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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증인이 되리라 (행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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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셋을 가진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 딸들은 한결 같이 뛰어난 미모 입니다. 그러나 딸들은 저마다 결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게으름뱅이 입니다. 또 하나는 도둑질을 잘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남의 흠 뜯 기를 좋아 합니다. 이런 결점 때문에 딸들은 시집가지 못했습니다. 노처녀로 늙어 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어느 부자가 이 딸들에게 청혼을 해왔습니다. 그 것도 세딸 모두에게 였습니다. 그 사람은 세 아들이 있으니 딸들을 내 아들들의 신부로 주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딸의 아버지는 무척 기뻤으나 한편으로는 큰 걱정이 되었습니다. 딸의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에게 솔직하게 털어 놓았습니다. 저들에게는 이러 이러한 결점들이 있으니 어떡하면 좋겠느냐고 했습니다. 청혼해온 아들의 아버지는 자기가 책임을 지고 주의하겠으 니 걱정 말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각 세쌍이 결혼을 했습니다. 시가의 아버지는 곰곰히 생각을 했습니다. 게으름뱅이 큰 며느리를 위해서는 많은 몸종을 고용해 주었습니다. 맏딸은 적당히 게으름을 피 우며 잘 살았습니다. 도벽이 있는 둘쩌 며느리를 위해서는 큰 창고의 열쇠를 넘겨 주었습니다. 무엇이든지 탐나는 것이 있으면 다 가져 가 라는 의미입니다. 세번째 흠구덕을 좋아하는 며느리에게는 좋은 묘안 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시아버지는 매일 아침 일찌기 그 며느리를 일 으켜서 오늘은 무언가 사람을 헐뜯을 일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친정의 아버지는 딸들의 시집살이가 궁금 했습니다. 어느날 염치 불 구하고 사돈네 집으로 갔습니다. 딸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맏딸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는 좋을만큼 게으름을 피우며 살 수 있어서 무척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딸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물 건을 가지고 싶을 때 얼마든지 가질 수 있으므로 무척 행복하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만나 본 세째 딸은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친정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시아버지가 내게 남녀 관계를 몰아 세우므로 무척 괴롭다는 것입니다. 매우 서러운 표정까지 지어 보였습니다. 친정 아버지는 세째 딸의 말을 믿지 아니 했습니다. 어째 서일까요. 그녀는 시아버지까지도 헐뜯고 있기 때문입니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 이야기입니다. 게으름이나 도벽은 고칠 수 있는 병입니다. 그러나 사람을 헐뜯는 것은 고칠 수 없는 고질적인 병임을 교훈하는 이야기 입니다. 사람은 남을 칭찬하는 말보다는 웬지 헐뜯는 말하기를 좋아 합니다. 좋은말, 좋은소식 전해주기 보다는 나쁜말 나쁜소식 전해 주기를 더 좋아합니다. 그래서 좋은말 좋은 소식은 곧 감추어져 버립니다. 나쁜 일 나쁜 소식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개에 날개를 달아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갑니다. 탈무드에 보면 또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느 랍비가 사환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오라고 했습니다. 사환은 혀를 사왔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이번에는 값싼 것을 사오도록 했습니다. 또 혀를 사왔습니다. 랍비는 물었습니다. 내가 너더러 맛있는 음식을 사오라고 했더 니 혀를 사왔구나 오늘은 그럭 저럭 값싼 걸로 사오라고 했더니 또 혀 를 사왔구나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냐, 사환은 대답 했습니다. 혀가 아 주 좋으면 이보다 더 좋은게 없습니다. 또한 혀가 나쁘면 이보다 더 나쁜게 없습니다. 하고 말하더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3장은 혀의 장이라고 할만큼 혀에 대하여 많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혀를 능히 길들일 사람은 없습니다. 쉬지 아니하는 악입니다. 죽이는 독입니다. 이것은 혀에 대한 여호와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다 실수가 많으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 이라고 합니다. 첫 사람 아담 부부는 듣지 말아야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결과는 타락입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죄와 악의 해독을 온 인류에게 끼쳤습니다.잘못된 말은 듣기만 해도 이렇게 엄청난 해독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하고 듣지 말아야할 말을 들으면 불화합니다. 싸우고 원수를 맺는 일들이 왕왕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도 혀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혀입니다. 세상에서 말을 하는 생물은 인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가 하는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 합니다. 2천년 전에 유대땅 예루살렘에서 주님이 승천 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님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오순절 성령님의 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열 다섯 나라로부터 온 유대인들에게 설교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는 32절에 너희가 죽인 이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일에 증 인이다"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모든 죄인의 형벌 을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 하셨는 데 우리는 바로 그 일에 증인이라고 합니다. 그 날의 증거로 삼천명이 회개합니다. 예수를 그들의 구주로 믿습니다. 당일에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렇게 해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삼천이나 더해진 것입니다. 사도들은 담대하게 예수 사건의 증인으로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영원히 지옥 불로 직행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동족을 하루에 삼천명 이나 구원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는 바울 사도의 설교가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회당에서 긴 설교를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말합니다. 무 덤에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은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간 사람들에게 여러날 보이셨다고 합니다. 31절은 "저희가 이제 백성 앞 에서 그의 증인" 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예수를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사도들의 증거 를 들었습니다. 그 증거를 확신있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굳게 믿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의 생명을 모두 바처 복음을 확신있게 전 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말하지 말것은 죽어도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꼭 말해야 할것은 어떤 경우에도 말해야만 합니다. 어떤 권력자가 와서 우리의 입에 자물쇠를 채워도 우리는 사도들처럼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할 것은 오직 예수 사건입니다. 예수 이외에 다른 말을 전 하는 것은 말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전하면 많은 방해가 있습니다. 사탄이 역사 합니다.전도의 길은 험합니다. 그래도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사망이 가로 막아도 전도의 길은 가 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 음성을 듣지도 못했습니다. 만져 보지도 못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대하여는 소경이요 귀 머거리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삼 년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듣고 만지고 말했던 제자들처럼 우리 도 주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의해서 입니다. 믿음은 태산을 옮길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우리는 주님을 압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그것을 가 르쳐 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충만하게 해줍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보고 들은 예수를 전하기에 충분 합니다. 주님 을 만진 사도들이 전한 것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바울이 그렇 게 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가 누구 이십니까. 하나님의 품에서 한 여인의 품으로 내려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신성을 입도록 인성을 입으신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시려고 인자가 되신 분입니다. 주님은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우리 앞에 나타나신 역사적 인물입니다. 하나님 이시면서도 사람이셨던 분입니다. 주님은 이렇듯 자연 법 칙을 거스려 태어 나셨지만 누구보다도 자연 법칙에 순응하신 분입니다. 주님은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후미진 곳에서 자라나셨습니다. 30년 세월을 목수로 일하셨습니다. 유아기에 그의 생명을 채는 손길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한 외에는 일생에 본국의 경계선을 넘어본 일이 없습니다. 주님은 부를 누려본 일이 없습니다. 권세를 가져본 일도 없습니다. 세상 학교에서 교육 받아본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3년동안이나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였습니다. 누구보다도 성경을 잘 알 았습니다. 그의 말하는 솜씨는 랍비들까지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지 혜는 출중했고 지식은 해박 했습니다. 그는 책상머리의 서생이 아니면서도 인생을 통찰하는 철학이 충만 했습니다.
주님은 유아기에 왕을 놀라게 했습니다. 유년기에는 박식한 석학들 을 놀라게 했습니다. 장년기에는 자연의 질서까지도 제어 하셨습니다. 험한 파도 위도 걸으시고 거치른 풍랑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친척이라야 무력한 사람 뿐이었습니다. 항상 배가 고팟습니다. 잠잘 곳도 변변치 못했습니다. 산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 도 깃들일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곳조차 없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참으로 델리케트한 분입니다. 자신을 위하여는 엄했습니다. 가난하고 희생 했습니다. 그러나 이웃을 위하여는 항상 풍성하고 무엇 이나 넘쳤습니다. 그는 진실로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위하여 살으셨 습니다. 주님은 약한방울 없이도 수많은 사람을 치료 했으나 당신의 봉사에 대한 청구서 한번 제출하신 적이 없습니다. 책 한권 쓰지 아니 했지만 그에 대하여 쓰여진 책을 다 보관 하자면 온 세상 도서관으로도 모자 랄 것입니다. 그는 한곡의 노래도 작곡한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 의 작곡가를 다 모아도 부족할만큼 많은 노래 제목을 제공 하셨습니다. 대학하나 설립하지 않았지만 세상의 어느 학교가 당신의 학교만큼 그 수효를 자랑할 수 있을까요. 그는 약품 하나 발명해 내지 않았지만 이 세상 의사들이 상처를 치료한 것보다 더 많은 마음의 상처들을 고 처주신 것입니다. 주님이야 말로 천문학의 대가요 지질학의 바위요 물리학의 사자요 모든 불화의 중재자라고 한다면 오히려 욕되는 표현이 될까요. 왜냐하면 주님이야 말로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주님도 전도 하셨습니다. 항상 피곤 했습니다. 얼마나 피곤 하 셨으면 갈릴리 바다의 그 풍랑에도 깊이 잠이 들으셨을까요. 죽겠다고 아우성 치는 제자들의 소리도 듣지 못할 지경이였습니다. 전도 하시던 주님은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러나 전도는 오히려 그의 양식이 되었습니다. 수가 우물가의 사건을 보십시요. 시장끼 모면 하 려고 청하셨던 한그릇의 물이 다섯 남편을 둔 거지 같은 인생의 여인 에게 전도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의 영혼을 구원하신 주님은 그만 시장끼도 잊으신 것입니다. 위대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왔다가 다 가고 없지만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헤롯이 그를 죽일 수 없었습니다. 사탄이 그를 유혹할 수도 없었습니다. 사망이 그를 멸망 시킬 수도 없었습니다. 무덤이 그를 붙잡아 둘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부유 하지만 우리 때문에 가난 하셨습니다. 그가 얼마나 가난 했더냐고 마리아에게 물어 보십시요. 동방 박사들에게서 그 사정을 들어 보십시요. 주님은 남의 외양간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남의 배를 빌려 타고 호수를 건너기도 했습니다. 남 의 나귀를 빌려 탔습니다. 마침내는 남의 무덤까지 빌리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완전하신 분입니다. 수십억 인간들의 우두머리 이십니다. 한마디로 정말 그분은 멋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주님이 제자에게 배신을 당하셨습니다. 인류의 속죄양으로 겨우 은 30에 팔리 셨습니다. 그를 부인하지 않기로 맹세한 수제자가 거푸 3번이나 저주 하면서 부인 했습니다. 주님은 이런 쓰라린 배신의 상처 위에 십자가를 메신 것입니다. 가 야바의 뜰에서 음모의 표적이 되셨습니다. 마치 온 세상 사람이 온통 이 음모에 가담한듯 합니다. 40에서 하나 감한 서른 아홉대의 채찍을 맞으셨습니다. 주님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었습니다. 그것도 부족 하여 그는 자기 키보다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기어 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를 메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골고다의 낮은 언덕이 예수에게는 너무도 높습니다. 가다가는 쓰러지 고 가다가는 쓰러집니다. 상채기에서 흘러 내리는 선혈은 너무도 선명 하도록 점점이 뿌려 집니다. 이글거리는 태양은 가뜩이나 피로해진 몸 에서 수분을 증발 시키고 있습니다. 구레네의 시몬이 아니었더라면 하마트면 주님은 십자가를 끝까지 메 지 못할뻔 했습니다. 예수의 몸이 아무리 쇠약하여 졌더라도 십자가마 저 질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는 원수를 물리치기 위하여는 하늘에 있는 열두 영도 더 되는 천군 천사도 불러 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는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주님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잘 아시기 때문에 사람과 동역 하시기 를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바울은 우리를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당신을 버리고 떠나버린 제자들 대신 구레네 시몬과 동역 하 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잠시도 깨어 나와 함께 기도할 수 없더 냐 말씀하시던 주님이십니다. 이미 제자들의 배신을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때 이후로 당신을 배신하는 무리는 강물이 이어지듯 끊임이 없습니다. 그래도 주님은 당신의 동역자를 채고 계십니다.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 부르짖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그 음성은 지금도 우리의 기전을 때리는듯 합니다. 마 지막 아버지 께마저 버림을 받으신 주님이십니다. 그 아픔으로 주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믿는 주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어찌 주님께 대한 칭송 의 말을 다 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기회 되는대로 해야 합니다.
주님은 너무도 멋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님이 우리에게 당신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구 하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할 수있는 말중에 이 말보다 더 귀한 말씀이 있을 까요. 이보다 더 아름다운 말씀, 이보다 더 해야만할 말씀이 있을까 요. 주님은 당신의 사건을 전도 하라고 명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이 모든 사건을 당신의 부활로 결산 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아무리 값지다고 할지라도 부활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될까요. 그리고 부활의 주님을 섬긴다고 하드라도 주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지 못한다 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일찌기 바울사도도 우리가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될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들 부활의 첫 열매로 당신 부활에 동참하도록 부르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주님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야 합니다. 사도들이 그러 했습니다. 진실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제자 들이 그러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 부활의 증인들이 되 고 있습니다. 지금 드리는 이 말씀은 듣기 위한 설교가 아닙니다.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기 위하여 자리에서 일어서라는 신호의 나팔인 것입니다. 그러나 잠깐 더 좀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 입의 전도의 말이 모두 주님 사건에 대한 것인가요. 전도가 모두 주님의 사건에 대한 말이 아 닙니다. 자기 생각 자기 믿음의 엉터리 말을 전해서는 안됩니다. 성경 의 사실을 분명하고 확신있게 믿어야 합니다. 확신의 믿음이 확신의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각 잘못된 믿음을 교정하지 않으 면 주님의 증인으로서 참된 증거를 할 수 있는 기회는 가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을 증거하는 참된 증인의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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