의 자세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름날에 시원한 냉수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힘이 없이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덥고 열 받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2. 기쁘고 만족하게 하는 사람
잠언 25:25은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한다. 애 타는 사람에게 갈증을 해소하는 소식을 주는 일은 냉수 같은 일이다. 가장 큰 갈증은 듣고 싶은 소식이다.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의 생사에 대하여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자식이 돌아올 것 같아 몇 해를 대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기다리는 부모에게 기쁜 소식은 목마를 때의 얼음 냉수 같은 일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한다. 가장 기쁜 소식은 복음일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가장 기쁜 편지의 배달부이다.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복음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사랑으로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
3. 동정을 베푸는 사람
마태복음 10:42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한다. 동정심이란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파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우는 마음이다. 내가 목마르면 저 사람도 목마르겠지 하고 냉수를 대접하는 마음이다. 물이 귀한 사람들에게 냉수를 대접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 귀한 동정심이다. 냉수 한 그릇은 시원케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우리 조상들의 삶에는 냉수 한 그릇의 동정심이 있었다. 더울 때 냉수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충성된 그리스도의 편지 배달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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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2
1. 주일설교
셋째 하늘
시편 148:1-4, 고린도후서 12:1-4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높이 올라가면 적도나 북극이나 비슷하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땅은 전부 아름답다.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세상의 갈등도, 이해관계도, 초월할 수 있다. 중국 장자의 책 서두에 붕(鵬)이 등장하는데 높이 올라가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소설 갈매기의 꿈에는 더 높이 올라가는 새가 더 멀리 본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더 높이 올라가서 인생을 보고 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고난을 피력한 바울은 12장에서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환상을 통하여
셋째 하늘의 의미를 보자.
1. 영적 체험의 장소
바울의
셋째 하늘은 바울의 신비한 영적 체험의 자리이다. 바울의 신비한 영적 체험과 육적인 가시로 당하는 고통이 공존한다. 바울은 이런 신비한 체험을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14년전이란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고 자신을 3인칭화한다. 신비한 체험이 전적으로 주께로 말미암은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라고 하고 바울은 내가 갔다고 하지 않고.이끌려 갔다고 한다. 예수님은 변화하시려고 산에 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려고 가셔서 변화하신 것이다. 모든 영적 체험이 나의 주체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계시는 장소
유대인의 관념은 하늘을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는 보이는 하늘이고
둘째는 별이 달려 있는 하늘이며
셋째 하늘은 최고의 하늘 즉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한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하늘을 하나님의 처소라고 하고 하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쓰이기도 하였다. 바울의
셋째 하늘 경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자
리를 성경은 보좌라고 하는데 왕의 자리를 의미한다. 신비한 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리에도 참여한다. 이런 경험은 바울 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다.
3.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는 장소
낙원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하기도 하였고 신약에서는 영원한 나라(눅 23:43) 혹은 승리자가 갈 자리(계 2:7)를 상징하였다. 바울은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비밀을 공개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보좌에 가면 하나님의 비밀도 공개하신다. 바울이 경험했던
셋째 하늘은 누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갈 수 있고, 가야 하는 장소이다. 바울의 신비한 경험의 고백은 자신의 고통의 고백 뒤에 나온 고백이다. 우리도 세상의 고통 뒤에는 신비한 체험을 맛보게 하실 것이다. 이 신비한 경험을 맛보는
셋째 하늘의 백성이 되자.
이번 설교방송은 김형태원로목사의 특별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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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4. 주일설교요약
20세기 최후의 주자들
사사기 10:1-4, 고린도전서 9:24-27
첫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의 성숙한 신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엡 4:13-16에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신앙과 지식이 일치한 온전한 사람이며(13), 세속적 풍조와 유혹에 요동하지 않는 것이며(14), 사랑과 진리로 그리스도인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이다.(15-16) 우리는 그동안 사회와 교회의 이중문화권 속에서 위선적 미숙한 신앙생활 상태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기적이며 주관적인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성숙한 신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둘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에 일어날 환난에 대비해야 하겠다.
20세기는 전쟁의 100년이었다. 딤후 3:1-5의 경고를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평안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는 깨닫고 조심해야 하겠다. 히 12:1-10의 말씀 처럼 우리는 가족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피곤해서 낙심치 말고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사랑으로 책망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원망치 말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번영과 연락에 취하지 말아야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의 신앙의 주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지나온 날들을 감사하는 동시에 21세기 차세대에게 바톤을 잘 넘겨주도록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하겠다. 고전 9:25-27에 주자의 지침으로 자기를 이기고 절제하는 것, 달리는 방향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싸움의 대상은 불의한 세력이라는 것, 그리고 남에게 전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성장에 성공하고 자기성장에 실패하는 경우이다. 빌 3:10-14에 우리의 달리는 목표는 부활이며, 아직 우리는 미완성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고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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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주일설교요약
열린 하늘
창세기 7:6-12, 마가복음 1:8-13
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늘을 여는 일로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시고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을 여신 것은 선지자도 계시도 끊어진 것을 다시 이으시려고 하신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하늘이 열리고라고 하였지만 마가는 하늘이 갈라지고라고 하였다. 갈라진 것은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것을 묘사한 단어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구속을 의미한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구원을 여신 것이며 인간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여신 것이다.
1. 하나님을 듣고 보게 한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 아니라 공생애 시작에 삼위 하나님이 회동하신 것이다. 하늘의 성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어 30년을 준비하게 한 아들 성자에게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공생애의 신임장을 주는 장면이다. 세례시에 들려온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변화산에서도 들려온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며 음성이 들려온다.
하늘이 열리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화평하며 하나가 될 것이다.
2. 사람을 향한 멸망과 비전을 보게 한다.
창세기 7:11에는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여신 하늘의 멸망의 문이다. 에스겔 1:1에는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상으로 보게 하신다.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멸망과 구원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모르게 하신 장래의 일을 하늘을 열고 보여주실 때가 있다 이것을 성경은 이상 중에라고 한다. 계시록 4:1에는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신다.
3. 고난 중에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한다.
사도행전 7:56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 말화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다. 스데반은 열린 하늘을 통하여 예수님과 그 영광을 모았다. 야곱은 열린 하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자가 왕래하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는 사람에게 하늘을 열고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하신다. 하늘이 열리면 예수님이 보이고 성령이 강림하시며 막힌 담이 헐린다. 눈을 들어 열린 하늘을 보며 고난을 이기는 은총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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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8. 주일설교요약
위로의 신앙
시편 119:49-56, 고후 1:1-7
위로라고 하는 말은 버리지 않고 항상 곁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신다. 이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신약성경에서의 위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시킨 말이다. 헬라어에서의 위로는 불러서 곁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보혜사란 말도 같은 어원으로서 위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린도후서는 위로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고난을 당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위로의 서신을 보내고 있다.
1.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환난을 당한 성도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울을 곁에 불러 바울 되게 하시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아브라함을 불러 곁에 두셨고 홀로 도망하던 야곱도 불러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 위로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홀로 있는 것 같아도 어디에 가든지 주의 손이 인도하시며 모든 곳에 내가 가는 곳에 먼저 가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천사와 같은 사람을 만나 위로 받게 하시고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으려해도 곁에서 권고하시고 돌이키게 하신다.
2.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
5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한다. 본문에는 '위로'란 단어만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환난', '고난'도 세 번씩 나온다. 그리스도의 위로는 고난 때문이다. 고난이 없으면 위로도 없다. 사람들이 약자 편이듯이 하나님도 약자 편이시다. 우리는 고난과 환난이 끊임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 것같이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위로는 불러서 곁에 두는 것인데 예수님은 불러서 곁에 두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임마누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위로를 받는다.
3. 우리도 위로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게 하신다. 우리가 위로 받는 것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성도 교제의 구체적 방법이며 최고의 방법이다. 하나님이 위로자이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하시며 보혜사 성령께서 위로자이신 것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이사야 40:1에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다. 위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고 우리의 말을 듣고 위로를 받도록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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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1. 주일설교요약
기쁨의 신앙
시편 4:7-8, 로마서 15:1-3
성경의 인물들은 발랄하고 활기차고 기쁨에 차 있었다. 참 기독교인은 기쁨이 있어야 하고 기독교인의 이미지는 기쁨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참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의 일곱 가지 감성 가운데 제일 먼저가 기쁨(喜)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희락이 있다.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다. 기뻐하다(aresko)는 말은 신약성경에 열일곱번 나타나는데 그중 열세번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기쁨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1.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신앙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뻐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수단이 죄를 짓게 만든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방법이 고행(Penance)인데 현재는 고행이 아니라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 신앙이 필요하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쓰는 시대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자.
2. 이웃을 기쁘게 하는 신앙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한다. 이웃을 기쁘게 하면 선을 이루는 것이 되고 덕을 세우는 일이다. 성경은 이웃을 기쁘게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체감되는 가장 큰 중요한 문제의 핵심은 남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33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한다. 남의 유익을 얻게 하는 것은 구원을 얻게 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배달하는 배달부이다.
3.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뜻이다. 로마서 8:8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한다. 육신을 벗어나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유대 사회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도 한 달 이상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거움, 기쁨, 웃음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주신 이 기쁨을 빼앗기지 말고 매일 기쁨이 넘치는 날들이 되도록 기뻐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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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 주일설교요약
부활과 평안
예레미야 23:5-8, 요한복음 20:19-23
부활절은 가장 기쁜 날이다. 사망을 주는 마귀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배된 날이다. 사람은 죽기 위하여 지음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다 죽지만 죽기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다 죽지만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부활은 교회의 기초이었다. 사도들의 증거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증거이다. 그리고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는 사건이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셨던 샬롬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샬롬이 되자.
1. 십자가의 죽으심은 근심이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수난에 관한 예고를 하셨다.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고 했지만 절대로 안 된다는 우려가 사실로 되었고 이 사실이 그들에겐 공포요
비극이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시려고 할 때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보다 죽으심이 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로 변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의 공포심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그들은 지하 어두운 방에 모여 그들이 살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2. 부활은 평안의 선포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안하뇨라고 물으셨고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려는 사건이다. 부활이 없이는 기쁨이 없다. 부활이 없이는 참 평강이 없다. 부활만이 평강을 준다. 진정한 평안은 부활 신앙의 대가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평강을 가져야 한다. 고린도전서 15:22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 삶이기 때문에 평안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도 부활할 것이며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평안이 있다.
3. 부활신앙은 평안의 삶이다.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이미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다시 평안을 선포하셨다. 너희가 평안하뇨라고 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준 평안을 잘 간직하고 있느냐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다 평안을 잃어버렸다. 이제 주님은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선포하신다.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왜냐하면 평안은 부활하신 주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육신의 부활과 영원히 사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영원한 평강도 함께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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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주일설교요약
만남의 신앙
시편 32:5-7, 요한복음 1:43-51
요한복음 1장 후반에는 만나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이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는 만남이 강조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초기에는 수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에 관한 얘기,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만난 얘기 등이 나타난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진정한 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스치고 지나간 군중과 같은 만남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의 만남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삶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구주로 만나야 한다.
1. 전지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는 대화를 통한 만남이 나타난다. 니고데모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니고데모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하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모습과 만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미래를 환하게 보시는 전지성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의 온 몸과 정성을 다하여 전지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2. 자신의 죄성과의 만남
전지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다음에는 반드시 자신의 죄성과 만나게 된다. 성경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죄성과 만나게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전지성과 만났을 때에 자신의 죄성과 만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에 하나 같이 요구되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회개하라는 첫 번째 선포를 하셨고 사람들이 처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한결같이 회개를 촉구하였다. 회개는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필수적인 단계인 것이다.
3. 하나님의 계시와의 만남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니고데모의 미래적 환상을 말씀해 주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광경이다. 이 광경은 야곱의 벧엘 광야에서의 환상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사닥다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학적 방법이나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하여서도 알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말씀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깨어진 우리의 심령이 소생하게 되고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다시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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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1. 주일설교(요약문)
갈릴리 사람 예수
이사야9:1-4, 마태복음26:69-72
산업사회를 개미사회라 하고 정보사회를 거미사회라고 한다. 개미사회는 위 아래가 분명한 사닥다리 사회이고 거미사회는 거미가 거미줄의 한 가운데 있듯이 원의 중심사회이다. 그래서 거미사회는 항상 자신이 중심이 된다. 전에는 항상 선생님이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중심이 된다. 그래서 선생님도 고발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같은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아니라 시골이며 주변인 갈릴리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이라 하였고 후에는 제자들도 갈릴리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 예수님이 주변인물임을 알리는 이름 우리 나라는 지연, 지방색, 지역감정을 탈피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탈피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있다. 최근의 유고의 전쟁도 이런 유의 문제이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 되신 것은 예수님이 주변인물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유대의 중심 인물이 아니라 주변 인물이었다. 갈릴리는 주변이지만 신학의 중심이었고 정치 경제의 중심인 예루살렘과는 달랐다. 예수님은 주변인물이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적 전통을 깨고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했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2. 예수님의 활동을 알리는 이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에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셨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며 병자를 고치신 곳이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아온 곳이다. 예수님은 정치의 중심인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 인물인 갈릴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셨다. 사회의 주목의 대상인 중심 인물이 아닌 일반 대중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이다. 또 갈릴리는 당시의 활동뿐만 아니라 장래의 일을 계시하시던 중요한 계시의 장소였다. 현재의 활동과 더불어 장래의 활동을 알게 하신 장소가 갈릴리였다.
3.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이름 예수님은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다. 갈릴리는 가장 익숙한 장소였고 처음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장소이다. 아무리 갈릴리의 행적과 말씀과 기적들이 중요해도 부활이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갈릴리는 예수님의 생애의 자리이며 전 생애의 결론이었다. 승천 후에 비로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제자들의 중심이 옮겨졌다. 갈릴리 사람은 예수님의 별칭인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별칭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에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다. 성령은 주변인물을 중심인물로 변화시킨다. 성령으로 중심인물이 되자.
199
9.
1.2
4. 주일설교요약
가정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창세기 3:8-12, 에베소서 6:1-4
핀란드 어느 마을에서는 금년 8월 7일 하루 동안 아무나 만나서 들어갈 수 있도록 천막을 치고 섹스 잔치를 한다고 한다. 미국 M
IT 대학 연구팀은 2년 내에 세포핵 이전이란 유전공학 기술로 수컷 없이 암컷만 가지고 생쥐를 만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딸이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여 때리지 않게 각서를 받아달라고 하였고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딸이 술을 마시고 어머니와 다투다 어머니가 때린다고 112에 신고하였다. 세계적으로도 가정이 파괴되고 있고 우리 나라도 경제위기로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가정이 치유 받아야 한다.
1. 부부관계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은 원래 평등하게 남녀를 지으셨는데 인간은 물리적 힘으로 우열을 가리게 되었다. 성적 기능이란 우열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녀에게 주신 소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면 가정이 따라서 파괴된다. 좋은 가정에서 바른 사회, 바른 세계가 시작된다. 호세아는 고멜이란 부정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은 사랑하고 다시 결합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하신다. 인간의 욕망으로 파괴된 부부관계를 하나님은 말씀으로 치유하신다. 지금도 인간의 욕망으로 파괴된 부부관계를 하나님은 말씀으로 치유하시기를 바라신다.
2. 자녀관계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성경은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순종을, 그리고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것을 권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것은 부모의 문제이며 부모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닌 주의 가르침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미가7:6은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라고 예언한다. 그리스도는 이런 파괴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치유하신다.
3. 형제관계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가인과 아벨 이후 형제관계의 파괴는 동생에 대한 책임상실이다. 야곱과 에서의 다시 만남은 새로운 관계로의 회복을 일러준다. 이 새로운 관계 회복에 하나님은 만남의 중간에서 간섭하시고 치유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형제를 일흔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0:21의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는 말씀은 요즘 세상 얘기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는 형제 관계를 치유하신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주님은 우리의 가정들이 치유받고 행복한 가정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199
9.
1.1
7. 주일설교요약
여성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열왕기하 4:32-37, 누가복음 18:1-5
그리스도 앞에서 치유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치유받지 못할 사람도 없다. 특별히 제도권 사회에서 소외되고 아직도 사람으로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유대사회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전통 사회였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여성은 남성의 종속적 관계이었고 이런 전통은 우리 나라나 유대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소외 계층인 여성, 더구나 과부의 한을 풀어주는 재판장의 이야기이다. 왜 하필이면 과부이고 호소의 내용이 한이었을까
1. 한이 많은 여성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의 과부는 가장 소외되고 가장 불쌍하고 가장 무력한 인간을 대표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이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다고 하셨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으며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구약의 엘리사도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준 기사가 있다. 한이란 우리 민족사에 깊이 뿌린 내린 우리 정서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여성들의 한은 깊어 인간적으로 풀 길이 없다.
2. 치유 받기 위한 끈기를 가진 여인
이 여인의 끈기 있는 간청은 재판관이 마음에도 없는 일이지만 도와주었다. 자주 가서란 말은 미완료형으로 끈질기게 간 것을 의미한다. 이 여인은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송사를 정당하게 처리해 달라고 하였다. 공평성이 전혀 없는 재판관은 과부의 형편보다는 듣지 않으면 귀찮게 할 것이라는 자기중심적 이기심 때문에 들어주었다. 이런 끈기 있는 자세가 불의한 재판관까지 굴복하게 만들었다. 여성들에게는 독특한 종교성이 있으며 여성의 신통력은 유난히 뛰어나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하여 훨씬 영성적이다. 한이 많은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혜인지 모른다.
3. 여인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가장 소외되고 억울한 과부의 피맺힌 호소를 하나님은 들으신다. 성경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으로 비유하지만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간청하는 소리를 응답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아니 하시겠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끈기 있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며 오랜 여인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끈질긴 마음이 딸을 낫게 하였다. 구시대의 여성들의 제도적 상처와 원한을 그리스도는 치유하시어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되게 하신다. 상처의 해결자는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상처받은 여성을 치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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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10. 주일설교요약
교회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출애굽기 32:1-6, 사도행전 2:37-47
제83회 총회의 주제는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경제위기시대를 맞이하여 치유 받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성경은 하나님을 치료자라고 한다. 회개로 시작된 교회는 개인의 치유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설립의 요인이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역사 하시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교회의 생활인데 가장 큰 실패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 일을 통하여 교회가 치유 받아야 할 내용을 보자.
1. 인본주의 교회의 치유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백성을 이끌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이지 백성의 주인은 아니다. 모세가 40일을 보이지 않자 백성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자고 하였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자고 하였고 모세가 그들을 이끄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다음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교회를 고치신다.
2. 물질주의 교회의 치유
아론은 자신의 동생이 40일 동안 보이지 않자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백성들의 요청으로 금고리를 빼어 가져오게 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금을 가지고 멋진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자신의 존재와 신분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금은 가장 귀하고 비싼 것으로 금으로 만들면 좋은 신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재산이 있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눠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장사하는 곳이었으며 제사장은 돈을 받고 장사를 묵인하였다. 교회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며 성직자가 물질의 노예가 되는 교회를 주님은 치유하신다.
3. 혼합주의 교회의 치유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 단을 쌓고 공포하기를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다고 한다. 백성들이 이튿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 금송아지 앞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우상을 섬기게 하는 혼합주의이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먹고 마시며 뛰노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이방신에 대한 제의와 혼합이 된 것이다. 이런 혼합주의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기독교가 정치와 야합하고 다른 종교와 혼합하여 기독교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잃는 것을 그리스도는 치유하신다. 치유 받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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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2
9. 주일설교요약문
택한 그릇
사무엘상12:10-13, 사도행전9:15-19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일이며 설교자는 철저하게 도구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의 역할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릇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수단과 도구를 의미한다. 예레미야 18장은 토기장이 비유로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히브리 표현법에서 그릇은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우리말에도 사람을 그릇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 복음을 담는 그릇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복음을 위하여 택한 그릇이라고 한다. 바울이란 그릇은 복음을 담는 그릇이다. 음식을 차릴 때에 그릇을 선택한다. 그릇이 아무리 맛을 내 준다고 해도 그릇을 먹지 않는다. 그릇이 아무리 좋아도 그 내용은 복음이다. 어떤 그릇이든지 그릇은 복음을 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여러 번 얘기한다. 자신이 복음을 위한 그릇이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릇에도 복음만 담을 수 있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복음의 그릇이다.
2. 고난을 담는 그릇
바울은 해를 받게 하려고 택한 그릇이다. 선택의 의미가 고난이다. 선택은 영광이지만 고난이 따르게 된다. 고난은 예수님의 것이므로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 고난이 없으면 예수님과 무관하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 고난을 기뻐하고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관원들에게 잡혔지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하였다. 우리를 택한 것도 고난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다. 고난이 아니면 우리의 선택이 의미가 없다.
3. 자신을 담는 그릇
토기장이는 귀히 쓸 그릇도 만들고 천히 쓸 그릇도 만든다. 그러나 도구인 그릇은 스스로 귀한 그릇이 되게 자신을 담아야 한다. 비싼 그릇이 좋은 그릇이 아니라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좋은 그릇이다. 가장 좋은 용도에 쓰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다듬어야 한다. 우리 각자는 다 가치가 있는 소중한 사람인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더욱 값지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 성경은 이 그릇은 우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릇이며 택한 그릇이다. 복음을 운반하는 그릇이며 고난을 담는 그릇이다. 자신을 담아 귀한 그릇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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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2
2. 주일설교요약문
한 부자의 결정적 실수
잠언 23:1-5, 누가복음 12:16-21
잠언 23:1-5, 1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며 2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3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4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5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누가복음 12:16-21, 16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다른 말로는 돈많은 바보의 비유라고 한다. 이 비유의 배경은 상속 문제를 둘러싼 형제의 도움 요청을 받으신 예수께서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대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진다. 실제적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탐심이며 부요하지 못한 마음이 문제이다. 만족하고, 절약하고, 나누어주고,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없으면 결국 탐심이 지배하게 된다. 비유의 부자는 결정적 실수를 한다. 그의 실수를 보고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자.
1.모든 것을 자신이 했다는 생각
과거에 대한 결정적 실수는 내가 했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 사고는 모든 것이 내가 했다는 자기 중심적 공명심으로 나타나며 모든 결과가 자신의 노력의 대가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없다. 하루를 살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반면에 쓸데 없는 것에 의존하고 자신이 할 일을 포기하는 태도도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건전한 생각이다.
2.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생각
현재에 대한 결정적 실수는 전부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세상에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단지 세상에 있는 동안 빌려 쓰는 것들밖에 없다. 아무리 정당할지라고 부하게 되는 길에는 위험성이 많이 있는 법이다. 소유하려는 마음 자체가 실수이며 관리하려는 마음이 정당한 마음이다. 옛날 수도원에서는 일인칭 단수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부자의 영혼도 물질도 다 하나님의 것이었다. 지나친 욕심은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3.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이라는 생각 미래에 대한 결정적 실수는 여러 해 쓸 물건을 준비하였으니 편히 먹고 즐기겠다는 생각이다. 부를 갈망하는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래가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이라는 착각은 탐심이 주는 최대의 유혹이다. 예수님의 기록되지 않은 말씀에 세상은 하나의 다리이다. 현명한 자는 다리를 건너가지만 집을 짓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야 한다. 부자의 어리석음을 다시 범치 말고 탐심을 버리고 나누며 살자.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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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15. 주일설교요약문
감사의 나팔
역대하 5:11-14, 로마서 14:4-6
역대하 5:11-14, 11이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차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 12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일백이십 인이 함께서 있다가 13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14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로마서 14:4-6, 4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사회는 아직도 좋은 일들이 많은 사회이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많다. 네델란드의 두 명물의 집이 있다. 하나는 안네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교회
이다. 아버지의 교회는 청교도들의 처음 기착지이며 노약자들과 환자들을 내려놓고 간 곳에 세운 교회이다. 그후 청교도들은 1620년 12월 신대륙에 도착하였고 110명이 출발하였지만 추위와 파도에 시달리다 55명이 도착하였다. 다음해 그들은 농사를 지어 감사를 드렸는데 추수감사절의 유래이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은 감사의 축제이었다.
1. 감사의 표현은 찬송
노래하는 레위 사람들은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나팔 부는 제사장 120명은 노래하는 자와 함께 일제히 찬송하며 감사하였다. 감사는 찬송으로 표현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밤중에 찬미하였고 옥문이 열렸다. 감사할 때에 찬송하게 되고 찬송할 때에 감사가 우러난다. 찬송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다. 욥은 자녀가 죽고 재산이 없어졌지만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라고 하였다. 감사는 볼록렌즈로 보아야 하고 불평은 오목렌즈로 보아야 하는데 바꿔보니 감사가 작아지고 불평이 많아진다.
2. 감사의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심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였는데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우리의 삶의 초점을 맞추면 감사가 넘치게 된다. 시편 136편의 주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것이다. 선하심이 영원하시기에 감사의 조건 또한 영원하다.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선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선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려운 현실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 삶의 활력의 근거가 된다.
3. 감사의 결과는 영광
찬송하며 감사했을 때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였고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였다. 열 나환자가 다 고침을 받았지만 한 사람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원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불인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편에서 우리의 일을 보면 감사뿐이고 우리편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원망뿐이다. 감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불평은 마귀의 뜻이다. 날마다 감사의 나팔을 불어 마귀의 뜻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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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14. 주일설교요약
본향으로 가는 나그네
시편 90:1-7, 히브리서 11:13-16
올해도 어김없이 설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간다. 폴 케네디는 한국이 21세기에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를 가정중심주의라고 하였다. 명절이 되어 고향을 찾기 위하여 전 국민의 절반이 움직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힘들긴 해도 우리의 좋은 문화적 전통일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성경의 믿음의 조상들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 좋은 믿음이다.
1. 우리는 모두가 나그네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라고 하였고 이삭과 야곱도 자신을 나그네라고 하였다. 신앙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나그네라고 한다. 신약에서 바울이나 베드로도 인생을 나그네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면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 바른 삶이며 나그네와 같이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나그네란 고향을 따로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고향이 있다는 의미이며 나그네가 잠시 세상에 우거하듯이 이 땅을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살 듯이 사는 것이다.
2. 나그네는 고향을 찾는 본능이 있다.
외국인과 나그네는 본향을 찾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많은 동물들이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듯이 사람도 귀소본능을 가지고 산다. 고향에 가면 고향의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살며 심리적 안정감을 가진다. 아무리 타향이 좋아도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다. 그래서 서양인의 말에는 자기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서원할 때에 다시 자신의 집에 돌아오게 하면 십일조을 바치겠다고 하였고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한국인은 유별난 귀소민족이라고 한다. 한국 교인의 신앙도 유별난 귀소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여야 한다.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본향이 있다. 하나는 이 땅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본향을 사모하는 것도 좋지만 성경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이는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좋아도 임시적인 것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찬송에도 있듯이 우리의 돌아갈 고향은 하늘나라이다. 이러한 영원한 고향이 있어 사모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다.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을 갈 때마다 참 본향을 찾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가자.
199
9.
5.2
3. 설교방송
성령을 받았느냐
요엘 2:28-30, 사도행전 19:1-7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고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말씀하신 단어는 평강과 성령이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미 다락방 강화에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 성령을 주시마고 하셨는데 그 약속의 성취인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다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다. 이 약속은 오순절에 이루어졌고 바울이 다시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확인한다.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의 오순절이란 별명을 가진 성령의 역사 장면이다.
1.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믿지 못한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말씀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믿으면 성령 받고 성령이 아니면 믿게 하지 못한다. 확실한 믿음이란 성령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신뢰와 의탁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3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다.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지혜가 있어야 예수를 고백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한다. 빌립은 성령의 지시로 광야로 갔고 성령의 지시로 내시의 병거로 올라갔고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다시 성령이 빌립을 이끌어 아소도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성령은 모든 지시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믿게 한다.
2. 성령의 현존을 부인하는 자들이 지금도 있다.
아볼로는 당시에 가장 유능하고 지적인 목회자였지만 성령을 알지 못하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성령의 세례를 알게 하여주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였지만 성령의 현존과 내재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에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한다. 성령의 인격을 현존적으로 믿는 고백이다. 성령시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시대이다. 성령이 현존하시는 시대인 것이다.
3. 성령은 안수하므로 임하였다.
시편 51:11에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하여 성령의 구약적 근거를 제시한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다. 성령의 임재는 오순절에는 기도하므로, 고넬료의 집에서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에베소에서는 안수하므로 성령이 임재하였다. 성령강림의 방편은 달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 요엘 2:28 그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하였다. 그후가 지금이 아닐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해답을 얻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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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2
5. 설교방송(설교요약)
좋은 땅에 떨어지므로
이사야 55:8-11, 누가복음 8:8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마지막 땅은 좋은 땅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땅이다.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해석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그리고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한다. 결국 말씀을 듣고 행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하였는데 성경이 말하는 좋은 땅은 어떤 땅인가 우리의 마음밭이 좋은 땅이 되도록 좋은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고 좋은 땅이 되게 하자.
1. 잘 기경된 땅
호세아 10:12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하신다. 비를 내리는 좋은 땅은 기경된 땅이다. 식물이 싹이 나게 하려면 물, 공기, 햇볕이 있어야 하는데 이 셋이 있어도 땅이 기경되지 못하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기엔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마음이 기경되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기경이란 갈아 뒤엎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도 때로는 갈아 엎어서 깊숙이 전혀 다른 영적 체험을 해야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 질서 있고 순박한 땅
예례미야 4:26은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나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좋은 땅은 혼돈하지 않으며 공허하지 않고 질서 있고 순박한 땅이다. 좋은 땅은 하나님의 질서가 살아있고 순박한 땅이다. 이런 땅에 식물이 잘 자라듯이 마음도 이런 마음이 말씀이 잘 자란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순박하지 못하여 하늘 소리를 외면했고 롯의 사위들은 마음이 굳어 장인의 소리를 농담으로 여겼다. 어린이같이 순박하고, 하나님 질서대로 사는 마음은 좋은 땅처럼 말씀이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3. 하나님이 주인인 땅
신명기 1:35은 내가 열조에게 맹세한 좋은 땅이라고 가나안 땅을 얘기한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고 가보니 엉뚱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좋은 땅이 아니다. 그러나 이곳이 좋은 땅인 것은 하나님이 주인인 땅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이든 사람이 주인이면 나쁜 땅이며 아무리 힘들고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인이면 좋은 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의지하면 열매 맺지 못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좋은 땅이 되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말씀을 순박하게,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여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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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1
8. 설교방송 (설교요약)
가시가 기운을 막으므로
예레미야 4:3-7, 누가복음 8:7
씨뿌리는 비유의 세 번째 밭은 가시밭이다.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해석한다.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고 잎이 크지만 막판에 결실치 못한 것이다. 육신적, 현실적 장애물 때문에 열매 없이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고 하신 말씀이 이런 말씀일 것이다. 말씀이 자라다 방해받는 것을 왜 가시가 방해했다고 할까
1. 실망과 좌절하게 하므로
창세기 3:18은 죄지은 아담에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라고 저주한다. 이후로 사람들은 애를 써서 여름 내내 고생을 해도 가을에 실망이 생긴다. 삶의 가시는 신앙의 사람으로 좌절하게 하고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엘리야도 승리한 다음에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였고 요나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인이 절망하는 것을 마귀는 제일 재미있어 한다. 데마나 그레스게나 디도는 교회를 섬기다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낙심의 가시를 제거하자.
2. 아프고 상처받게 하므로
가시는 찌르고 아프게 하고 상처받게 한다. 말씀이 자랄 때면 상처와 아픔이 있고 상처와 아픔이 자라지 못하게 방해한다. 예수님도 상처가 있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할 때에 내려와 보라는 유혹은 상처였고 이사야도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을 예언하였다. 바울도 뱀에게 물렸을 때에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하여 상처를 주었다. 말씀이 다 자라기 전에는 연한 순같아서 상처를 쉽게 받는다. 말씀이 상처를 받는 것은 말씀이 덜 자란 까닭이다.
그런데 사실은 상처를 받아야 자란다. 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상처가 아닌 주님의 사랑을 받는 상처가 있어야 한다.
3. 높아지고 교만하게 하므로
요담의 나무왕의 비유에는 가시나무가 가장 교만한 나무이다. 가시가 말씀을 방해하는 것은 교만으로 말씀이 장애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기린이 15센티 깊이의 물에 빠져죽는다고 한다. 키나, 지혜나 머리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교만은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갖추셨지만 다 버리셨는데 우리는 너무 높이고 많이 가지고 많이 먹고 산다. 장미꽃의 가시가 예쁜 꽃을 피우지 못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시가 예쁜 꽃을 피운다. 우리의 가시가 말씀을 방해하는 가시가 아니라 말씀을 예쁘게 꽃피우는 가시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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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11. 설교방송 (설교요약)
습기가 없으므로
욥기 37:11-13, 누가복음 8:6
올해 장마철에 비가 적게 왔다.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와야 정상인데 물이 귀하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심령에 비가 내리지 않고 습기가 없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의 두 번째 뿌려진 곳은 바위 위이며 뿌리는 내리지만 습기가 없으므로 말라버린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되 해가 나면 타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해가 나면 잘 자라야 하는데 해가 방해되는 것이 문제이다. 흙은 없어도 식물이 자라지만 습기가 없으면 자라지 못한다. 뿌려진 말씀이 어떤 습기가 없어 자라지 못하는가
1. 땀이 없으므로
말씀의 씨를 윤택하게 하는 물은 땀이다. 땀이란 말씀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19에 네가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고 하셨다. 땀은 먹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땀을 흘리는 것은 건강에도 필요하며 영적으로도 땀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회는 봉사의 땀, 헌신의 땀이 있어야 말씀이 열매맺고 신앙이 자란다. 땀이 없으면 교인은 되지만 신앙의 열매가 없다. 교회에 나와도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땀을 흘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의 땀은 피가 되었다.
2. 눈물이 없으므로
말씀의 씨가 자라기 위한 물은 눈물이다. 눈물은 말씀의 씨가 가장 잘 자라게 하는 양분이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이유는 눈물을 많이 흘린 흔적 때문이다. 그는 요
를 적시며 회개하였고 자신의 고통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고 하였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생명을 연장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였다. 바울의 전도와 목회도 눈물이었다. 눈물이 있으면 말씀이 자라고 사람이 변하고 영혼이 구원받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뻐하시고 열매맺게 하신다.
3. 피가 없으므로
말씀의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 피는 가장 좋은 말씀의 영양분이며 가장 좋은 습기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피는 생명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며 그 피로 교회가 세워졌다. 피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고 피가 없으면 성도도 아니다. 성경의 피는 희생을 의미하는데 말씀이 자라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신다. 희생해야 예배도, 헌금도, 전도도, 봉사도 가능하다. 희생하지 않고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교회는 땀, 물, 피에 의해 세워지고 든든하게 자란다. 습기가 모자란 바위 같은 마음이 되지 말고 촉촉한 습기로 가을의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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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2
7.주일설교 (설교요약)
개혁의 두 가지 과제
창세기 35:1-3, 고린도전서 9:19-23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격한 변화를 강요하는 변화의 시대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회도 신속하게 변모해야 교회가 사회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교회가 생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성경의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실패도 거듭한 인물이다. 야곱이 경험한 실패는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적 문제이다. 세겜에서의 가정적 경험을 맛보고 야곱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이다. 야곱 가정의 문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이며 야곱의 문제 해결방안은 지금의 개혁의 방안이다.
1. 벧엘에 올라가야 한다.
세겜에서 실패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에 올라와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시고 보장하시던 그 자리를 다시 경험하게 하신다. 야곱에게 벧엘은 잊을 수 없는 하나님과 만난 영적 자리이다. 바울은 평생을 통하여 다메섹의 경험을 회상하며 힘을 얻었다. 그리고 야곱은 이방신상을 버리고 올라가자고 한다. 이방신상은 라헬이 그의 아버지 집에서 훔쳐온 드라빔일 것이다. 벧엘에는 드라빔이 없어도 되고, 어울리지도 않고, 하나님은 우상을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2. 의복을 바꾸어야 한다.
가정을 개혁하는
첫째 방안은 내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둘째 방안은 외부적으로 의복을 바꾸어야 한다. 원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상을 버리고, 형식을 개혁하기 위하여 의복을 바꾸어야 한다. 의복은 우리의 행위, 형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시로 바꾸어 입어야 한다. 더러운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유행이 지난 옷을 벗고 유행의 옷을 입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여러 모양이 된 이유를 설명한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형식을 바꾸어야 하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한번도 내용인 그리스도가 바뀐 적은 없다.
3. 단을 쌓아야 한다.
벧엘에 올라가고, 의복을 바꾸는 이유는 하나님께 단을 쌓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복음의 원리를 되찾고 형식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벧엘의 하나님께 올라가면 실패할 때에도 응답하시고 가정이 새롭게 개혁되고, 사회가 새롭게 변화된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한다. 영적으로 돌아서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형식을 수시로 버릴 수 있어야 새 시대에 적응해 나가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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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
4. 설교방송(설교요약)
새들이 먹어버렸으므로
창세기 40:16-19, 누가복음 8:5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대표적 비유이다.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뿌려진 것을 의미한다. 길가에 뿌려져 싹이 나지 못한 이유 즉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이 두 가지 이다.
첫째는 내부적 문제로 자신의 마음이 굳어져 새 진리를 막는 것이고,
둘째는 외부적 문제로 거부하는 동안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새들이 먹었다는 것은 마귀가 말씀을 방해하였다는 것이다. 새들의 생태적 특성을 살펴보고 새들에게 말씀을 빼앗기지 않게 영적으로 방어하고 조심하자.
1. 죽을 것에 의존
마태복음 24:28에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라고 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정한 새는 주로 주검을 따라다니고 죽은 동물의 시체를 먹고 산 것보다 죽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죽은 것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보다 사망에 관심이 있던 아담 이후 사람들은 생명보다 사망을 선택하고 죽음에 관심을 가진다. 이것이 마귀의 생리이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사망으로 이끄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거기에 몰려다닌다. 경건한 영성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자유하고 고독해야 한다.
2. 먹는 것에 의존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자신의 몸을 즐겁게 하고 향락에 살게 한다. 악인의 결말이 멸망인데 왜 새로 악인을 비유했을까 새가 보는데서 그물을 쳐 두어도 새는 먹는것에 몰두하여 그물을 개의치 않고 열중하여 먹다가 걸리고 만다. 성경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먹는 것을 염려하게 하거나 과하게 먹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먹고 정신이 팔려 있으면 죽게 마련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마귀의 모습이다. 마귀는 인간의 본능을 이용하여 서서히 인간에게서 선을 빼앗아 가고 인간을 자멸하게 한다.
3. 세상 권력에 의존
에스겔 31:6은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라고 한다. 큰 나무 애굽 밑에 있으면 안전할 줄 아는 세상 권력에 의존을 의미한다. 이런 새의 습성이 인간에 대한 마귀의 꼬임이다. 마귀는 세상에서 세상의 힘에 의존하여 살게 하고 컴퓨터를 의존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서 말씀에 의존하고 사는 것을 방해한다. 권력과 금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어야 나라가 발전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새를 다스리라고 하셨고 아담은 새의 이름을 지었다. 뿌려진 말씀이 빼앗기지 않도록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다스리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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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13. 설교방송 (설교요약)
나 때문이라
요나1:11-16, 디모데전서1:15-17
요나는 주전 8세기 선지자로서 그의 이름의 뜻은 비둘기이다. 이름과는 달리 때로는 과격하고, 불순종하고 도망하던 자이다. 그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듣고도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깊이 잠을 자고 있을 때에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지우게 되었다. 그는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다. 그의 이 말은 자신을 인정하고 자각한 중요한 말이었으며 사흘 동안 큰 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더불어 스스로 세상에 버려지므로 구원한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었다. 큰 풍랑 가운데 우리가 취하여야 할 자세를 요나를 통하여 배우자.
1. 내 자신을 알 때의 고백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내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인간관계의 상실은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의 결과이다. 사람이 자신을 알면 누구나 아름답고 자신을 모르면 모두가 추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사울왕이나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자신을 과대평가 하다가 망했다. 반면에 스스로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한다고 과소평가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노하셨다.
2. 내 죄를 발견할 때의 고백
요나는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히게 되었는데도 잠만 자고 있었다. 세상의 요동함이 자신 때문인데도 자신과는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배를 한꺼번에 흔들어놓고 자신은 편안히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죄에 대한 엄격함이 있어야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모습 아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하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였고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다.
3. 자신에 대하여 진실할 때의 고백
요나는 제비 뽑혔을 때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분명한 심증이 있어도 끝가지 부인하고 혐의내용에 증거가 나와도 인정보다 변명한다. 제비뽑기 결정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승복한 것은 위대한 일이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진실한 태도이다. 잘못은 이미 저질렀지만 거기에 승복하는 자세는 또 다른 그의 인격이다. 잘못은 할 수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면 더 큰 잘못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지금도 교회의 부흥은 반복된다. 이 세상의 큰 풍랑이 나 때문이라는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이 바람을 고요케 하시고 우리가 탄 배가 승리의 항구에 도달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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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2
8. 주일설교
새 하늘
사도행전65:17-20, 요한계시록21:1-2
십자가는 부활을 전제로 고난은 기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종착은 부활이며 기쁨이며 새 하늘이다. 우리 모두가 훗날에 이를 곳이 하늘의 예루살렘 즉 새 하늘이다. 계시록 21장은 신천신지에 대한 요한이 본 계시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사야 65:17-25에는 신천신지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신약의 새 하늘이란 헬라어에서 시간적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 새로움을 의미한다. 새 하늘은 처음 하늘을 개조하고 새롭게 도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질서로 재창조한 나라이다.
1. 새 하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다. 새 하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다. 계시록 21:3은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하였고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라고 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장막인 것을 말한다. 창세기 1:1의 창조와 같은 단어가 세 번 반복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셨듯이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갈 나라이다. 사람들이 만든 것은 새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새 것을 만드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던 완벽한 작품이듯이 새 하늘도 새 땅도 완벽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2. 새 하늘은 처음 하늘과는 다른 곳이다.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지나갔다는 것은 현 질서가 지나가고 새 질서가 실현된 것을 의미한다. 창조하다는 것은 현세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현세의 것은 개조할 수 없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새 하늘은 처음 하늘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곳이다. 없어졌다는 것은 한번 없어짐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다. 현 세계가 완전히 멸망되고 하늘과 땅이 완전히 새롭게 지어진다고 한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은 악한 세상을 상징하는 바다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사야 65:17은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새 하늘은 이전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3. 새 하늘은 기쁨과 즐거움의 나라이다. 새 하늘은 기뻐하며 즐거워할 곳이다. 세상에서의 상대적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새 하늘에는 죽음도, 울음도 아픔도 없는 아름다운 곳이다. 새 하늘은 해함이나 상함도 없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편리하고 좋은 시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로 가고 있다고 한다. 새 하늘은 이 세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이다. 이 땅에서 살면서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새 하늘을 보며 살자.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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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0.설교방송 (설교요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잠언 15:15-19, 사도행전 10:1-8
베드로가 가이사랴를 방문하여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들은 자들이 성령을 받는다. 고넬료는 이방전도의 문을 연 사람으로 로마의 군인이었다. 신약성경에는 백부장 네 사람이 등장하는데 모두가 신앙인이었다. 그 가운데 고넬료는 가장 가정적인 사람이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고넬료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어떤 가정인가를 보고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가정이 되게 하자. 건강하고 경건한 가정에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운다. 경건한 가정은 사회의 기초이다.
1. 기도하는 가정
2절에는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하였고 4절에는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으니라고 한다. 아무리 구제해도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바친 향기로운 제물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기도와 구제가 제물로 상달된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문제는 구제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니 불평이 생긴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기도해 주어야 바르게 자라며 기도하는 어머니를 가진 자녀를 마귀는 넘나보지 못한다. 기도는 가장 귀한 것을 도둑이 들지 못하는 금고에 쌓아두는 것과 같다.
2. 구제하는 가정
구제는 그리스도인의 필수과목이다. 구제는 선포와 교제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있는 곳에 봉사가 있다고 하였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경건한 고넬료는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일에도 열심이었을 것이다. 구약에서 객과 고아와 과부는 특별관리 대상이었고 신약에서는 구제하기 위하여 7집사를 세웠다. 사실은 교회가 구제의 전문 기관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서 아무리 흩어 구제하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슴 없이 얼굴만 가지고는 구제하지 못한다. 사랑 없이 돈만 가지고는 봉사가 안된다.
3. 순종하는 가정
순종은 성경이 명하는 중요한 신앙적 미덕이다. 성경은 순종하라는 명령이 많이 있다. 노아는 맑은 하늘 아래서 비난을 초월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였다. 순종은 자기 머리로 계산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고 나서 계산하는 것이다. 순종은 자신의 경험에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때로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고 때로는 비난이 따른다. 우리의 가정이 구제하고 순종하는 가정이 되면 자녀들은 그 은혜로 절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주시도록 되어 있다면 나는 결코 다시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 모티어.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는 사실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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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 2
5. 주일설교요약문
종교개혁의 현대적 의미
역대하 1:14-21, 요한복음 2:13-17
역대하 1:14-21, 14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15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16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17또 여호와의 전에 있던 돈을 쏟아서 감독자와 공장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18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9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20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21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요한복음 2;13-17, 13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481년이 되었다. 도미니칸 수도사 테첼이 면죄부를 팔려고 온 다음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붙이고 개혁의 문을 연 것이다. 개혁 1세대인 루터는 원리 중심의 개혁을, 개혁 2세대인 칼빈은 실천 중심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종교개혁은 두 가지 중요한 명제를 가진다. 하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리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방법으로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1. 하나님 말씀의 회복
루터의 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면 현재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요시야의 개혁은 성전 수리 중 발견된 모세의 율법에서 시작한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일도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로 돌아가려는 의도였다. 성전에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악행을 하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보호받으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지금의 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사람의 회복
요시야의 개혁을 통하여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힐기야는 대제사장으로서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성경에 먼지가 쌓이도록 하였고 요시야는 성경을 찾아 백성들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한 지도자의 나태로 말미암아 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았고 다른 한 지도자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사장들은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고 성전에서 장사하게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내어 쫓으셨다. 개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사명의 회복
요시야의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의 회복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신앙과 예배행위는 국가와 민족의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이다. 요시야의 개혁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적 차원이다. 우리 시대의 개혁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사회개혁이란 교회개혁에서 시작될 것이다. 교회는 사회에 대한 사명을 위해 힘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힘은 사회를 지배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르네상스가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미완성이었을 것이다. 종교개혁은 사회개혁의 전제이면서 동시에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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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16. 주일설교요약
새벽 이슬 같은 청년
시편 110:1-3, 디모데후서 2:22-23
호세아 14:5 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리라라고 한다. 이슬은 고요히 내리고 맑은 밤에만 내리는데 이런 이슬을 청년에 비유한다. 새벽에 온 땅을 적시는 이슬은 팔레시틴에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낮에는 때양볕으로 덥지만 새벽의 이슬로 모든 식물의 생명이 커가고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청년은 그 나라 역사의 아침을 여는 새벽 이슬이다. 청년은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로 젖게 하는 신선한 생명력의 발랄함을 보여준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은 어떤 청년인가
1. 거룩한 옷을 입는다.
옷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옷을 통하여 우리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옷은 활동과 생활과 사고방식을 나타낸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임금님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청함을 받고도 오지 않은 자만큼 큰 저주를 한다. 로마서 13:14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룩한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먼저 벗어야 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기독 청년은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 똑같아지기는 쉽다. 그러나 기독 청년은 시대를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의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2. 즐거이 헌신합니다.
헌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을 드리는 것을 헌신이라고 한다. 헌신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목숨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모리아에서 드리라고 하는 명령을 듣는다. 아들을 드리는 것은 자신을 드리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은 노인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청년인 이삭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죽기를 작정한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갔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 헌신은 억지가 아니라 기쁘게 해야 한다.
3. 주께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온갖 사람들이 주께 나아왔다. 주님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셨다. 예수님께는 사람들이 몰려들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리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님께 나아오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말씀이 있으며 고침을 받는다. 사도행전 2:17에는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한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죽은 사람이 아니라 환상이 있고 주님을 만나서 일어나 교회와 나라에 희망을 주는 청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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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9. 주일설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신명기 5:16, 에베소서 6:1-4
기독교는 효의 종교이다. 한자에서 효자는 늙은 부모를 자녀가 업고 있는 것을 뜻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는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아래에서 듣는다는 의미로 자세가 중요하다. 또한 순종도 주안에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안에서 하는 순종이 아니면 순종도 의미가 없다. 신약 성경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십계명 제5계명의 인용이며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는데 공경 없는 순종은 종의 태도이다.
1. 도덕의 시작
윤리를 떠난 기독교란 있을 수 없다. 기독교는 윤리를 가장 강조하는 종교이다. 시대가 변해도 성경의 진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동양의 삼강오륜의
첫째는 부위자강, 부자유친으로 부모와 자녀에 대한 것이고, 성경의 약속 있는 첫 계명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도덕의 시작은 사회 질서의 기초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이 경제논리에 의하여 움직여서는 안 된다.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잠들었을 때에 아들 함이 이 광경을 보고 나와서 형과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종의 종이 되게 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셨다.
2. 신앙의 첫 열매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잘 받들어 섬기셨고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걱정하셨다. 효는 신앙을 통하여 완성된다. 인륜의
첫째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지만 부모에 대한 공경은 인륜이면서 동시에 신륜이다. 부모 공경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것은 문자적인 첫 계명은 아니지만 으뜸 되는 축복의 약속이란 뜻이다.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을 가장 잘 선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의 비결을 잘 지켜 살려면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해야 한다.
3. 성공의 비결
우리가 성공하려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면 성공한다. 성공은 부모 공경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다. 성공의
첫째 내용은 잘 되는 것이다. 잘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형통한다는 뜻이다. 잘 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영혼의 부모인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의
둘째 내용은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다. 장수는 고대 관념에서 축복의 한 상징이었다. 이 말은 순종하므로 땅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된 환경이 없는 장수는 욕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를 공경치 않고 하나님을 공경치 못한다. 부모를 공경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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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2. 주일설교요약
천국의 주인
사무엘상2:22-26, 마태복음18:1-6
뉴욕 타임즈 메거진이 선정한 지난 천년의 밀레니엄 베스트로 인물은 엘리자베스 1세가, 도구는 나사못이, 패션은 지퍼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어린이이다. 예수님의 어린이에 대한 관점은 천국의 주인이라는 점이며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인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돌아오셔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고 다툼을 할 때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천국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어린이가 아닌 어른에게 주신 교훈에서 무엇을 배울까
1. 어린아이 같이 되어라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얘기는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다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 돌이켜란 말은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 변화를 의미하며 회개해야 어린이 같이 된다. 회개는 깨끗한 인간의 본심, 어린이의 심정을 회복하게 하는 약이다. 어른들은 감정을 숨기지만 아기들은 감추지 않고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어른들은 오리발을 항상 사용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수영할 때만 사용한다. 어린이는 신뢰와 믿음을 본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사무엘이 여호와와 사람에게 은총을 받은 것은 엘리의 아들들과 달리 세상을 몰랐고 영적 귀가 밝았기 때문이다.
2. 자기를 낮추어라
고난받는 종의 노래(사 53장)를 연상케 하는 말씀으로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린이의 모습이다. 자기를 낮추다는 말은 단순한 의미의 겸손이 아니라 멸시, 굴욕, 천대를 받으면서도 겸손한 것이다. 겸손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어린이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 어린이 입장이 되어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아야 진실해지고 겸손해지고 세상이 맑아 보인다.
3. 어린아이를 영접하라
문자적으로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냐 아니면 영적으로 자기를 낮춘 신자를 영접하느냐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실제로 유대에는 이런 형벌이 없는 듯하며 로마에는 이런 형벌이 있었다. 안드레는 어린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다. 만일에 어린이를 외면하였다면 오천명이 다 굶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 사회가 범죄없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 특히 어린이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믿음이 있고 감성이 있는 신지식인으로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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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2
5. 주일설교요약
할렐루야
시편 148:1-5, 요한계시록 19:1-6
기독교인들이 아멘과 더불어 원어 그대로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할렐루야이다. 좋은 의미를 가진 말이지만 너무 남용되어 그 의미가 퇴색된 말도 할렐루야일 것이다. 할렐루야란 제목의 영화에서는 사기꾼이 할렐루야를 하고 가장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한다. 비기독교인들도 아는 기독교의 고유 언어 중의 하나가 할렐루야일 것이다. 할렐루야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다. 시편에 23번 나타나며 계시록에 4번 나타나 성경 전체에 27번 나타나는 고유 언어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유대교 예배의 전승을 이어받은 것이다.
1. 세속 영역에서도 사용되었다
애굽왕 바로의 신하는 사라의 미모를 찬양하였고(창 12:15),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도 찬양을 받고(시 78:15), 불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 다곤을 찬양하였다(삿 16:24) 세속 음악과 교회 음악이 다른 것은 음악의 대상이 다른 것이다. 세속 음악은 대상이 사람이고 자기의 즐거움이지만 교회 음악은 대상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며 결국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세상의 음악은 잠시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지만 교회의 음악은 영혼을 영원히 기쁘게 한다.
2.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사용되었다.
시편의 대부분의 할렐루야는 송축하라, 찬양하라, 감사하라 등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하고 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시편에 나타난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을 포함하고 있다. 천사들은 여러 가지 역할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은 목소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찬양의 내용도 형식도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렐루야를 정확히 지켜야 찬송이 된다.
3. 일상 생활에서 사용해야 한다.
할렐루야는 예배에만 사용하는 예배 용어가 아니라 일상 용어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할렐루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시편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찬양의 대상이다. 시편의 마지막 절은 숨쉴 줄만 알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우리의 찬송으로 다른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안다. 할렐루야의 성경적 용법은 명령어이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길인 동시에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길이다. 할렐루야로 호흡이 있는 날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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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1
8. 주일설교요약
아멘
시편 106:47-48, 요한계시록 7:9-12
현재의 기도의 형식은 구약에 기초를 둔 것으로 기독교 초기에 이미 현재와 같은 기도의 형식이 자리잡았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끝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아멘은 성경 전체에 50절에 나오는 단어이다. 아멘은 확실하다, 진실한, 진리, 진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에 확실히 그렇게 되어지이다, 그렇게 해 주십시요라는 뜻이다. 아멘은 개신교에서는 기도, 찬송, 축도 다음에 사용하는 말로서 시편의 낭송, 성구의 낭송 다음에 사용되기도 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말
아멘은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말이다. 시편106:48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찌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할찌어다라고 한다. 예배시의 기도의 응답이며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고 아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신명기 27장에는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다. 레위사람들이 큰 소리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때에 백성들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아멘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믿음이 있다.
2. 진실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말
아멘이란 기도가 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아멘은 헬라어로 진실로의 뜻이다. 아멘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말이다. 요한복음에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25번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응답에는 진실함이 있어야한다. 아멘이 없는 기도는 불신앙이며 아멘이 없는 기도는 투정에 불과하며 아멘이 없는 기도는 내가 뜻을 먼저 세워놓고 하나님을 설득시키려는 어리석음이다. 아멘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도구이다.
3. 종국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
계시록 3:14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아멘이시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아멘이시다. 아멘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다. 진실하지 못하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그리스도는 진실성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사야65:16는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향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라고 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다. 진리는 아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응답하는 아멘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 아멘 하기를 즐겨하고 아멘을 높이자. 아멘이 더욱 우렁찬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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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20 설교방송(설교요약)
전쟁과 평화
사무엘상7:12-14, 야고보서4:1-3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49년이 되었고 3년만에 정전이 되었다고 하지만 지난 50여년간 우리는 전쟁 속에 살아왔다. 더구나 얼만전의 서해 교전 사건은 아직도 우리 나라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외국의 설문에서도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하였다. 사무엘의 시대에 하나님은 불레셋과 끊임없이 전쟁하는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하나님의 자연적인 방법으로 불레셋을 일시에 퇴각하게 하신다. 그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도움자가 되신 것을 믿고 돌을 세워 에벤에셀이라 하였다.
1. 전쟁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사무엘은 전쟁에 승리하였을 때에 비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의미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이 되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셔서 승리하게 하신 전쟁의 주인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셨고 여리고와의 전쟁에서도 무기도 아닌 양각나팔과 횃불과 항아리를 가지고 승리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싸우리라고 하신다.
2. 전쟁과 평화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편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편이 아닐 때에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편일 때에 그들은 이겼다.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쟁을 하셨기 때문이다. 사무엘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주신다.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의 생명을 상하지 않게 하신다. 궁극적으로 예수님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전쟁을 주시기도 하고, 평화를 주시기도 한다.
3. 하나님의 미래적 목표는 사람 사이의 평화이다.
사무엘은 국토를 회복하고 아모리 사람과의 평화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우리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신다. 사람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사람과의 평화가 없다. 사람은 손을 가지고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다.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만들고, 고쳐 쓰고,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전쟁 무기를 만들 줄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고쳐서 보습을 만들고, 낫을 만들어 전쟁이 아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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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
3. 주일설교
자녀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라
창세기 3:16
갈라디아서4:18-20
창세기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갈라디아서4:18-20,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어린이날은 1866년 미국에서 시작된 어린이 집단 세례일이었다. 당시에 어린이가 무시당하고 학대받던 시대에 사랑하고 세례주고,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획기적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린이들이 과잉보호를 받게 되어 어린이날 폐지론까지 나왔다. 어린이는 귀한 존재이다. 우리에게 자녀를 주시고 우리 사회에 어린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바울의 편지인 갈라디아서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한다. 또 고린도전서 고전 4:15에는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한다. 바울은 직접 낳은 자녀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뜨거운 애정을 표시한다. 우리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점검해 보자.
1. 자녀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부모
나의 자녀들아, 이 말은 애정이 넘치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셨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라는 용어를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한다. 솔로몬의 잠언에도 내 아들아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의 자녀에게 늘 사랑의 표현을 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내게 위탁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의 자녀란 내 소유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위탁하신 나의 자녀이다.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를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사랑을 받게 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부모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수고한다고 하였다. 바울이 수고하고 애썼던 것은 자기 자녀 속에 자기의 형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할 것은 우리의 형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형상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부모는 시시각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녀에게 담을 수 있도록 얘기하고 기도하고 본을 보여주는 삶이 필요하다. 가정은 최상의 학교이다. 가정은 학교보다 좋은 학교이며 가정은 교회보다 좋은 학교이다. 신생아에게 젖빠는 법을 가르치듯이 어려서부터 저절로 그리스도를 배워 몸에 익히게 하라는 것이다.
3. 해산의 수고를 하는 부모
해산의 수고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힘들고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의 수고를 의미한다. 하나님도 우리를 낳는 해산의 수고를 하셨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낳는 수고도 하시고 죽게 하시는 고통도 겪으시므로 인간의 가장 혹독한 수고와 고통을 경험하신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결혼한 경험이 없지만 해산의 수고의 공은 안다. 사람이 범죄하므로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지만 해산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구원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해산의 고통을 함으로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야 한다.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일은 좋은 부부관계이다. 좋은 부부관계에서 자녀를 위하여 늘 해산의 고통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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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8. 주일설교요약문
향기로운 냄새
레위기 1:3-9,
고린도후서 2:12-17
레위기1:3-9,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4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6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고린도후서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17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가 에덴의 범죄로 두절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제사를 통하여 대화를 계속하신다. 제사는 사람의 회개와 하나님의 사죄가 있는 하나님과의 사람의 대화이다. 출애굽은 희생을 드리는 제사의 목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속 사건이다. 레위기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다섯 가지 제사가 있으며 제사의 방법은 화제, 거제, 요제, 전제의 네 가지가 있었다. 가장 귀한 제사는 번제이며 가장 귀한 방법은 화제이다. 화제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이다.
1. 죽어야 향기로운 냄새
모든 생물은 산 것이 죽어야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죽여서 드린다. 산 것을 죽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였을 때 나비가 날아와서 앉는 쪽을 생화라고 하였다. 산 것이 향기가 있지만 참 향기는 죽을 때이다. 백합은 부서질 때 향기가 진동한다. 로마서 12:1에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한다. 제물은 죽어야 비로소 제물이 된다. 히브리서 9장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한다.
2. 믿음과 정성으로 드려야 향기로운 냄새
소의 번제(1:9)나 양과 염소의 번제(13)나 비둘기의 번제(17)나 곡물의 소제(2:2)나 구운 떡의 소제(2:9)의 마지막 결론은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한다. 부자의 소의 번제든지 가난한 자의 비둘기의 번제든지 곡물의 소제든지 어떤 제사든지 하나님은 똑같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제사는 제물에 있지 않고 바치는 자의 정성에 있다. 하나님은 양을 보시지 않고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기뻐하시지 않고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신다. 드리는 자의 믿음과 정성이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아벨은 믿음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태워야 향기로운 냄새
화제는 태우는 것이다. 짐승이든 곡물이든 태워야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하나님은 냄새를 좋아하신다. 창세기 8:21에는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라고 한다. 실상은 고기를 태울 때 나쁜 냄새가 나지만 순종과 정성의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로 여기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향기로운 냄새가 되셨다. 사랑하는 것이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희생함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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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3
1. 주일설교요약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사야 43:4-7
고린도전서 10:30-33
이사야 43:4-7, 4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0:30-33,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같은 일이지만 죽지 못해 하는 사람이 있고, 먹고살기 위해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생이지만 비관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낙관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생의 목적을 하나님께까지 승화할 수 있다면 가장 고상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장로교의 소요리문답의 1번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삶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활
하나님의 본질은 영광이다. 영광이란 일반적으로 빛을 의미하며 히브리어의 영광은 무겁다는 뜻이다. 요한일서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한다. 그 빛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을 그에게 다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동물과 사람이 다른 것은 사람은 의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이사야 43:7에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므로 영광을 돌려야 사람답고 보람을 느끼게 되어 있다.
2. 하나님 중심의 생활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중심이다. 생활의 중심이란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느냐 라는 것이므로 이것이 곧 우리의 사람됨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마치 태양계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게 될 때에 질서와 안정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중심의 생활은 자신에게 질서와 안정을 주므로 평안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당파, 소송, 우상숭배 등 문제가 많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인간적으로 불가하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문제를 인간적 문제를 해결한다.
3. 다른 사람을 위한 생활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이 세상에서는 결국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우상제물에 대한 문제는 찬반의 논란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자유함이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서로 협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주님도 기도문에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영광을 영원히 받으셔야 한다. 우리가 먹을 때나 마실 때나 무엇을 할 때나 이기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목적이 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도 기쁨이 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199
9.
1.
3. 주일설교요약
교회와 교제
시편 133:1-3, 로마서15:1-3
21세기를 준비하는 교회의 마지막 준비 과제는 교제이다. 21세기는 교제의 시대로서 교회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교제란 단순한 친교의 의미 외에도 교회의 구조나 심방 등 목회적 돌봄을 포함하는 확장된 내용을 뜻한다. 친교란 사도신경의 한 구절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중요한 한 내용이며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이상이다. 우리 교회가 21세기를 앞두고 교회에 대한 교제의 과제를 준비하여 21세기에 한국교회의 새로운 교제의 형태를 제공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교제의 의미
교제란 신앙생활의 특징이며 성도의 생활을 결정 지우는 용어이다. 또한 교회의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로서 신앙의 본질이다. 교제란 말의 어원인 코이노니아는 신약성경에 18번 사용되는 용어로서 바울서신에 많이 나오는 바울의 용어이다. 기독교가 십자가의 종교라고 하는데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횡적인 선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의미하는 종적인 선을 가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십자가의 복음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2. 교제의 내용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람과의 교제로 나뉘어진다. 하나님과의 교제란 예배가 그 내용이며 찬송, 기도, 말씀, 봉사등이 포함된다. 사람과의 교제란 사랑이 그 내용이다. 예배가 없는 사랑이 세속적 윤리로 전락하듯이 사랑이 없는 예배란 율법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교제란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요한 예배를 실천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제란 기독교인의 생활의 총체적 모습이다. 예배와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하며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개선해 준다.
3. 21세기와 교21세기는 새로운 구조를 필요로 한다. 산업사회로 대표되는 20세기와 정보사회로 대표되는 21세기는 확연하게 다르다. 산업사회의 기조와 정보사회의 기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까지의 교회의 구조를 새로운 세기에 맞게 바꾸어주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교제의 중요성이다. 교회가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심방과 구역의 구조를 재편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배와 사랑의 내용과 표현을 다시 재편하여 우리 교회가 교제가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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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2
7. 주일설교요약
잊을 것과 잊지 말 것
시편 103:1-7, 히브리서 13:13-17
인생의 역사란 마지막이 시작이다. 인생에게 절대로 끝이란 없다. 하나의 끝은 또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감사하는 것은 끝이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한해의 끝은 새로운 해의 시작이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시간을 새해라고 한다. 이미 타락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열심히 뛰어왔고 많은 것을 배운 한 해였다. 정말 없어서는 안될 한해였다. 힘들고 괴로운 해였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해가 필요하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망년의 계절에 잊을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해보자.
1. 잊을 것은 잊어야 한다.
잊어버림은 축복이다. 고통과 실패와 억울한 것들이 잊혀지지 않으면 못 살 것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란 기억만큼이나 큰 하나님의 은혜이다. 잊으니까 살지 잊지 않으면 살지 못할 것들이 많이 있다. 과거에 대한 망각은 현재에 대한 충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가능하다. 지난 1년 동안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은 눈높이를 낮추기 위한 투쟁이었다.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의 잘못을 잊어버리자. 기억도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면 이것이 배은망덕이다.
2.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은택
실생활에서 잊어버리는 것들은 괜찮은 것들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시편 103:2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한다. 잊고 싶을 만큼 힘든 한해였을지 모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택은 한해 동안도 우리에게 풍성하게 내리셨다.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난제가 겹쳤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이 크다. 구원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작은 삶의 부족 때문에 불평하면 가나안은 우리의 것이 못된다. 아무리 고기가 먹고싶고 가는 길이 험해도 구원하신 은택을 잊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3. 잊지 말아야 할 선행과 자선
히브리서 13:16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 사회는 건국 이래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고 하지만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올해는 구세군의 자선남비가 작년보다 6% 더 많아 13억을 예상한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국민의 저력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줄 알아야한다. 힘들었던 해이지만 그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과 은택은 잊지 말고 대신잊어야 할 것을 떨어버리는 해맞이가 되자.
199
8.
5.2
4. 주일설교요약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라
역대상 29:1-5, 골로새서 1:24-27
역대상 29:1-5,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2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3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4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5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골로새서 1:24-27, 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 받을 고통을 내가 대신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고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될 수 없고 아무 잘못 없는 분이 더럽고 추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잘못 있는 사람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죽을 수 없는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 작은 그리스도의 경지에 들어간 것같은 바울의 고백이다. 골로새서에 나타난 바울과 그리스도의 관계와 바울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1. 괴로움을 기뻐하라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면 억울해하고 분해하고 심지어 원수시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기뻐하였고 사실은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경제는 몇 사람이 망쳐놓고 고통은 분담하자고 하므로 억울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은 일부러 라도 고난을 받아들이고 괴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극단적 금욕주의가 했던 것처럼 육체에 고난을 주므로 영혼이 맑아지게 된다. 바울은 약할 때에 강하다고 하였고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우리도 고난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난을 의미하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하나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라는 가장 부끄러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 고난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남은 고난이 있다. 이것도 모자라서 얼마든지 더 받을 여유가 있다는 의미이다. 고난을 당하므로 우리가 평안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기꺼이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은 고난이다. 쿼바디스에서는 베드로가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다시 지려고 로마로 가신다고 하셨고 우리가 무거워하는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 하시려는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가 남겨놓은 유산이다. 예수님은 고난이란 값진 유산을 남겨주셨다.
3. 내 육체에 채우라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은 교회를 위하여라면 채운다는 뜻이며 다른 곳이 아닌 내 육체에 채운다는 뜻이다. 육체에 채워야 하는 이유는 육체는 고난에 약하기 때문이며 육체에 채울 수 없는 까닭은 육체를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셨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능욕을 받고도 기뻐하였다. 바울도 수많은 고난을 그의 몸에 채웠다. 예수님은 아무 고통 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구원하셨다. 우리도 편안한 가운데 예수님을 따라가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제자가 됨을 확인한다. 주님은 결코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주의 귀한 은혜로 상급을 주신다.
199
8.
5.10. 주일설교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아가 5:1, 에베소서 5:22-25
아가5: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에베소서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한국 전쟁 후 포로교환시에 자유의사에 따라서 갈 곳을 정하였는데 많은 공산군이 자유 대한으로 넘어왔고 미군들도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21명의 미군은 자기나라에 가지 않고 중립국 또는 공산국가로 넘어갔다. 조사결과 문제의 21명은 가정이 불화하고 부모의 사이가 좋지 않고 사랑에 굶주린 자들이었다. 결국 화목하지 못한 가정은 나라도 버리게 하고 이념도 바꾸게 만든 것이다. 가정은 천국을 설명한다는 말이 있다. 화목한 가정은 이미 천국 생활을 하지만 화목하지 못한 가정은 이미 지옥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정은 철저하게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부부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이다.
구약은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고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고 한다. 이 말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부족을 채워주어야 한다. 이삭이 사라가 죽은 후에 리브가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위로자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용기를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구약에서도 가정을 중요시하는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부부관계를 설명한다. 부부의 관계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와 같으면 늘 견고할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하듯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정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처럼 늘 든든한 기초를 가져야 한다.
2. 부부의 자세의 모범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부부의 자세의 기준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희생적 사랑이 가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원래 부모님의 은덕이란 철저하게 자기 희생적이듯이 부부의 관계도 희생적이어야 한다. 최근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정 파괴를 가중시키는데 이유는 있겠지만 가정의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의 모범이란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대로 자기를 비울 수 있는 희생 때문이며, 사람들과 같이 된 인간적인 자세이며, 죽기까지 복종하신 복종의 자세 때문이다. 부부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참 사랑의 관계일 수 있다.
3. 부부의 사명은 복종과 사랑이다.
성경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복종과 사랑이라고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여야 한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복종하란 말은 지속적 상태를 의미하며, 사랑하란 말은 지속적 습관적 행위를 의미한다. 베드로는 나아가서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권하였고 골로새서 3:19에는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부부는 항상 죄짓기 전의 아담의 고백인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가정들이다. 가정 중심의 미래 사회를 준비하며 우리의 가정들이 참 가정이 되도록 하자.
199
8.
4.26. 주일설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출애굽기 3:13-15
사도행전 3:1-10
출애굽기3:13-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사도행전 3:1-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가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름인데 이름은 자신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 대한 관념은 우리와 같이 이름을 지으면 그렇게 되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기 전에 가지신 예수님의 인격과 소명과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란 인간 예수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뜻으로 신앙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에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19회 나온다. 나사렛 예수는 천시된 이름이다. 천한 동네 이름을 예수님의 이름에 붙여서 나사렛 예수라 했지만 가장 귀한 이름, 가장 힘있는 이름이 되었다. 사도들은 가장 천한 이름을 가장 자랑하였다.
1.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치유의 도구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전 같으면 무서워 쩔쩔 매던 사람들인데 당당하게 기도하는 시간에 성전에 들어간다. 성전에 가던 중 미문에 앉아있던 걸인을 만나서 이전 같으면 돈을 주고받는 관계이었지만 이제는 돈 대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한다. 돈 대신 치유의 능력을 베풀었고 은과 금 대신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었다. 거짓 선지자도 주의 이름으로 치유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의 이름을 도용했지 의지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도용하지 말아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더 이상 천한 이름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며 가장 존귀한 이름이며 가장 의지할 이름이며 치유의 능력을 가진 이름이다.
2.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삶의 힘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기적이 문제가 되어 대제사장이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고 물었다. 무슨 권세 즉 누구의 이름이냐는 뜻이다. 이름은 권세인 것을 의미한다. 나사렛 예수 이름은 삶의 힘이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이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 전에는 내 신념으로 따르다 다시 고기 잡으려 바다로 돌아가고, 내 의지로 따르려다 다 버릴지라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내 힘으로 주님을 방어하려다 귀를 잘랐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는 중심과 순서가 바뀌었다.
3.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복음전파의 도구이다.
빌립이 먼저 예수님 만나고 나다나엘에게 전도할 때에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한다. 빌립은 다른 이름이 아닌 나사렛 예수를 전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온 인류를 구원 얻게 하는 유일한 이름이다. 이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복음전파의 도구는 우리의 지식이나 자랑이나 교회 얘기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뿐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는 예수 이름을 전하기 가장 쉬운 때이다. 이 때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하며 삶의 힘이 솟고 복음전파의 기회가 되게 하자.
199
8.
4.1
9. 주일설교요약문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기33:1-11 로마서3:21-24
창세기 33:1-1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야곱과 에서의 만남은 야곱의 두려움으로 시작한다. 20년간의 하란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올 때에 많은 떼를 모아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 외삼촌 집의 드라빔을 라헬이 훔쳐왔기 때문에 간신히 외삼촌의 추격을 피하였는데 다시 형 에서가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나왔다. 그 밤에 잠도 못 자고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도 얻는다. 자신이 잘못이 없으면 겁날 것이 없을 텐데 잘못한 것이 많으므로 두려워하였다. 야곱은 구약의 인물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은혜로 산 사람이었다. 구약에서 은혜란 하난이란 말로 마음이 기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1. 야곱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5절)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는 야곱의 네 아내와 열두 아들을 보고 이들은 누구냐고 하였고 야곱은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자신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부모를 골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남편과 아내가 세상에서 많은 남자와 여자 가운데 내 남편, 내 아내가 되게 하신 것은 이 땅에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내 남편으로,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내 아내로 만드신 은혜이며, 자녀를 이 땅에 내보내실 때에 나를 선택하셔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2. 야곱의 만남이 하나님의 은혜(8절)
야곱은 에서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내들과, 아들들에게 에서한테 절하게 하였고 에서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다. 야곱은 내 주게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위하여 야곱은 형의 은혜를 입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식구들을 절하게 하고 접근해 가는데 형의 은혜를 입기 이전에 이미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형과의 만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만날 때마다 은혜인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다 은혜이다.
3. 야곱의 소유가 하나님의 은혜(11절)
야곱은 에서에게 자신의 소유를 주었고 에서는 사양하였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라고 하여 자신의 소유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였다. 빈손으로 외삼촌 집에 갔지만 올 때에는 네 아내, 열두 아들, 수많은 소유와 함께 돌아온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지만 구하지 않은 물질, 장수, 부귀, 영화까지 다 주셨다. 우리는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 왔다는 것이 고백이 되어야한다. 내가 부지런히 일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소유에 하나님이 마음을 기울이셔야 소유가 넉넉하게 된다.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이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만남에, 소유에 은혜를 베푸
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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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20. 주일설교요약문
임마누엘
이사야 8:5-10, 마태복음 1:18-23
성탄절은 예수님께는 가장 슬픈 날이지만 가장 기쁜 날로 만드셨다. 하나님 없던 사람을 하나님 있게 하셨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 8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런 의미를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셨다. 성탄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탄생 때에 주어진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성탄의 의미가 살아나게 하자.
1. 성탄의 방법
사람이 세상에 오는 방법은 부모님의 몸을 통하여 온다. 그러나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시는 예수님은 죄인의 방법으로 오실 수 없다. 그 방법이 초자연적인 방법인 처녀가 잉태하여 이 땅에 오는 방법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단절된 자체가 죄이다. 단절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죄를 범한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2. 성탄의 이름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한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선한 목자, 등 예수님의 이름은 많다. 태어나실 때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고 구원자 외에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다. 죄가 분리라면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멀어지고 멀어졌던 하나님과 함께 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하셨다. 임마누엘은 그 이름이 구원이며 그 이름에 힘이 있다.
3. 성탄의 목적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목적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성탄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이다. 경제위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경제위기이다. 하나님은 큰 날개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며 원수를 패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을 하나님이 없는 백성이 결단코 이기지 못한다. 이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과 함께 구원을 체험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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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13. 주일설교요약문
내 입에 주신 말씀
민수기23:11-12, 요한계시록10:8-11
성탄절은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날이.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셔서 입으로,몸으로, 삶으로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모압평지에 왔을 때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두려워서 미디안의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한다. 발람이 발락왕에게 나아갔을 때에 왕은 저주하라고 하였지만 나는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신 말씀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말씀을 가지고 주신 말씀만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1.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
성경은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이라고 한다. 발람의 말씀의 근거는 여호와에게 있다. 우리 입의 모든 말씀이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되어야 한다. 즉 말씀의 기원이 하나님이시다. 말씀의 근거인 하나님은 말씀으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성경이 절대로 변치 않는 것은 여호와의 입이 명하신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가가 있고 힘이 있고 감동이 있다.
2. 축복의 말씀
발람은 이스라엘을 온전히 축복하는 말만 하였다. 발람의 입에 있는 말씀은 축복밖에 없고 저주가 없으니 축복밖에 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므로 복을 내리시기를 원하시고, 선을 행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된 말씀이며 맛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 되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고 갈 길을 밝게 비춘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축복인 것은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책이다. 이런 축복의 책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3.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씀
발람은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도 말씀이 입에 있다면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바울도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매를 맞고, 죽을 뻔하고, 옥에 갇히지만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우리 입에 말씀을 가지고 축복하는 말을 남김없이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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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1
7.주일설교요약문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전도서 12:1-8, 요한복음 6:26-27
전도서12:1-8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2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6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7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요한복음 6: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청년은 교회의 미래이며 소망이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에 미래적 소망이 있고 교회가 산다. 우리 모든 청년들이 꿈이 있고 장래에 소망이 있고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청년이기를 바란다. 청년들은 소망을 심고 진실을 거두어야 한다. 무엇을 위하여 일하느냐는 것은 중요한 생의 가치관이다. 흔히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위하여 일하게 되는데 이는 다 부질 없는 일이다. 오늘 성경은 분명한 해답을 제시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양식의 문제는 심각한 세계적 문제로 대두되는데 우리는 영의 양식을 구할 줄 알아야 하고 영의 양식을 위하여 일할 줄 알아야 한다.
1.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다음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는데 이들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도 표적도 아닌 떡이었다. 떡이란 먹어도 또 배고프게 마련인 것인데 이들은 일시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떡만 먹으면 사는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했고 부자와 나사로의 얘기에 나오는 부자가 그러했다. 광야에서의 제일 중요한 문제는 먹는 문제였고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데 성경은 이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 한다.
그런데 하늘 양식을 땅의 양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썩지 않을 양식을 썩게 하는 사람들이다.
2.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예수께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애쓰지만 잡고 나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반면에 생명이 있는 양식은 늘 가치가 변치 않는 것이며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망과 생명 가운데 사망을 선택하였고 이후로 생명보다 사망을 좋아하고 썩지 않을 것보다 썩는 것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당하여 애굽으로 피난하였다. 하나님은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도다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의뢰하는 돈이나 양식이나 지식이나 젊음이나 힘은 잠깐이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영원하다.
3. 인자가 주는 양식
썩지 않는 양식은 인자가 주는 양식이다. 다른데 가서 얻으려해도 얻지 못하고 인자만 주실 수 있는 양식이다. 영생하는 양식을 구하려고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500명을 동원하여 동방으로 보냈지만 구하지 못하고 죽었다. 애굽사람들은 영생하려고 미라를 만들었지만 죽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다. 만나는 중요한 양식이지만 오래 두면 썩었고 영원한 양식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은 영원히 주리지도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은 양식이다. 썩는 것을 썩지 않게 하는 방법은 썩기 전에 쓰고 주는 것이다.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슬기로운 우리 청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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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6. 주일설교요약문
여호와의 얼굴
민수기 6:22-26, 마태복음 18:10-14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는 성경해석에도 나타나는데 한국인은 성경해석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사고는 히브리적 사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서양인은 헬라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성경해석에 어려운 점이 많다. 얼굴이란 것도 히브리적 사고는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고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얼굴이 향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심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떠나셨다는 의미이다.
1. 여호와의 얼굴은 보호하시는 얼굴이다.
경제위기 이후에 달라진 것 가운에 하나는 사회에서 성공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조건은 능력이며 다음이 노력이다. 기능사회로 변함에 따라 인품이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는 사람은 이전에 비하여 크게 줄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성공의 조건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향하여 있다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은 인간 생존의 열쇠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 사회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절대적인 필요 조건이다.
2. 여호와의 얼굴은 은혜 베푸시는 얼굴이다.
성경은 여호와의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에게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비취면 우리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얼굴이 비취지 않으면 은혜는 베풀어지지 않는다. 지난 일년의 경제위기 시대에 하나님은 은혜의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고 은혜를 입게 하셨다. 이제 신용등급도 상승하고 투자적정국이 되었다고 한다. 슈바이처는 죽음에 포위된 생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인생은 하나님의 얼굴에 포위된 생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3. 여호와의 얼굴은 평강을 주시는 얼굴이다.
성경은 여호와는 얼굴을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인간의 평강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갈망은 평강인데 평강은 사람이 주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있는 동안 우리는 평강하다. 우리가 평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구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그 백성에게 향하였다. 하나님의 얼굴이 항상 우리를 향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얼굴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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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1
8. 주일설교요약문
자유함이 있는 곳
예레미야34:17-22,고린도후서3:12-18
예레미야34:17-22, 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19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21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2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고린도후서3:12-18,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인간 자산이다. 누구나 다 자유를 원하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유는 누릴 줄 아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최근에는 자살 사건이 많이 있다. 죽으면 자유하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오래 전 4대 자유를 발표했는데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결핍으로부터 해방 받을 자유, 어디서나 공포로부터 보장받을 자유이다. 이런 자유가 있다고 해도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참 자유는 죄에서 자유이다.
1. 자유함이 없는 구약
14절을 원문에 가깝게 읽으면 그 수건은 구약을 읽을 때까지 벗어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으니이다. 그리스도 없이 구약을 읽으면 마치 수건을 쓰고 읽는 것이나 같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불완전한 구약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완전하게 되지 못하고 스스로 완전케 될 수도 없다. 율법으로 말하면 제일인 모세도 율법적으로는 완전치 못한 사람이었다. 수건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쓰던 탈릿을 의미한다. 회교 여인들이 쓰는 차도르도 얼마나 부자유하겠나 구약은 이것과 같이 자유함이 없기에 수건을 벗어야 한다.
2. 자유함을 얻는 법
16절은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오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한다. 자유함을 얻는 법은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수건을 벗는 법은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사
람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그에게 비추어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은 벗겨지고, 구약의 뜻은 선명하게 된다. 율법은 온갖 형식과 전통들이 숨통을 죄는 것므로 유대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도 율법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관습이 신앙인줄 알고 그것을 움켜쥐고 말씀보다 교회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수건을 쓰고 보는 것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3. 자유함이 있는 신약
17절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율법은 의문이니 율법이 있는 곳에 속박함이 있느니라이다.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로 십자가에서 모든 속박을 끊으셨다. 그리스도는 자유케 하는 권능이 있다. 주의 영은 자유케 하는 영 이며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다. 율법은 밖에서 속박하고 죽이나 영은 안에서 살리고 해방한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도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자유함이 있는 곳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을 벗고 자유를 누리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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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11. 주일설교요약문
물동이를 버리고
신명기 10:12-19, 요한복음 4:27-30
신명기 10:12-19,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요한복음 4:27-30, 27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한복음은 대화의 책이다. 서두에서는 그리스도를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셨고 대화로 오신 그리스도는 나다나엘, 니고데모, 우물가의 여인 등과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우물은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굉장히 중요한 생활 수단이며 생명과 연관된 것이다. 성경은 이삭과 야곱이 우물을 팠던 일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것은 물과 공기와 햇빛이다. 그 중에서 물은 인간생존의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관심은 육체의 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다.
1. 예수님은 생수이다.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물 얘기로 시작하신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공급자이시며 생수 그 자체라고 하신다. 세상의 물은 점점 오염되어 가고 있고 마시면 마실수록 몸에 해롭기 때문에 생수가 아니다. 왜 예수님은 생수일까 물은 형식이 없으며 이것이 액체의 특성이다. 자신의 모양은 없지만 다른 것의 모양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물이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변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맞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이라는 형식도, 남자로서 여자라는 형식도 넘어서셨다.
2. 여인은 물동이를 이고 왔다.
예수님의 관심은 생수지만 여인의 관심은 아직은 물동이다. 물동이는 물을 위한 것이지 물동이 자체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물이 없으면 물동이도 필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생수는 알맹이며 물동이는 껍데기이며 생수는 내용이고 물동이는 형식이다. 이 여인은 생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고 물동이에만 관심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사람들은 내용보다 형식에 관심을 가진다. 이것이 구조조정의 요인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내용보다 형식에 관심을 가지며 속은 드러내지 않고 겉만 가리는 쌈문화가 발달한다.
3.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갔다.
물동이를 이고 온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갔다. 물동이를 버린 것은 더 이상 물동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의 물인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물동이는 아무 것도 아니며 더 이상 보존의 가치가 없다. 참 내용을 얻은 다음에는 형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동이를 가지고 올 때는 체면이 문제였고 형식이 문제였지만 물동이를 버리고 갈 때에는 더 이상 체면이나 형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동이를 버려야 증거할 수 있다. 사회의 개혁이나 기업의 구조조정은 물동이를 버리는 일이다. 내용은 변하지 않고 형식을 언제나 버릴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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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4. 주일설교요약문
자기를 속이지 말라
레위기 25:17, 고린도전서 3:18-22
레위기 25:17,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린도전서 3:18-23, 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최근 사회의 정황들은 마치 서로 속고 속이며 사는 것과도 같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는 말세에 대한 징조가 있는데 바울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다가 자신이 속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레위기 25:17은 깊은 뜻은 서로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까닭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속이지 않는 진실한 삶의 근본이다.
1. 지혜 있다 하지 말라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가 있다고 착각한다.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이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며 이것이 스스로 속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지혜에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반대로 산다. 이것이 지혜롭지 못한 삶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겸손을 권한다. 겸손이란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또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2.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스스로 속는 것은 사람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식견으로 사람들은 자랑을 많이 한다.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의 지식, 인간의 소유 등을 자랑하며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바울은 자랑할 것은 자신의 약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자랑할 것이 없음은 모든 것이 주께로 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이나 소유나 존재 자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솔로몬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인간적인 것을 자랑할 수 없는 항상 부족한 존재이다.
3. 내 것이라 하지 말라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고 이 것 때문에 그는 죽어 음부에 가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것이지 내가 소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의 자세를 가질 때에 가장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지혜를 얻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199
8.
9.2
7.주일설교요약문
생명나무 가에서
창세기3:22-24, 요한계시록22:1-5
도시의 빌딩 숲 속에 살다가 가끔은 나무 숲 속에 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면 좋을 것이다. 숲은 산소를 공급하고 머리가 맑아지고 머리에 산소가 많이 공급되어야 건강하고 상쾌하게 된다.
그러므로 숲은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호흡하며 사는 곳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이다. 생명나무 사이로 거닐며 살게 되니 영원히 사는 생명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제3일에 나무를 창조하셨다. 에덴 한가운데 생명나무를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타락하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시 곁에 두게 하신다.
1. 생명나무는 어린양의 보좌를 중심으로 심겨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고 생명수 강이 보좌에서 흘러내리며 강 좌우에 길이 있는데 그 길에 생명나무가 12가지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무성하다.생명수 강의 근원은 어린양의 보좌이고 생명나무도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심겨있다. 어린양은 예수님이신데 심판자를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심판은 사망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려는 의도이다. 어린양에게서 생명이 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만이
생명을 창조한다. 예수님도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셨다. 바울도 사도행전 17:25에서 하나님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하였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공급받아 생명이 필요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자.
2. 생명나무는 생명수 강 좌우에 있는 나무이다
생명나무가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생명수를 마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수가 우물가의 여인에게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 어린양의 보좌에 근원을 두고 흘어나는 물은 영생하는 물이다. 엘리사는 여리고의 샘물에 소금을 뿌려 물을 깨끗하게 하였고 토산이 많아지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뿌려졌기 때문에 물이 깨끗해졌다. 나무는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고 늘 풍성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물을 마시고 영혼을 위하고 영혼이 배부르고 마음을 기름지게 하는 것을 공급받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생명나무 보다 선악과를 선택한 인간은 지금도 죽음의 물을 즐기며 살아간다.
3.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잎이 무성하다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나무는 12가지 열매를 맺어 모든 사람이 달마다 풍성한 실과를 얻게 한다. 에스겔 47:12의 강 좌우 가에는 각종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라는 말씀의 에스겔이 본 환상도 요한의 환상과 일치한다. 하나님이 타락하기 전 인간에게 제일 먼저 먹게 하신 것을 다시 먹게 하신다. 첫 아담이 실패하여 먹지 못하게 불칼로 막으신 생명나무 열매를
둘째 아담을 통하여 풍성하게 먹게 하신다. 열매는 하나님 좋아하신다. 열매 있는 나무를 좋아하시며 성도가 열매가 되기를 바라시며 성도들이 세상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 나라 생명나무에 처음 익은 그리스도의 열매로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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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13. 주일설교요약문
뽕나무 위에서
역대하 1:14-15, 누가복음 19:1-10
역대하 1:14-15, 14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15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같이 많게 하였더라 누가복음 19:1-10,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에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고 하신다. 누가복음의 삭개오의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소경 바디매오의 사건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바디매오는 여리고 입구에서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구원을 얻게 되며, 삭개오는 여리고 출구에서 예수님을 만나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 뽕나무는 성지에서 흔한 나무로 삭개오에게 뽕나무는 흔하였지만 은혜스러운 나무였다. 우리에게도 흔하지만 은혜 받을 만한 기회가 얼마든지 많이 있다.
1. 왜 뽕나무에 올라갔나
삭개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였다. 삭개오의 평소의 관심은 얼마나 가진 사람인가라는 소유였지만 이제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은 억지가 아니라 자의였다. 하나님을 보려고 호렙산에 오라 갔던 모세나 가정적 실패 후에 벧엘로 올라갔던 야곱도 스스로 하나님을 보기 원했던 것이다.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뽕나무에 올라갔다. 키가 작은 것은 자기 탓이며 사람이 많은 것은 남의 탓이다. 뽕나무는 이 두 가지 장애물을 동시에 치유하는 방법이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 탓과 남을 탓을 다 극복해야 한다.
2. 왜 내려오라고 하셨나
뽕나무에 오르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에 필요한 우리편의 요건이며, 내려오는 것은 예수님 편의 요건이다. 뽕나무는 예수님을 보는 장소이지 만나는 장소는 아니다. 뽕나무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장소이지 만난 이후의 장소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뽕나무는 더 이상 필요 없다. 구경과 만남은 다르다. 지금까지는 예수님 구경이고 이제는 예수님 만남이다. 지금까지는 호기심을 가지고 뽕나무 위를 올랐지만 이제는 영접하기 위하여 뽕나무에서 내려와야 한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예수님을 관찰하고, 구경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보는 뽕나무 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계속 뽕나무 위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올라가는 용기보다 내려오는 결단이 더 필요하며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3. 내려와서 무엇을 하나
내려오라는 말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삭개오가 진정 원하였던 것은 뽕나무 위가 아니라 아래였다. 단순히 보고자 했던 삭개오의 소원은 그 이상의 은총으로 받았다. 작은 소원이 큰 은총이 되었다. 우리의 보고자 하는 작은 소원은 우리 집에 들어오시는 큰 은총으로 주어진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토색한 것을 네배로 갚겠다고 한다. 회개에는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 만나면 회개는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고 하신다. 구원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삭개오는 소유와 구원을 바꾼 것이다. 소유에 관심을 가진 뽕나무 위의 구경꾼이 아니라 구원에 관심이 있다면 뽕나무 아래의 영접한 자가 되자.
199
8.
9. 6. 주일설교요약문
로뎀나무 아래서
열왕기상 19:1-8, 로마서 8:35-39
열왕기상 19:1-8, 1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로마서 8:35-39,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지난달에 북한에 가서 로뎀제약회사를 착공하고 돌아왔습니다. 남북 합영회사로는 분단 후 처음이어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로뎀이라고 이름한 것은 다시 소생하는 관계가 되기 위한 바람이 담겨져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신을 섬기던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런 승리 다음에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세벨의 보복으로 그는 브엘세바의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로뎀나무 아래의 경험은 열심히 살려고 하는 우리와 우리 민족의 경험입니다. 죽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이겨내는 비결을 봅시다.
1. 로뎀나무 아래는 좌절과 포기의 순간입니다.
엘리야는 그의 고통과 분함을 참지 못하여 죽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이런 감정은 우리 국민의 현재의 감정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보고 죽기를 청하였고 도마는 예수께서 다시 유대로 가시려 할 때에 죽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엘리야가 범한 가장 큰 죄는 실망이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잘 쓰는 무기라고 합니다.
죽기를 자청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야가 좌절한 것은 자신의 열심만 특심하다고 한 자만심과 자신만 고통을 당한다는 고독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큰 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일만을 볼 때에는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2. 로뎀나무 아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불쌍히 보시고 천사를 통하여 먹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좌절과 실의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다시 힘을 얻도록
먹이십니다. 실제로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잘못된 관심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에 물에 빠졌으며,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가나안인들을 보았을 때에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포자기와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하시고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십니다. 엘리야가 세상의 권력과 여건을 바라보다가 다시 하나님을 바라본 자리가 로뎀나무 아래였습니다.
3. 로뎀나무 아래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의 자리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엘리야는 일어나 힘을 얻고 40주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옛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음식을 먹고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40장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 어려움을 당한 우리 민족에게도 새 힘을 얻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경제위기이후 다른 나라에서는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 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많이 팔리는 것이 소주와 삼겹살이라고 합니다. 지혜를 구하며 어려움을 이겨낼 것인가 아니면 좌절과 한탄 가운데 지낼 것인가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재기의 엘리야를 배워서 경제위기 한파를 슬기롭게 이겨내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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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1. 주일설교요약문
결실하는 신앙
시편 92:12-15, 마태복음 13:3-8
시편 92:12-15, 12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13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14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15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마태복음 13:3-8,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추수기에 태풍이 불어 수확에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아무리 여름 내내 농부가 수고한다고 하더라도 한해의 농사는 망치게 된다. 수고한대로 먹는 것은 축복이며 뿌려진 씨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씨는 하나이지만 뿌려지는 곳에 따라 열매를 맺기도 하고 맺지 못하기도 한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마음밭에 따라 천태만상의 결과를 가지고 온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열매 있는 나무가 된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1. 타인의 방해가 없어야 결실한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방해를 제거해야 한다. 최근에는 추수기가 된 벼를 훔쳐가는 도둑이 생겼다. 가장 악랄한 추수의 방해자이다. 말씀이 분명히 뿌려졌지만 사단이 와서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은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이다. 말씀은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타인의 방해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씨가 뿌려지자 새들이 와서 먹고 열매가 맺히자 새들이 와서 열매를 파먹는다. 굳은 마음 때문에 말씀이 귀에 들려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사위들이 그러하였다.
2. 자신의 방해가 없어야 결실한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방해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해가 없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방해다. 지면이 얇은 땅은 해가 나면 타고 만다. 해는 자라게 하는 절대적인 요인이지만 없어지는 것은 자신의 탓이다. 또 가시밭에 뿌려진 씨같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결실하지 못한다. 이것도 자신의 방해이다. 태풍에도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달려있는 과실들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과실들이 대학 입시생들에게 인기 있는 상품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인기 있는 백성이다.
3. 방해없는 은혜로 끝까지 결실한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좋아야 한다. 기후도 좋아야 하고 마지막의 재해도 없어야 한다.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지고 좋은 조건을 가져야 많은 결실을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진지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였다. 이런 마음이 옥토로 결실한다. 우리에게 열매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의 사람됨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한 시절만 과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생명나무처럼 달마다 열두 가지 과실을 맺는 사람들이 되어 늙어도 결실하는 마지막 태풍에 떨어지지 않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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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20. 주일설교요약문
은혜의 완성
창세기 33:10-11, 고린도후서 8:1-15
루이스 윅스목사
창세기33:10-11, 10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고린도후서8:1-15,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7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有餘)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린도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많은 규범뿐만 아니라 특별한 사항들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는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인 돈이나 가난 또는 베풂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재물을 드리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서 권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되 하나님께 대해서 올바르게 응답하는 자세로 드리며 심지어 우리가 어떻게 곡물들을 수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곡식을 거둘 때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얼마만큼 남겨두라고 성경말씀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의 청지기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게 시간을 초월해서 베풀며 선한 의미에서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주셨다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타인을 위해 항상 마음을 열고 많이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많이 베풀어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볼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다양한 신학적인 것 중 사도바울이 말하는 중요한 한가지는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이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라는 얘기입니다. 이 사이클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름 받고 있는 소명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프리카 가나의 한 장로교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헌금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들의 헌금을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면서 헌금함에 넣고는 다시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헌금이 다 끝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를 한 후 다시 두 번째 헌금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웃으면서 또 춤을 추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성스럽게 드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는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기 위해 소명 받은 사람이며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해 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기뻐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면서 살아가는 과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일은 가능하며 성령께서 역사 하심으로써 또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한국은 지금이 위기이며 치유 받아야 할 대상이다. 성경의 국가에 대한 사상은 국가에 대한 애국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본회퍼는 국가를 하나님의 위임과 연결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대한 신적 위임이 국가이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관심을 가지며 국가에 대한 봉사를 위해 받은 위임은 대리권을 가진다. 예수님도 바울도 국가에 대한 애정이 극진하였다. 국가가 치유 받고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자.
1. 국가는 하나님의 손에 있다.
예레미야는 토기장이와 질그릇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비유하고 있다. 토기장이의 손은 같은 질흙이지만 여러 가지 그릇을 만들어낸다. 진흙은 보잘 것 없지만 이것을 높은 열에 구우면 그릇이 되고, 아름다워지고, 빛이 난다. 진흙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불이 그릇이 되게 한다. 국가란 국민과 국토와 주권이 함께 있어야 되듯이 개인도 마찬가지이다. 토기장이의 비유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상징한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서 우리 나라와 우리를 지으셨다.
2. 악에서 돌이키면 국가를 치유하신다.
8절은 만일 나의 말한 그 민족이 그 악에서 돌이키면 내가 그에게 내리기로 생각하였던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겠고라고 한다. 이 한 절은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시는 약하심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강한 자만이 돌이키고 양보하는 자는 강한 자이다. 우리가 돌이키면 하나님이 돌아서신다. 우리가 돌아서는 것은 '슈브'란 말로 회개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돌아서심은 '나함'이란 말로 용서를 의미한다. 국가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대한 순종여부에 달렸다. 국가의 병이란 근본적으로 치유 받아야 한다.
3. 그리스도가 국가를 이렇게 치유하신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도덕적 위기를 치유하신다. 우리 나라는 전통적 인간관계의 가치관을 상실하고 있다. 정치윤리나 봉사정신도 실종되고 있다. 그리스도는 국가의 경제적 위기를 치유하신다.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을 그리스도는 고쳐 주기시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그릇된 관행과 생활풍습을 고치시기를 원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분열된 국가를 하나되게 치유하신다. 주기도문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나라에 임하게 하면 치유된다. 우리 나라를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로 인정하면 이것이 곧 국가의 치유이다. 예수 믿고 우리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로 인정하게 하는 것이 곧 국가 치유의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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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8.1 설교방송 (설교요약)
냉수 같은 그리스도인
잠언 25:11-13, 마태복음 10:40-42
성경의 물은 은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다. 비가 은혜의 상징인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며 강도 은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심판의 상징이다. 오늘의 본문은 추수철의 눈의 냉기라는 뜻으로 찌는 더위에 레바논의 헬몬산에서 눈을 가져와 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더운 여름에 추수하는 성지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눈으로 만든 시원한 냉수를 공급하는 것은 가장 상쾌한 일이다. 충성된 자의 어떤 면이 보낸 자에게 얼음 냉수 같을까
1. 시원하게 하는 사람
충성된 사자는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고 하였다. 얼음 냉수의 제일 상징은 시원하게 하는 것이다. 시원한 것이 무엇일까 시원한 것은 편안한 것을 의미하며, 이목구비가 뚜렷한 것을 의미하며, 막힘이 없는 것을 의미하며, 답답하지 않고 열린 마음의 자세가 있는 것을 의미한다. 여름날에 시원한 냉수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막힘이 없이 열린 자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을 덥고 열 받게 만들지 말아야 한다.
2. 기쁘고 만족하게 하는 사람
잠언 25:25은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한다. 애 타는 사람에게 갈증을 해소하는 소식을 주는 일은 냉수 같은 일이다. 가장 큰 갈증은 듣고 싶은 소식이다.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의 생사에 대하여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었다. 자식을 잃은 부모가 자식이 돌아올 것 같아 몇 해를 대문을 잠그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기다리는 부모에게 기쁜 소식은 목마를 때의 얼음 냉수 같은 일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한다. 가장 기쁜 소식은 복음일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가장 기쁜 편지의 배달부이다. 갈증을 느끼는 사람들, 배고파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복음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사랑으로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
3. 동정을 베푸는 사람
마태복음 10:42에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한다. 동정심이란 같이 아파하고, 같이 고파하고, 같이 슬퍼하고, 같이 웃고, 같이 우는 마음이다. 내가 목마르면 저 사람도 목마르겠지 하고 냉수를 대접하는 마음이다. 물이 귀한 사람들에게 냉수를 대접하는 것은 어떤 것보다 귀한 동정심이다. 냉수 한 그릇은 시원케 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우리 조상들의 삶에는 냉수 한 그릇의 동정심이 있었다. 더울 때 냉수 같은 그리스도인이 되어 충성된 그리스도의 편지 배달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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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2
1. 주일설교
셋째 하늘
시편 148:1-4, 고린도후서 12:1-4
비행기를 타고 조금만 높이 올라가면 적도나 북극이나 비슷하다. 하늘에서 바라보는 땅은 전부 아름답다. 조금만 더 높이 올라가면 세상의 갈등도, 이해관계도, 초월할 수 있다. 중국 장자의 책 서두에 붕(鵬)이 등장하는데 높이 올라가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소설 갈매기의 꿈에는 더 높이 올라가는 새가 더 멀리 본다는 평범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더 높이 올라가서 인생을 보고 있다.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고난을 피력한 바울은 12장에서 신비한 영적 체험을 말하고 있다. 바울의 환상을 통하여
셋째 하늘의 의미를 보자.
1. 영적 체험의 장소
바울의
셋째 하늘은 바울의 신비한 영적 체험의 자리이다. 바울의 신비한 영적 체험과 육적인 가시로 당하는 고통이 공존한다. 바울은 이런 신비한 체험을 자신의 자랑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14년전이란 역사적 사실을 강조하고 자신을 3인칭화한다. 신비한 체험이 전적으로 주께로 말미암은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바울은 주의 환상과 계시라고 하고 바울은 내가 갔다고 하지 않고.이끌려 갔다고 한다. 예수님은 변화하시려고 산에 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시려고 가셔서 변화하신 것이다. 모든 영적 체험이 나의 주체나 의지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계시는 장소
유대인의 관념은 하늘을 셋으로 나누는데
첫째는 보이는 하늘이고
둘째는 별이 달려 있는 하늘이며
셋째 하늘은 최고의 하늘 즉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라고 한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하늘을 하나님의 처소라고 하고 하늘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쓰이기도 하였다. 바울의
셋째 하늘 경험은 하나님이 계신 곳을 방문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는 자
리를 성경은 보좌라고 하는데 왕의 자리를 의미한다. 신비한 영의 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자리에도 참여한다. 이런 경험은 바울 만의 경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경험할 수 있다.
3.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는 장소
낙원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상징하기도 하였고 신약에서는 영원한 나라(눅 23:43) 혹은 승리자가 갈 자리(계 2:7)를 상징하였다. 바울은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사람에게 공개하지 않는 하나님의 비밀을 공개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보좌에 가면 하나님의 비밀도 공개하신다. 바울이 경험했던
셋째 하늘은 누구나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갈 수 있고, 가야 하는 장소이다. 바울의 신비한 경험의 고백은 자신의 고통의 고백 뒤에 나온 고백이다. 우리도 세상의 고통 뒤에는 신비한 체험을 맛보게 하실 것이다. 이 신비한 경험을 맛보는
셋째 하늘의 백성이 되자.
이번 설교방송은 김형태원로목사의 특별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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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4. 주일설교요약
20세기 최후의 주자들
사사기 10:1-4, 고린도전서 9:24-27
첫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의 성숙한 신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엡 4:13-16에 그리스도인의 성숙은, 신앙과 지식이 일치한 온전한 사람이며(13), 세속적 풍조와 유혹에 요동하지 않는 것이며(14), 사랑과 진리로 그리스도인에게까지 자라나는 것이다.(15-16) 우리는 그동안 사회와 교회의 이중문화권 속에서 위선적 미숙한 신앙생활 상태에 있었다. 이제 우리는 이기적이며 주관적인 자기 세계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달려가는 성숙한 신도들이 되어야 하겠다.
둘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에 일어날 환난에 대비해야 하겠다.
20세기는 전쟁의 100년이었다. 딤후 3:1-5의 경고를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평안보다 하나님의 심판을 우리는 깨닫고 조심해야 하겠다. 히 12:1-10의 말씀 처럼 우리는 가족을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 피곤해서 낙심치 말고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예수를 바라보고 인내해야 한다. 그리고 자녀를 사랑으로 책망하는 하나님의 징계를 원망치 말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세상의 번영과 연락에 취하지 말아야 하겠다.
셋째로 우리는 20세기 최후의 신앙의 주자들이 되어야 하겠다.
우리는 지나온 날들을 감사하는 동시에 21세기 차세대에게 바톤을 잘 넘겨주도록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하겠다. 고전 9:25-27에 주자의 지침으로 자기를 이기고 절제하는 것, 달리는 방향은 하나님의 나라이며 싸움의 대상은 불의한 세력이라는 것, 그리고 남에게 전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교회성장에 성공하고 자기성장에 실패하는 경우이다. 빌 3:10-14에 우리의 달리는 목표는 부활이며, 아직 우리는 미완성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그리고 뒤에 것은 잊어버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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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7. 주일설교요약
열린 하늘
창세기 7:6-12, 마가복음 1:8-13
예수님의 공생애는 하늘을 여는 일로 시작하셨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그 위에 임하시고 음성이 들려왔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늘을 여신 것은 선지자도 계시도 끊어진 것을 다시 이으시려고 하신 것이다. 마태와 누가는 하늘이 열리고라고 하였지만 마가는 하늘이 갈라지고라고 하였다. 갈라진 것은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갈라지는 것을 묘사한 단어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 구속을 의미한다. 하늘이 열리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구원을 여신 것이며 인간에 대한 동정과 사랑을 여신 것이다.
1. 하나님을 듣고 보게 한다.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씻는 일이 아니라 공생애 시작에 삼위 하나님이 회동하신 것이다. 하늘의 성부 하나님이 이 땅에 보내어 30년을 준비하게 한 아들 성자에게 공생애를 시작하도록 공생애의 신임장을 주는 장면이다. 세례시에 들려온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음성은 변화산에서도 들려온다. 하늘이 열리면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며 음성이 들려온다.
하늘이 열리면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것처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화평하며 하나가 될 것이다.
2. 사람을 향한 멸망과 비전을 보게 한다.
창세기 7:11에는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여신 하늘의 멸망의 문이다. 에스겔 1:1에는 제 삼십년 사월 오일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더니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이상을 내게 보이시니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구원의 계획을 이상으로 보게 하신다. 하나님은 하늘을 여시고 하나님의 멸망과 구원을 알게 하신다.
하나님은 모르게 하신 장래의 일을 하늘을 열고 보여주실 때가 있다 이것을 성경은 이상 중에라고 한다. 계시록 4:1에는 하늘의 열린 문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신다.
3. 고난 중에 하늘의 영광을 보게 한다.
사도행전 7:56에는 스데반이 순교할 때 말화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하였다. 스데반은 열린 하늘을 통하여 예수님과 그 영광을 모았다. 야곱은 열린 하늘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자가 왕래하는 것을 보았으며 예수님이 나다나엘에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고난 받는 사람에게 하늘을 열고 하늘의 찬란한 영광을 보게 하신다. 하늘이 열리면 예수님이 보이고 성령이 강림하시며 막힌 담이 헐린다. 눈을 들어 열린 하늘을 보며 고난을 이기는 은총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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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2
8. 주일설교요약
위로의 신앙
시편 119:49-56, 고후 1:1-7
위로라고 하는 말은 버리지 않고 항상 곁에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버리지도 않으시고 떠나지도 않으신다. 이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신약성경에서의 위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역과 연관시킨 말이다. 헬라어에서의 위로는 불러서 곁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보혜사란 말도 같은 어원으로서 위로자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고린도후서는 위로의 서신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바울은 고난을 당하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위로의 서신을 보내고 있다.
1.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나님
바울은 하나님을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를 위로하시고 환난을 당한 성도들을 위로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울을 곁에 불러 바울 되게 하시고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성도들을 위로하신다. 아브라함을 불러 곁에 두셨고 홀로 도망하던 야곱도 불러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셨다. 위로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가 홀로 있는 것 같아도 어디에 가든지 주의 손이 인도하시며 모든 곳에 내가 가는 곳에 먼저 가 계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천사와 같은 사람을 만나 위로 받게 하시고 아무도 모르게 죄를 지으려해도 곁에서 권고하시고 돌이키게 하신다.
2. 그리스도를 통한 위로
5절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한다. 본문에는 '위로'란 단어만 많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환난', '고난'도 세 번씩 나온다. 그리스도의 위로는 고난 때문이다. 고난이 없으면 위로도 없다. 사람들이 약자 편이듯이 하나님도 약자 편이시다. 우리는 고난과 환난이 끊임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넘친 것같이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친다. 위로는 불러서 곁에 두는 것인데 예수님은 불러서 곁에 두어 하나님이 함께 하신 임마누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도록 위로를 받는다.
3. 우리도 위로하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환난 중에 있는 자를 위로하게 하신다. 우리가 위로 받는 것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다. 성도 교제의 구체적 방법이며 최고의 방법이다. 하나님이 위로자이시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위로하시며 보혜사 성령께서 위로자이신 것같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위로자가 되어야 한다. 이사야 40:1에는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신다. 위로는 하나님의 명령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위로를 받고 우리의 말을 듣고 위로를 받도록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는 성도가 되자.
199
9.
2.2
1. 주일설교요약
기쁨의 신앙
시편 4:7-8, 로마서 15:1-3
성경의 인물들은 발랄하고 활기차고 기쁨에 차 있었다. 참 기독교인은 기쁨이 있어야 하고 기독교인의 이미지는 기쁨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면 참 기쁨이 무엇인지 모른다.
인간의 일곱 가지 감성 가운데 제일 먼저가 기쁨(喜)이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도 희락이 있다. 바울은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였다. 기뻐하다(aresko)는 말은 신약성경에 열일곱번 나타나는데 그중 열세번이 바울 서신에 나타난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기쁨을 빼앗기지 않고 기쁨의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1.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는 신앙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기뻐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기쁘게 하려는 수단이 죄를 짓게 만든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려는 극단적인 방법이 고행(Penance)인데 현재는 고행이 아니라도 자신을 기쁘게 하지 않는 신앙이 필요하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온갖 수단을 다 쓰는 시대에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자.
2. 이웃을 기쁘게 하는 신앙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고 한다. 이웃을 기쁘게 하면 선을 이루는 것이 되고 덕을 세우는 일이다. 성경은 이웃을 기쁘게 할 것을 권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체감되는 가장 큰 중요한 문제의 핵심은 남을 기쁘게 하려는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0:33는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한다. 남의 유익을 얻게 하는 것은 구원을 얻게 하는 길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배달하는 배달부이다.
3.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신앙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라고 한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다는 뜻이다. 로마서 8:8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고 한다. 육신을 벗어나야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유대 사회에서는 부모님이 돌아가도 한 달 이상 슬퍼하지 말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즐거움, 기쁨, 웃음을 좋아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이 주신 이 기쁨을 빼앗기지 말고 매일 기쁨이 넘치는 날들이 되도록 기뻐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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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
4. 주일설교요약
부활과 평안
예레미야 23:5-8, 요한복음 20:19-23
부활절은 가장 기쁜 날이다. 사망을 주는 마귀의 권세가 그리스도의 부활로 지배된 날이다. 사람은 죽기 위하여 지음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다 죽지만 죽기 위해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다 죽지만 그러나 영원히 죽지 않는다. 이것이 부활신앙이다. 부활은 교회의 기초이었다. 사도들의 증거는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부활의 증거이다. 그리고 부활은 제자들에게 기쁨과 평강을 주는 사건이었다.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주셨던 샬롬이 가정과 교회와 사회의 샬롬이 되자.
1. 십자가의 죽으심은 근심이었다.
예수님은 여러 번 수난에 관한 예고를 하셨다. 베드로는 절대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됩니다고 했지만 절대로 안 된다는 우려가 사실로 되었고 이 사실이 그들에겐 공포요
비극이었다. 도마는 예수님께서 유대로 가시려고 할 때에 우리도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고 하였다. 예수님의 부활보다 죽으심이 더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이 사실로 변하여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님이 잡히실 때에 제자들은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그들의 공포심이 여지없이 노출되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다음 그들은 지하 어두운 방에 모여 그들이 살길을 모색했을 것이다.
2. 부활은 평안의 선포이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평안하뇨라고 물으셨고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하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체적으로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려는 사건이다. 부활이 없이는 기쁨이 없다. 부활이 없이는 참 평강이 없다. 부활만이 평강을 준다. 진정한 평안은 부활 신앙의 대가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들은 평강을 가져야 한다. 고린도전서 15:22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참 삶이기 때문에 평안이 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도 부활할 것이며 우리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평안이 있다.
3. 부활신앙은 평안의 삶이다.
예수님은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준다고 이미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이 십자가로 두려워하고 있을 때에 다시 평안을 선포하셨다. 너희가 평안하뇨라고 하신 것은 내가 너희에게 준 평안을 잘 간직하고 있느냐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다 평안을 잃어버렸다. 이제 주님은 다시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고 선포하신다. 부활을 믿는 자들에게는 평안이 있다.
왜냐하면 평안은 부활하신 주님의 선포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육신의 부활과 영원히 사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은 영원한 평강도 함께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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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
7. 주일설교요약
만남의 신앙
시편 32:5-7, 요한복음 1:43-51
요한복음 1장 후반에는 만나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이 말은 예수님의 공생애 초기에는 만남이 강조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초기에는 수가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인에 관한 얘기, 니고데모가 밤중에 예수님을 만난 얘기 등이 나타난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단순한 만남이 아니라 진정한 참 만남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스치고 지나간 군중과 같은 만남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의 만남이어야 한다. 오늘날의 삶에서도 예수님은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구주로 만나야 한다.
1. 전지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대화에는 대화를 통한 만남이 나타난다. 니고데모는 전지하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니고데모는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라는 고백을 한다.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발견하고 전지하신 하나님의 모습과 만나는 것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과거와 자신의 미래를 환하게 보시는 전지성을 만나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우리의 온 몸과 정성을 다하여 전지하신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2. 자신의 죄성과의 만남
전지하신 하나님과의 만남 다음에는 반드시 자신의 죄성과 만나게 된다. 성경은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을 때에 자신의 죄성과 만나게 되는 것을 기록하고 있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전지성과 만났을 때에 자신의 죄성과 만나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죄인들이 예수님을 만날 때에 하나 같이 요구되는 것은 회개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회개하라는 첫 번째 선포를 하셨고 사람들이 처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에 한결같이 회개를 촉구하였다. 회개는 예수님을 만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필수적인 단계인 것이다.
3. 하나님의 계시와의 만남
예수님은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니고데모의 미래적 환상을 말씀해 주신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광경이다. 이 광경은 야곱의 벧엘 광야에서의 환상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인 사닥다리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이심을 알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과학적 방법이나 다른 어떤 방법을 통하여서도 알 수 없다. 단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말씀과의 만남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깨어진 우리의 심령이 소생하게 되고 가정과 사회와 국가를 다시 살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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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11. 주일설교(요약문)
갈릴리 사람 예수
이사야9:1-4, 마태복음26:69-72
산업사회를 개미사회라 하고 정보사회를 거미사회라고 한다. 개미사회는 위 아래가 분명한 사닥다리 사회이고 거미사회는 거미가 거미줄의 한 가운데 있듯이 원의 중심사회이다. 그래서 거미사회는 항상 자신이 중심이 된다. 전에는 항상 선생님이 높은 위치에 있었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중심이 된다. 그래서 선생님도 고발의 대상이 된다. 예수님은 예루살렘과 같은 정치 경제의 중심지가 아니라 시골이며 주변인 갈릴리 사람이 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갈릴리 사람이라 하였고 후에는 제자들도 갈릴리 사람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1. 예수님이 주변인물임을 알리는 이름 우리 나라는 지연, 지방색, 지역감정을 탈피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탈피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이런 문제는 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어느 나라든지 있다. 최근의 유고의 전쟁도 이런 유의 문제이다. 예수님이 갈릴리 사람이 되신 것은 예수님이 주변인물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결코 유대의 중심 인물이 아니라 주변 인물이었다. 갈릴리는 주변이지만 신학의 중심이었고 정치 경제의 중심인 예루살렘과는 달랐다. 예수님은 주변인물이기 때문에 당시의 문화적 전통을 깨고 누구에게나 접근이 가능했고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2. 예수님의 활동을 알리는 이름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모으실 때에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셨다. 갈릴리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며 병자를 고치신 곳이고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좇아온 곳이다. 예수님은 정치의 중심인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 인물인 갈릴리 사람들을 중심으로 활동하셨다. 사회의 주목의 대상인 중심 인물이 아닌 일반 대중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으신 것이다. 또 갈릴리는 당시의 활동뿐만 아니라 장래의 일을 계시하시던 중요한 계시의 장소였다. 현재의 활동과 더불어 장래의 활동을 알게 하신 장소가 갈릴리였다.
3.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는 이름 예수님은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고 하셨다. 갈릴리는 가장 익숙한 장소였고 처음 예수님과 제자들이 만난 장소이다. 아무리 갈릴리의 행적과 말씀과 기적들이 중요해도 부활이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갈릴리는 예수님의 생애의 자리이며 전 생애의 결론이었다. 승천 후에 비로소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제자들의 중심이 옮겨졌다. 갈릴리 사람은 예수님의 별칭인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들의 별칭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제자들이 성령강림 후에 복음의 전도자가 되었다. 성령은 주변인물을 중심인물로 변화시킨다. 성령으로 중심인물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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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2
4. 주일설교요약
가정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창세기 3:8-12, 에베소서 6:1-4
핀란드 어느 마을에서는 금년 8월 7일 하루 동안 아무나 만나서 들어갈 수 있도록 천막을 치고 섹스 잔치를 한다고 한다. 미국 M
IT 대학 연구팀은 2년 내에 세포핵 이전이란 유전공학 기술로 수컷 없이 암컷만 가지고 생쥐를 만든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딸이 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여 때리지 않게 각서를 받아달라고 하였고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딸이 술을 마시고 어머니와 다투다 어머니가 때린다고 112에 신고하였다. 세계적으로도 가정이 파괴되고 있고 우리 나라도 경제위기로 많은 가정이 파괴되고 있다. 가정이 치유 받아야 한다.
1. 부부관계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하나님은 원래 평등하게 남녀를 지으셨는데 인간은 물리적 힘으로 우열을 가리게 되었다. 성적 기능이란 우열을 가리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남녀에게 주신 소명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면 가정이 따라서 파괴된다. 좋은 가정에서 바른 사회, 바른 세계가 시작된다. 호세아는 고멜이란 부정한 여인으로 말미암아 가정이 파괴되었지만 하나님은 사랑하고 다시 결합하여 아이를 낳으라고 하신다. 인간의 욕망으로 파괴된 부부관계를 하나님은 말씀으로 치유하신다. 지금도 인간의 욕망으로 파괴된 부부관계를 하나님은 말씀으로 치유하시기를 바라신다.
2. 자녀관계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성경은 자녀들에게 부모에 대한 순종을, 그리고 부모에게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할 것을 권한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성경적이어야 한다. 아이들이 비뚤어지는 것은 부모의 문제이며 부모가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이 아닌 주의 가르침으로 양육하여야 한다. 미가7:6은 아들이 아비를 멸시하며 딸이 어미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로다라고 예언한다. 그리스도는 이런 파괴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치유하신다.
3. 형제관계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가인과 아벨 이후 형제관계의 파괴는 동생에 대한 책임상실이다. 야곱과 에서의 다시 만남은 새로운 관계로의 회복을 일러준다. 이 새로운 관계 회복에 하나님은 만남의 중간에서 간섭하시고 치유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형제를 일흔번에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10:21의 장차 형제가 형제를 아버지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며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는 말씀은 요즘 세상 얘기이다.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는 형제 관계를 치유하신다. 가정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중요한 기관이다. 주님은 우리의 가정들이 치유받고 행복한 가정들이 되기를 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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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1
7. 주일설교요약
여성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열왕기하 4:32-37, 누가복음 18:1-5
그리스도 앞에서 치유받지 않아도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 앞에서 치유받지 못할 사람도 없다. 특별히 제도권 사회에서 소외되고 아직도 사람으로서 충분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많이 있다. 유대사회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전통 사회였다. 인간의 타락 이후에 여성은 남성의 종속적 관계이었고 이런 전통은 우리 나라나 유대 나라나 마찬가지였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는 소외 계층인 여성, 더구나 과부의 한을 풀어주는 재판장의 이야기이다. 왜 하필이면 과부이고 호소의 내용이 한이었을까
1. 한이 많은 여성
오늘날도 그렇지만 당시의 과부는 가장 소외되고 가장 불쌍하고 가장 무력한 인간을 대표하였다. 그래서 성경은 과부와 고아에 대한 하나님의 동정이 상당히 자주 나타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저들은 과부의 가산을 삼키고 있다고 하셨으며 나인성 과부의 아들을 살려주셨으며 과부의 두 렙돈 헌금에 관심을 기울이셨다. 구약의 엘리사도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려 준 기사가 있다. 한이란 우리 민족사에 깊이 뿌린 내린 우리 정서이다. 특히 우리 민족의 여성들의 한은 깊어 인간적으로 풀 길이 없다.
2. 치유 받기 위한 끈기를 가진 여인
이 여인의 끈기 있는 간청은 재판관이 마음에도 없는 일이지만 도와주었다. 자주 가서란 말은 미완료형으로 끈질기게 간 것을 의미한다. 이 여인은 부당하게 당하고 있는 송사를 정당하게 처리해 달라고 하였다. 공평성이 전혀 없는 재판관은 과부의 형편보다는 듣지 않으면 귀찮게 할 것이라는 자기중심적 이기심 때문에 들어주었다. 이런 끈기 있는 자세가 불의한 재판관까지 굴복하게 만들었다. 여성들에게는 독특한 종교성이 있으며 여성의 신통력은 유난히 뛰어나다고 한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하여 훨씬 영성적이다. 한이 많은 것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은혜인지 모른다.
3. 여인을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가장 소외되고 억울한 과부의 피맺힌 호소를 하나님은 들으신다. 성경은 하나님을 불의한 재판관으로 비유하지만 하나님이 불의하신 것이 아니라 불의한 재판관도 끈질기게 간청하는 소리를 응답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아니 하시겠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끈기 있는 기도를 반드시 들어주시며 오랜 여인의 상처를 치유하신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끈질긴 마음이 딸을 낫게 하였다. 구시대의 여성들의 제도적 상처와 원한을 그리스도는 치유하시어 21세기는 여성의 시대가 되게 하신다. 상처의 해결자는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상처받은 여성을 치료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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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10. 주일설교요약
교회를 치유하시는 그리스도
출애굽기 32:1-6, 사도행전 2:37-47
제83회 총회의 주제는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경제위기시대를 맞이하여 치유 받아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성경은 하나님을 치료자라고 한다. 회개로 시작된 교회는 개인의 치유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설립의 요인이 된다. 교회는 하나님의 기관으로서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역사 하시는 곳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생활은 교회의 생활인데 가장 큰 실패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일이었다. 이 일을 통하여 교회가 치유 받아야 할 내용을 보자.
1. 인본주의 교회의 치유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백성을 이끌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도구이지 백성의 주인은 아니다. 모세가 40일을 보이지 않자 백성들은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자고 하였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우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자고 하였고 모세가 그들을 이끄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고백 다음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하셨다. 지금도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닌 교회를 고치신다.
2. 물질주의 교회의 치유
아론은 자신의 동생이 40일 동안 보이지 않자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백성들의 요청으로 금고리를 빼어 가져오게 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었다. 금을 가지고 멋진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자신의 존재와 신분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금은 가장 귀하고 비싼 것으로 금으로 만들면 좋은 신이 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초대교회는 교회가 재산이 있었다.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눠주기 위해서이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장사하는 곳이었으며 제사장은 돈을 받고 장사를 묵인하였다. 교회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며 성직자가 물질의 노예가 되는 교회를 주님은 치유하신다.
3. 혼합주의 교회의 치유
아론은 금송아지 앞에 단을 쌓고 공포하기를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다고 한다. 백성들이 이튿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았다. 금송아지 앞에 단을 쌓고 여호와의 절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우상을 섬기게 하는 혼합주의이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서 먹고 마시며 뛰노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제사가 이방신에 대한 제의와 혼합이 된 것이다. 이런 혼합주의는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기독교가 정치와 야합하고 다른 종교와 혼합하여 기독교의 순수성과 독자성을 잃는 것을 그리스도는 치유하신다. 치유 받는 교회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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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2
9. 주일설교요약문
택한 그릇
사무엘상12:10-13, 사도행전9:15-19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운반하는 일이며 설교자는 철저하게 도구이어야 한다. 이런 사람의 역할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서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소명이다. 그릇이란 말은 헬라어에서 일반적으로 수단과 도구를 의미한다. 예레미야 18장은 토기장이 비유로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히브리 표현법에서 그릇은 사람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우리말에도 사람을 그릇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 복음을 담는 그릇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복음을 위하여 택한 그릇이라고 한다. 바울이란 그릇은 복음을 담는 그릇이다. 음식을 차릴 때에 그릇을 선택한다. 그릇이 아무리 맛을 내 준다고 해도 그릇을 먹지 않는다. 그릇이 아무리 좋아도 그 내용은 복음이다. 어떤 그릇이든지 그릇은 복음을 담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복음에 대한 열정을 여러 번 얘기한다. 자신이 복음을 위한 그릇이 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그릇에도 복음만 담을 수 있어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가장 좋은 복음의 그릇이다.
2. 고난을 담는 그릇
바울은 해를 받게 하려고 택한 그릇이다. 선택의 의미가 고난이다. 선택은 영광이지만 고난이 따르게 된다. 고난은 예수님의 것이므로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 고난이 없으면 예수님과 무관하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 고난을 기뻐하고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하였다. 베드로와 요한은 복음을 전하다가 관원들에게 잡혔지만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고 하였다. 우리를 택한 것도 고난을 받게 하시기 위함이다. 고난이 아니면 우리의 선택이 의미가 없다.
3. 자신을 담는 그릇
토기장이는 귀히 쓸 그릇도 만들고 천히 쓸 그릇도 만든다. 그러나 도구인 그릇은 스스로 귀한 그릇이 되게 자신을 담아야 한다. 비싼 그릇이 좋은 그릇이 아니라 귀하게 쓰임 받는 그릇이 좋은 그릇이다. 가장 좋은 용도에 쓰일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다듬어야 한다. 우리 각자는 다 가치가 있는 소중한 사람인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더욱 값지고 훌륭한 사람이 된다. 성경은 이 그릇은 우리라고 하였다. 우리가 그릇이며 택한 그릇이다. 복음을 운반하는 그릇이며 고난을 담는 그릇이다. 자신을 담아 귀한 그릇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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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2
2. 주일설교요약문
한 부자의 결정적 실수
잠언 23:1-5, 누가복음 12:16-21
잠언 23:1-5, 1네가 관원과 함께 앉아 음식을 먹게 되거든 삼가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하며 2네가 만일 탐식자여든 네 목에 칼을 둘 것이니라 3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4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5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
누가복음 12:16-21, 16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17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18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19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20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21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는 다른 말로는 돈많은 바보의 비유라고 한다. 이 비유의 배경은 상속 문제를 둘러싼 형제의 도움 요청을 받으신 예수께서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대 있지 아니하니라고 하신 말씀에 이어진다. 실제적 문제는 소유가 아니라 탐심이며 부요하지 못한 마음이 문제이다. 만족하고, 절약하고, 나누어주고, 아낄 줄 아는 마음이 없으면 결국 탐심이 지배하게 된다. 비유의 부자는 결정적 실수를 한다. 그의 실수를 보고 우리가 반복하지 않도록 하자.
1.모든 것을 자신이 했다는 생각
과거에 대한 결정적 실수는 내가 했다는 것이다. 자기 중심적 사고는 모든 것이 내가 했다는 자기 중심적 공명심으로 나타나며 모든 결과가 자신의 노력의 대가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하게 된다. 모든 것이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은 없다. 하루를 살기 위해서도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반면에 쓸데 없는 것에 의존하고 자신이 할 일을 포기하는 태도도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건전한 생각이다.
2.모든 것이 자신의 소유라는 생각
현재에 대한 결정적 실수는 전부가 나의 것이라는 생각이다. 실제로 세상에 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단지 세상에 있는 동안 빌려 쓰는 것들밖에 없다. 아무리 정당할지라고 부하게 되는 길에는 위험성이 많이 있는 법이다. 소유하려는 마음 자체가 실수이며 관리하려는 마음이 정당한 마음이다. 옛날 수도원에서는 일인칭 단수를 쓰지 못하게 하였다. 내 것이 아니라 우리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부자의 영혼도 물질도 다 하나님의 것이었다. 지나친 욕심은 타인의 것을 빼앗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3.모든 것이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이라는 생각 미래에 대한 결정적 실수는 여러 해 쓸 물건을 준비하였으니 편히 먹고 즐기겠다는 생각이다. 부를 갈망하는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미래가 자신의 계획대로 될 것이라는 착각은 탐심이 주는 최대의 유혹이다. 예수님의 기록되지 않은 말씀에 세상은 하나의 다리이다. 현명한 자는 다리를 건너가지만 집을 짓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아야 한다. 부자의 어리석음을 다시 범치 말고 탐심을 버리고 나누며 살자.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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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15. 주일설교요약문
감사의 나팔
역대하 5:11-14, 로마서 14:4-6
역대하 5:11-14, 11이 때에는 제사장들이 그 반차대로 하지 아니하고 스스로 정결케 하고 성소에 있다가 나오매 12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단 동편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일백이십 인이 함께서 있다가 13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가 일제히 소리를 발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14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인하여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
로마서 14:4-6, 4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사회는 아직도 좋은 일들이 많은 사회이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감사할 일들이 많다. 네델란드의 두 명물의 집이 있다. 하나는 안네의 집이고 다른 하나는 아버지의 교회
이다. 아버지의 교회는 청교도들의 처음 기착지이며 노약자들과 환자들을 내려놓고 간 곳에 세운 교회이다. 그후 청교도들은 1620년 12월 신대륙에 도착하였고 110명이 출발하였지만 추위와 파도에 시달리다 55명이 도착하였다. 다음해 그들은 농사를 지어 감사를 드렸는데 추수감사절의 유래이다. 솔로몬의 성전 봉헌은 감사의 축제이었다.
1. 감사의 표현은 찬송
노래하는 레위 사람들은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나팔 부는 제사장 120명은 노래하는 자와 함께 일제히 찬송하며 감사하였다. 감사는 찬송으로 표현하였다.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가 매를 맞고 옥에 갇혔을 때에 밤중에 찬미하였고 옥문이 열렸다. 감사할 때에 찬송하게 되고 찬송할 때에 감사가 우러난다. 찬송은 그 자체가 능력이 있다. 욥은 자녀가 죽고 재산이 없어졌지만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을찌니이다라고 하였다. 감사는 볼록렌즈로 보아야 하고 불평은 오목렌즈로 보아야 하는데 바꿔보니 감사가 작아지고 불평이 많아진다.
2. 감사의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심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였는데 찬송의 내용은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우리의 삶의 초점을 맞추면 감사가 넘치게 된다. 시편 136편의 주제는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는 것이다. 선하심이 영원하시기에 감사의 조건 또한 영원하다.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선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선하신 하나님은 선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어려운 현실이 닥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으면 삶의 활력의 근거가 된다.
3. 감사의 결과는 영광
찬송하며 감사했을 때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하였고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가득하였다. 열 나환자가 다 고침을 받았지만 한 사람만 감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원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불인정하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편에서 우리의 일을 보면 감사뿐이고 우리편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면 원망뿐이다. 감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며 불평은 마귀의 뜻이다. 날마다 감사의 나팔을 불어 마귀의 뜻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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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2.14. 주일설교요약
본향으로 가는 나그네
시편 90:1-7, 히브리서 11:13-16
올해도 어김없이 설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아간다. 폴 케네디는 한국이 21세기에 세계의 중심국가가 될 수밖에 없는 5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를 가정중심주의라고 하였다. 명절이 되어 고향을 찾기 위하여 전 국민의 절반이 움직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힘들긴 해도 우리의 좋은 문화적 전통일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성경의 믿음의 조상들은 믿음으로 살았지만 이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나그네로 사는 것이 좋은 믿음이다.
1. 우리는 모두가 나그네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외국인과 나그네라고 한다. 아브라함이 자신을 나그네라고 하였고 이삭과 야곱도 자신을 나그네라고 하였다. 신앙의 조상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나그네라고 한다. 신약에서 바울이나 베드로도 인생을 나그네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땅에 살면서 나그네로 사는 것이 바른 삶이며 나그네와 같이 무소유의 삶을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이다. 나그네란 고향을 따로 가지고 있으므로 다른 고향이 있다는 의미이며 나그네가 잠시 세상에 우거하듯이 이 땅을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잠시 살 듯이 사는 것이다.
2. 나그네는 고향을 찾는 본능이 있다.
외국인과 나그네는 본향을 찾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많은 동물들이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듯이 사람도 귀소본능을 가지고 산다. 고향에 가면 고향의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살며 심리적 안정감을 가진다. 아무리 타향이 좋아도 고향만큼 좋은 곳은 없다. 그래서 서양인의 말에는 자기 집만큼 좋은 곳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야곱은 벧엘에서 하나님과 서원할 때에 다시 자신의 집에 돌아오게 하면 십일조을 바치겠다고 하였고 하나님은 야곱을 다시 자기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다. 한국인은 유별난 귀소민족이라고 한다. 한국 교인의 신앙도 유별난 귀소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하늘에 있는 본향을 사모하여야 한다.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본향이 있다. 하나는 이 땅에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본향을 사모하는 것도 좋지만 성경은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이는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이 아무리 좋아도 임시적인 것이며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 것이다. 찬송에도 있듯이 우리의 돌아갈 고향은 하늘나라이다. 이러한 영원한 고향이 있어 사모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다. 설날을 맞이하여 고향을 갈 때마다 참 본향을 찾는 신앙인의 자세를 가지고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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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2
3. 설교방송
성령을 받았느냐
요엘 2:28-30, 사도행전 19:1-7
예수님께서 부활 후 40일 동안 세상에 계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시기 위함이었고 이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말씀하신 단어는 평강과 성령이다. 부활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하시고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다. 이미 다락방 강화에서 내가 가면 다른 보혜사 성령을 주시마고 하셨는데 그 약속의 성취인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다. 사도행전 1장에서는 다시 아버지의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다. 이 약속은 오순절에 이루어졌고 바울이 다시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확인한다. 사도행전 19장은 에베소의 오순절이란 별명을 가진 성령의 역사 장면이다.
1.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믿지 못한다.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말씀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다. 믿으면 성령 받고 성령이 아니면 믿게 하지 못한다. 확실한 믿음이란 성령을 통하여서만 가능하다.
왜냐하면 믿음이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닌 신뢰와 의탁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2:3은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신다. 성령이 주시는 신령한 지혜가 있어야 예수를 고백하게 하고 예수를 믿게 한다. 빌립은 성령의 지시로 광야로 갔고 성령의 지시로 내시의 병거로 올라갔고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올 때에 다시 성령이 빌립을 이끌어 아소도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하였다. 성령은 모든 지시가 하나님의 뜻인 것을 믿게 한다.
2. 성령의 현존을 부인하는 자들이 지금도 있다.
아볼로는 당시에 가장 유능하고 지적인 목회자였지만 성령을 알지 못하여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데려다가 성령의 세례를 알게 하여주었다. 성경은 성령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고 하였지만 성령의 현존과 내재를 부인하는 자들이 있다. 사도신경을 고백할 때에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한다. 성령의 인격을 현존적으로 믿는 고백이다. 성령시대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는 시대이다. 성령이 현존하시는 시대인 것이다.
3. 성령은 안수하므로 임하였다.
시편 51:11에는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라고 하여 성령의 구약적 근거를 제시한다. 사도행전 8장에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다. 성령의 임재는 오순절에는 기도하므로, 고넬료의 집에서는 말씀을 듣는 가운데 그리고 에베소에서는 안수하므로 성령이 임재하였다. 성령강림의 방편은 달라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아야 한다. 요엘 2:28 그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주리니라고 하였다. 그후가 지금이 아닐까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에 해답을 얻는 성도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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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2
5. 설교방송(설교요약)
좋은 땅에 떨어지므로
이사야 55:8-11, 누가복음 8:8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마지막 땅은 좋은 땅이다. 가장 이상적인 상태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 땅이다. 좋은 땅에 뿌려지는 것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필요한 세 가지 요소 중의 하나이다. 예수님의 해석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그리고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라고 한다. 결국 말씀을 듣고 행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다. 좋은 땅에 뿌려진다고 하였는데 성경이 말하는 좋은 땅은 어떤 땅인가 우리의 마음밭이 좋은 땅이 되도록 좋은 땅이 어떤 땅인가를 알고 좋은 땅이 되게 하자.
1. 잘 기경된 땅
호세아 10:12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고 하신다. 비를 내리는 좋은 땅은 기경된 땅이다. 식물이 싹이 나게 하려면 물, 공기, 햇볕이 있어야 하는데 이 셋이 있어도 땅이 기경되지 못하면 싹이 나고 열매를 맺기엔 부족하다. 아무리 좋은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마음이 기경되지 못하고 죽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기경이란 갈아 뒤엎는 것인데 우리의 마음도 때로는 갈아 엎어서 깊숙이 전혀 다른 영적 체험을 해야 말씀이 열매를 맺을 수 있다.
2. 질서 있고 순박한 땅
예례미야 4:26은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나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좋은 땅은 혼돈하지 않으며 공허하지 않고 질서 있고 순박한 땅이다. 좋은 땅은 하나님의 질서가 살아있고 순박한 땅이다. 이런 땅에 식물이 잘 자라듯이 마음도 이런 마음이 말씀이 잘 자란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은 순박하지 못하여 하늘 소리를 외면했고 롯의 사위들은 마음이 굳어 장인의 소리를 농담으로 여겼다. 어린이같이 순박하고, 하나님 질서대로 사는 마음은 좋은 땅처럼 말씀이 자라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
3. 하나님이 주인인 땅
신명기 1:35은 내가 열조에게 맹세한 좋은 땅이라고 가나안 땅을 얘기한다. 가나안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아니었고 가보니 엉뚱한 사람이 살고 있는 땅이었다. 사람의 눈으로는 좋은 땅이 아니다. 그러나 이곳이 좋은 땅인 것은 하나님이 주인인 땅이기 때문이다. 어떤 곳이든 사람이 주인이면 나쁜 땅이며 아무리 힘들고 부족해도 하나님이 주인이면 좋은 땅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에게 의지하면 열매 맺지 못하고, 하나님께 의지하면 좋은 땅이 되어 열매를 많이 맺을 것이다. 말씀을 순박하게,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풍성한 열매를 맺는 여름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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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1
8. 설교방송 (설교요약)
가시가 기운을 막으므로
예레미야 4:3-7, 누가복음 8:7
씨뿌리는 비유의 세 번째 밭은 가시밭이다.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라고 해석한다. 씨가 뿌려지고 싹이 나고 잎이 크지만 막판에 결실치 못한 것이다. 육신적, 현실적 장애물 때문에 열매 없이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이 세상이나 세상의 것을 사랑치 말라고 하신 말씀이 이런 말씀일 것이다. 말씀이 자라다 방해받는 것을 왜 가시가 방해했다고 할까
1. 실망과 좌절하게 하므로
창세기 3:18은 죄지은 아담에게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라고 저주한다. 이후로 사람들은 애를 써서 여름 내내 고생을 해도 가을에 실망이 생긴다. 삶의 가시는 신앙의 사람으로 좌절하게 하고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엘리야도 승리한 다음에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였고 요나도 마찬가지였다. 신앙인이 절망하는 것을 마귀는 제일 재미있어 한다. 데마나 그레스게나 디도는 교회를 섬기다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낙심의 가시를 제거하자.
2. 아프고 상처받게 하므로
가시는 찌르고 아프게 하고 상처받게 한다. 말씀이 자랄 때면 상처와 아픔이 있고 상처와 아픔이 자라지 못하게 방해한다. 예수님도 상처가 있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할 때에 내려와 보라는 유혹은 상처였고 이사야도 예수님의 찔림과 상함을 예언하였다. 바울도 뱀에게 물렸을 때에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고 하여 상처를 주었다. 말씀이 다 자라기 전에는 연한 순같아서 상처를 쉽게 받는다. 말씀이 상처를 받는 것은 말씀이 덜 자란 까닭이다.
그런데 사실은 상처를 받아야 자란다. 말씀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상처가 아닌 주님의 사랑을 받는 상처가 있어야 한다.
3. 높아지고 교만하게 하므로
요담의 나무왕의 비유에는 가시나무가 가장 교만한 나무이다. 가시가 말씀을 방해하는 것은 교만으로 말씀이 장애를 받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기린이 15센티 깊이의 물에 빠져죽는다고 한다. 키나, 지혜나 머리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교만은 말씀이 자라지 못하게 한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갖추셨지만 다 버리셨는데 우리는 너무 높이고 많이 가지고 많이 먹고 산다. 장미꽃의 가시가 예쁜 꽃을 피우지 못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가시가 예쁜 꽃을 피운다. 우리의 가시가 말씀을 방해하는 가시가 아니라 말씀을 예쁘게 꽃피우는 가시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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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11. 설교방송 (설교요약)
습기가 없으므로
욥기 37:11-13, 누가복음 8:6
올해 장마철에 비가 적게 왔다. 장마철에는 비가 많이 와야 정상인데 물이 귀하게 되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우리 심령에 비가 내리지 않고 습기가 없는 것이다. 씨뿌리는 비유의 두 번째 뿌려진 곳은 바위 위이며 뿌리는 내리지만 습기가 없으므로 말라버린다. 말씀을 즉시 기쁨으로 받되 해가 나면 타서 없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해가 나면 잘 자라야 하는데 해가 방해되는 것이 문제이다. 흙은 없어도 식물이 자라지만 습기가 없으면 자라지 못한다. 뿌려진 말씀이 어떤 습기가 없어 자라지 못하는가
1. 땀이 없으므로
말씀의 씨를 윤택하게 하는 물은 땀이다. 땀이란 말씀을 이루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3:19에 네가 이마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라고 하셨다. 땀은 먹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땀을 흘리는 것은 건강에도 필요하며 영적으로도 땀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교회는 봉사의 땀, 헌신의 땀이 있어야 말씀이 열매맺고 신앙이 자란다. 땀이 없으면 교인은 되지만 신앙의 열매가 없다. 교회에 나와도 신앙이 자라지 않는 것은 땀을 흘리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기도하실 때의 땀은 피가 되었다.
2. 눈물이 없으므로
말씀의 씨가 자라기 위한 물은 눈물이다. 눈물은 말씀의 씨가 가장 잘 자라게 하는 양분이다. 다윗이 하나님 마음에 합한 이유는 눈물을 많이 흘린 흔적 때문이다. 그는 요
를 적시며 회개하였고 자신의 고통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아달라고 하였다. 히스기야의 눈물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생명을 연장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심한 통곡과 눈물의 기도였다. 바울의 전도와 목회도 눈물이었다. 눈물이 있으면 말씀이 자라고 사람이 변하고 영혼이 구원받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기뻐하시고 열매맺게 하신다.
3. 피가 없으므로
말씀의 씨가 자라기 위해서는 피가 필요하다. 피는 가장 좋은 말씀의 영양분이며 가장 좋은 습기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피는 생명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살리는 생명이며 그 피로 교회가 세워졌다. 피가 없으면 교회가 아니고 피가 없으면 성도도 아니다. 성경의 피는 희생을 의미하는데 말씀이 자라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희생을 요구하신다. 희생해야 예배도, 헌금도, 전도도, 봉사도 가능하다. 희생하지 않고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교회는 땀, 물, 피에 의해 세워지고 든든하게 자란다. 습기가 모자란 바위 같은 마음이 되지 말고 촉촉한 습기로 가을의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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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2
7.주일설교 (설교요약)
개혁의 두 가지 과제
창세기 35:1-3, 고린도전서 9:19-23
우리가 사는 시대는 과격한 변화를 강요하는 변화의 시대이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교회도 신속하게 변모해야 교회가 사회를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며 이러한 교회가 생존 가능하게 될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께 많은 복을 받은 성경의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실패도 거듭한 인물이다. 야곱이 경험한 실패는 외부의 영향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적 문제이다. 세겜에서의 가정적 경험을 맛보고 야곱은 다시 벧엘로 올라가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의 해결이다. 야곱 가정의 문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문제이며 야곱의 문제 해결방안은 지금의 개혁의 방안이다.
1. 벧엘에 올라가야 한다.
세겜에서 실패한 야곱에게 하나님은 벧엘에 올라와서 단을 쌓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복을 주시고 보장하시던 그 자리를 다시 경험하게 하신다. 야곱에게 벧엘은 잊을 수 없는 하나님과 만난 영적 자리이다. 바울은 평생을 통하여 다메섹의 경험을 회상하며 힘을 얻었다. 그리고 야곱은 이방신상을 버리고 올라가자고 한다. 이방신상은 라헬이 그의 아버지 집에서 훔쳐온 드라빔일 것이다. 벧엘에는 드라빔이 없어도 되고, 어울리지도 않고, 하나님은 우상을 가장 싫어하시기 때문이다.
2. 의복을 바꾸어야 한다.
가정을 개혁하는
첫째 방안은 내부적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고
둘째 방안은 외부적으로 의복을 바꾸어야 한다. 원리로 돌아가기 위하여 우상을 버리고, 형식을 개혁하기 위하여 의복을 바꾸어야 한다. 의복은 우리의 행위, 형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수시로 바꾸어 입어야 한다. 더러운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유행이 지난 옷을 벗고 유행의 옷을 입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여러 모양이 된 이유를 설명한다. 사람을 얻기 위해서는 얼마든지 자신의 형식을 바꾸어야 하는 것을 설명한다. 그러나 한번도 내용인 그리스도가 바뀐 적은 없다.
3. 단을 쌓아야 한다.
벧엘에 올라가고, 의복을 바꾸는 이유는 하나님께 단을 쌓기 위해서이다.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복음의 원리를 되찾고 형식을 바꾸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기 위함이다. 벧엘의 하나님께 올라가면 실패할 때에도 응답하시고 가정이 새롭게 개혁되고, 사회가 새롭게 변화된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을 행복하게 할 수 없으며 삶의 질을 향상시키지 못한다. 영적으로 돌아서고 사회의 변화에 따라 형식을 수시로 버릴 수 있어야 새 시대에 적응해 나가는 교회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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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7.
4. 설교방송(설교요약)
새들이 먹어버렸으므로
창세기 40:16-19, 누가복음 8:5
씨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의 대표적 비유이다.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뿌려진 것을 의미한다. 길가에 뿌려져 싹이 나지 못한 이유 즉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인이 두 가지 이다.
첫째는 내부적 문제로 자신의 마음이 굳어져 새 진리를 막는 것이고,
둘째는 외부적 문제로 거부하는 동안 마귀가 와서 말씀을 빼앗아버린 것이다. 새들이 먹었다는 것은 마귀가 말씀을 방해하였다는 것이다. 새들의 생태적 특성을 살펴보고 새들에게 말씀을 빼앗기지 않게 영적으로 방어하고 조심하자.
1. 죽을 것에 의존
마태복음 24:28에는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지니라라고 한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부정한 새는 주로 주검을 따라다니고 죽은 동물의 시체를 먹고 산 것보다 죽은 것에 관심을 가지고 죽은 것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채우는 것을 의미한다. 생명보다 사망에 관심이 있던 아담 이후 사람들은 생명보다 사망을 선택하고 죽음에 관심을 가진다. 이것이 마귀의 생리이다. 사람을 살리지 못하고 사망으로 이끄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거기에 몰려다닌다. 경건한 영성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자유하고 고독해야 한다.
2. 먹는 것에 의존
마귀는 끊임없이 사람들로 하여금 먹는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한다. 자신의 몸을 즐겁게 하고 향락에 살게 한다. 악인의 결말이 멸망인데 왜 새로 악인을 비유했을까 새가 보는데서 그물을 쳐 두어도 새는 먹는것에 몰두하여 그물을 개의치 않고 열중하여 먹다가 걸리고 만다. 성경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먹는 것을 염려하게 하거나 과하게 먹게 하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이다. 지나치게 먹고 정신이 팔려 있으면 죽게 마련이다. 이런 인간의 모습이 마귀의 모습이다. 마귀는 인간의 본능을 이용하여 서서히 인간에게서 선을 빼앗아 가고 인간을 자멸하게 한다.
3. 세상 권력에 의존
에스겔 31:6은 공중의 모든 새가 그 큰 가지에 깃들이며라고 한다. 큰 나무 애굽 밑에 있으면 안전할 줄 아는 세상 권력에 의존을 의미한다. 이런 새의 습성이 인간에 대한 마귀의 꼬임이다. 마귀는 세상에서 세상의 힘에 의존하여 살게 하고 컴퓨터를 의존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에서 말씀에 의존하고 사는 것을 방해한다. 권력과 금력의 고리를 끊을 수 있어야 나라가 발전한다. 태초에 하나님은 새를 다스리라고 하셨고 아담은 새의 이름을 지었다. 뿌려진 말씀이 빼앗기지 않도록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다스리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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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13. 설교방송 (설교요약)
나 때문이라
요나1:11-16, 디모데전서1:15-17
요나는 주전 8세기 선지자로서 그의 이름의 뜻은 비둘기이다. 이름과는 달리 때로는 과격하고, 불순종하고 도망하던 자이다. 그는 니느웨로 가라는 명령을 듣고도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깊이 잠을 자고 있을 때에 제비에 뽑혀 바다에 던지우게 되었다. 그는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고 하였다. 그의 이 말은 자신을 인정하고 자각한 중요한 말이었으며 사흘 동안 큰 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과 더불어 스스로 세상에 버려지므로 구원한 예수님의 그림자가 되었다. 큰 풍랑 가운데 우리가 취하여야 할 자세를 요나를 통하여 배우자.
1. 내 자신을 알 때의 고백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 내 자신을 아는 것이 중요한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자신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는 자신을 알 수 없다. 인간관계의 상실은 하나님과의 관계 상실의 결과이다. 사람이 자신을 알면 누구나 아름답고 자신을 모르면 모두가 추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절대로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사울왕이나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은 자신을 과대평가 하다가 망했다. 반면에 스스로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모세는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한다고 과소평가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노하셨다.
2. 내 죄를 발견할 때의 고백
요나는 바람이 불고, 배가 뒤집히게 되었는데도 잠만 자고 있었다. 세상의 요동함이 자신 때문인데도 자신과는 아무 관계없다고 생각하였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과 배를 한꺼번에 흔들어놓고 자신은 편안히 잠들어 있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잘못을 절대 용서하지 않는 죄에 대한 엄격함이 있어야 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모습 아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였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신성을 발견하고 자신이 죄인이라고 하였고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다.
3. 자신에 대하여 진실할 때의 고백
요나는 제비 뽑혔을 때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분명한 심증이 있어도 끝가지 부인하고 혐의내용에 증거가 나와도 인정보다 변명한다. 제비뽑기 결정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승복한 것은 위대한 일이다. 이것은 자신에 대한 진실한 태도이다. 잘못은 이미 저질렀지만 거기에 승복하는 자세는 또 다른 그의 인격이다. 잘못은 할 수 있지만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면 더 큰 잘못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솔직하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면 지금도 교회의 부흥은 반복된다. 이 세상의 큰 풍랑이 나 때문이라는 고백이 있을 때에 우리 주님은 이 바람을 고요케 하시고 우리가 탄 배가 승리의 항구에 도달하게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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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3.2
8. 주일설교
새 하늘
사도행전65:17-20, 요한계시록21:1-2
십자가는 부활을 전제로 고난은 기쁨을 전제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종착은 부활이며 기쁨이며 새 하늘이다. 우리 모두가 훗날에 이를 곳이 하늘의 예루살렘 즉 새 하늘이다. 계시록 21장은 신천신지에 대한 요한이 본 계시를 기록하고 있으며 이사야 65:17-25에는 신천신지의 약속이 기록되어 있다. 신약의 새 하늘이란 헬라어에서 시간적
새로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질적 새로움을 의미한다. 새 하늘은 처음 하늘을 개조하고 새롭게 도배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질서로 재창조한 나라이다.
1. 새 하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다. 새 하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곳이다. 계시록 21:3은 하나님의 장막이라고 하였고 이사야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라고 하여 하나님이 창조하신 하나님의 장막인 것을 말한다. 창세기 1:1의 창조와 같은 단어가 세 번 반복된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람을 위하여 창조하셨듯이 앞으로 다가올 새 하늘과 새 땅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갈 나라이다. 사람들이 만든 것은 새 것이 없지만 하나님은 새 것을 만드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보시기에 좋았던 완벽한 작품이듯이 새 하늘도 새 땅도 완벽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2. 새 하늘은 처음 하늘과는 다른 곳이다.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지나갔다는 것은 현 질서가 지나가고 새 질서가 실현된 것을 의미한다. 창조하다는 것은 현세를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데서 있게 하는 것이다. 더 이상 현세의 것은 개조할 수 없고 다시 고쳐 쓸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새 하늘은 처음 하늘과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곳이다. 없어졌다는 것은 한번 없어짐으로 다시 생기지 않는 것이다. 현 세계가 완전히 멸망되고 하늘과 땅이 완전히 새롭게 지어진다고 한다. 바다도 다시 있지 않다는 것은 악한 세상을 상징하는 바다가 멸망했다는 것이다. 사야 65:17은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한다. 새 하늘은 이전 것과 비교가 안 되는 것이다.
3. 새 하늘은 기쁨과 즐거움의 나라이다. 새 하늘은 기뻐하며 즐거워할 곳이다. 세상에서의 상대적 기쁨과 즐거움이 아니라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이다. 새 하늘에는 죽음도, 울음도 아픔도 없는 아름다운 곳이다. 새 하늘은 해함이나 상함도 없는 것이다. 미래학자들은 미래를 편리하고 좋은 시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유토피아의 반대인 디스토피아로 가고 있다고 한다. 새 하늘은 이 세상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이다. 이 땅에서 살면서 신령한 눈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새 하늘을 보며 살자. 거기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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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30.설교방송 (설교요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
잠언 15:15-19, 사도행전 10:1-8
베드로가 가이사랴를 방문하여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전하고 말씀을 들은 자들이 성령을 받는다. 고넬료는 이방전도의 문을 연 사람으로 로마의 군인이었다. 신약성경에는 백부장 네 사람이 등장하는데 모두가 신앙인이었다. 그 가운데 고넬료는 가장 가정적인 사람이었던 것을 기록하고 있으며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었다. 고넬료의 가정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이 어떤 가정인가를 보고 우리의 가정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경건한 가정이 되게 하자. 건강하고 경건한 가정에서는 인간에게 필요한 거의 모든 것을 배운다. 경건한 가정은 사회의 기초이다.
1. 기도하는 가정
2절에는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라고 하였고 4절에는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으니라고 한다. 아무리 구제해도 기도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바친 향기로운 제물처럼 하나님의 보좌에 기도와 구제가 제물로 상달된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문제는 구제만 하고 기도하지 않으니 불평이 생긴 것이다.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기도해 주어야 바르게 자라며 기도하는 어머니를 가진 자녀를 마귀는 넘나보지 못한다. 기도는 가장 귀한 것을 도둑이 들지 못하는 금고에 쌓아두는 것과 같다.
2. 구제하는 가정
구제는 그리스도인의 필수과목이다. 구제는 선포와 교제와 더불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있는 곳에 봉사가 있다고 하였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경건한 고넬료는 고아와 과부를 구제하는 일에도 열심이었을 것이다. 구약에서 객과 고아와 과부는 특별관리 대상이었고 신약에서는 구제하기 위하여 7집사를 세웠다. 사실은 교회가 구제의 전문 기관이 되어야 한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서 아무리 흩어 구제하여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슴 없이 얼굴만 가지고는 구제하지 못한다. 사랑 없이 돈만 가지고는 봉사가 안된다.
3. 순종하는 가정
순종은 성경이 명하는 중요한 신앙적 미덕이다. 성경은 순종하라는 명령이 많이 있다. 노아는 맑은 하늘 아래서 비난을 초월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순종하였다. 순종은 자기 머리로 계산하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따르고 나서 계산하는 것이다. 순종은 자신의 경험에 합리적으로 이해되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순종은 때로는 인간의 상식을 벗어나고 때로는 비난이 따른다. 우리의 가정이 구제하고 순종하는 가정이 되면 자녀들은 그 은혜로 절로 영적으로 육적으로 바르고 건강하게 자랄 것이다.
우리가 구하는 것마다 하나님이 주시도록 되어 있다면 나는 결코 다시 기도하지 않을 것이다
알렉 모티어.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주시지 않는 사실에 감사하게 생각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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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0. 2
5. 주일설교요약문
종교개혁의 현대적 의미
역대하 1:14-21, 요한복음 2:13-17
역대하 1:14-21, 14무리가 여호와의 전에 연보한 돈을 꺼낼 때에 제사장 힐기야가 모세의 전한 여호와의 율법책을 발견하고 15서기관 사반에게 일러 가로되 내가 여호와의 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 하고 그 책을 사반에게 주매 16사반이 책을 가지고 왕에게 나아가서 복명하여 가로되 왕께서 종들에게 명하신 것을 종들이 다 준행하였나이다 17또 여호와의 전에 있던 돈을 쏟아서 감독자와 공장의 손에 붙였나이다 하고 18서기관 사반이 또 왕에게 고하여 가로되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 하고 사반이 왕의 앞에서 읽으매 19왕이 율법의 말씀을 듣자 곧 자기 옷을 찢더라 20왕이 힐기야와 사반의 아들 아히감과 미가의 아들 압돈과 서기관 사반과 왕의 시신 아사야에게 명하여 가로되 21너희는 가서 나와 및 이스라엘과 유다의 남은 자를 위하여 이 발견한 책의 말씀에 대하여 여호와께 물으라 우리 열조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것을 준행치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쏟으신 진노가 크도다
요한복음 2;13-17, 13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의 앉은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한지 481년이 되었다. 도미니칸 수도사 테첼이 면죄부를 팔려고 온 다음 95개 조항을 비텐베르크 성당의 문에 붙이고 개혁의 문을 연 것이다. 개혁 1세대인 루터는 원리 중심의 개혁을, 개혁 2세대인 칼빈은 실천 중심의 개혁을 시도하였다. 종교개혁은 두 가지 중요한 명제를 가진다. 하나는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고 다른 하나는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원리로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방법으로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1. 하나님 말씀의 회복
루터의 개혁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었다면 현재의 개혁도 성경으로 돌아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요시야의 개혁은 성전 수리 중 발견된 모세의 율법에서 시작한다.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하며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숙정하신 일도 성경이 가르치는 예배로 돌아가려는 의도였다. 성전에서 장사꾼과 환전상을 내쫓은 것은 성전에서의 제사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악행을 하고 하나님의 집에 들어와 보호받으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지금의 개혁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2. 하나님의 사람의 회복
요시야의 개혁을 통하여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준다. 힐기야는 대제사장으로서 사명을 다 하지 못하고 성경에 먼지가 쌓이도록 하였고 요시야는 성경을 찾아 백성들로 하여금 읽게 하였다. 한 지도자의 나태로 말미암아 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잊고 살았고 다른 한 지도자의 열심으로 말미암아 전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회복하였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사장들은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고 성전에서 장사하게 하였고 예수님은 그들을 내어 쫓으셨다. 개혁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회복되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사명의 회복
요시야의 개혁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배의 회복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신앙과 예배행위는 국가와 민족의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이다. 요시야의 개혁은 개인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적 차원이다. 우리 시대의 개혁도 국가와 민족을 위한 절대절명의 과제이다. 사회개혁이란 교회개혁에서 시작될 것이다. 교회는 사회에 대한 사명을 위해 힘이 있어야 한다. 교회의 힘은 사회를 지배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섬기는데 사용해야 한다. 르네상스가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미완성이었을 것이다. 종교개혁은 사회개혁의 전제이면서 동시에 완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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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16. 주일설교요약
새벽 이슬 같은 청년
시편 110:1-3, 디모데후서 2:22-23
호세아 14:5 은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리라라고 한다. 이슬은 고요히 내리고 맑은 밤에만 내리는데 이런 이슬을 청년에 비유한다. 새벽에 온 땅을 적시는 이슬은 팔레시틴에서는 중요하다.
왜냐하면 한낮에는 때양볕으로 덥지만 새벽의 이슬로 모든 식물의 생명이 커가고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청년은 그 나라 역사의 아침을 여는 새벽 이슬이다. 청년은 교회를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로 젖게 하는 신선한 생명력의 발랄함을 보여준다. 새벽 이슬 같은 청년은 어떤 청년인가
1. 거룩한 옷을 입는다.
옷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옷을 통하여 우리의 거룩함을 드러내는 것은 중요한 것이다. 옷은 활동과 생활과 사고방식을 나타낸다. 혼인잔치의 비유에서는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푼 임금님이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청함을 받고도 오지 않은 자만큼 큰 저주를 한다. 로마서 13:14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거룩한 옷을 입으려면 헌 옷을 먼저 벗어야 한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다고 하더라도 기독 청년은 차별성을 가져야 한다. 똑같아지기는 쉽다. 그러나 기독 청년은 시대를 바라보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의에 대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2. 즐거이 헌신합니다.
헌신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중요한 덕목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몸을 드리는 것을 헌신이라고 한다. 헌신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목숨이 천하보다 귀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모리아에서 드리라고 하는 명령을 듣는다. 아들을 드리는 것은 자신을 드리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은 노인인 아브라함이 아니라 청년인 이삭을 요구하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헌신이다. 다윗이 골리앗에게 대적한다는 것은 죽기를 작정한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갔다.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하였다. 헌신은 억지가 아니라 기쁘게 해야 한다.
3. 주께 나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온갖 사람들이 주께 나아왔다. 주님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셨다. 예수님께는 사람들이 몰려들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진리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님께 나아오면 모든 죄가 사해지고 말씀이 있으며 고침을 받는다. 사도행전 2:17에는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한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처럼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고 죽은 사람이 아니라 환상이 있고 주님을 만나서 일어나 교회와 나라에 희망을 주는 청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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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9. 주일설교
네 부모를 공경하라
신명기 5:16, 에베소서 6:1-4
기독교는 효의 종교이다. 한자에서 효자는 늙은 부모를 자녀가 업고 있는 것을 뜻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는 순종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아래에서 듣는다는 의미로 자세가 중요하다. 또한 순종도 주안에서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안에서 하는 순종이 아니면 순종도 의미가 없다. 신약 성경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십계명 제5계명의 인용이며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였는데 공경 없는 순종은 종의 태도이다.
1. 도덕의 시작
윤리를 떠난 기독교란 있을 수 없다. 기독교는 윤리를 가장 강조하는 종교이다. 시대가 변해도 성경의 진리는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동양의 삼강오륜의
첫째는 부위자강, 부자유친으로 부모와 자녀에 대한 것이고, 성경의 약속 있는 첫 계명도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다. 도덕의 시작은 사회 질서의 기초이다. 부모에 대한 공경이 경제논리에 의하여 움직여서는 안 된다. 노아 홍수 이후에 노아가 술에 취하여 벌거벗고 잠들었을 때에 아들 함이 이 광경을 보고 나와서 형과 다른 사람에게 말하였다. 하나님은 이 아들을 종의 종이 되게 하시고 멸시와 천대를 받게 하셨다.
2. 신앙의 첫 열매
예수님은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잘 받들어 섬기셨고 십자가상에서도 어머니를 걱정하셨다. 효는 신앙을 통하여 완성된다. 인륜의
첫째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이지만 부모에 대한 공경은 인륜이면서 동시에 신륜이다. 부모 공경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란 것은 문자적인 첫 계명은 아니지만 으뜸 되는 축복의 약속이란 뜻이다. 부모님의 자녀에 대한 사랑은 거의 절대적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며 인간은 하나님의 선물을 가장 잘 선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신앙의 비결을 잘 지켜 살려면 하나님의 대리자이신 부모님을 순종하고 공경해야 한다.
3. 성공의 비결
우리가 성공하려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면 성공한다. 성공은 부모 공경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이다. 성공의
첫째 내용은 잘 되는 것이다. 잘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형통한다는 뜻이다. 잘 되는 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영혼의 부모인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공의
둘째 내용은 땅에서 장수하는 것이다. 장수는 고대 관념에서 축복의 한 상징이었다. 이 말은 순종하므로 땅에서 진정한 행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잘된 환경이 없는 장수는 욕에 지나지 않는다. 부모를 공경치 않고 하나님을 공경치 못한다. 부모를 공경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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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5.
2. 주일설교요약
천국의 주인
사무엘상2:22-26, 마태복음18:1-6
뉴욕 타임즈 메거진이 선정한 지난 천년의 밀레니엄 베스트로 인물은 엘리자베스 1세가, 도구는 나사못이, 패션은 지퍼가 선정되었다. 그러나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발견은 어린이이다. 예수님의 어린이에 대한 관점은 천국의 주인이라는 점이며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며 하나님 나라의 대표자인 것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돌아오셔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고 다툼을 할 때에 예수님은 어린 아이가 천국의 주인이라고 하신다. 어린이가 아닌 어른에게 주신 교훈에서 무엇을 배울까
1. 어린아이 같이 되어라
개구리 올챙이 시절 모른다는 얘기는 개구리 이야기가 아니고 사람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자신을 다시 돌이켜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 돌이켜란 말은 참회와 중생을 이루는 전인적 변화를 의미하며 회개해야 어린이 같이 된다. 회개는 깨끗한 인간의 본심, 어린이의 심정을 회복하게 하는 약이다. 어른들은 감정을 숨기지만 아기들은 감추지 않고 감정을 그대로 표현한다. 어른들은 오리발을 항상 사용한다. 그러나 어린이는 수영할 때만 사용한다. 어린이는 신뢰와 믿음을 본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천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사무엘이 여호와와 사람에게 은총을 받은 것은 엘리의 아들들과 달리 세상을 몰랐고 영적 귀가 밝았기 때문이다.
2. 자기를 낮추어라
고난받는 종의 노래(사 53장)를 연상케 하는 말씀으로 자기를 낮추신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린이의 모습이다. 자기를 낮추다는 말은 단순한 의미의 겸손이 아니라 멸시, 굴욕, 천대를 받으면서도 겸손한 것이다. 겸손은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다. 어른들은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어린이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중요하다. 어린이 입장이 되어서 다시 세상을 바라보아야 진실해지고 겸손해지고 세상이 맑아 보인다.
3. 어린아이를 영접하라
문자적으로 어린이를 영접하는 것이냐 아니면 영적으로 자기를 낮춘 신자를 영접하느냐의 논란이 있는 구절이다. 소자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연자맷돌을 목에 달고 죽는 것이 낫다고 하셨다. 실제로 유대에는 이런 형벌이 없는 듯하며 로마에는 이런 형벌이 있었다. 안드레는 어린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가지고 왔다. 만일에 어린이를 외면하였다면 오천명이 다 굶었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 사회가 범죄없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 특히 어린이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의 아이들을 믿음이 있고 감성이 있는 신지식인으로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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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2
5. 주일설교요약
할렐루야
시편 148:1-5, 요한계시록 19:1-6
기독교인들이 아멘과 더불어 원어 그대로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할렐루야이다. 좋은 의미를 가진 말이지만 너무 남용되어 그 의미가 퇴색된 말도 할렐루야일 것이다. 할렐루야란 제목의 영화에서는 사기꾼이 할렐루야를 하고 가장 거룩한 그리스도인으로 가장한다. 비기독교인들도 아는 기독교의 고유 언어 중의 하나가 할렐루야일 것이다. 할렐루야는 '너희들아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다. 시편에 23번 나타나며 계시록에 4번 나타나 성경 전체에 27번 나타나는 고유 언어이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유대교 예배의 전승을 이어받은 것이다.
1. 세속 영역에서도 사용되었다
애굽왕 바로의 신하는 사라의 미모를 찬양하였고(창 12:15), 결혼식의 주인공인 신부도 찬양을 받고(시 78:15), 불레셋 사람들은 그들의 신 다곤을 찬양하였다(삿 16:24) 세속 음악과 교회 음악이 다른 것은 음악의 대상이 다른 것이다. 세속 음악은 대상이 사람이고 자기의 즐거움이지만 교회 음악은 대상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영광이며 결국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다. 세상의 음악은 잠시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지만 교회의 음악은 영혼을 영원히 기쁘게 한다.
2.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사용되었다.
시편의 대부분의 할렐루야는 송축하라, 찬양하라, 감사하라 등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하고 있다. 할렐루야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시편에 나타난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을 포함하고 있다. 천사들은 여러 가지 역할이 있지만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찬양은 목소리가 아니라 온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찬양의 내용도 형식도 다르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렐루야를 정확히 지켜야 찬송이 된다.
3. 일상 생활에서 사용해야 한다.
할렐루야는 예배에만 사용하는 예배 용어가 아니라 일상 용어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일상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할렐루야의 삶을 살아야 한다. 시편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하라고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의 찬양의 대상이다. 시편의 마지막 절은 숨쉴 줄만 알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다. 우리의 찬송으로 다른 사람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을 안다. 할렐루야의 성경적 용법은 명령어이다. 할렐루야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길인 동시에 내 자신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길이다. 할렐루야로 호흡이 있는 날까지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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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4.1
8. 주일설교요약
아멘
시편 106:47-48, 요한계시록 7:9-12
현재의 기도의 형식은 구약에 기초를 둔 것으로 기독교 초기에 이미 현재와 같은 기도의 형식이 자리잡았다. 내 이름으로 구하라고 하셨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끝에 아멘으로 화답한다. 아멘은 성경 전체에 50절에 나오는 단어이다. 아멘은 확실하다, 진실한, 진리, 진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기도에 확실히 그렇게 되어지이다, 그렇게 해 주십시요라는 뜻이다. 아멘은 개신교에서는 기도, 찬송, 축도 다음에 사용하는 말로서 시편의 낭송, 성구의 낭송 다음에 사용되기도 했다
1.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말
아멘은 사람을 통해 전달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말이다. 시편106:48은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영원부터 영원까지 찬양할찌어다 모든 백성들아 아멘할찌어다라고 한다. 예배시의 기도의 응답이며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짐을 믿고 아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신명기 27장에는 축복과 저주를 선포한다. 레위사람들이 큰 소리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할 때에 백성들은 아멘으로 응답한다. 아멘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고 확인하는 믿음이 있다.
2. 진실로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말
아멘이란 기도가 진실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아멘은 헬라어로 진실로의 뜻이다. 아멘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말이다. 요한복음에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25번 기록되어 있다. 기도의 응답에는 진실함이 있어야한다. 아멘이 없는 기도는 불신앙이며 아멘이 없는 기도는 투정에 불과하며 아멘이 없는 기도는 내가 뜻을 먼저 세워놓고 하나님을 설득시키려는 어리석음이다. 아멘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도구이다.
3. 종국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
계시록 3:14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아멘이시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아멘이시다. 아멘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이다. 진실하지 못하고 미지근한 라오디게아 교회에 그리스도는 진실성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이사야65:16는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향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라고 한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다. 진리는 아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멘의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라고 하셨다. 우리가 응답하는 아멘 속에 그리스도가 있다. 아멘 하기를 즐겨하고 아멘을 높이자. 아멘이 더욱 우렁찬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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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6.20 설교방송(설교요약)
전쟁과 평화
사무엘상7:12-14, 야고보서4:1-3
한국 전쟁이 일어난지 49년이 되었고 3년만에 정전이 되었다고 하지만 지난 50여년간 우리는 전쟁 속에 살아왔다. 더구나 얼만전의 서해 교전 사건은 아직도 우리 나라가 안전지대가 아니라는 증거이다. 외국의 설문에서도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곳이라고 하였다. 사무엘의 시대에 하나님은 불레셋과 끊임없이 전쟁하는 이스라엘을 도우시고 하나님의 자연적인 방법으로 불레셋을 일시에 퇴각하게 하신다. 그때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도움자가 되신 것을 믿고 돌을 세워 에벤에셀이라 하였다.
1. 전쟁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사무엘은 전쟁에 승리하였을 때에 비스바와 센 사이에 돌을 세우고 에벤에셀이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의미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편이 되심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들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도우셔서 승리하게 하신 전쟁의 주인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아말렉과 전쟁할 때에도 하나님은 모세의 팔이 내려오지 않게 하셔서 승리하게 하셨고 여리고와의 전쟁에서도 무기도 아닌 양각나팔과 횃불과 항아리를 가지고 승리하게 하셨다. 하나님은 내가 싸우리라고 하신다.
2. 전쟁과 평화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의 편이었지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편이 아니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편이 아닐 때에 그들은 전쟁에서 패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편일 때에 그들은 이겼다. 그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쟁을 하셨기 때문이다. 사무엘 한 사람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평화를 주신다. 바울 한 사람 때문에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의 생명을 상하지 않게 하신다. 궁극적으로 예수님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전쟁을 주시기도 하고, 평화를 주시기도 한다.
3. 하나님의 미래적 목표는 사람 사이의 평화이다.
사무엘은 국토를 회복하고 아모리 사람과의 평화가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원수라도 우리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신다. 사람과의 평화는 하나님과의 평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님과의 평화가 없이는 사람과의 평화가 없다. 사람은 손을 가지고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다. 도구를 만든다는 것은 만들고, 고쳐 쓰고,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전쟁 무기를 만들 줄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고쳐서 보습을 만들고, 낫을 만들어 전쟁이 아닌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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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
3. 주일설교
자녀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하라
창세기 3:16
갈라디아서4:18-20
창세기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갈라디아서4:18-20, 18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어린이날은 1866년 미국에서 시작된 어린이 집단 세례일이었다. 당시에 어린이가 무시당하고 학대받던 시대에 사랑하고 세례주고,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획기적 일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어린이들이 과잉보호를 받게 되어 어린이날 폐지론까지 나왔다. 어린이는 귀한 존재이다. 우리에게 자녀를 주시고 우리 사회에 어린이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바울의 편지인 갈라디아서에서 나의 자녀들아라고 한다. 또 고린도전서 고전 4:15에는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 한다. 바울은 직접 낳은 자녀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뜨거운 애정을 표시한다. 우리가 어떤 부모가 되어야 하는지 점검해 보자.
1. 자녀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부모
나의 자녀들아, 이 말은 애정이 넘치는 자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다. 내게 이런 자녀를 주셨다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요한은 나의 자녀들아라는 용어를 그의 서신에서 자주 사용한다. 솔로몬의 잠언에도 내 아들아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우리의 자녀에게 늘 사랑의 표현을 하며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는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나의 자녀는 하나님께서 내게 위탁하신 하나님의 자녀이다. 나의 자녀란 내 소유란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게 위탁하신 나의 자녀이다. 부모의 사랑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를 우리를 통하여 세상에 보내어 우리의 사랑을 받게 하신 것이다.
2.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부모
바울은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수고한다고 하였다. 바울이 수고하고 애썼던 것은 자기 자녀 속에 자기의 형상이 아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우리가 자녀에게 심어주어야 할 것은 우리의 형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이다. 아이들은 우리의 형상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형상을 심어주어야 한다. 부모는 시시각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을 자녀에게 담을 수 있도록 얘기하고 기도하고 본을 보여주는 삶이 필요하다. 가정은 최상의 학교이다. 가정은 학교보다 좋은 학교이며 가정은 교회보다 좋은 학교이다. 신생아에게 젖빠는 법을 가르치듯이 어려서부터 저절로 그리스도를 배워 몸에 익히게 하라는 것이다.
3. 해산의 수고를 하는 부모
해산의 수고는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힘들고 가장 고귀한 자기희생의 수고를 의미한다. 하나님도 우리를 낳는 해산의 수고를 하셨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낳는 수고도 하시고 죽게 하시는 고통도 겪으시므로 인간의 가장 혹독한 수고와 고통을 경험하신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결혼한 경험이 없지만 해산의 수고의 공은 안다. 사람이 범죄하므로 해산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지만 해산함으로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고 구원의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를 위하여 해산의 고통을 함으로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해산의 고통은 한번이 아니라 계속해야 한다. 자녀를 위한 가장 좋은 일은 좋은 부부관계이다. 좋은 부부관계에서 자녀를 위하여 늘 해산의 고통을 아끼지 않는 부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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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8. 주일설교요약문
향기로운 냄새
레위기 1:3-9,
고린도후서 2:12-17
레위기1:3-9, 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4그가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할지니 그리하면 열납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 5그는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가져다가 회막 문 앞 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6그는 또 그 번제 희생의 가죽을 벗기고 각을 뜰 것이요, 7제사장 아론의 자손들은 단 위에 불을 두고 불 위에 나무를 벌여 놓고 8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뜬 각과 머리와 기름을 단 윗불 위에 있는 나무에 벌여 놓을 것이며 9그 내장과 정갱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단 위에 불살라 번제를 삼을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고린도후서2:12-17, 12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치 못하여 저희를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16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17우리는 수다한 사람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
하나님과 사람의 대화가 에덴의 범죄로 두절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제사를 통하여 대화를 계속하신다. 제사는 사람의 회개와 하나님의 사죄가 있는 하나님과의 사람의 대화이다. 출애굽은 희생을 드리는 제사의 목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속 사건이다. 레위기에는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의 다섯 가지 제사가 있으며 제사의 방법은 화제, 거제, 요제, 전제의 네 가지가 있었다. 가장 귀한 제사는 번제이며 가장 귀한 방법은 화제이다. 화제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이다.
1. 죽어야 향기로운 냄새
모든 생물은 산 것이 죽어야 향기로운 냄새를 낸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죽여서 드린다. 산 것을 죽여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시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시험하였을 때 나비가 날아와서 앉는 쪽을 생화라고 하였다. 산 것이 향기가 있지만 참 향기는 죽을 때이다. 백합은 부서질 때 향기가 진동한다. 로마서 12:1에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한다. 제물은 죽어야 비로소 제물이 된다. 히브리서 9장에는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한다.
2. 믿음과 정성으로 드려야 향기로운 냄새
소의 번제(1:9)나 양과 염소의 번제(13)나 비둘기의 번제(17)나 곡물의 소제(2:2)나 구운 떡의 소제(2:9)의 마지막 결론은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고 한다. 부자의 소의 번제든지 가난한 자의 비둘기의 번제든지 곡물의 소제든지 어떤 제사든지 하나님은 똑같이 받으시고 기뻐하신다. 제사는 제물에 있지 않고 바치는 자의 정성에 있다. 하나님은 양을 보시지 않고 자랑하는 바리새인의 십일조를 기뻐하시지 않고 과부의 두 렙돈을 보신다. 드리는 자의 믿음과 정성이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것은 아벨은 믿음과 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태워야 향기로운 냄새
화제는 태우는 것이다. 짐승이든 곡물이든 태워야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하나님은 냄새를 좋아하신다. 창세기 8:21에는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라고 한다. 실상은 고기를 태울 때 나쁜 냄새가 나지만 순종과 정성의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로 여기신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향기로운 냄새가 되셨다. 사랑하는 것이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그리스도의 그 사랑이 있으면 우리가 그리스도의 향기이고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된다. 희생함으로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가 되고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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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3
1. 주일설교요약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이사야 43:4-7
고린도전서 10:30-33
이사야 43:4-7, 4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고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사람들을 주어 너를 바꾸며 백성들로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들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7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고린도전서 10:30-33, 30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세상에서 우리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다. 같은 일이지만 죽지 못해 하는 사람이 있고, 먹고살기 위해 하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사람이 있다. 자신의 생이지만 비관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고,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있고, 낙관적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생의 목적을 하나님께까지 승화할 수 있다면 가장 고상한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장로교의 소요리문답의 1번도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겁게 하는 것이다고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얘기하는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삶을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생활
하나님의 본질은 영광이다. 영광이란 일반적으로 빛을 의미하며 히브리어의 영광은 무겁다는 뜻이다. 요한일서 1:5은 하나님은 빛이시다고 한다. 그 빛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 영광이란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을 그에게 다시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동물과 사람이 다른 것은 사람은 의지를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다. 이사야 43:7에는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이 만드셨다.
그러므로 영광을 돌려야 사람답고 보람을 느끼게 되어 있다.
2. 하나님 중심의 생활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 무엇을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중심이다. 생활의 중심이란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자리잡고 있느냐 라는 것이므로 이것이 곧 우리의 사람됨을 의미한다. 세상에서 얻을 수 있고 좋은 것들이 하나님의 것으로 바뀌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다. 마치 태양계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게 될 때에 질서와 안정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중심의 생활은 자신에게 질서와 안정을 주므로 평안하게 되는 것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당파, 소송, 우상숭배 등 문제가 많이 있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인간적으로 불가하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 중심의 삶은 문제를 인간적 문제를 해결한다.
3. 다른 사람을 위한 생활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이 세상에서는 결국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이다. 당시 고린도 교회의 우상제물에 대한 문제는 찬반의 논란이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덕이 되지 않으면 먹지 말라는 것이었다. 우리의 자유함이 다른 사람에게 거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며 서로 협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다. 주님도 기도문에서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라고 가르치셨다. 하나님은 영광을 영원히 받으셔야 한다. 우리가 먹을 때나 마실 때나 무엇을 할 때나 이기적인 목적이 아니라 이타적인 목적이 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우리에게도 기쁨이 된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본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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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
3. 주일설교요약
교회와 교제
시편 133:1-3, 로마서15:1-3
21세기를 준비하는 교회의 마지막 준비 과제는 교제이다. 21세기는 교제의 시대로서 교회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교제란 단순한 친교의 의미 외에도 교회의 구조나 심방 등 목회적 돌봄을 포함하는 확장된 내용을 뜻한다. 친교란 사도신경의 한 구절로 우리의 신앙고백의 중요한 한 내용이며 보이지 않는 교회의 이상이다. 우리 교회가 21세기를 앞두고 교회에 대한 교제의 과제를 준비하여 21세기에 한국교회의 새로운 교제의 형태를 제공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 교제의 의미
교제란 신앙생활의 특징이며 성도의 생활을 결정 지우는 용어이다. 또한 교회의 본질적 사명 가운데 하나로서 신앙의 본질이다. 교제란 말의 어원인 코이노니아는 신약성경에 18번 사용되는 용어로서 바울서신에 많이 나오는 바울의 용어이다. 기독교가 십자가의 종교라고 하는데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하는 횡적인 선과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의미하는 종적인 선을 가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없이는 불가능하며 십자가의 복음에서 성취되는 것이다.
2. 교제의 내용
교제는 하나님과의 교제와 사람과의 교제로 나뉘어진다. 하나님과의 교제란 예배가 그 내용이며 찬송, 기도, 말씀, 봉사등이 포함된다. 사람과의 교제란 사랑이 그 내용이다. 예배가 없는 사랑이 세속적 윤리로 전락하듯이 사랑이 없는 예배란 율법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교제란 하나님께 대한 가장 중요한 예배를 실천하는 것이며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제란 기독교인의 생활의 총체적 모습이다. 예배와 사랑의 구체적 실천이 교제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하며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하게 개선해 준다.
3. 21세기와 교21세기는 새로운 구조를 필요로 한다. 산업사회로 대표되는 20세기와 정보사회로 대표되는 21세기는 확연하게 다르다. 산업사회의 기조와 정보사회의 기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까지의 교회의 구조를 새로운 세기에 맞게 바꾸어주는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교제의 중요성이다. 교회가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심방과 구역의 구조를 재편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사람과의 관계에서 예배와 사랑의 내용과 표현을 다시 재편하여 우리 교회가 교제가 넘치는 교회가 되게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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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2
7. 주일설교요약
잊을 것과 잊지 말 것
시편 103:1-7, 히브리서 13:13-17
인생의 역사란 마지막이 시작이다. 인생에게 절대로 끝이란 없다. 하나의 끝은 또다른 시작에 불과하다. 감사하는 것은 끝이 시작이라는 사실이다. 한해의 끝은 새로운 해의 시작이다. 똑같은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이러한 시간을 새해라고 한다. 이미 타락한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되게 하신 하나님이시다. 열심히 뛰어왔고 많은 것을 배운 한 해였다. 정말 없어서는 안될 한해였다. 힘들고 괴로운 해였지만 우리에게는 이런 해가 필요하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나그네와 행인 같은 사람들이라고 한다. 망년의 계절에 잊을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해보자.
1. 잊을 것은 잊어야 한다.
잊어버림은 축복이다. 고통과 실패와 억울한 것들이 잊혀지지 않으면 못 살 것이다.
그러므로 망각이란 기억만큼이나 큰 하나님의 은혜이다. 잊으니까 살지 잊지 않으면 살지 못할 것들이 많이 있다. 과거에 대한 망각은 현재에 대한 충실과 미래에 대한 희망에서 가능하다. 지난 1년 동안 고통스러웠던 시간들은 눈높이를 낮추기 위한 투쟁이었다. 우리에게 잘못한 자들의 잘못을 잊어버리자. 기억도 아니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도 우리는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면 이것이 배은망덕이다.
2. 잊지 말아야 할 하나님의 은택
실생활에서 잊어버리는 것들은 괜찮은 것들이다. 그러나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 있다. 시편 103:2은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라고 한다. 잊고 싶을 만큼 힘든 한해였을지 모르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의 은택은 한해 동안도 우리에게 풍성하게 내리셨다. 경제적 고통과 사회적 난제가 겹쳤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심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이 크다. 구원받은 은혜를 망각하고 작은 삶의 부족 때문에 불평하면 가나안은 우리의 것이 못된다. 아무리 고기가 먹고싶고 가는 길이 험해도 구원하신 은택을 잊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3. 잊지 말아야 할 선행과 자선
히브리서 13:16에는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고 하신다. 우리 사회는 건국 이래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이했다고 하지만 선을 행하고 나눠주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올해는 구세군의 자선남비가 작년보다 6% 더 많아 13억을 예상한다고 한다. 이것이 우리 국민의 저력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베풀줄 알아야한다. 힘들었던 해이지만 그 속에 숨은 하나님의 뜻과 은택은 잊지 말고 대신잊어야 할 것을 떨어버리는 해맞이가 되자.
199
8.
5.2
4. 주일설교요약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라
역대상 29:1-5, 골로새서 1:24-27
역대상 29:1-5, 다윗 왕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내 아들 솔로몬이 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바되었으나 오히려 어리고 연약하고 이 역사는 크도다 이 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2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3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 외에도 내 마음에 내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므로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 4곧 오빌의 금 삼천 달란트와 천은 칠천 달란트라 모든 전 벽에 입히며 5금, 은그릇을 만들며 공장의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쓰게 하였노니 오늘날 누가 즐거이 손에 채워 여호와께 드리겠느냐
골로새서 1:24-27, 24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25내가 교회 일군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26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27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사랑은 다른 사람을 위하여 다른 사람이 받을 고통을 내가 대신 받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이 가장 고상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될 수 없고 아무 잘못 없는 분이 더럽고 추한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잘못 있는 사람처럼 십자가를 지시고 죽을 수 없는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하였다. 인간의 경지를 넘어서 작은 그리스도의 경지에 들어간 것같은 바울의 고백이다. 골로새서에 나타난 바울과 그리스도의 관계와 바울이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한번 점검해 보자.
1. 괴로움을 기뻐하라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라고 하였다. 우리는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면 억울해하고 분해하고 심지어 원수시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을 기뻐하였고 사실은 이것이 가장 가치 있는 사랑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른 사람 때문에 괴로움을 당한 경험이 있다. 지금도 경제는 몇 사람이 망쳐놓고 고통은 분담하자고 하므로 억울해 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은 일부러 라도 고난을 받아들이고 괴로움을 기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극단적 금욕주의가 했던 것처럼 육체에 고난을 주므로 영혼이 맑아지게 된다. 바울은 약할 때에 강하다고 하였고 약한 것을 자랑한다고 하였다. 우리도 고난을 기뻐하고 자랑해야 한다.
2. 그리스도의 고난을 이해하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고난을 의미하며 바울은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였다. 그리스도의 고난이란 하나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십자가라는 가장 부끄러운 형벌을 받아야 하는 고난이었다. 이것뿐만 아니라 남은 고난이 있다. 이것도 모자라서 얼마든지 더 받을 여유가 있다는 의미이다. 고난을 당하므로 우리가 평안할 수만 있다면 예수님은 지금도 기꺼이 고난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남은 고난이다. 쿼바디스에서는 베드로가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다시 지려고 로마로 가신다고 하셨고 우리가 무거워하는 십자가의 고통을 대신 하시려는 준비가 되어 있다. 예수님의 남은 고난은 그리스도가 남겨놓은 유산이다. 예수님은 고난이란 값진 유산을 남겨주셨다.
3. 내 육체에 채우라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는 말씀은 교회를 위하여라면 채운다는 뜻이며 다른 곳이 아닌 내 육체에 채운다는 뜻이다. 육체에 채워야 하는 이유는 육체는 고난에 약하기 때문이며 육체에 채울 수 없는 까닭은 육체를 아까워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육체에 채우셨고, 베드로와 요한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능욕을 받고도 기뻐하였다. 바울도 수많은 고난을 그의 몸에 채웠다. 예수님은 아무 고통 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고난 가운데 구원하셨다. 우리도 편안한 가운데 예수님을 따라가고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제자가 됨을 확인한다. 주님은 결코 그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운 사람을 외면하지 않고 주의 귀한 은혜로 상급을 주신다.
199
8.
5.10. 주일설교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아가 5:1, 에베소서 5:22-25
아가5:1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으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에베소서5: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23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24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한국 전쟁 후 포로교환시에 자유의사에 따라서 갈 곳을 정하였는데 많은 공산군이 자유 대한으로 넘어왔고 미군들도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21명의 미군은 자기나라에 가지 않고 중립국 또는 공산국가로 넘어갔다. 조사결과 문제의 21명은 가정이 불화하고 부모의 사이가 좋지 않고 사랑에 굶주린 자들이었다. 결국 화목하지 못한 가정은 나라도 버리게 하고 이념도 바꾸게 만든 것이다. 가정은 천국을 설명한다는 말이 있다. 화목한 가정은 이미 천국 생활을 하지만 화목하지 못한 가정은 이미 지옥 생활을 하고 있다. 성경이 가르치는 가정은 철저하게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음을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1. 부부관계는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이다.
구약은 남자의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고 여자를 남자의 돕는 배필로 지으셨다고 한다. 이 말은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 쌍방적 관계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내는 남편의 부족을 채워주어야 한다. 이삭이 사라가 죽은 후에 리브가를 통하여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아내는 남편에게 위로자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용기를 주고 칭찬해 주어야 한다. 구약에서도 가정을 중요시하는 것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신약에서는 교회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부부관계를 설명한다. 부부의 관계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와 같으면 늘 견고할 것이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하듯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가정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처럼 늘 든든한 기초를 가져야 한다.
2. 부부의 자세의 모범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가 부부의 자세의 기준이라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주신 희생적 사랑이 가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원래 부모님의 은덕이란 철저하게 자기 희생적이듯이 부부의 관계도 희생적이어야 한다. 최근의 경제적 어려움은 가정 파괴를 가중시키는데 이유는 있겠지만 가정의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가정의 모범이란 빌립보서 2장에 기록된 대로 자기를 비울 수 있는 희생 때문이며, 사람들과 같이 된 인간적인 자세이며, 죽기까지 복종하신 복종의 자세 때문이다. 부부도 이런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참 사랑의 관계일 수 있다.
3. 부부의 사명은 복종과 사랑이다.
성경은 교회와 그리스도의 관계를 복종과 사랑이라고 한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여야 한다. 남편은 그리스도의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다. 반면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복종하란 말은 지속적 상태를 의미하며, 사랑하란 말은 지속적 습관적 행위를 의미한다. 베드로는 나아가서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권하였고 골로새서 3:19에는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히지 말라고 한다. 부부는 항상 죄짓기 전의 아담의 고백인 이는 내 뼈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라는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가정들이다. 가정 중심의 미래 사회를 준비하며 우리의 가정들이 참 가정이 되도록 하자.
199
8.
4.26. 주일설교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출애굽기 3:13-15
사도행전 3:1-10
출애굽기3:13-15,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
사도행전 3:1-10,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문에 두는 자라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미하니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제일 먼저 가지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이름인데 이름은 자신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에 대한 관념은 우리와 같이 이름을 지으면 그렇게 되라는 소망이 담겨져 있다. 예수님의 이름은 나기 전에 가지신 예수님의 인격과 소명과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란 인간 예수는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뜻으로 신앙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에는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이 19회 나온다. 나사렛 예수는 천시된 이름이다. 천한 동네 이름을 예수님의 이름에 붙여서 나사렛 예수라 했지만 가장 귀한 이름, 가장 힘있는 이름이 되었다. 사도들은 가장 천한 이름을 가장 자랑하였다.
1.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치유의 도구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전 같으면 무서워 쩔쩔 매던 사람들인데 당당하게 기도하는 시간에 성전에 들어간다. 성전에 가던 중 미문에 앉아있던 걸인을 만나서 이전 같으면 돈을 주고받는 관계이었지만 이제는 돈 대신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게 한다. 돈 대신 치유의 능력을 베풀었고 은과 금 대신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었다. 거짓 선지자도 주의 이름으로 치유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의 이름을 도용했지 의지하지 않았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도용하지 말아야 한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더 이상 천한 이름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며 가장 존귀한 이름이며 가장 의지할 이름이며 치유의 능력을 가진 이름이다.
2.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삶의 힘이다.
베드로와 요한의 기적이 문제가 되어 대제사장이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행 4:7)고 물었다. 무슨 권세 즉 누구의 이름이냐는 뜻이다. 이름은 권세인 것을 의미한다. 나사렛 예수 이름은 삶의 힘이다. 이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건강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베드로가 이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하려고 애썼지만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한다. 전에는 내 신념으로 따르다 다시 고기 잡으려 바다로 돌아가고, 내 의지로 따르려다 다 버릴지라도 절대로 버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세 번씩이나 부인했고, 내 힘으로 주님을 방어하려다 귀를 잘랐다. 이제는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려는 중심과 순서가 바뀌었다.
3.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복음전파의 도구이다.
빌립이 먼저 예수님 만나고 나다나엘에게 전도할 때에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 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고 한다. 빌립은 다른 이름이 아닌 나사렛 예수를 전하였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하였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은 온 인류를 구원 얻게 하는 유일한 이름이다. 이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복음전파의 도구는 우리의 지식이나 자랑이나 교회 얘기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의 이름뿐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때는 예수 이름을 전하기 가장 쉬운 때이다. 이 때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치유하며 삶의 힘이 솟고 복음전파의 기회가 되게 하자.
199
8.
4.1
9. 주일설교요약문
하나님의 은혜로
창세기33:1-11 로마서3:21-24
창세기 33:1-11,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그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과 그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 형 에서에게 가까이 하니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 때에 여종들이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 자식으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에서가 또 가로되 나의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가로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에서가 가로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야곱과 에서의 만남은 야곱의 두려움으로 시작한다. 20년간의 하란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외삼촌 라반의 집을 떠나올 때에 많은 떼를 모아 부자가 되어 돌아온다. 외삼촌 집의 드라빔을 라헬이 훔쳐왔기 때문에 간신히 외삼촌의 추격을 피하였는데 다시 형 에서가 400명의 사병을 이끌고 나왔다. 그 밤에 잠도 못 자고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란 이름도 얻는다. 자신이 잘못이 없으면 겁날 것이 없을 텐데 잘못한 것이 많으므로 두려워하였다. 야곱은 구약의 인물 가운데 가장 하나님의 은혜로 산 사람이었다. 구약에서 은혜란 하난이란 말로 마음이 기울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의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는 의미이다.
1. 야곱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5절)
야곱이 에서를 만났을 때 에서는 야곱의 네 아내와 열두 아들을 보고 이들은 누구냐고 하였고 야곱은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라고 하였다. 야곱은 자신의 가정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한다. 수많은 사람 가운데 부모를 골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남편과 아내가 세상에서 많은 남자와 여자 가운데 내 남편, 내 아내가 되게 하신 것은 이 땅에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내 남편으로, 여자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내 아내로 만드신 은혜이며, 자녀를 이 땅에 내보내실 때에 나를 선택하셔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정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다.
2. 야곱의 만남이 하나님의 은혜(8절)
야곱은 에서에게 환심을 사기 위하여 아내들과, 아들들에게 에서한테 절하게 하였고 에서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고 물었다. 야곱은 내 주게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라고 대답한다. 야곱과 에서의 만남을 위하여 야곱은 형의 은혜를 입기 위하여 선물을 준비하고, 식구들을 절하게 하고 접근해 가는데 형의 은혜를 입기 이전에 이미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 형과의 만남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진 일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의 모든 만남이 하나님의 은혜이기에 만날 때마다 은혜인줄 알고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과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다 은혜이다.
3. 야곱의 소유가 하나님의 은혜(11절)
야곱은 에서에게 자신의 소유를 주었고 에서는 사양하였다. 야곱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라고 하여 자신의 소유가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고백하였다. 빈손으로 외삼촌 집에 갔지만 올 때에는 네 아내, 열두 아들, 수많은 소유와 함께 돌아온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지만 구하지 않은 물질, 장수, 부귀, 영화까지 다 주셨다. 우리는 모든 것이 아버지께로 왔다는 것이 고백이 되어야한다. 내가 부지런히 일해서 얻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것이다.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우리의 소유에 하나님이 마음을 기울이셔야 소유가 넉넉하게 된다. 지금은 은혜받을만한 때이다.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만남에, 소유에 은혜를 베푸
실 것이다.
199
8.12.20. 주일설교요약문
임마누엘
이사야 8:5-10, 마태복음 1:18-23
성탄절은 예수님께는 가장 슬픈 날이지만 가장 기쁜 날로 만드셨다. 하나님 없던 사람을 하나님 있게 하셨고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 되게 하셨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예수님의 탄생 800년 전에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하면서 예수님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한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하나님의 일이며 하나님의 목적이다. 이런 의미를 예수님 오실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셨다. 성탄 주일을 맞이하여 예수님의 탄생 때에 주어진 이름의 의미를 통하여 성탄의 의미가 살아나게 하자.
1. 성탄의 방법
사람이 세상에 오는 방법은 부모님의 몸을 통하여 온다. 그러나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려 오시는 예수님은 죄인의 방법으로 오실 수 없다. 그 방법이 초자연적인 방법인 처녀가 잉태하여 이 땅에 오는 방법이다. 죄는 하나님과의 단절이며 단절된 자체가 죄이다. 단절은 하나님께 대한 죄악이며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이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죄를 범한 인간은 절대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탄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최후의 유일한 수단이었다.
2. 성탄의 이름
이사야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한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 인자, 하나님의 아들, 선한 목자, 등 예수님의 이름은 많다. 태어나실 때에도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고 구원자 외에도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나셨다. 죄가 분리라면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다. 지금도 예수님을 믿으면 죄와 멀어지고 멀어졌던 하나님과 함께 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행 2:21)고 하셨다. 임마누엘은 그 이름이 구원이며 그 이름에 힘이 있다.
3. 성탄의 목적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려는 목적은 성취된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은 성탄의 목적을 성취하신 것이다. 경제위기 시대를 살고 있지만 우리만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경제위기이다. 하나님은 큰 날개로 우리를 감싸고 계시며 원수를 패망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백성을 하나님이 없는 백성이 결단코 이기지 못한다. 이 하나님은 세상 끝날 까지 나와 항상 함께 하리라고 하신다. 임마누엘로 오신 주님과 함께 구원을 체험하고 주님을 의지하고 용기를 가지고 승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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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13. 주일설교요약문
내 입에 주신 말씀
민수기23:11-12, 요한계시록10:8-11
성탄절은 예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날이.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셔서 입으로,몸으로, 삶으로 말씀을 주셨다. 그리고 그 말씀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여 모압평지에 왔을 때 모압왕 발락은 이스라엘을 두려워서 미디안의 선지자 발람에게 이스라엘을 저주하게 하려고 한다. 발람이 발락왕에게 나아갔을 때에 왕은 저주하라고 하였지만 나는 하나님이 내 입에 주신 말씀만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말씀을 가지고 주신 말씀만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1.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
성경은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이라고 한다. 발람의 말씀의 근거는 여호와에게 있다. 우리 입의 모든 말씀이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 되어야 한다. 즉 말씀의 기원이 하나님이시다. 말씀의 근거인 하나님은 말씀으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고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성경이 절대로 변치 않는 것은 여호와의 입이 명하신 여호와께서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숨을 불어넣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살았고 운동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가가 있고 힘이 있고 감동이 있다.
2. 축복의 말씀
발람은 이스라엘을 온전히 축복하는 말만 하였다. 발람의 입에 있는 말씀은 축복밖에 없고 저주가 없으니 축복밖에 할 것이 없었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므로 복을 내리시기를 원하시고, 선을 행하시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복된 말씀이며 맛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 발에 등이요 길에 빛이 되어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하고 갈 길을 밝게 비춘다. 또 하나님의 말씀이 축복인 것은 교육하기에 유익한 책이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는 책이다. 이런 축복의 책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다.
3.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말씀
발람은 여호와께서 내 입에 주신 말씀을 내가 어찌 말하지 않을 수 있으리이까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은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에게도 말씀이 입에 있다면 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바울도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어서 매를 맞고, 죽을 뻔하고, 옥에 갇히지만 말씀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우리 입에 말씀을 가지고 축복하는 말을 남김없이 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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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5.1
7.주일설교요약문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
전도서 12:1-8, 요한복음 6:26-27
전도서12:1-8 너는 청년의 때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가 가깝기 전에 너의 창조자를 기억하라 2해와 빛과 달과 별들이 어둡기 전에, 비 뒤에 구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리하라 3그런 날에는 집을 지키는 자들이 떨 것이며 힘있는 자들이 구부러질 것이며 맷돌질하는 자들이 적으므로 그칠 것이며 창들로 내어다 보는 자가 어두워질 것이며 4길거리 문들이 닫혀질 것이며 맷돌 소리가 적어질 것이며 새의 소리를 인하여 일어날 것이며 음악하는 여자들은 다 쇠하여질 것이며 5그런 자들은 높은 곳을 두려워할 것이며 길에서는 놀랄 것이며 살구나무가 꽃이 필 것이며 메뚜기도 짐이 될 것이며 원욕이 그치리니 이는 사람이 자기 영원한 집으로 돌아가고 조문자들이 거리로 왕래하게 됨이라 6은줄이 풀리고 금그릇이 깨어지고 항아리가 샘 곁에서 깨어지고 바퀴가
우물 위에서 깨어지고7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 8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도다 모든 것이 헛되도다
요한복음 6:26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청년은 교회의 미래이며 소망이다. 청년이 살아야 교회에 미래적 소망이 있고 교회가 산다. 우리 모든 청년들이 꿈이 있고 장래에 소망이 있고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청년이기를 바란다. 청년들은 소망을 심고 진실을 거두어야 한다. 무엇을 위하여 일하느냐는 것은 중요한 생의 가치관이다. 흔히 돈이나 명예나 권력을 위하여 일하게 되는데 이는 다 부질 없는 일이다. 오늘 성경은 분명한 해답을 제시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한다. 당시나 지금이나 양식의 문제는 심각한 세계적 문제로 대두되는데 우리는 영의 양식을 구할 줄 알아야 하고 영의 양식을 위하여 일할 줄 알아야 한다.
1.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예수께서 오천명을 먹이신 다음에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따라왔는데 이들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고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었다. 이들의 관심은 예수님도 표적도 아닌 떡이었다. 떡이란 먹어도 또 배고프게 마련인 것인데 이들은 일시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었다. 떡만 먹으면 사는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가 그러했고 부자와 나사로의 얘기에 나오는 부자가 그러했다. 광야에서의 제일 중요한 문제는 먹는 문제였고 문제 해결은 하나님께 있었다. 하나님은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셨는데 성경은 이것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이라 한다.
그런데 하늘 양식을 땅의 양식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썩지 않을 양식을 썩게 하는 사람들이다.
2.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예수께서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있다가 없어지는 것을 잡으려고 애쓰지만 잡고 나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반면에 생명이 있는 양식은 늘 가치가 변치 않는 것이며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망과 생명 가운데 사망을 선택하였고 이후로 생명보다 사망을 좋아하고 썩지 않을 것보다 썩는 것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당하여 애굽으로 피난하였다. 하나님은 그 의뢰하는 양식을 끊으셨도다라고 한다. 우리가 세상에서 의뢰하는 돈이나 양식이나 지식이나 젊음이나 힘은 잠깐이며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영원하다.
3. 인자가 주는 양식
썩지 않는 양식은 인자가 주는 양식이다. 다른데 가서 얻으려해도 얻지 못하고 인자만 주실 수 있는 양식이다. 영생하는 양식을 구하려고 진시황제는 불로초를 구하기 위하여 500명을 동원하여 동방으로 보냈지만 구하지 못하고 죽었다. 애굽사람들은 영생하려고 미라를 만들었지만 죽었다. 예수님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주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다. 만나는 중요한 양식이지만 오래 두면 썩었고 영원한 양식은 아니었다. 예수님이 주시는 양식은 영원히 주리지도 영원히 목마르지도 않은 양식이다. 썩는 것을 썩지 않게 하는 방법은 썩기 전에 쓰고 주는 것이다. 영생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슬기로운 우리 청년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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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2.
6. 주일설교요약문
여호와의 얼굴
민수기 6:22-26, 마태복음 18:10-14
동서양의 문화의 차이는 성경해석에도 나타나는데 한국인은 성경해석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한국인의 사고는 히브리적 사고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서양인은 헬라적 사고를 하기 때문에 성경해석에 어려운 점이 많다. 얼굴이란 것도 히브리적 사고는 사람의 인격을 의미하고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 자신을 상징하며 하나님의 얼굴이 향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심을 의미하며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떠나셨다는 의미이다.
1. 여호와의 얼굴은 보호하시는 얼굴이다.
경제위기 이후에 달라진 것 가운에 하나는 사회에서 성공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조건은 능력이며 다음이 노력이다. 기능사회로 변함에 따라 인품이 중요한 조건이라고 보는 사람은 이전에 비하여 크게 줄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요한 성공의 조건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에게 향하여 있다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얼굴은 인간 생존의 열쇠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 사회이다. 하나님의 얼굴은 절대적인 필요 조건이다.
2. 여호와의 얼굴은 은혜 베푸시는 얼굴이다.
성경은 여호와의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얼굴은 우리에게 은혜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비취면 우리에게는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의 얼굴이 비취지 않으면 은혜는 베풀어지지 않는다. 지난 일년의 경제위기 시대에 하나님은 은혜의 얼굴을 돌리지 않으시고 은혜를 입게 하셨다. 이제 신용등급도 상승하고 투자적정국이 되었다고 한다. 슈바이처는 죽음에 포위된 생이라고 하였는데 사실은 인생은 하나님의 얼굴에 포위된 생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3. 여호와의 얼굴은 평강을 주시는 얼굴이다.
성경은 여호와는 얼굴을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인간의 평강의 원인은 하나님의 사랑과 선택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영원한 갈망은 평강인데 평강은 사람이 주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스스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평강의 원천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여 있는 동안 우리는 평강하다. 우리가 평강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구약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면 죽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은 그 백성에게 향하였다. 하나님의 얼굴이 항상 우리를 향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얼굴로 은혜와 평강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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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1
8. 주일설교요약문
자유함이 있는 곳
예레미야34:17-22,고린도후서3:12-18
예레미야34:17-22, 17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너희가 나를 듣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한 것을 실행치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에게 자유를
선언하여 너희를 칼과 염병과 기근에 붙이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할 것이며 18송아지를 둘에 쪼개고 그 두 사이로 지나서 내 앞에 언약을 세우고 그 말을 실행치 아니하여 내 언약을 범한 너희를 19곧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난 유다 방백들과 예루살렘 방백들과 환관들과 제사장들과 이 땅 모든 백성을 20내가 너희 원수의 손과 너희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붙이리니 너희 시체가 공중의 새들과 땅 짐승의 식물이 될 것이며 21또 내가 유다 왕 시드기야와 그 방백들을 그 원수의 손과 그 생명을 찾는 자의 손과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의 손에 붙이리라 22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내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 성에 다시 오게 하리니 그들이 이 성을 쳐서 취하여 불사를 것이라 내가 유다 성읍들로 황무하여 거민이 없게 하리라
고린도후서3:12-18, 12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13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같이 아니하노라 14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16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17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자유는 모든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인간 자산이다. 누구나 다 자유를 원하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자유는 누릴 줄 아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최근에는 자살 사건이 많이 있다. 죽으면 자유하다는 생각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오래 전 4대 자유를 발표했는데 어디서나 말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수 있는 자유, 어디서나 결핍으로부터 해방 받을 자유, 어디서나 공포로부터 보장받을 자유이다. 이런 자유가 있다고 해도 인간은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참 자유는 죄에서 자유이다.
1. 자유함이 없는 구약
14절을 원문에 가깝게 읽으면 그 수건은 구약을 읽을 때까지 벗어지지 아니하고 남아 있으니이다. 그리스도 없이 구약을 읽으면 마치 수건을 쓰고 읽는 것이나 같다. 불완전한 것을 완전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다. 불완전한 구약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는 절대로 완전하게 되지 못하고 스스로 완전케 될 수도 없다. 율법으로 말하면 제일인 모세도 율법적으로는 완전치 못한 사람이었다. 수건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이 쓰던 탈릿을 의미한다. 회교 여인들이 쓰는 차도르도 얼마나 부자유하겠나 구약은 이것과 같이 자유함이 없기에 수건을 벗어야 한다.
2. 자유함을 얻는 법
16절은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오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한다. 자유함을 얻는 법은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수건을 벗는 법은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사
람이 그리스도에게 돌아와 그에게 비추어 구약을 읽을 때에 수건은 벗겨지고, 구약의 뜻은 선명하게 된다. 율법은 온갖 형식과 전통들이 숨통을 죄는 것므로 유대인들은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도 율법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관습이 신앙인줄 알고 그것을 움켜쥐고 말씀보다 교회의 전통을 고수하려는 수건을 쓰고 보는 것 같은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3. 자유함이 있는 신약
17절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고 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율법은 의문이니 율법이 있는 곳에 속박함이 있느니라이다. 자유는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선물로 십자가에서 모든 속박을 끊으셨다. 그리스도는 자유케 하는 권능이 있다. 주의 영은 자유케 하는 영 이며 그리스도는 살리는 영이다. 율법은 밖에서 속박하고 죽이나 영은 안에서 살리고 해방한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도 자유케 하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는 자유함이 있는 곳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수건을 벗고 자유를 누리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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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11. 주일설교요약문
물동이를 버리고
신명기 10:12-19, 요한복음 4:27-30
신명기 10:12-19, 12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13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 14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15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16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17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며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19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요한복음 4:27-30, 27이 때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서 여자와 말씀하시는 것을 이상히 여겼으나 무엇을 구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저와 말씀하시나이까 묻는 이가 없더라 28여자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이르되 29`나의 행한 모든 일을 내게 말한 사람을 와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하니 30저희가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요한복음은 대화의 책이다. 서두에서는 그리스도를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셨고 대화로 오신 그리스도는 나다나엘, 니고데모, 우물가의 여인 등과의 대화를 기록하고 있다. 우물은 물이 귀한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굉장히 중요한 생활 수단이며 생명과 연관된 것이다. 성경은 이삭과 야곱이 우물을 팠던 일을 중요하게 기록하고 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것은 물과 공기와 햇빛이다. 그 중에서 물은 인간생존의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관심은 육체의 물이 아니라 생명의 물이다.
1. 예수님은 생수이다.
여인과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물 얘기로 시작하신다. 그리고 예수님 자신이 생수의 공급자이시며 생수 그 자체라고 하신다. 세상의 물은 점점 오염되어 가고 있고 마시면 마실수록 몸에 해롭기 때문에 생수가 아니다. 왜 예수님은 생수일까 물은 형식이 없으며 이것이 액체의 특성이다. 자신의 모양은 없지만 다른 것의 모양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는 것이 물이다.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고, 변할 수 있으며, 누구에게나 맞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으로서 사마리아인이라는 형식도, 남자로서 여자라는 형식도 넘어서셨다.
2. 여인은 물동이를 이고 왔다.
예수님의 관심은 생수지만 여인의 관심은 아직은 물동이다. 물동이는 물을 위한 것이지 물동이 자체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물이 없으면 물동이도 필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생수는 알맹이며 물동이는 껍데기이며 생수는 내용이고 물동이는 형식이다. 이 여인은 생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고 물동이에만 관심을 가진다. 일반적으로 세상의 사람들은 내용보다 형식에 관심을 가진다. 이것이 구조조정의 요인이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내용보다 형식에 관심을 가지며 속은 드러내지 않고 겉만 가리는 쌈문화가 발달한다.
3.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갔다.
물동이를 이고 온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고 갔다. 물동이를 버린 것은 더 이상 물동이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의 물인 그리스도를 만난 다음에는 물동이는 아무 것도 아니며 더 이상 보존의 가치가 없다. 참 내용을 얻은 다음에는 형식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물동이를 가지고 올 때는 체면이 문제였고 형식이 문제였지만 물동이를 버리고 갈 때에는 더 이상 체면이나 형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물동이를 버려야 증거할 수 있다. 사회의 개혁이나 기업의 구조조정은 물동이를 버리는 일이다. 내용은 변하지 않고 형식을 언제나 버릴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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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0.
4. 주일설교요약문
자기를 속이지 말라
레위기 25:17, 고린도전서 3:18-22
레위기 25:17, 너희는 서로 속이지 말고 너희의 하나님을 경외하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고린도전서 3:18-23, 18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니 기록된 바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궤휼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21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22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최근 사회의 정황들은 마치 서로 속고 속이며 사는 것과도 같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는 말세에 대한 징조가 있는데 바울은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한다고 하였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하다가 자신이 속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기를 속이지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기 전에 먼저 자신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속이지 말아야 한다. 레위기 25:17은 깊은 뜻은 서로 속이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까닭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속이지 않는 진실한 삶의 근본이다.
1. 지혜 있다 하지 말라
사람들은 자신이 지혜가 있다고 착각한다. 스스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다(고전 1:25).
그러므로 사람들이 자신이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이며 이것이 스스로 속이는 일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지혜에는 어리석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지혜에는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 하는데 사람들은 반대로 산다. 이것이 지혜롭지 못한 삶인 것이다. 성경은 사람들에게 겸손을 권한다. 겸손이란 결국 하나님을 인정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다. 또 지혜의 근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해야 한다.
2.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사람이 스스로 속는 것은 사람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식견으로 사람들은 자랑을 많이 한다. 인간의 아름다움, 인간의 지식, 인간의 소유 등을 자랑하며 산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바울은 자랑할 것은 자신의 약한 것이라고 하였다. 인간이 하나님 안에서 자랑할 것이 없음은 모든 것이 주께로 왔기 때문이다. 인간의 지식이나 소유나 존재 자체가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솔로몬은 인간적으로 볼 때에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그가 모든 것이 헛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인간적인 것을 자랑할 수 없는 항상 부족한 존재이다.
3. 내 것이라 하지 말라
사람들은 이 세상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이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고 이 것 때문에 그는 죽어 음부에 가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내가 가진 것은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것이지 내가 소유자가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청지기의 자세를 가질 때에 가장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것이라고 인정하는 지혜를 얻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속이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가 되자.
199
8.
9.2
7.주일설교요약문
생명나무 가에서
창세기3:22-24, 요한계시록22:1-5
도시의 빌딩 숲 속에 살다가 가끔은 나무 숲 속에 갈 수 있는 여유를 가지면 좋을 것이다. 숲은 산소를 공급하고 머리가 맑아지고 머리에 산소가 많이 공급되어야 건강하고 상쾌하게 된다.
그러므로 숲은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호흡하며 사는 곳이 있는데 하나님의 나라이다. 생명나무 사이로 거닐며 살게 되니 영원히 사는 생명을 공급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제3일에 나무를 창조하셨다. 에덴 한가운데 생명나무를 창조하셨는데 사람이 타락하므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다시 곁에 두게 하신다.
1. 생명나무는 어린양의 보좌를 중심으로 심겨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양의 보좌가 있고 생명수 강이 보좌에서 흘러내리며 강 좌우에 길이 있는데 그 길에 생명나무가 12가지 열매를 맺고 잎사귀가 무성하다.생명수 강의 근원은 어린양의 보좌이고 생명나무도 하나님의 보좌를 중심으로 심겨있다. 어린양은 예수님이신데 심판자를 어린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심판은 사망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려는 의도이다. 어린양에게서 생명이 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 만이
생명을 창조한다. 예수님도 자신이 생명이라고 하셨다. 바울도 사도행전 17:25에서 하나님이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하였다. 어린양의 보좌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공급받아 생명이 필요한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자.
2. 생명나무는 생명수 강 좌우에 있는 나무이다
생명나무가 생명을 공급할 수 있는 것은 생명수를 마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수가 우물가의 여인에게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하셨다. 어린양의 보좌에 근원을 두고 흘어나는 물은 영생하는 물이다. 엘리사는 여리고의 샘물에 소금을 뿌려 물을 깨끗하게 하였고 토산이 많아지게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뿌려졌기 때문에 물이 깨끗해졌다. 나무는 뿌리가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하다. 시냇가에 심기워진 나무가 열매를 많이 맺고 늘 풍성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에서 생명을 주는 물을 마시고 영혼을 위하고 영혼이 배부르고 마음을 기름지게 하는 것을 공급받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생명나무 보다 선악과를 선택한 인간은 지금도 죽음의 물을 즐기며 살아간다.
3. 생명나무는 열두 가지 열매를 맺고 잎이 무성하다
하나님의 나라의 생명나무는 12가지 열매를 맺어 모든 사람이 달마다 풍성한 실과를 얻게 한다. 에스겔 47:12의 강 좌우 가에는 각종 실과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실과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실과를 맺으리니라는 말씀의 에스겔이 본 환상도 요한의 환상과 일치한다. 하나님이 타락하기 전 인간에게 제일 먼저 먹게 하신 것을 다시 먹게 하신다. 첫 아담이 실패하여 먹지 못하게 불칼로 막으신 생명나무 열매를
둘째 아담을 통하여 풍성하게 먹게 하신다. 열매는 하나님 좋아하신다. 열매 있는 나무를 좋아하시며 성도가 열매가 되기를 바라시며 성도들이 세상에서 성령의 열매를 맺기를 기대하신다. 하나님 나라 생명나무에 처음 익은 그리스도의 열매로 영원히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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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13. 주일설교요약문
뽕나무 위에서
역대하 1:14-15, 누가복음 19:1-10
역대하 1:14-15, 14솔로몬이 병거와 마병을 모으매 병거가 일천 사백이요 마병이 일만 이천이라 병거성에도 두고 예루살렘 왕에게도 두었으며 15왕이 예루살렘에서 은금을 돌같이 흔하게 하고 백향목을 평지의 뽕나무같이 많게 하였더라 누가복음 19:1-10, 1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 지나가시더라 2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3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4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5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6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7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가로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8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9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0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5장의 잃은 양의 비유, 잃어버린 드라크마의 비유에는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 하리라고 하신다. 누가복음의 삭개오의 이야기는 바로 이 이야기이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난 사건은 소경 바디매오의 사건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바디매오는 여리고 입구에서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구원을 얻게 되며, 삭개오는 여리고 출구에서 예수님을 만나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 뽕나무는 성지에서 흔한 나무로 삭개오에게 뽕나무는 흔하였지만 은혜스러운 나무였다. 우리에게도 흔하지만 은혜 받을 만한 기회가 얼마든지 많이 있다.
1. 왜 뽕나무에 올라갔나
삭개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듣고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였다. 삭개오의 평소의 관심은 얼마나 가진 사람인가라는 소유였지만 이제는 어떤 사람인가라는 존재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는 열망은 억지가 아니라 자의였다. 하나님을 보려고 호렙산에 오라 갔던 모세나 가정적 실패 후에 벧엘로 올라갔던 야곱도 스스로 하나님을 보기 원했던 것이다. 삭개오는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뽕나무에 올라갔다. 키가 작은 것은 자기 탓이며 사람이 많은 것은 남의 탓이다. 뽕나무는 이 두 가지 장애물을 동시에 치유하는 방법이다. 예수님을 만나려면 내 탓과 남을 탓을 다 극복해야 한다.
2. 왜 내려오라고 하셨나
뽕나무에 오르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기에 필요한 우리편의 요건이며, 내려오는 것은 예수님 편의 요건이다. 뽕나무는 예수님을 보는 장소이지 만나는 장소는 아니다. 뽕나무는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장소이지 만난 이후의 장소가 아니다. 예수님을 만난 다음에는 뽕나무는 더 이상 필요 없다. 구경과 만남은 다르다. 지금까지는 예수님 구경이고 이제는 예수님 만남이다. 지금까지는 호기심을 가지고 뽕나무 위를 올랐지만 이제는 영접하기 위하여 뽕나무에서 내려와야 한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예수님을 관찰하고, 구경하고, 호기심을 가지고 보는 뽕나무 위가 필요하다. 그러나 계속 뽕나무 위에만 있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올라가는 용기보다 내려오는 결단이 더 필요하며 더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3. 내려와서 무엇을 하나
내려오라는 말에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였다. 삭개오가 진정 원하였던 것은 뽕나무 위가 아니라 아래였다. 단순히 보고자 했던 삭개오의 소원은 그 이상의 은총으로 받았다. 작은 소원이 큰 은총이 되었다. 우리의 보고자 하는 작은 소원은 우리 집에 들어오시는 큰 은총으로 주어진다. 삭개오는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토색한 것을 네배로 갚겠다고 한다. 회개에는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 만나면 회개는 자연적인 결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구원을 선포하며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라고 하신다. 구원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삭개오는 소유와 구원을 바꾼 것이다. 소유에 관심을 가진 뽕나무 위의 구경꾼이 아니라 구원에 관심이 있다면 뽕나무 아래의 영접한 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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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 6. 주일설교요약문
로뎀나무 아래서
열왕기상 19:1-8, 로마서 8:35-39
열왕기상 19:1-8, 1아합이 엘리야의 무릇 행한 일과 그가 어떻게 모든 선지자를 칼로 죽인 것을 이세벨에게 고하니 2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 같게 하리라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 한지라 3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그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4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5로뎀나무 아래 누워 자더니 천사가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6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7여호와의
사자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네가 길을 이기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8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행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로마서 8:35-39, 35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지난달에 북한에 가서 로뎀제약회사를 착공하고 돌아왔습니다. 남북 합영회사로는 분단 후 처음이어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로뎀이라고 이름한 것은 다시 소생하는 관계가 되기 위한 바람이 담겨져 있습니다.
엘리야는 바알 신을 섬기던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고 여호와가 하나님이신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이런 승리 다음에 그에게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이세벨의 보복으로 그는 브엘세바의 로뎀나무 아래에서 죽기를 자청한 것입니다. 엘리야의 로뎀나무 아래의 경험은 열심히 살려고 하는 우리와 우리 민족의 경험입니다. 죽을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 민족의 현실과 이겨내는 비결을 봅시다.
1. 로뎀나무 아래는 좌절과 포기의 순간입니다.
엘리야는 그의 고통과 분함을 참지 못하여 죽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이런 감정은 우리 국민의 현재의 감정입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구원받는 것을 보고 죽기를 청하였고 도마는 예수께서 다시 유대로 가시려 할 때에 죽기를 자청하였습니다. 엘리야가 범한 가장 큰 죄는 실망이라는 것이었고 이것은 마귀가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잘 쓰는 무기라고 합니다.
죽기를 자청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항이기도 했습니다. 엘리야가 좌절한 것은 자신의 열심만 특심하다고 한 자만심과 자신만 고통을 당한다는 고독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큰 일을 보지 못하고 작은 일만을 볼 때에는 실망하고 좌절하게 됩니다.
2. 로뎀나무 아래는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의 자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를 불쌍히 보시고 천사를 통하여 먹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좌절과 실의 가운데 있던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다시 힘을 얻도록
먹이십니다. 실제로 우리가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잘못된 관심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바람을 바라보았을 때에 물에 빠졌으며,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이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가나안인들을 보았을 때에 자신들이 메뚜기 같이 보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포자기와 열등의식을 극복하게 하시고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십니다. 엘리야가 세상의 권력과 여건을 바라보다가 다시 하나님을 바라본 자리가 로뎀나무 아래였습니다.
3. 로뎀나무 아래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의 자리입니다.
모세의 후계자인 엘리야는 일어나 힘을 얻고 40주야를 걸어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렀습니다. 옛날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자리였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음식을 먹고 새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사야 40장은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는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는 경제적 어려움을 당한 우리 민족에게도 새 힘을 얻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의 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십니다.
그런데 경제위기이후 다른 나라에서는 가장 많이 팔리는 것이 책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많이 팔리는 것이 소주와 삼겹살이라고 합니다. 지혜를 구하며 어려움을 이겨낼 것인가 아니면 좌절과 한탄 가운데 지낼 것인가는 중요한 선택입니다. 재기의 엘리야를 배워서 경제위기 한파를 슬기롭게 이겨내는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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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1.
1. 주일설교요약문
결실하는 신앙
시편 92:12-15, 마태복음 13:3-8
시편 92:12-15, 12의인은 종려나무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같이 발육하리로다 13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14늙어도 결실하며 진액이 풍족하고 빛이 청청하여 15여호와의 정직하심을 나타내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바위시라 그에게는 불의가 없도다
마태복음 13:3-8, 3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뿌릴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8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추수기에 태풍이 불어 수확에 많은 피해를 보게 되었다. 아무리 여름 내내 농부가 수고한다고 하더라도 한해의 농사는 망치게 된다. 수고한대로 먹는 것은 축복이며 뿌려진 씨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의 씨는 하나이지만 뿌려지는 곳에 따라 열매를 맺기도 하고 맺지 못하기도 한다.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마음밭에 따라 천태만상의 결과를 가지고 온다. 시냇가에 심은 나무는 열매 있는 나무가 된다. 포도나무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제자가 될 것이라고 하셨다.
1. 타인의 방해가 없어야 결실한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방해를 제거해야 한다. 최근에는 추수기가 된 벼를 훔쳐가는 도둑이 생겼다. 가장 악랄한 추수의 방해자이다. 말씀이 분명히 뿌려졌지만 사단이 와서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은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방해이다. 말씀은 누구에게나 뿌려지지만 타인의 방해 때문에 결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씨가 뿌려지자 새들이 와서 먹고 열매가 맺히자 새들이 와서 열매를 파먹는다. 굳은 마음 때문에 말씀이 귀에 들려지지 않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이나 롯의 사위들이 그러하였다.
2. 자신의 방해가 없어야 결실한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타인의 방해뿐만 아니라 자신의 방해가 없어야 한다. 말씀을 듣고 결실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방해다. 지면이 얇은 땅은 해가 나면 타고 만다. 해는 자라게 하는 절대적인 요인이지만 없어지는 것은 자신의 탓이다. 또 가시밭에 뿌려진 씨같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 때문에 결실하지 못한다. 이것도 자신의 방해이다. 태풍에도 끝까지 떨어지지 않고 달려있는 과실들이 있다. 일본에서는 이런 과실들이 대학 입시생들에게 인기 있는 상품이라고 한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인기 있는 백성이다.
3. 방해없는 은혜로 끝까지 결실한다.
결실하기 위해서는 조건이 좋아야 한다. 기후도 좋아야 하고 마지막의 재해도 없어야 한다. 말씀이 좋은 땅에 뿌려지고 좋은 조건을 가져야 많은 결실을 할 수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진지한 마음으로 말씀을 상고하였다. 이런 마음이 옥토로 결실한다. 우리에게 열매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우리의 사람됨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일이다. 우리는 한 시절만 과실을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생명나무처럼 달마다 열두 가지 과실을 맺는 사람들이 되어 늙어도 결실하는 마지막 태풍에 떨어지지 않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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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9.20. 주일설교요약문
은혜의 완성
창세기 33:10-11, 고린도후서 8:1-15
루이스 윅스목사
창세기33:10-11, 10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이다 11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고린도후서8:1-15, 1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6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너희 가운데서 시작하였은즉 이 은혜를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 7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8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10 이 일에 내가 뜻만 보이노니 이것은 너희에게 유익함이라 너희가 일 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11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13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14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有餘)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15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린도교회에 보낸 사도바울의 편지를 보면 일반 그리스도인들이 지켜야할 많은 규범뿐만 아니라 특별한 사항들에 대해서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는 특별히 경제적인 문제인 돈이나 가난 또는 베풂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에는 재물을 드리는 일에 대해서 부정적인 면이 아니라 긍정적인 면에서 권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리되 하나님께 대해서 올바르게 응답하는 자세로 드리며 심지어 우리가 어떻게 곡물들을 수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계십니다. 곡식을 거둘 때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얼마만큼 남겨두라고 성경말씀은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의 청지기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항상 가난한 자들에게 시간을 초월해서 베풀며 선한 의미에서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무엇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독생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주셨다는 것부터 시작된다고 말합니다. 타인을 위해 항상 마음을 열고 많이 베풀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다시 많이 베풀어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모든 면에서 볼 때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 다양한 신학적인 것 중 사도바울이 말하는 중요한 한가지는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고 다른 사람이 또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이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라는 얘기입니다. 이 사이클은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것부터 시작합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기 위해서 부름 받고 있는 소명자들인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에 아프리카 가나의 한 장로교를 방문하여 함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헌금하는 시간이 되었는데 그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기들의 헌금을 찬송을 부르며 춤을 추면서 헌금함에 넣고는 다시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헌금이 다 끝나고 어려운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를 한 후 다시 두 번째 헌금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뻐하며 웃으면서 또 춤을 추면서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정성스럽게 드렸습니다. 바로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는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기 위해 소명 받은 사람이며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해 가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한다는 것은 예수그리스도를 내 마음속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면 기뻐하면서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해 나가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은혜의 사이클을 완성하면서 살아가는 과정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서 이일은 가능하며 성령께서 역사 하심으로써 또한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드리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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