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울과 예수의 만남 (행9:1-9)
본문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그 인생을 결정합니다. 어떤 나라에서 태어났냐로 조국이 결정됩니다. 어느 부모 밑에서 태어났냐가 그의 인생과 인격과 성품을 결정합니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가 그 한 사람의 가정을 결정합니다. 어떤 신을 만나느냐가 그 사람의 영원을 결정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느냐 만나지 않느냐는 우리 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분기점을 이룹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사울이라는 그 청년은 오늘 그가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울과 예수의 만남은 오순절 사건 이후에 최대의 사건이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면 사울이 바울이 된 그 순간부터 이방의 세계는, 복음의 세계는 이방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열게 한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사울은 예수를 믿기 전에 그의 생애를 성경에 나온대로 요약을 해 보면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특별히 그는 엄격한 바리새파 유대주의에서 그가 자라났습니다. 그걸 보면 사도 바울은 유대주의에 정통한 사람입니다. 그는 다소에서 성장을 했는데 바로 헬라문화와 철학에 익숙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로마시민권을 나면서부터 가졌다는 것을 보면 로마의! 법과 정치에 정통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그는 당대 석학이었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그는 지성인이 갖추어야 할 것을 모두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유대 종교와 헬라의 철학과 로마의 법을 다 익숙한 그런 배경에서 자랐습니다. 특별히 그는 종교 전문직에 있었을뿐만 아니라 세상 전문직에도 종사했던 경험이 있는 직업에 경험이 있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울이라는 이 청년은 무식하고 맹목적인 예수교 핍박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예수교를 핍박하거나 기독교를 핍박하는 사람들을 보면 비지성적인 사람이거나 무식한 사람들이 많은데 사울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자라온 배경과 그가 예수를 만나기 전에 생애를 정리해 보면은 그에게는 분명한 신앙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확신과 남달리 역사 철학을 가진 지성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지성인은 나약합니다. 일반적으로 지성인들은 행동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성인을 사색하는 지성인이다라는 이런 멋진 말을 하나 붙여 주는데 그 말은 행동력이 없다는 뜻도 됩니다. 그러나 사울은 사색하는 지성인뿐만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 이었습니다. 그는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을 했고 소위 프락시스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그의 삶을 희생할 줄도 알았고 손해 볼 줄도 알았습니다. 누가 월급을 주거나 누가 지위를 주었기 때문에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그는 자기의 신념 때문에 행동했던 사람입니다. 9장 1절과 2절을 보겠습니다. 1절과 2절 시작--사울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했는데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은. 자기의 신앙에 확신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서운 것입니다. 남이 시켜서 하면 남이 시킨 만큼만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알아서 하면 그 이상을 합니다. 신앙이란 누가 시켜서 믿는 게 아닙니다. 자기가 좋아서 믿는 것이며, 확신이 있기 때문에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9장
1,2절의 사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대한 아주 나쁜 인상과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예수쟁이들 밥맛도 없습니다. 아주 재미가 없습니다. 아주 인상이 나쁩니다. 굉장히 감정적으로 싫다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위협과 살기가 있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얼마나 이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감정의 문제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는 이만큼 나쁜 선입관을 갖고 !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2절을 보면은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져다가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자기의 소신껏 행동하는 행동파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사울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회개혁가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운동권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고 행동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도 해보고 대화도 많이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갖지 않은 놀라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주위환경에서 가정에서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환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 나이에 교도소까지 들어가면서 그 행동을 합니다. 또 불법적인 많은 과격한 행동을 하는데 어 그분들과 교제하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또 새로운 놀라운 부분이 그 분들에게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이런 분들은 대충 이런 3가지 요소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권의 사람이나 사회개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 헁동 하지 않는 지성. 행동하지 않는 신앙을 몹시 경멸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해야지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비겁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행동하지 않는 동료 교수들이나 지성인들을 마음속으로 무척 경멸하고 있는 것을 일반적으로 봅니다. 두 번째는 이들의 생각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 자신들의 지성. 자신들의 양심.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아주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나는 이런 행동을 한다고 그들은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고 고난을 겪는 것을 마치 신앙의 클라이막스처럼 생각하고 신앙의 엑스타시를 거기서 느끼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매를 맞고 쫓겨 다니는 그런 고통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화상이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들과 만나서 얻은 인상은 그 행동 때문에 일어나야 했던 불법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을 쓰게 됩니다. 여러 가지 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법이나 폭력이나 투쟁은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사실은 당연히 그러한 오류는 용서받아야 할 오류라고 떳떳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 이런 행동을 하는 지성인들은 아무 누구도 말릴 수가 없고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부모도 학교도 어떤 사회도 그렇게 믿고 행동하고 그런 성자의 모습을 자기 스스로 갖기 때문에 아무 누구도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또 정죄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는 지성인들은 비록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행동하는 지성인들에 대해서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먹힙니다. 이쪽에는 별로 할 말이 없고, 저쪽에는 말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비겁하지 않느냐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비겁한 거 아니냐 라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의 모습과 이런 모습과 굉장히 비슷한, 아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이런 분들의 사고를 과연 누가 바꿀 수가 있을까요 대부분 이런 분들은 나이 60이 넘어서야 자기를 반성합니다. 40대 50대까지 그런 반성의 기미를 일반적 막보이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의견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행동을 하는 지성인들을 과연 누가 누가 설득을 할수 있을까요 사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가장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스데반의 옷을 발 앞에 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울에게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기 보면은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췄다.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사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얼마나 그리고 엄청난 사건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을 가리켜 오순절 사건 이후에 최고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잘 보십시오. 3절에 보면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는데 홀연히 라는 말이 나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왔다고 그랬습니다. 4절을 보면은 땅에 엎드려 들으매 무엇이 들렸습니까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서 비슷한 소리죠 오순절날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임할 때 홀연히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를. 아주 비슷한 속성이예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한 것은 120명 집단 공동체에 임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임재, 동시적인 임재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한 개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순절날 일어날 수 있고. 120명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사도바울에게도 개인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러 가는 도중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은 오늘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건들이 여러분의 생애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아무 누구도 내 생애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꿈이 있고 이데올로기가 있고 이념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 혁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구나 개입할 수가 없어요. 돈을 주고 산 사람은 쉽게 설득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철학이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쉽게 못바꿔요. 이 속에 예수님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땅에 엎드렸을 때 사울에게 들린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라는 말을 두 번 불렀습니다. 이것은 사울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입니다. 우리는 보통 부를 때 아무개야! 하면서 이름을 부릅니다. 그냥 부를때. 그러나 특별한 부탁과 어떤 특별한 관심이 있을때는 이름을 두 번 부릅니다. 사울아! 사울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나는 우리 주님이 용조야! 용조야! 이렇게 두 번 부르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꼭 두 번 부를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어떤 일관계나 용무관계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어떤 특별한 미션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그러셨는데 이 말씀은 가만히 묵상해 보면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뜻은 사울아! 사울아!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뜻이 이 안에 있습니다. 부부싸움 해 보신분들 계시죠. 안 해 보신분들 있으시겠어요 부부싸움을 하면 대개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여보 왜 그래 왜 그리 나를 못살게 굴고 미워해 이런 말을 던지는 데 이 말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내가 당신한테 시집와서 당신한테 당하고 시부모한테 당하고 시동생한테 당하고. 이렇게 당하고 저렇게 당하고 다 참고 수고했는데 당신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이러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말이. 당신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희생을 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런 뜻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거예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또 하나의 뜻이 이 말씀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너는 왜 나의 교회를 핍박했느냐 라고 하지 않았아요. 너는 왜 나의 제자들을 핍박했느냐라고 하지 않았어요.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실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면한 적도 없고 핍박 한 적도 없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가서 흩었습니다. 가서 잡아오고 사울은 오늘 보면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다메섹까지 갔고 그들을 위협했고. 그들에 대해 살기 등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울에게 예수님은 너는 왜 내 제자를 핍박했느냐 너는 왜 내 교회를 핍박했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왜 나를 핍박했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곧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라는 예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을 보면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먼저 미워한 줄 알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핍박하는 대신에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느니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본문에서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33년동안 우리와 같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40일만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만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오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과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음주에 무슨 일로 죽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면 아마 교회에서 성도님들이 교회장을 치루어 주시겠지요 다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여러분은 저의 설교를 들으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계속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러나 나의 설교는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없는데 그분의 음성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육체로 보이지 않지만 그분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고 그분은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러 2000년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팔레스틴으로 우리가 성지순례가지만 가봐야 예수님은 못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지금 찾아오시는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우리를 보고계시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분의 임재는, 예수님의 임재는 성령님의 임재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성령의 임재의 본질을 찾을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란 무엇입니까 오순절날 성령님의 임재는 무엇입니까 사울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는 곧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을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는 뜨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사들과 능력들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그숝간 5절에서 주여!-뉘시오니까 주여 뉘시오니까!-말이 재미있는데. 당신이 누구십니까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면 당신이 누구십니까 라고 말할거예요. 그러나 사울은 순식간에 반응이 퀴리오스! 주여 라는 반응입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사람에게는요 그 예감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가 꼭 하나님을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있어요. 안믿는데 모든 일이 꼭 하나님을 믿을 것 만 같아요. 특별히 예수님을 막 핍박하면 이러다 내가 예수 믿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돈은 많이 벌리는데 이거 왜벌리지 이게 자꾸 이상한 예감이 들어요. 어떤 사람은 꼭 하나님을 믿을 것만 같은 예감이 있는데 아마 스데반이 그런 예감이 들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주여-! 라고 그런거에요. 자기도 모르게. 그는 너무 강렬하게 자기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한 인격. 거룩한 인격. 사랑의 주님을 직감한 것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제가 온누리 교회를 목회하면서 두 분의 삶을 기억합니다. 한분은 청년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던 중에 그는 역사의 모순 앞에서 운동권과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를 어느 날 간증하게 되었는데 대학로에서 빨간띠를 띠고 일선에서 투쟁을 하였습니다. 투쟁을 했는데 경찰과 부딪혔고 몽둥이를 맞았고 피를 쏟았고 기절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를 안수하시고 치유하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는 그 순간에 모든 생각을 바꾸고 온누리 교회로 오게 되었고 대학부에서 공부했고 경배와 찬양에서 손을 들고 울며 찬양을 했습니다. 그를 설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데모하는 주님이 현장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서울대학 운동권의 핵심 멤버였고, 여자는 이대 핵심 멤버였습니다. 둘이 운동권 사람끼리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 30대 중반에 해당하는 분들인데 그것이 자기의 삶이었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어떻게 누구의 소개인지 모르지만 우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동안.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날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의 대해서 들었었습니다. 그가 민중신학으로 박사과정을 거의 끝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논문을 정리하면 되는 그때. 부목사님을 통해서 연락이 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를 알고 느끼게 되니 이 논문을 못 쓰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을 속이고 학위를 받을 것인가!-마지막 몇 달 남지 않은 이 과정에 논문을 포기할 것인가 자기를 가르치고 몇 달동안 자기를 지원해 주었던 동료들과 교수님을 배신할 것인가! 이 부부는 주일날 이 부부가 떠나는 날 제방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일날 기다리는 것이 일주일의 전부래요. 그만큼 저희 교회의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 부부는 몇 달을 고민하다가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것만이 자기가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논문을 못쓰겠다라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으로.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학위를 포기하고 논문을 포기하고 그들은 이민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왜 가십니까 무슨 job 이 있으십니까 그냥 떠난다고 해요. 자기를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적으로 보기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편지가 왔습니다. 신학교를 가고 싶은데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아무 누구도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만진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거예요. 우리 인생에 이런 절규가 있었습니다. 우리 생애에 이런 만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이나 우리의 양심적인 행동이나 우리의 열심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못 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 그게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적인 똑똑함과 인간적인 열정과 인간적인 그 프락시스 행동 때문에 주님이 안보일수 있습니다. 사울처럼.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가 고난받는 것이 성자처럼 그것이 우상일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작.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때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사울의 영혼은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말앞에 누가 더 주저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우리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 말앞에 거절하고 항거하고 거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병정이나 빌라도나 대제사장이 나를 죽인 것이 아니라 니가 나를 죽인 것이다. 그들이 나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핍박한 것이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혹시 핍박하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예수님게 거절하고 나는 예수님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서 핍박을 했다면 부정적인 생각을 했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교회가 하는 일들을 웃기게 생각하고 목사는 할 짓이 없으니까 대학이 떨어지니까 대학이나 가지. 선교사는 자기 멀쩡한 직업을 낳두고 왜 저런 짓을 할까 라고 한 것이 다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들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다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됩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예수님은 사울에게 나는 지금 어떤 계획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막연히 부르시지 않습니다. 사울을 부를때는 이방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해 부른 나의 택한 그릇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막연히 여러분을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사도로. 여러분을 통하여 이 민족을 구원시키는 사도로. 어떤 사람은 노동자 속에, 어떤 사람은 운동권속에, 어떤 사람들은 빈민촌속에 가서 그들을 변화시키라고 여러분을 부르신거에요. 당신은 이북을 복음화 하라고. 당신은 중국을 복음화 하라고. 사울을 부른 것은 이방을 복음화 시키라고. 빌립은 전도자로 쓰기 위하여. 스데반은 순교자로 쓰기 위하여 바나바는 상담자로 쓰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있습니다. 너는 지금 일어나라. 성으로 들어가라! 네게 행할자가 있다는 사람을 내가 준비해놨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두가지 사실을 또 하나 발견합니다. 하나는 성령을 받고 영적 거듭남, 깨어짐 충격, 성령세례 이런 것들을 받는 한 경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받고 불밭고 기적과 능력과 은사를 받으면 다 되느냐 아닙니다.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훌륭한 사역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양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를 가르칠 자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거듭났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는 3년동안 아라비아로 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냥 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신학교를 간다던지, 용평을 간다던지 뭐 이런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용평을 가기를 원합니다. 헌신하여서 3개월 동안 저녁마다 여기서 훈련을 받던지, 직장을 포기하고 공부하는 것을 잠깐 스톱하고 하나님께 훈련, 생활 훈련, 사고훈련, 가르치는 훈련, 성격개조 훈련. 이런 모든 갖 훈련을 받아야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을 하게 되요. 전도 훈련을 위하여 1년,2년 신학교도 가고 헌신자 스쿨도 가고 현지 미션 스쿨도 가는 것입니다. 자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옆에 있던 사람들은 빛이 오고 꼬꾸라지는 것 같애요. 이걸 가지고는 오해할 소지가 많지요. 바람소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아! 스데반이 갑자기 발목이 삐었다. 사울이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고. 장이 꼬였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고. 그 현상을 다루는 각도에서 변명을 할 수가 있을 거에요. 그러나 사울에게는 이것은 변명할 사건이 못되요. 그 사건이 지나고 나서 사울이 일어나 보니까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아마 빛이 강렬하게 왔기 때문에 눈에 이상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시력을 잃어버렸다기 보다는 일시적 마비현상. 충격과 정지현상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는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잠깐 생각해 봅시다. 이 때 사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심정이 지금 어떤 상태가 되어 있겠습니까 그는 의기양양하게, 살기 등등하게, 패기왕성하게 그냥 개선군처럼 라이센스까지 다 받아가지고 지금 예수쟁이를 잡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양심대로 행동한다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눈일 멀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못가서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가야되요. 이럴 때 우리가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을까요 굉장한 혼돈이 왔을 것입니다. 굉장한 충격이 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떵떵 거리고 권력을 한솝에 잡고 살던 사람이 어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자기가 가고 싶으데로 가지를 못합니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칼을 뺏깁니다. 총을 뺏깁니다. 권력을 뺏깁니다. 재물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인격과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을 때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사울이 지금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갑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의해서 여러 가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혼돈. 마음의 가난함. 아니! 어쩜 그 거룩하신 주님의 음성. 그래서 그는 마치 빛을 본 것처럼 그의 인생이 정리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이 3일이었습니다. 변화의 시간. 거룩한 침묵의 시간. 마치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에 부활하기 전까지 무덤에 갖힌 삼일과 같습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구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가 깨질 지경이 되어가지고서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요나를 물에 던져 버립니다. 그때 큰 물고기가 거기 입을 벌리고 있다가 요나를 씹은게 아니라 통째로 삼켜 버린 것입니다. 요나는 그 물고기 3일을 뱃속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뱃속에서 잤던 것처럼 잤을까요 에라 모르겠다. 자자. 그랬을까요 안그랬을 것 같아요. 볼수도 없고 먹을수도 없었던 3일이었어요. 요나는 거기서 무엇을 3일동안. 구약에는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백세에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낳았습니다. 너무나 귀한 이삭을 어느날 너는 너의 자식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짐을 지우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데 3일입니다. 아브라함은 3일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이 아마 사울이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한 3일 동안 있었던 하나님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아마도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자기가 깨지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자아가 죽는 시간입니다. 그는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시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울을 기억하셨습니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는 그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오셔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변화시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심을 믿습니다. 응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주님이 원하는대로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2절의 사울의 경우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대한 아주 나쁜 인상과 감정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주 예수쟁이들 밥맛도 없습니다. 아주 재미가 없습니다. 아주 인상이 나쁩니다. 굉장히 감정적으로 싫다는 것을 이 본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보면 위협과 살기가 있었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얼마나 이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감정의 문제로 넘어간 것입니다. 그는 이만큼 나쁜 선입관을 갖고 !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2절을 보면은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오기 위하여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의 공문을 가져다가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은 자기의 소신껏 행동하는 행동파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사울을 보면서 오늘날 우리 시대의 사회개혁가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여러 운동권 사회개혁에 관심이 많고 행동하고 투쟁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도 해보고 대화도 많이 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그분들을 보면 참으로 놀라운 부분이 있습니다. 우리가 갖지 않은 놀라운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주위환경에서 가정에서 환영하지 않습니다. 사회가 환영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젊은 나이에 교도소까지 들어가면서 그 행동을 합니다. 또 불법적인 많은 과격한 행동을 하는데 어 그분들과 교제하면서 생각해 보는 것은 또 새로운 놀라운 부분이 그 분들에게도 있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이런 분들은 대충 이런 3가지 요소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운동권의 사람이나 사회개혁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 헁동 하지 않는 지성. 행동하지 않는 신앙을 몹시 경멸하고 있다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해야지 행동하지 않는 것은 비겁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향하여 비겁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행동하지 않는 동료 교수들이나 지성인들을 마음속으로 무척 경멸하고 있는 것을 일반적으로 봅니다. 두 번째는 이들의 생각은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의 행동. 자신들의 지성. 자신들의 양심. 자신들의 신앙에 대해서 아주 뿌듯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손해를 보지만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나는 이런 행동을 한다고 그들은 말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고 고난을 겪는 것을 마치 신앙의 클라이막스처럼 생각하고 신앙의 엑스타시를 거기서 느끼는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됩니다. 굶주리고 매를 맞고 쫓겨 다니는 그런 고통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자화상이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들과 만나서 얻은 인상은 그 행동 때문에 일어나야 했던 불법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법이 허용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을 쓰게 됩니다. 여러 가지 투쟁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법이나 폭력이나 투쟁은 그럴 수밖에 없는 역사적 필연적 과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또 놀라운 사실은 당연히 그러한 오류는 용서받아야 할 오류라고 떳떳하게 생각을 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 이런 행동을 하는 지성인들은 아무 누구도 말릴 수가 없고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그건 부모도 학교도 어떤 사회도 그렇게 믿고 행동하고 그런 성자의 모습을 자기 스스로 갖기 때문에 아무 누구도 그들을 설득할 수가 없습니다. 또 정죄하기도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행동하지 않는 지성인들은 비록 잘못되었다 할지라도 행동하는 지성인들에 대해서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이 안먹힙니다. 이쪽에는 별로 할 말이 없고, 저쪽에는 말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비겁하지 않느냐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결국은 비겁한 거 아니냐 라는 거예요. 이런 말을 합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사울의 모습이었습니다. 사울의 모습과 이런 모습과 굉장히 비슷한, 아주 비슷한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시작-이런 분들의 사고를 과연 누가 바꿀 수가 있을까요 대부분 이런 분들은 나이 60이 넘어서야 자기를 반성합니다. 40대 50대까지 그런 반성의 기미를 일반적 막보이지를 않습니다. 자기의 주장과 의견이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행동을 하는 지성인들을 과연 누가 누가 설득을 할수 있을까요 사울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을 가장 옳은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스데반의 옷을 발 앞에 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울에게 어느날 갑자기 예수님이 홀연히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기 보면은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췄다.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 것입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사울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가 들리는데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얼마나 그리고 엄청난 사건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 사건을 가리켜 오순절 사건 이후에 최고의 사건이라고 말했습니다. 잘 보십시오. 3절에 보면은 다메섹에 가까이 이르는데 홀연히 라는 말이 나옵니다.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왔다고 그랬습니다. 4절을 보면은 땅에 엎드려 들으매 무엇이 들렸습니까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서 비슷한 소리죠 오순절날 사도행전 2장에 성령이 임할 때 홀연히 하늘로서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를. 아주 비슷한 속성이예요. 오순절날 성령이 임한 것은 120명 집단 공동체에 임한 사건이라고 한다면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임재, 동시적인 임재가 나타났는데 이것은 한 개인에게 나타난 것입니다. 성령님은 오순절날 일어날 수 있고. 120명에게도 일어날 수 있지만 사도바울에게도 개인적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그가 핍박하러 가는 도중에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 성령님은 오늘 개인적으로 여러분들에게 나타날 수도 있고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건들이 여러분의 생애에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아무 누구도 내 생애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꿈이 있고 이데올로기가 있고 이념이 있는 사람들은 사회 혁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더구나 개입할 수가 없어요. 돈을 주고 산 사람은 쉽게 설득할 수가 있어요. 그러나 철학이나 역사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쉽게 못바꿔요. 이 속에 예수님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땅에 엎드렸을 때 사울에게 들린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슨 소리입니까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이라는 말을 두 번 불렀습니다. 이것은 사울에 대한 예수님의 특별한 관심입니다. 우리는 보통 부를 때 아무개야! 하면서 이름을 부릅니다. 그냥 부를때. 그러나 특별한 부탁과 어떤 특별한 관심이 있을때는 이름을 두 번 부릅니다. 사울아! 사울아! 사무엘아! 사무엘아! 나는 우리 주님이 용조야! 용조야! 이렇게 두 번 부르기를 바랍니다. 나는 우리주님이 여러분의 이름을 꼭 두 번 부를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어떤 일관계나 용무관계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개인적인 관계 때문에, 어떤 특별한 미션이 있어서 부르시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고 그러셨는데 이 말씀은 가만히 묵상해 보면 두 가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뜻은 사울아! 사울아! 나는 그렇게 너를 사랑하는데 내가 너를 그렇게 기다렸는데.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는데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를 그렇게 사랑했는데 너는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뜻이 이 안에 있습니다. 부부싸움 해 보신분들 계시죠. 안 해 보신분들 있으시겠어요 부부싸움을 하면 대개 여자가 남자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여보 왜 그래 왜 그리 나를 못살게 굴고 미워해 이런 말을 던지는 데 이 말을 가만히 분석해 보면 내가 당신한테 시집와서 당신한테 당하고 시부모한테 당하고 시동생한테 당하고. 이렇게 당하고 저렇게 당하고 다 참고 수고했는데 당신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 이러면서 하는 말입니다. 이말이. 당신은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 라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희생을 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런 뜻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의미가 있는거예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또 하나의 뜻이 이 말씀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너는 왜 나의 교회를 핍박했느냐 라고 하지 않았아요. 너는 왜 나의 제자들을 핍박했느냐라고 하지 않았어요.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사실 사울은 예수를 핍박한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면한 적도 없고 핍박 한 적도 없습니다. 사울은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면 가서 흩었습니다. 가서 잡아오고 사울은 오늘 보면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잡아오기 위하여 다메섹까지 갔고 그들을 위협했고. 그들에 대해 살기 등등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울에게 예수님은 너는 왜 내 제자를 핍박했느냐 너는 왜 내 교회를 핍박했느냐라고 하지 않으시고 왜 나를 핍박했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곧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제자를 핍박하는 것이 곧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 라는 예수님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15장 18절을 보면 세상이 너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나를 먼저 미워한 줄 알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이 너희를 핍박하는 대신에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있느니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이 본문에서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예수님께서 육체를 입고 오셔서 33년동안 우리와 같이 사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죽으실 뿐 아니라 3일만에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40일만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더 이상 예수님을 만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오면서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과 대화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음주에 무슨 일로 죽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러면 아마 교회에서 성도님들이 교회장을 치루어 주시겠지요 다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그러면 다음주에 여러분은 저의 설교를 들으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는 계속 될 것입니다. 누군가에 의해서. 그러나 나의 설교는 들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는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분이 없는데 그분의 음성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첫째 그는 육체로 보이지 않지만 그분은 분명히 살아 계시고 우리를 보고 계시고 그분은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얼마나 놀랍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러 2000년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팔레스틴으로 우리가 성지순례가지만 가봐야 예수님은 못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두 번째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라고 말했던 것을 보면 지금 찾아오시는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살아계시고 우리를 보고계시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그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 번째 그분의 임재는, 예수님의 임재는 성령님의 임재와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 성령의 임재의 본질을 찾을수가 있습니다. 성령의 임재란 무엇입니까 오순절날 성령님의 임재는 무엇입니까 사울에게 임한 성령의 임재는 곧 그리스도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성령을 받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님은 자기를 높이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에 대해서 말하지 않으면 견딜수가 없는 뜨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예수님을 선포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우리에게 은사들과 능력들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은 그숝간 5절에서 주여!-뉘시오니까 주여 뉘시오니까!-말이 재미있는데. 당신이 누구십니까 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보통 말하면 당신이 누구십니까 라고 말할거예요. 그러나 사울은 순식간에 반응이 퀴리오스! 주여 라는 반응입니다. 아주 재미있어요. 사람에게는요 그 예감이라는 게 있어요. 우리가 꼭 하나님을 믿을 것 같은 사람이 있어요. 안믿는데 모든 일이 꼭 하나님을 믿을 것 만 같아요. 특별히 예수님을 막 핍박하면 이러다 내가 예수 믿지. 그런 생각이 들어요. 돈은 많이 벌리는데 이거 왜벌리지 이게 자꾸 이상한 예감이 들어요. 어떤 사람은 꼭 하나님을 믿을 것만 같은 예감이 있는데 아마 스데반이 그런 예감이 들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타나니까 주여-! 라고 그런거에요. 자기도 모르게. 그는 너무 강렬하게 자기도 거부할 수 없는 어떤 한 인격. 거룩한 인격. 사랑의 주님을 직감한 것입니다. 주여! 누구십니까 제가 온누리 교회를 목회하면서 두 분의 삶을 기억합니다. 한분은 청년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계신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다니던 중에 그는 역사의 모순 앞에서 운동권과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를 믿게 된 동기를 어느 날 간증하게 되었는데 대학로에서 빨간띠를 띠고 일선에서 투쟁을 하였습니다. 투쟁을 했는데 경찰과 부딪혔고 몽둥이를 맞았고 피를 쏟았고 기절에서 쓰러졌습니다. 그때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주님이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를 안수하시고 치유하시고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그는 그 순간에 모든 생각을 바꾸고 온누리 교회로 오게 되었고 대학부에서 공부했고 경배와 찬양에서 손을 들고 울며 찬양을 했습니다. 그를 설득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데모하는 주님이 현장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또한 사람은 서울대학 운동권의 핵심 멤버였고, 여자는 이대 핵심 멤버였습니다. 둘이 운동권 사람끼리 결혼을 했습니다. 지금 30대 중반에 해당하는 분들인데 그것이 자기의 삶이었고 삶의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들이 어떻게 누구의 소개인지 모르지만 우리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동안. 설교를 듣게 되었습니다. 주일날마다. 그리고 성령의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령께서 그를 만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은 어렸을 때부터 예수님의 대해서 들었었습니다. 그가 민중신학으로 박사과정을 거의 끝나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논문을 정리하면 되는 그때. 부목사님을 통해서 연락이 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예수를 알고 느끼게 되니 이 논문을 못 쓰게 되었더라는 것입니다. 신앙 양심을 속이고 학위를 받을 것인가!-마지막 몇 달 남지 않은 이 과정에 논문을 포기할 것인가 자기를 가르치고 몇 달동안 자기를 지원해 주었던 동료들과 교수님을 배신할 것인가! 이 부부는 주일날 이 부부가 떠나는 날 제방에 와서 기도를 했습니다. 주일날 기다리는 것이 일주일의 전부래요. 그만큼 저희 교회의 예배를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 부부는 몇 달을 고민하다가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것만이 자기가 살길이라는 것입니다. 논문을 못쓰겠다라는 것입니다. 민중신학으로. 그것이 성경적이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결국은 학위를 포기하고 논문을 포기하고 그들은 이민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제가 왜 가십니까 무슨 job 이 있으십니까 그냥 떠난다고 해요. 자기를 사랑해주었던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적으로 보기가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그 후에 편지가 왔습니다. 신학교를 가고 싶은데 추천서를 써 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추천서를 써 주었습니다. 아무 누구도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그를 만진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신거예요. 우리 인생에 이런 절규가 있었습니다. 우리 생애에 이런 만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성이나 우리의 양심적인 행동이나 우리의 열심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못 볼 수가 있습니다. 너무나 그게 크게 나타나기 때문에. 인간적인 똑똑함과 인간적인 열정과 인간적인 그 프락시스 행동 때문에 주님이 안보일수 있습니다. 사울처럼. 자기가 생각하고, 자기가 행동하고 자기가 고난받는 것이 성자처럼 그것이 우상일수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시겠습니다. 시작. 주여 누구십니까 당신은 누구십니까 이때 예수님이 성령님을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말을 듣는 순간에 사울의 영혼은 산산조각이 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말앞에 누가 더 주저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우리가 이 말을 들었다면 그 말앞에 거절하고 항거하고 거불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은 로마의 병정이나 빌라도나 대제사장이 나를 죽인 것이 아니라 니가 나를 죽인 것이다. 그들이 나를 핍박한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핍박한 것이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예수님을 혹시 핍박하지 않았다고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예수님게 거절하고 나는 예수님을 힘들게 하지 않았다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혹시 여러분이 교회에 대해서 핍박을 했다면 부정적인 생각을 했다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고 교회가 하는 일들을 웃기게 생각하고 목사는 할 짓이 없으니까 대학이 떨어지니까 대학이나 가지. 선교사는 자기 멀쩡한 직업을 낳두고 왜 저런 짓을 할까 라고 한 것이 다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거예요. 그게 그 사람들에게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다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은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됩니다. 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 예수님은 사울에게 나는 지금 어떤 계획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실 때 막연히 부르시지 않습니다. 사울을 부를때는 이방인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을 위해 부른 나의 택한 그릇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부르실 때 막연히 여러분을 부르시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사도로. 여러분을 통하여 이 민족을 구원시키는 사도로. 어떤 사람은 노동자 속에, 어떤 사람은 운동권속에, 어떤 사람들은 빈민촌속에 가서 그들을 변화시키라고 여러분을 부르신거에요. 당신은 이북을 복음화 하라고. 당신은 중국을 복음화 하라고. 사울을 부른 것은 이방을 복음화 시키라고. 빌립은 전도자로 쓰기 위하여. 스데반은 순교자로 쓰기 위하여 바나바는 상담자로 쓰기 위하여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것에는 반드시 계획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준비가 있습니다. 너는 지금 일어나라. 성으로 들어가라! 네게 행할자가 있다는 사람을 내가 준비해놨다. 여기서 우리는 재미있는 두가지 사실을 또 하나 발견합니다. 하나는 성령을 받고 영적 거듭남, 깨어짐 충격, 성령세례 이런 것들을 받는 한 경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받고 불밭고 기적과 능력과 은사를 받으면 다 되느냐 아닙니다.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훌륭한 사역자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양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를 가르칠 자가 있다라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거듭났지만 완성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는 3년동안 아라비아로 가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냥 일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신학교를 간다던지, 용평을 간다던지 뭐 이런 것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용평을 가기를 원합니다. 헌신하여서 3개월 동안 저녁마다 여기서 훈련을 받던지, 직장을 포기하고 공부하는 것을 잠깐 스톱하고 하나님께 훈련, 생활 훈련, 사고훈련, 가르치는 훈련, 성격개조 훈련. 이런 모든 갖 훈련을 받아야지 하나님의 사람으로 일을 하게 되요. 전도 훈련을 위하여 1년,2년 신학교도 가고 헌신자 스쿨도 가고 현지 미션 스쿨도 가는 것입니다. 자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시작!-옆에 있던 사람들은 빛이 오고 꼬꾸라지는 것 같애요. 이걸 가지고는 오해할 소지가 많지요. 바람소리였다고 말할 수도 있겠고 아! 스데반이 갑자기 발목이 삐었다. 사울이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겠고. 장이 꼬였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고. 그 현상을 다루는 각도에서 변명을 할 수가 있을 거에요. 그러나 사울에게는 이것은 변명할 사건이 못되요. 그 사건이 지나고 나서 사울이 일어나 보니까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8절과 9절을 보겠습니다. 시작!-
아마 빛이 강렬하게 왔기 때문에 눈에 이상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마 시력을 잃어버렸다기 보다는 일시적 마비현상. 충격과 정지현상이 생겼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그는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손에 의해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잠깐 생각해 봅시다. 이 때 사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그 심정이 지금 어떤 상태가 되어 있겠습니까 그는 의기양양하게, 살기 등등하게, 패기왕성하게 그냥 개선군처럼 라이센스까지 다 받아가지고 지금 예수쟁이를 잡으로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기쁘게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양심대로 행동한다고 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꼬꾸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눈일 멀었습니다. 자기의 손으로 못가서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가야되요. 이럴 때 우리가 그 사람의 심정을 이해할수 있을까요 굉장한 혼돈이 왔을 것입니다. 굉장한 충격이 왔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떵떵 거리고 권력을 한솝에 잡고 살던 사람이 어떤 한 순간에 모든 것을 다 잃어 버리고 사람들에 의해서 이리저리 끌려 다닙니다. 자기가 가고 싶으데로 가지를 못합니다. 교도소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때 그 사람의 심정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하고 고통스럽겠습니까 칼을 뺏깁니다. 총을 뺏깁니다. 권력을 뺏깁니다. 재물을 빼앗겨 버렸습니다. 인격과 그의 모든 것을 빼앗겨 버렸을 때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모르긴 해도 사울이 지금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갑니다. 우리는 지금 그분의 의해서 여러 가지 마음이 생겼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혼돈. 마음의 가난함. 아니! 어쩜 그 거룩하신 주님의 음성. 그래서 그는 마치 빛을 본 것처럼 그의 인생이 정리되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 시간이 3일이었습니다. 변화의 시간. 거룩한 침묵의 시간. 마치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에 부활하기 전까지 무덤에 갖힌 삼일과 같습니다. 요나라는 사람이 구약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배를 타고 도망가다가 풍랑을 만납니다. 배가 깨질 지경이 되어가지고서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 요나를 물에 던져 버립니다. 그때 큰 물고기가 거기 입을 벌리고 있다가 요나를 씹은게 아니라 통째로 삼켜 버린 것입니다. 요나는 그 물고기 3일을 뱃속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뱃속에서 잤던 것처럼 잤을까요 에라 모르겠다. 자자. 그랬을까요 안그랬을 것 같아요. 볼수도 없고 먹을수도 없었던 3일이었어요. 요나는 거기서 무엇을 3일동안. 구약에는 아브라함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는 백세에 약속의 자식인 이삭을 낳았습니다. 너무나 귀한 이삭을 어느날 너는 너의 자식을 죽이라는 것입니다. 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일찍 일어나서 짐을 지우고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산으로 가는데 3일입니다. 아브라함은 3일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이 아마 사울이 보지 못하고 먹지 못한 3일 동안 있었던 하나님과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 시간은 아마도 번데기가 나비가 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부활을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자기가 깨지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은 자아가 죽는 시간입니다. 그는 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에게 이런 시간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사울을 기억하셨습니다. 보고 계셨습니다. 그는 그를 부르고 계셨습니다. 오셔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변화시키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을 준비시키고 계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여러분을 부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변화되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을 하나님이 준비시키고 계십니다.
사울을 부르신 예수님! 오늘도 우리를 불러주심을 믿습니다. 응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변화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주님이 원하는대로 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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