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절

TOP
DOWN

네 이웃을 사랑하라 (눅10:25-37)

본문

성도는 주님의 말씀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기쁨으로 행하고, ‘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가 좋은 성도요,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말씀을 깊이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착한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세상과 유리된 곳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합니다. 이 관계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발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역할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봅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그들을 외면하며 살아왔습니다. 나 하나 신경 쓰기에도 너무 바빴기 때문입니다. 나만 은혜 받으면 되고, 나만 구원받으면 되지, 뭐 다른 사람들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성도의 삶은 주님 앞에서 어떻게 보이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예수님은 한 율법사로부터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에 매우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는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질문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해보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사에게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율법사는 본문 27절에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말하셨습니다. 이때 이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이번에는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 오니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 유대인들의 이웃에 대한 의식구조는 자기 중심적이며, 자기 민족 중심적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에는 로마 주둔군이 있었고, 헬라인들이 여행자들이 자주 방문하였으며, 북쪽에는 유대인들이 적대시하는 사마리아인들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자주 외국인들과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에 ‘과연 그들의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중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바로 이 율법사는 예수님께 이웃에 대한 경계선을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로 답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살펴봅시다.
1.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직업, 국적, 종교, 인종들이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인물입니다. 그가 옷을 입고 있었다면 대충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겠지만, 그는 옷마저 강도들에게 뺏기고 벗은 몸으로 있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는 단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이었습니다. 그의 신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났습니다.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몸도 상처를 입고, ‘나를 도와달라는 구조 요청을 할 힘조차 없이 길가에 버려진 불쌍한 상태’였습니다. 이 사람은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이웃입니다. 그럼 성경은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비록 양상은 다를지라도 오늘날 우리의 주위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그 날까지 이 세상에는 가난한 자, 헐벗고 굶주리는 자, 불쌍한 자,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끊이지 않습니다. 마치 강도 만난 사람과 같이 이웃의 손길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들을 향한 선한 이웃이 되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요, 명령입니다. 좋은 이웃, 선한 이웃이 되기를 바랍니다.
2. 강도들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강도는 갑자기 나타나 범죄를 저지른 후에 곧 떠나가 버렸습니다. 이 강도들은 제사장과 레위인, 사마리아인을 공격하지 않고 처음에 지나간 사람만 공격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은 힘으로 자기 욕심을 충족시키는 자들입니다. 권모술수와 공갈과 폭력으로 남의 것을 제것처럼 소유하는 자들입니다. 마치 이웃이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고 이웃의 소유가 모두 자기의 것인 것처럼 착각하는 자들입니다. 내 것은 당연히 내 것이요, 다른 사람의 것도 필요하면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은 우리의 사회에서 존재가치가 없는 무익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있어서는 안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마지막 때가 가까우면 더욱 많은 강력 범죄 사건과 어지러운 일들이 많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강도와 같이 남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지 말고, 더욱 적극적으로 선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3.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이들은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성전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내려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강도 만나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 둘 다 모두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 했지만, 타락한 종교 지도자들이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랑의 행함 없이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여기서 열외가 아니라, 내가 자비를 베풀지 않으면 제사장과 레위인들과 마찬가지로 비난을 받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을 통해서 깨닫는 것은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되고, 내가 그 비판의 주인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4.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 주님은 어려울 때 사랑으로 다가가 도운 사마리아 사람을 선하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는 인종과 종교와 계층의 차별이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도움을 필요한 한 사람을 보고 자기가 도울 수 있는 힘을 최대한 발휘했습니다. 강도 만나 신음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왜 그런지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강도 만난 그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그렇습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곧 사랑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만 먹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는 이어서 강도 만난 자에게 가까이 가서 상처를 싸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까지 데려와 주인에게 치료를 부탁하고 치료비까지 기꺼이 지불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인의 행위는 돈과 시간과 온 정성을 바쳤습니다. 아낌없는 희생을 했습니다. 한마디로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아 사랑을 실천하는 자였습니다. 주님은 이런 자의 모습을 귀히 여기고 ‘선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오늘 우리 성도들이 이 사회 속에서 감당해야할 삶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자들이 많아질 때에 그만큼 우리의 사회는 사랑이 풍성해 질 것입니다. 곳곳에 주님의 향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주님이 좋아하시고, 인정하시는 선한 일을 적극적으로 감당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비유를 마친 후에 율법사에게 질문하였습니다. “네 소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제사장과 레위인의 입장에서 볼 때에 이웃이란 신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유대인에게만 해당될 수 있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매를 맞고 옷이 벗겨져 있고, 거반 죽은 상태가 되어 신분을 알아 볼 수 없기에 이웃으로 규정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알면 행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의 행함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본문에 등장하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의 이웃이 누구이며, 우리가 그 이웃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를 잘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이웃이란 그렇게 매력적인 인물이 아닐 수 있습니다. 비유에 나타난 것처럼, 이웃은 피로 범벅이 되고 벌거벗겨지고 거반 죽은 상태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도움만 필요로 하지 그 어떤 것도 보답할 수 없는 자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이러한 자를 외면하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면 결국 비난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국 주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눈을 들어 세상을 바라봅시다. 가깝게는 우리의 주위를 돌아봅시다. 과연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가 없이 사단에게 사로잡혀 그저 세상과 물질만 바라보며 소망 없이 사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지금도 물질적으로 헐벗고 굶주리고있는 사람들, 이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 모두가 우리들이 돌아보아야 할 이웃들입니다. 주님은 이웃을 보았으면 이제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계명과 말씀을 잘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아무쪼록 말씀 속에서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그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아낌없이 실천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은 지금도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원하십니다. 저는 이런 면에서 보면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나름대로 대상을 정해놓고 주님의 이름으로 돌보고 사랑한다고 하지만 너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샘물교회는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갖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일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실천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함께 하는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삭헌금을 드리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지만 구약시대에 농사 짓는 사람들이 추수할 때에 과일이든, 보리든 모두 싹쓸이 수확을 하지 않았습니다. 조금씩 과일도, 보리도 남겨두었습니다.
왜냐하면 가난하여 수확할 수 없는 사람들이 그 이삭을 주워서 먹고살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이삭헌금과 오늘 드리는 착한 사마리아 주일 헌금은 온전히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드려진 이삭헌금의 내용을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립니다. 1잃어버린 지갑을 되찾은 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2옥수수를 사먹으려다 사지 않고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3철지난 옷을 세탁하다가 주머니에서 발견한 돈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4콩나물 사고 남은 돈과 택시를 타지 않고 걸어와 남은 돈으로 이삭헌금을 드립니다. 5폐유 판 것으로 이삭 헌금을 드립니다. 6시장보고 남은 금액을 드립니다. 7금식하고 그 식사대금으로 드립니다. 8대심방 식사준비를 절약하여 이삭헌금을 드립니다. 9길에서 우연히 주은 1만원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10시장에서 천원, 슈퍼에서 천원 친구 옷 사는데 천원 시장에서 5백원 남은 것으로 이삭헌금 드립니다.(날자가 기록되어있음) 11손님 오셔서 돈까스 2개 시켜 드리고 저는 집에 있는 밥을 먹은 것으로 이삭헌금 드립니다. 12파 사고 200원, 택시에서 300원, 계란사고 400원, 목욕하고 200원 남은 것으로 이삭헌금을 드립니다. 13책을 샀는데 할인 받은 것을 이삭헌금으로 드립니다. 14세일하는 물건을 사고 남은 돈을 드립니다. ⑮ 주일에 원치 않게 돈을 벌었는데 이것을 드립니다. 16.생일을 당하여 케익을 살 돈으로 대신 이삭헌금 2만원 드립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이삭까지 다 거두지 않고 사랑의 현장을 위하여 이삭줍기 헌금으로 드린 것입니다. 적은 돈이지만 참으로 소중한 것들입니다. 우리는 앞으로 더욱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형식에 그치지 말고 점점 확대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랑의 실천은 성도로서 당연한 행위지지 결코 자랑의 조건이 아닙니다. 또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비난하거나 정죄하면 그 동안 실천한 사랑의 행위를 다 쏟아 놓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생색내는 것이 아니라 당연하게 생각하고 실천해야 할 것입니다. 샘물의 모든 가족 여러분! “사랑”이란 말이 우리의 생각 속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분명한 확신하고 깨달은 것을 실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드려지는 헌금은 장애자나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을 만나 섬기는 일에 쓰여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는 착한 사마리아 주일로 드립니다. 우리교회는 매년 10월둘째 주일이면 착한 사마리아 주일로 드릴 것입니다. 내가 ‘참 이웃’이 되기를 결단해야 하겠습니다. ‘실천하는 이웃사랑’으로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 오늘 헌금하고 10월중에 ‘사랑과 봉사의 현장’으로 찾아 갈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참여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제는 자주 가서 고통 당하는 자들을 씻겨주고, 청소도 해 줍시다. 홀로 식사가 불가능한 사람들을 위해 밥을 먹여주는 섬김도 행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들입니다. 알고 보니 가까운 곳에 우리가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잘 실천하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가 힘껏 도와야 합니다. 저는 한 주간 동안 착한 사마리아 주일을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이곳 저곳을 살폈습니다. 돌본다고 했지만 부족할 뿐입니다. 물론 교회의 최종 목적이 구제와 봉사는 아닙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이 최고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생명을 살리는 계기를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갖기 위해 힘써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꼭 기도와 사랑의 후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이웃들을 찾아가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평생을 이 사랑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의 이웃에게는 큰 힘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잔치 집이나 흥겨운 행사장을 즐겨 찾습니다. 문화생활을 위한 음악회, 전시회 등 이러한 자리는 즐겨 찾으면서도, 그늘진 곳은 외면하기 쉽습니다. 주님이 가시기를 원하는 곳에 우리도 가야 합니다. 주님이 행하시기를 원하는 그것을 우리도 즐거이 행해야 합니다. ‘사랑과 봉사의 현장’을 우리 모두 가지고 살아갑시다. ‘이삭헌금’을 통해 ‘착한 사마리아 주일 헌금’을 통해, 그리고 기도와 사랑의 마음을 통해 우리의 이웃을 찾읍시다. 주변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만들고, 밝게 만드는 좋은 이웃들이 됩시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하신 주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29,555 건 - 93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