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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여자의 은전 한닢 (눅15:8-10)

본문

누가복음 15장의 주제는 우리의 의로움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로 운 모습으로 서는가. 우리의 노력으로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인 가. 우리의 노력으로 의로와진다는 사람들은 15장의 서두에서 예수를 원망하 며 비난했던 서기관이나 바리새인 집단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의로와진다는 사람들은 세리와 죄인 집단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내용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왜냐하면 신앙은 국민학생 들의 바른생활 시험문제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우리의 의로움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한다고 말하고 , 또 그렇게 믿고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실질적인 삶에서 우리가 깨끗 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는 식의 삶을 주장한다면 이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오늘 이 땅의 기독교인들 은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래도 자기는 하나님 앞에 그만한 은혜 를 입을 만큼,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는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즉 죄인 은 죄인이로되 다른 죄인들 보다는 의롭고 깨끗한 죄인이라는 묘한 생각을 가 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푸신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열심히 살았다든지 아니면 그만큼 열심히 믿었다든지, 그것도 아니면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라든지 하는 등등의 이유를 내세워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푼 은혜를 설명하려고 한다. 뿐만아니라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자신의 경험을 내세워 하나님께 열심을 내보라고 권하기도 하 고, 좀더 도덕적인 삶, 깨끗한 삶을 살라고 책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은혜라는 말은 이 모두를 부정하는 의미이다. 은혜란 주어진 결과 에 대한 원인이 나에게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하신 것은 내가 똑똑해서도 아니고, 교회에 열심이어서도 아니고, 또 세상에서 윤리 도덕적 으로 흠 없이 살아 왔기 때문도 아니다. 내 쪽에서의 아무런 원인이 없었음에 도 불구하고 의로움이라는 상태가 나에게 주어진 것.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이다. 그러니까 나의 상태가 지저분하면 지저분할수록, 모자라면 모자 랄수록 더욱 하나님의 은혜가 빛난다. 그러나 이전의 내가 세상에서 흠도 없 고 점도 없을 정도로 깨끗하고 의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이라면 얘기가 좀 달 라진다. 즉 이 사람은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의롭게 살아온 것도 조금은 ─ 아주 조금이기는 하더라도 ─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자기보다 형편 없이 지저분하고 형편 없이 잘못된 사람들을 바라 보면 적어도 자신이 그들과 동등한 죄인으로는 여겨지지 않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게 한다.
15장의 서두에서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이 세리나 죄인을 영접하는 예수의 행 태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이다. 그들은 당시의 유대 사회에서 하나님을 믿고 의로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는데 그렇지 못한 세리같은 인간들과 동등하게 의로와진다는 것이 어떻게 가당하겠는가. 어림도 없는 일이 었다. 그들과 같이 의로와질 바에야, 일을 그렇게 불공평하게 처리하는 하나님의 의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게 그들의 심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향한 그들의 원망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는 이들에게 잃은 양 한마리의 비유에 이어 잃어버려진 은전 한닢 의 비유를 들려 주었다. 항상 그렇듯이 모든 비유는 듣는 귀를 요구한다. 들 을 수 있는 귀가 없다면 천국의 그 많은 진리들도 한낱 허공을 향하여 울리는 꽹과리 소리에 불과할 것이다. 잃어버려진 은전 한닢의 비유는 무엇을 말하는가. 잃은 양의 비유나 돌아온 탕자의 비유 만으로도 회개하는 죄인 하나의 모습은 충분히 설명할 수 있을 터인데 무엇 때문에 잃은 은전 한닢의 비유까 지 동원되었는가. 이 비유는 앞뒤에 나오는 두 비유와 같은 내용인가 아니면 또 다른 의미가 있는가.
물론 이 비유도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모습이라는 데서 앞뒤의 두 비유와 근 본적으로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누가복음 15장이 우리가 하나님 앞 에 의로와지는 과정이나 모습을 설명한다고 볼 때 15장의 세가지 비유는 모두 다 동일한 내용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세가지 비유는 모두 잃 어버려진 어떤 것을 그 주인이 찾고, 그 찾음으로 인해 기뻐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 이 비유는 다른 두 비유와는 다르다. 어떤 점 이 다른가. 다른 두 비유와의 차별화를 위하여 이 세가지 비유의 주인공들을 비교해 보자.
123 주인 어떤 목자 어떤 여자 어떤 아버지 잃어버린 것 양 한마리 은전 한닢
둘째 아들 이상의 비유에서 목자나 여자, 아버지의 위치에 들어갈 대상은 물론 하나님이 나 하나님의 사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양 한마리나 은전 한닢, 혹은
둘째 아들이 상징하는 바는 회개한 죄인 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세 비유 모두 자신의 어떤 소유를 잃어버린 주인의 모습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첫번째 비유에서는 죄인의 모습이 양으로 묘사되다 보니까 그 주인은 목 자로 표현된 것일 게고, 두번째 비유는 일반적으로 가계를 주관하는 사람이 여자라는 면에서 은전의 주인이 여자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세번째도 마찬가 지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이 세가지 비유에 있어 주인된 심정은 모두다 같다 고 할 수 있는데,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상징하는 잃어버린 것들은 어떤가.
첫번째 비유에서는 죄인이 양 한마리로 묘사되고 있고, 두번째는 은전 한닢, 세번째는
둘째 아들이다. 여기서 두번째 비유가 다른 두 비유와 다른 점은, 은전 한닢은 다른 비유에서 나오는 양이나 사람과 같이 자유의지를 가진 생물 이 아니라는 점이다. 즉 세번째 비유에서는 말할 것도 없지만 첫번째 비유에 서도 양 한마리가 목자의 품을 떠나 잃어버려지게 된 것은 양의 책임이 크다 고 할 수 있다. 즉 잃어버려졌다는 말은 인간들이 죄인이 되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는데, 마지막 비유에 나오는 탕자의 경우에는 자기 자신이 자발적으 로 아버지의 그늘을 도망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원하심 을 거스리면서 자신의 길을 고집하는 인간의 모습을 설명한다고 볼 때 크게 무리가 없다. 그래서 이 탕자의 비유에서는 회개 역시 이 탕자의 깨달음과 돌 이킴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는 떠나가는 아들도 수동적으로 서서 바 라보기만 하고(물론 그 마음 속에서 고통이 크겠지만), 돌아오는 아들도 역시 맞아들여 기뻐하기만 한다. 즉 아버지 쪽에서 능동적으로 아들을 찾아 나서 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면에서 이 세가지 비유를 조명해 보면, 마지막 탕자의 비유는 아버지의 모습은 주로 수동적으로 그려지고, 아버지를 떠나는 것도 탕자고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행동에 옮기는 것도 탕자라는 점에서 탕자의 모습이 능동적으로 그 려지는 반면, 첫번째의 잃은 양의 비유에서는 잃어버려진 사건은 양(羊)쪽에 능동성이 있고, 그 양을 찾는 면에서는 목자쪽에 능동성이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두번째 비유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가 없다. 은전 한 닢은 스스로 잃어버려질 수도 없거니와 스스로 주인을 찾아 나설 수도 없다.
즉 은전 한닢이 상징하는 인간은, 죄인되는 모습에서도 철저히 수동적이고 의 인되는 모습에서도 철저히 수동적인 모습이다.
생각해 보자. 우리 중에 누구라도 스스로 죄인되고 싶어서 죄인된 사람이 있는가. 태어나서 다른 사람 괴롭힌 적도 없고, 남의 물건 훔친적도 없는 사람 이 어찌하여 죄인인가. 흔히들 하는 말로 우리 조상 아담의 원죄 때문에 어찌할 수 없이 죄인된 것이라면 이건 좀 억울한 일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억울해 하든 말든 사실은 사실이다. 아담 아래서 태어난 인간은 너 나를 막 론하고 모두다 죄인이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 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 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 이라 (롬5:12-14)
분명히 아담의 범죄와 동일한 범죄를 저지르지 아니한 자들에게도 사망이 왕 노릇했다고 바울은 지적한다. 그러나 사망이 사람들 위에 왕노릇했다는 말은 인간들이 죄를 지었다는 의미이고,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자기가 죄를 짓는지 도 모르면서 죄를 지었다는 말이 된다. 다시말하면 아담 아래서 태어났다는 것 만으로 이미 죄인이 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탕자 의 비유와는 좀 다르다. 탕자의 비유에서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가서 자신의 모든 권리를 주장하고, 그 권리를 받아 먼 나라에 가서 자기 책임하에 허랑방 탕하게 살지 않았는가. 이런 경우 탕자의 허랑방탕에 대한 책임을 본인에게 묻는 것은 당연하지만 단지 아담에게서 태어났다는 것 만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과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진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공의의 하나님이라면 하실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 딜레마를 안고 있다. 자기 책임과 상관없는 자신의 원죄.
그리고 이 원죄를 해결하기 위하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어야 한 다는 논리. 이 둘은 서로 맞지 않는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5장 14절에서 언급한 대로 아담이 오실 자(예수 그리스도)의 표상(tvupo 본, 전형)이라면 , 우리가 아담 아래서 자동적으로 죄인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 아래 서는 역시 자동적으로 의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자동적으로 라는 말의 뜻은, 아담 아래서는 우리가 죄를 지었느냐 짓지 않았느냐 혹은 우리가 아담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상관없이 죄인되었다는 뜻이고, 마찬가 지로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는 우리가 의로우냐 의롭지 않느냐 혹은 우리가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상관없이 이미 의인이 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이 죄인된 것도 우리의 책임이 아니고, 또한 의인 이 되는 것도 우리의 문제는 아니라는 얘기가 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아담 아래서 사느냐 아니면 예수 아래서 사느냐는 삶의 장소 문제일 뿐이다. 아담 아래서 사는 것은 인간들이 죄 가운데 빠져 사는 모습이고(죄를 짓느냐 짓지 않느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 쪽에서 보면 잃어버려진 인간의 모습이며, 예수 그리스도 아래에서 사는 삶은 역시 그가 얼마나 의로운 사람이냐에 상관없이 이미 하나님 앞에 되찾아진 삶이며, 의로운 삶의 모습이다. 이것은 마치 은전 한닢이 주인 여자의 손 안에 있느냐 아니면 어두운 방 의 구석진 곳에 잃어버려져 있느냐 하는 문제와 같다. 결코 은전의 외모가 바 뀌는 것이 아니며, 은전의 재질이 바뀌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삶의 장소, 그 거처가 바뀔 뿐이다.
그러면 이 얘기는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가 죄인된 것도 내 책임이 아니고, 돌이켜 의인이 되는 것도 내 노력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라는 얘긴가.
그런데 왜 성경은 우리더러 죄를 짓지 말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며, 죄 에 대한 회개를 요구하는가.
잃어버려진 은전 한닢의 비유는 우리로 하여금 의와 죄에 붙잡히지 말라는 메 시지이다. 그것은 우리의 문제가 아니다. 은전 하나가 잃어버려졌다가 주인의 손에 다시 찾아지는 사건은 전적으로 주인의 문제이지 은전이 나서서 해결해 야하는 문제는 아닌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잃어버려진 은전 한닢과 같은 존재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고야 말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찾음은 우리의 기쁨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끊임없이 의의 문제와 죄의 문제에 사로잡혀 정 작 자기자신의 문제는 놓치고 있다. 그러면 의와 죄의 문제에 사로잡힌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것은 사람들이 의로와지기를 노력하고 죄짓지 않고 살기를 애쓴다는 말이다. 지난호의 잃은 양 한마리의 비유에서도 밝혔듯이 사람들은 끊임없이 윤리적이려고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바로 이러한 삶의 행태가 곧 의와 죄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 이다. 그래서 스스로 의로운 사람들은 자기보다 덜 의로운 사람들을 매도하고 , 또 자타가 공히 인정하는 죄인들은 의로운 사람들 앞에서 늘 주눅들게 마련 이다. 양쪽 모두 의와 죄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 게 산다.
그러나 여기 어떤 여자의 은전 한닢은 잃어버려지고 찾아지는 문제에 있어서는 도무지 능동적인 역할이 불가능한 존재이다. 잃어버려졌다고 자신이 주인 을 찾아 나설 수도 없거니와, 또한 주인이 자신을 찾음으로 주인에게 기쁨이 되었다고 해도 자신이 나서서 자랑할 일도 없다. 즉 우리의 죄와 의는 오로지 우리 손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아 그 문제에서 자신의 손을 떼는 일이 필요 한 것이다. 우리가 죄사함을 받는다는 말의 뜻은 다시는 죄가 우리를 주장할 수 없다는 뜻을 포함하는데,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뜻은 우리의 생각이 '죄의식'으로부터 떠났다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죄의식으로부터 벗 어나지 못하는 한,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의(義)'로부터 벗어날 가능성도 없다.
예수께서 가장 경계하고 멀리했던 내용이 바로 이 '자기 의'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자기 의'가 없이는 못산다.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의 란 애시당초 존재하지도 않은 은전 한닢이, 의롭게 사는 것이 무슨 대단한 인 생의 의미라도 되는양 기염을 토하는 것이 바로 허환(虛幻)에 사로잡힌 인생 의 모습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적인 모습은 이것이다. 자기 문제가 아 닌 의를 자기가 이루겠다고 고집하는 것. 그리고 거기다 자기 목을 매고 하나님께 결사항전하는 것. 동키호테가 풍차를 향해 돌진하면서 자신은 천하에 둘 도 없는 명기사라고 착각하는 것과 진배 없다. 누가복음의 본문을 다시 한번 보자.
어느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 도록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눅15:8)
누가 등불을 켜는가. 집을 쓸고 부지런히 찾는 이는 또 누구인가. 우리의 의 로움을 주인 품에 찾아진 은전의 상태로 본다면, 우리의 의는 오로지 누구 손 에 달려 있는 문제인가. 이 문제에 은전이 보태거나 빼거나 할 사항이 있는가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자고 이렇게 의로와지려고 노력들인가. 스스로의 힘 으로는 주인 곁으로 단 1센티미터도 굴러갈 수 없는 은전이 도대체 무얼 어떻 게 해보겠다는 말인가.
우리가 우리의 의를 위해서 할 일이라곤 눈곱 만큼도 없다는 사실이 우리의 살을 저밀 만큼 절실해지기 전에는, 우리는 모두 바리새인들이고 서기관들이다. 그리고 죄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예수를 향해 비난과 원망을 늘어 놓는 사람들이다. 제발 죄와 의의 환각에서 벗어나, 우리가 원래 주인의 소유였고 그리고 비록 잃어버려졌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주인의 소유이며, 뿐만 아니라 주인의 그 집요하고도 세밀한 추적에 의해 결국은 다시 주인의 손에 들려질 은전 한닢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생각이 이 문제에 분명하고 철저해 질 때에만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로 제대로 설 것이다.
글/이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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