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한 예배 (마5:21-26)
본문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예배 생활입니다.
예배 생활이 충실치 못하면 성도의 신앙이 병들었기 때문이요, 예배 생활이 충실하면 그의 신앙이 건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줄로 압니다.
‘예배’란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모든 행위와 정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영적인 만남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가장 큰복이요, 귀중한 시간입니다.
예배 중에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성도들이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격과 기쁨을 더하게 합니다. 천국의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특히 예배 중에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심령을 강건하고 윤택케 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고통하며 근심하는 자에게 평안을, 실망하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매우 적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은 너무도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갈한 심령에 생수와 같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내려 주시는 만나와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된 은혜를 어떤 사람이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그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열망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식욕이 없을지라도 음식은 때에 맞춰 먹어야 합니다. 건강 비결 제1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때를 건너지 말아야 합니다. 제때에 먹는 식사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항상 입맛이 좋겠습니까 또 음식을 만들 때에도 어떻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입맛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이 이미 절반은 병들었다는 것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무 때에든지,어떤 음식이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탈나서 입맛이 떨어진 줄은 알지 못하고, 차려 놓은 음식만 타박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입맛이 없다고 음식을 거르면 그는 정말로 중병에 걸립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명곡을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의 국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국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 자꾸 듣다 보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라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먹으면 입맛이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더욱 열심히 만나십시오. 자꾸 만나다 보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철천지원수라도 한 감방 안에서 사흘만 같이 지내면 친구가 된답니다.
그런데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멀리한다면 자꾸 자꾸 멀어지는 것입니다.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면 그것은 무언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딘가 병이 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고, 주저하게 된다면 정말로 깊이 병들고 맙니다.
여러분! 자녀가 부모를 대하는 것이 기분에 관한 겁니까 사람은 기분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자기 기분과 감성을 억제하는 것이 위선인 것처럼 생각하고, 기분대로 사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분대로 사는 것은 짐승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고 예배에 열심히 나오고, 기분 나쁜 일이 생겼다고 예배를 등한히 하는 병폐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배는 언제나 꾸준해야 합니다. 감정을 초월해야 합니다.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야말로 건강한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자의 마음에 감격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를 빠지게 되면, 그 심령은 점점 병약해지고, 결국은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날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인간의 진실한 응답이 바로 예배이다.’그렇습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응답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의 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2: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배 자의 절대적 조건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화평’을 소유해야 합니다. 서로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과 행위에 화평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마5:9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예배 자의 도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의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을 들을 만한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불평이요 불만이었습니다. 마침내 간사하게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서를 속이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 드립니다.
이 사실은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죽일 결심을 합니다. 결국 야곱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형과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그렇게 20년이 흐른 후에 야곱은 다시 얍복 강을 건너와서 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형과 동생이 목을 안고 서로 입을 맞춥니다. 그때 야곱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창33:10절에 보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형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은 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남을 원망해서도 안되며, 또한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어서도 않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망 죄’입니다.
환경이나, 이유가 어쨌던 간에 원망은 바로 불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원망이란 자기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고, 내가 실패한 것은 환경 때문이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다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때문에 신세 망쳤다는 사람, 아내 때문에 출세하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 보면 원망은 절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에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나 자신이 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말했던지 간에, 부부 싸움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던지 간에,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잘못의 책임은 다 내게 있습니다’라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한 예배 자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내가 불행한 것도 내 책임이요,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도 바로 내 책임이요, 세상이 잘못되는 것도 내 책임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마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23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남들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까 누군가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면,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예배드린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거지 한 사람이 어떤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아무리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구걸하러 온 거지 인줄 미리 알고 안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 할 수 없이 돌아서면서 있는 대로 욕을 합니다. ‘분명히 아까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내다보지도 않다니, 그럴 수가 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대문에 붙어 있는 교회 팻말을 보았습니다. ‘흥 그 꼴에 교회에도 나가시는가 보구먼그래서 천당에 갈 수 있나.어디 두고 보자’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나갑니다.
이게 또 웬 망신입니까 그 교회 목사님이 심방 오시다가 이 꼴을 다 보고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곧바로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밖에서 한참 기다렸다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문울 얼어 주었습니다. 어쨌던 그 목사님은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원망을 듣게 되면 기도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원망하지 말 뿐더러 내가 원망을 들어서도 안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원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네 아버지나 나나 가난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하고 해서, 이 만큼 성공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 하는 것이냐’고 한참 늘어놓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저를 나아 달라고 했어요 왜 나아서 이 고생을 시킵니까 그리고 제자식 자기가 키우면서 무어가 그렇게 말이 많아요’하며 도리어 대듭니다. 이것이 또 문제입니다.
또 남편을 원망해 보십시오. 남편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원망해 보십시오. 아내도 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은 언제나 원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굳이 아이들에게 말하려거든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저 너희에게 미안하구나. 내가 돈을 못 벌어서 용돈도 제대로 못 주고 하니 말이다. 또 내가 이 모양으로 못생겼으니 부모 닮은 너희도 잘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미남 미녀로 만들어 주지 못하니 미안하다.’ 그렇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저쪽에서도 ‘죄송합니다.’하고 나올 것입니다.
이 쪽에서 고맙다고 말하면 저쪽에서도 고맙다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나는 남을 원망하면서 정작 남보고 나에게는 감사하라고 합니다. 앞뒤가 통 맞지를 않습니다. 보세요! 원망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내가 저들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 앞에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도 내게 고마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원망을 해서도 안되고, 또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을 해서도 안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가 합당한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귀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3-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해결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할 때이면, 원망들을 만한 일은 언제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내 잘못이오, 내가 잘못했소’라고 먼저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합당한 예배의 도리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대개는 진실해 집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놓고 말씀하시기를 ‘얘야!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느냐, 참으로 미안하구나’라고 하면 눈물이 글썽 글썽하여 조용히 듣고 있는 며느리가 ‘아니오, 나 때문에 어머님께서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르실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너 때문에 나만 고생했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미안하다는 이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하고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그때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자의 마음은 항상 예배드릴 때마다 늘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즉시 가서 내가 잘못했노라고 사과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가 예배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오로지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배 자는 용서와 화해와 사랑, 그리고 거리낌이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참으로 깨끗하게 비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예배가 은혜가 없고, 왜 예배가 힘이 들고, 왜 예배가 무기력해졌습니까 바른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점점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 자 된 바른 자세를 찾으십시오. 바른 예배가 이루어질 때에 내 영혼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도 강건해지고, 육신도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합당한 예배를 통해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며, 사회생활을 복되게 하는 성도의 삶에, 새로운 활력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 생활이 충실치 못하면 성도의 신앙이 병들었기 때문이요, 예배 생활이 충실하면 그의 신앙이 건실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할 줄로 압니다.
‘예배’란 구속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과 존귀를 드리는 모든 행위와 정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배는 하나님과 성도들의 영적인 만남과 교제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신 가장 큰복이요, 귀중한 시간입니다.
예배 중에 드리는 감사와 찬송은 성도들이 받은 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감격과 기쁨을 더하게 합니다. 천국의 기쁨과 평안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의 정성을 받으시고,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특히 예배 중에 주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정결케 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우리의 심령을 강건하고 윤택케 하여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고통하며 근심하는 자에게 평안을, 실망하고 낙심한 자에게 용기를 주십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은 매우 적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은 너무도 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은 갈한 심령에 생수와 같습니다. 굶주린 자에게 내려 주시는 만나와 같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복된 은혜를 어떤 사람이 받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그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마음 문을 열고, 주님을 열망하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식욕이 없을지라도 음식은 때에 맞춰 먹어야 합니다. 건강 비결 제1조가 바로 이것입니다. 때를 건너지 말아야 합니다. 제때에 먹는 식사가 건강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항상 입맛이 좋겠습니까 또 음식을 만들 때에도 어떻게 항상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건강한 사람은 언제나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입맛이 떨어졌다는 것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이 이미 절반은 병들었다는 것이 됩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무 때에든지,어떤 음식이든지 맛있게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탈나서 입맛이 떨어진 줄은 알지 못하고, 차려 놓은 음식만 타박하는 사람은 참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입맛이 없다고 음식을 거르면 그는 정말로 중병에 걸립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명곡을 좋아하는 사람은 우리의 국악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국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을 지라도, 자꾸 듣다 보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음식이라도 건강에 좋다고 생각하고 부지런히 먹으면 입맛이 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까 더욱 열심히 만나십시오. 자꾸 만나다 보면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철천지원수라도 한 감방 안에서 사흘만 같이 지내면 친구가 된답니다.
그런데 만나고 싶지 않다고 해서 그 사람을 멀리한다면 자꾸 자꾸 멀어지는 것입니다. 영영 못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정말로 원수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옵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뵙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싫어졌다면 그것은 무언가 나에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어딘가 병이 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고, 주저하게 된다면 정말로 깊이 병들고 맙니다.
여러분! 자녀가 부모를 대하는 것이 기분에 관한 겁니까 사람은 기분대로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치 자기 기분과 감성을 억제하는 것이 위선인 것처럼 생각하고, 기분대로 사는 것이 진실인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기분대로 사는 것은 짐승에 불과한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분 좋은 일이 생겼다고 예배에 열심히 나오고, 기분 나쁜 일이 생겼다고 예배를 등한히 하는 병폐가 있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예배는 언제나 꾸준해야 합니다. 감정을 초월해야 합니다. 환경을 초월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소유자야말로 건강한 심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 자의 마음에 감격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배를 빠지게 되면, 그 심령은 점점 병약해지고, 결국은 깊은 수렁에 빠져서 헤어날 수조차 없게 될 것입니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가진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에 대한 인간의 진실한 응답이 바로 예배이다.’그렇습니다. 예배는 곧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응답입니다.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을 알게 되고,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안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이는 우리의 영혼이 바로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예배의 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12:14절에 보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배 자의 절대적 조건입니다.
하나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먼저 ‘화평’을 소유해야 합니다. 서로 화목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자는 먼저 그 마음과 행위에 화평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아무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마5:9절에 보면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예배 자의 도리에 관한 것입니다.
본문의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원망을 들을 만한 일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야곱의 일생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동생으로 태어난 것이 불평이요 불만이었습니다. 마침내 간사하게 아버지를 속이고, 형에서를 속이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사 드립니다.
이 사실은 알게 된 에서는 야곱을 죽일 결심을 합니다. 결국 야곱은 고향에서 쫓겨나고, 형과 철천지원수가 됩니다.
그렇게 20년이 흐른 후에 야곱은 다시 얍복 강을 건너와서 형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형과 동생이 목을 안고 서로 입을 맞춥니다. 그때 야곱은 이렇게 간증합니다.
창33:10절에 보면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형과 만나면서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은 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는 남을 원망해서도 안되며, 또한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어서도 않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 앞에 큰 죄를 범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원망 죄’입니다.
환경이나, 이유가 어쨌던 간에 원망은 바로 불 신앙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원망하는 마음으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원망이란 자기 불행의 책임을 남에게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고, 내가 실패한 것은 환경 때문이고, 내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은 다 누구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때문에 신세 망쳤다는 사람, 아내 때문에 출세하지 못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잘못된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그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다 보면 원망은 절로 생기기 마련입니다. 이에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을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책임을 나 자신이 져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가 어떻게 말했던지 간에, 부부 싸움을 하면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던지 간에, 적어도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잘못의 책임은 다 내게 있습니다’라는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당한 예배 자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내가 불행한 것도 내 책임이요, 당신을 불행하게 만든 것도 바로 내 책임이요, 세상이 잘못되는 것도 내 책임이라’고 말입니다.
모든 불행의 원인이 나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오직 이러한 마음으로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23절에 보면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합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남들에게 원망을 듣게 됩니까 누군가가 나를 원망하고 있다면,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로 예배드린다고 할 찌라도 하나님께서는 열납하지 않으십니다.
거지 한 사람이 어떤 집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아무리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집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 분명한데도 구걸하러 온 거지 인줄 미리 알고 안 열어 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 할 수 없이 돌아서면서 있는 대로 욕을 합니다. ‘분명히 아까 사람이 들어가는 것을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데 내다보지도 않다니, 그럴 수가 있나 잘 먹고 잘 살아라’
그러다가 설상가상으로 우연히 대문에 붙어 있는 교회 팻말을 보았습니다. ‘흥 그 꼴에 교회에도 나가시는가 보구먼그래서 천당에 갈 수 있나.어디 두고 보자’고래 고래 소리를 지르며 떠나갑니다.
이게 또 웬 망신입니까 그 교회 목사님이 심방 오시다가 이 꼴을 다 보고 들었습니다. 목사님의 얼굴이 뜨거워졌습니다. 곧바로 들어가면 안될 것 같아서 밖에서 한참 기다렸다가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제야 문울 얼어 주었습니다. 어쨌던 그 목사님은 그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원망을 듣게 되면 기도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남을 원망하지 말 뿐더러 내가 원망을 들어서도 안돼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정에서도 자녀를 키우면서 아이들에게 이렇게 원망할 때가 많을 것입니다.
‘네 아버지나 나나 가난해도 어떻게 해서든지 열심히 공부하고 해서, 이 만큼 성공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도대체 무엇 하는 것이냐’고 한참 늘어놓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할 말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 저를 나아 달라고 했어요 왜 나아서 이 고생을 시킵니까 그리고 제자식 자기가 키우면서 무어가 그렇게 말이 많아요’하며 도리어 대듭니다. 이것이 또 문제입니다.
또 남편을 원망해 보십시오. 남편도 나름대로 할 말이 있습니다. 아내를 원망해 보십시오. 아내도 할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 원망은 언제나 원망을 불러일으킵니다.
굳이 아이들에게 말하려거든 이렇게 말하십시오. ‘그저 너희에게 미안하구나. 내가 돈을 못 벌어서 용돈도 제대로 못 주고 하니 말이다. 또 내가 이 모양으로 못생겼으니 부모 닮은 너희도 잘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성형수술이라도 해서 미남 미녀로 만들어 주지 못하니 미안하다.’ 그렇게 먼저 미안하다고 말해 보십시오. 저쪽에서도 ‘죄송합니다.’하고 나올 것입니다.
이 쪽에서 고맙다고 말하면 저쪽에서도 고맙다고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나는 남을 원망하면서 정작 남보고 나에게는 감사하라고 합니다. 앞뒤가 통 맞지를 않습니다. 보세요! 원망을 듣는다는 것은 이미 그 전에 내가 저들을 원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모든 사람 앞에 감사하고 고맙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되면 그 사람도 내게 고마워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원망을 해서도 안되고, 또 원망을 들을 만한 일을 해서도 안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가 합당한 예배가 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귀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23-24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해결 방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할 때이면, 원망들을 만한 일은 언제나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때면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내 잘못이오, 내가 잘못했소’라고 먼저 사과하고, 용서하고,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합당한 예배의 도리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는 대개는 진실해 집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놓고 말씀하시기를 ‘얘야! 나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느냐, 참으로 미안하구나’라고 하면 눈물이 글썽 글썽하여 조용히 듣고 있는 며느리가 ‘아니오, 나 때문에 어머님께서 얼마나 불편했는지 모르실 거예요’라고 대답합니다.
아마 죽는 순간까지 ‘너 때문에 나만 고생했다’고 하겠습니까 비록 마지막 순간이지만 미안하다는 이 말 한마디를 제대로 하고야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그때만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배 자의 마음은 항상 예배드릴 때마다 늘 그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거든 즉시 가서 내가 잘못했노라고 사과하고, 화해하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러한 자세가 아니기 때문에 예배가 예배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드릴 때에는 오로지 깨끗한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배 자는 용서와 화해와 사랑, 그리고 거리낌이 없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예배 자의 바른 자세입니다.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참으로 깨끗하게 비어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예배가 은혜가 없고, 왜 예배가 힘이 들고, 왜 예배가 무기력해졌습니까 바른 예배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이 점점 시들어 가고 있는 것은 하나님과의 바른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예배 자 된 바른 자세를 찾으십시오. 바른 예배가 이루어질 때에 내 영혼이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정신도 강건해지고, 육신도 강건해 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합당한 예배를 통해서 인간관계를 아름답게 하며, 사회생활을 복되게 하는 성도의 삶에, 새로운 활력과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가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