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은 나를 위해 무슨일을 하는가? (롬8:12-25)
본문
오늘은 로마서 14번째 강해입니다. 성령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 성령은 나를 위해 무엇을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누리는 최고의 축복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 2002년도 최고 유행했던 가장 유행했던 구호가 연초부터 부자 되세요. 어떤 아줌마가 나와서 부자 되세요. 맨날. 다같이 부자 되세요.
그런데 그게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나 봅니다. 그죠. 1년 내내 부자 되세요. 하여튼 부자라고 쓰인 책들도 많이 팔렸고. 부자 되고 싶어 합니다. 물질의 축복.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명예에 대한 축복. 건강에 대한 축복. 이런 것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도 많은 것들이 좋은 거지만 최고의 축복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 그거 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우리 안에 성령이 내조하고 계신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만 진정한 평안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를 잘 몰라요. 어 제가 오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이렇게 사람들 만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만나고 예배시간 10분전에 교회를 오는데 제 차가 분명히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지금 가면 주차할 때가 없을 거라고. 사람들 구제사역갔다가 갈 때 없으니까 다 올꺼고. 갈 때가 있어도 교회가 좋아서 다 올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열댓 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는가 다 우리 삼일교회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까요. 좀 지쳐있고 깨재재 한 것은 있는데 머리 안감아가지고 조금 얼룩덜룩 한 것은 있는데. 뭐.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그렇게 만족해 하는 얼굴. 그렇게 충만한 얼굴. 기쁨에 겨운 얼굴. 저는 월드컵 4강에 들어간 다음에 그런 얼굴 처음 봤습니다. 정말 기뻐하던 얼굴이더라고요. 이유가 뭡니까 새벽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오전에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위로 받고 오전에는 설교에는 은혜 못 받고 뒤통수 보고 은혜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봤습니다. 야! 사람이다. 사람이다. 하면서. 아마 우리 숙대 역사상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을 겁니다. 조금만 움직이면 사고날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런것들에 대한 은혜. 그리고 구제사역에 대한 은혜. 성탄 오후에 우리만큼 기쁨에 뿌듯한 사람 참 드물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쾌락과 즐거움에서 잠시잠간 즐거울 것 같지만 저녁쯤 되면 공허해지지 않습니까 공허함이 없는. 허전함이 없는 기쁨. 오직 성령만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의 일들 하고 허전함이 있던가요 공허함이 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해요.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터져 나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뻐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뻐해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뭐 잘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참 평안이 없습니다. 저는 어떤 부잣집 아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불면증에 걸려가지고. 몸은 편한데 잠은 잘수가 없다고. 밤낮 하드락이라는 것에 빠져가지고 그런 것 안들으면 잠도 안오고. 그리고 탐닉해가지고 눈이 충혈되어가지고 도와 달라고 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가지고 눈이 쑥 들어간 사람도 있고요. 실패, 아픔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우울질에 걸려가지고. 벌써 감각에 걸려 있어요. 사람들에게 폭언을 가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관계가 하나씩 하나씩 깨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참 무서운게 뭐냐면 마귀는요 마귀는 관계를 깹니다. 참 어떨때에는 우울질이라는 것으로 관계를 깨고요. 어떤 사람은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나는 정의의 사도다. 그래서 관계를 다 깨요. 자기 혼자 청청하리라 하면서. 관계를 깨는 일들. 그것은 물론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계를 다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관계를 다 깨버리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지요 어떤 때는 온순하게. 원수로부터 존경받아 가면서. 그저 인정받아가면서. 그러면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유지하면서 그런것들을 누리는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것. 그걸 누려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때문에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있게 서있을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없으면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항상 불안합니다 불안하고 항상 피곤한게 특징입니다. 그래서 피곤해요. 여러분이 새벽기도 나왔습니다 아침에 예배 나왔습니다. 오후에 구제사역갔습니다. 저녁때쯤 되면 제일 피곤할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 있으면 만나 보십시요. 그럼 오늘 저녁에 가보십시요. 누가 더 피곤한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tv본사람. 하루종일 누워 있던 사람. 그 사람이 훨씬 더 피곤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우리 늦게까지 주일 저녁에 예배 드렸는데 우리가 월요일에 더 피곤해 보입니까 아니면 두시쯤에 돌아가서 잠자는 사람이 더 피곤해 보입니까 한번 비교를 해보라고요. 저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4시쯤에 예배를 드렸던 것 같애요. 4시 반이나 5시쯤 되면 모든게 다 끝나버립니다. 그러면 집에 돌아오면 뭐 합니까 그때는 일요일밤에 대행진 이런 것 했었어요. 주일저녁에 뭐 하는줄도 모릅니다. 그게 마지막으로 봤던건데. 열심히 봤습니다. 난 텔레비전 좋아하니까. 뭐 영화 한편 보고. 히닥 거리는 거 보고. 그러고 월요일이 되면 일어날수가 없어요. 쇳덩어리예요. 쇳덩어리. 월요일날 뭐 한다고 하면 잠만 잤습니다. 잠만 자고 아무일도 못하고.
그런데 묘한게 뭐냐면 하나님께 찬미하고 새벽부터 기도하고 할때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큰 능력을 주시더라고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여러분! 그런 영적인 능력을 추구하면서 나아가는것. 그맛을 세상에 알려주는것. 성도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능력있는 삶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우리 특징들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조해 계시면 우리안에 무슨 일을 하십니까 내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있다라는 거예요. 이런일도 하지만 제일 큰 일들. 죄악을 무너뜨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뭡니까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 몸의 행실의 죽이는 사역을 합니다. 한마디로 해서 죄악을 무너뜨리는 사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라고 했죠.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시면 우리안에 죽음의 세력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그래서 성령충만한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죄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죄에 대한 고발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이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 많이 나와 있는데 16장 8절을 보면은 성령이 와서 하시는 일이 뭐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며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이 뭡니까 죄에 대해서 책망하는것. 오순절날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증거할 때 성령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으니까 백성들의 첫 번째 반응이 뭐였습니까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니까 저희가 이말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저희가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헝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니까 제일 먼저 깨닫는게 뭐였습니까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라는 거예요. 깨달음. 회개하면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그런데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보면은 조직신학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바라보는 어떤 연역적인 접근을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틀을 잡을려고 뼈를 잡을려고 조직신학을 읽을필요가 있습니다. 조직신학에서 구원에 서정이라고 할까. 조금 어려운데 구원의 단계가 있거든요.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성령에 그렇게 배웠었는데. 9가지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소중회. 소명 중생. 회개. 그다음에 신앙. 칭의. 수양. 그러니까 아들이 됨. 그다음에 성화. 그 다음에 견인. 그 다음에 영화.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단계. 이렇게 9가지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이 단계가 저는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처음에 보십시요. 처음에 소명. 하나님의 CALL
ING. 하나님이 부르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거죠. 소명. 소명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에 들어갔습니다. 순서가 중생다음에 뭐가 와요. 회개가 온다니까요. 회개가. 내가 회개 할수 있다라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안에 들어가셔서 죄를 보여 주니까 회개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한다는 것 자체가 뭐에요. 내가 구원받았다라는 표징입니다. 표징. 구원 받은 백성만 회개합니다. 잊지 마십시요. 중생한 사람이 회개하는 거지. 회개해서 중생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육신의 육체를 따라가는 사람이 자기가 혼자 깨닫고 이게 죄구나 해서 회개해서 중생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생. 본 어겐을 주시니까 죄가 보이고, 죄가 보이니까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나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회개할 맘을 가졌습니까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까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이미 구원 받은 백성이니까 회개하는거지 바로왕처럼 버림받은 왕들 보십시요. 회개가 없습니다. 후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가룟유다를 보십시요. 후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역사하면은 회개하게 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면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라고 나오는데 전신갑주를 입으라! 중에 하나가 뭡니까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 성령의 검은 보통 마귀와 싸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암덩어리 같은 죄악들을 향한 말씀의 매스가 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수술해 버립니다. 우리의 죄악거리들을 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해서 우리가 매순간마다, 매 순간 마다 죄악을 무너뜨리는 그런 거룩한 사역들을 하는 믿음의 종들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악들을 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고난가운데 이끄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일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에 우리의 인생들을 다시한번 회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진 사람있지요 어려운 사람 있지요
그런데 목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몇 번 사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의 일대기를 죽 들어보면은 하루아침에 능력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 별로없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수술하고 있는 건데. 수술하고 있는 건데 본인이 느끼기로는 수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라고 느껴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어떤 사람이 암덩어리가 있습니다. 특출난 선생님 만나가지고 완전히 치유할수 있는 선생님을 만났다고 합시다. 뭐 내용은 잘 모르지만 어떻든간에 수술받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럴때 병상에 누워 있으면 더 아파지는 것 같지요 더 악화 되는 것 같지요 보통 멀쩡한 것 같은데 배를 짜르고 뭐 잘라내는 것 같지요 몸무게 도 몇그램 줄어들 것 아니예요 뭐 떨어져 나가니까. 손해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뭡니까 건강해 지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거예요. 저는 이런 영적인 역전에 대한 것에 제일 안타까운게 어거스틴이 썼던 신의 도성이라는게 있지요 The city fo GOD!-저는 신학대학원때 이책을 읽었는데 참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신의 도성에서 어거스틴이 딜레마가 이거였다는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지하고 순종했던 로마. A.D 333년에 대제에 의해 기독교 국가가 되었던 로마. 이 로마가 하나님을 전혀 하나도 알지 못하는 야만족 게르만 족에게 점령당할수 있냐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땅에 살다보면은 이런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있는 종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대적해 보이는. 게다가 문화도 없어 보이는 야만족.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 보입니다. 게르만이 이겼어요. 로마를! 그 로마가 어떤 로마인데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 로마가. 기독교 로마가 그 야만족 게르만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이게 딜레마 아니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가. 저는 이런 사건들이 우리들 인생가운데 여러번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를 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탄합니다. 그리고 밤낮 얘기하는게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런일이 벌어집니까 어거스틴만 그런게 아닙니다.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도 똑같은 탄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우두커니 쳐다 보니 어떤일이 벌어져요. 믿지 않는 야만인들이 로마를 점령한 다음에 얼마지난다음에 그들이 회심하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오더라는거예요. 조금 지나고난 다음에 신성로마 제국이라고 나오지요 새로운 로마를 만들자. 하나님을 섬기는 로마를 만들자. 그래서 이전에 타락한 로마의 모습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는 모습으로 되더라는 겁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무릎을 친거예요. 아!-이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구나!-그지요 우리 인간이 생각할때에 이것은 망한거라고 생각하고 무너진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일하기 시작하는구나! 그걸 깨닫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큰 빌딩을 짓는 계획이 있다라고 합시다. 그지요 5층이나 6층 건물. 비교적 깨끗하다는 건물. 주변보다 훨씬 나은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설계자의 마음 가운데는 이것을 무너뜨리고 엄청난 고층 빌딩을 올려야 겠다라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림이 있습니다. 주변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볼때에는 멀쩡한 건물을 다 때려 부시는 것 같습니다. 다 부셔버립니다. 가슴 아파하지요 세상이 이럴수 있는냐 논리적으로 이해할수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건물보다 아름다운 건물이요 멋있는 건물입니다. 주변에 허름한 건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새 건물입니다. 그걸 왜 부십니까 그 좋은 것을 왜 부숩니까 이해를 못하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난 다음에 어떤일이 벌어집니까 그걸 부수니까 높은 고층 빌딩이 나오는거 아니예요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그렇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이해를 못합니다. 하나님! 이 멀쩡한 것을 왜 깨부숩니까 깨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더 큰 것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죄악적인 부분들을 잘 보면은 죄라고 하지만 우리 말로 관념적으로 죄라고 그러지만 죄라고 말하는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득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분들이 세워진 것이 많이 있습니다 죄의 기반에 세워진 것들. 주님께서 그것을 말씀의 기반에 세우기 위해서 무너뜨릴때가 있습니다. 참 묘해요. 우리는 죄는 싫어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기득권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실 똑같은 건데. 그게 무너져야 합니다. 철저하게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둔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갈 때 승리할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할때 처음에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새로운 은혜와 다시 세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꼭 붙드시고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다루실 때 감사함으로 어떤 때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힘있게 서 있는 우리 은헤의 종들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성령께서 하시는 방법. 나를 위해 행동하신다는 겁니다. 죄를 지적하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14절을 보십시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 21세기에 다른데서는 모르지만 우리 기독교에서의 최고의 화두가 뭔지 아십니까 리더의 대한 갈망이예요. 요즘에 제일 많이 나오는 책돌. 여러분! 미국에 대한 책방들 가보십시요. 그 중에 상당수의 주제가 리더십입니다. 리더십. 리더십이라는 얘기는 뭡니까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예요. 많은 교회에 대한 문제가 뭐냐하면 리더에 대한 갈망. 리더에 대한 갈망이예요. 리더가 없다라는 거예요. 리더가. 누가 우리를 이끌어 주실것인가!-라는 거예요. 서로 사람은 열심이 없다고들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열심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이 있는줄 아십니까 주를 위해서 충성할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성도들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뭔줄 아세요 그런 사람들을 이끌수 있는 리더가 없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리더가 없다라는 거예요. 리더십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의 친히 리더가 되어 주신다는 거에요. 리더십이 뭡니까 요약하면 이겁니다. 성령따라 가는 겁니다. 성령. 우리의 리더되시는 성령. 인도하심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것. 우리 삼일교회의 리더가 누가 되시겠습니까 성령께 있지 않습니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장기 계획이 있습니까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또 다른 표현을 하면 파도를 타는것. 기도의 파도를 보내주시면 기도의 파도를 타고요. 구제의 파도를 보내주시면 구제의 파도를 타면 되는거고요. 선교의 파도를 보내주시면 선교하면 됩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께서 보내 주신것에 순종하는것. 잃어버린자들을 위해서 순종하는것. 그게 성령의 리더십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겁니다. 저도 가끔 외국이나 이런데 가면은요. 뭐 잘 모르는데 혼자 찾아가라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참 매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리고 전 항상 다닐대 스탭들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가라고 하면은 잘 못해요. 물건도 잘 못사고. 돈을 주고도 받는건지. 안받는것인지. 하여튼 사회에서 전적 무능자가 되어 가고 있는데. 대개 불안합니다.
그런데 그럴때 대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목사님! 내가 모셔다 드릴께요. 그러면서 라이드 해서 데려다 줄때. 제일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적당히 길만 알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리이리 가면 돼. 하면서 약도 한 장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친히 우리의 손 붙잡고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참! 이런 리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령 의지하면요 불안할 것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때문에. 목자와 양 똑같아요. 목자와 양이 동행하잖아요. 목자가 아침에 다 집합. 차렷, 열중 쉬엇. 하면서 오늘 해야 할일. 거기 대장 하나 나와. 하면서 오른쪽 어디 가면은 푸른 초장이 있어. 먹고 안전하게 돌아올 것. 난 잠자고 있을테니까. 이런 목자 있습니까 목자는 그런게 아닙니다. 맨앞에 서가지고 이끌고 가는거지요. 같이 푸른 초장에 가서 뜯어 먹고. 그 다음에 맑은 시냇가에 물 퍼 먹고. 그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집이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에 자는것. 계속 같이 다니는게 목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를 이끄시니 목자같이 이끄신다는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잡한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이끄시는 것에 대해서 매일 매일. 순간 순간마다 순종하면 된다는 겁니다. 순종.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방법. 우리 시편 23편을 보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는 뭡니까 구덩이에 빠졌을때 긴 막대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긴것. 이렇게 기억자로 된것. 그것 갖다가 양 목덜미를 걸쳐다가 탁 건져내면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막대기. 지팡이랍니다. 긴것. 막대기는 조금 짧은 것인데. 순경들. 요즘에 순경들이 있나요 순경들 옆에 차고 있는 것.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말 안들을때 패는게 막대기예요. 그러니까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한다. 나를 인도해 주신다. 무슨 얘기입니까 어떤 때는 구원의 지팡이. 어떤 때는 징계의 막대기로. 진짜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께 맞을 때도 있잖아요. 이유가 뭡니까 사라으이 매지요. 사랑의 매. 그럴때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 참 여러분! 자녀를 키울때도 그렇고 리더십을 키울때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저는 요즘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잘 화가 안나요. 화가 안나는데. 제가 요즘 위기를 느끼는데 제가 너무 화를 안내니까 사람들이 긴장이 다 사라져 버리고 문제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결심을 합니다. 화를 내야지.
왜냐하면 제가 요즘 리더십 책들을 쭉 읽어보니까 지도자가 분노하는것도 지도력이래요. 분노할 때 분노할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 때도 화를 낼줄 모르는 것은 지도력이 아닙니다. 분노할 때는 분노할줄 알아야 해요.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요.
그런데 그런것들을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안된다는 거예요. 분노할 때 분노할줄 안다는 것. 저는 우리나라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대해서 햇볕 정책이라고 하는데. 다 좋아요. 우리가 평화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 지도력에 문제가 있습니다 햇볕 정책을 할려고 하면 속으로 해야 합니다. 햇볕정책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라고 다 말하는 것은 지도력이 아닙니다. 잊지 말라고요. 끝까지 그렇게 가더라도. 속에는 야! 우리 몽둥이도 있어 하면서 몽둥이를 안쓰는게 햇볕 정책이지. 자기 카드 다 보여주면서 우리는 다 퍼주기만 할 거야 이것은 지도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리더십 공부좀 다시해야 할 것 같애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냐. 오냐 라고 다 받아줘서 될일이 아니예요. 저요 사실 저희 애 태어난 다음에 애들을 때린적이 한번 있을 거예요. 한번. 한번. 몽둥이로 팬적이 있고. 우리 큰 애가 한 두 번 정도 맞았고. 작은 애가 한번 정도 맞았을까요 저는 때리는 아빠가 아닙니다. 폭력 아버지가 아니예요. 패는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왜냐 언제나 팰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놓고든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에 언제든지 맞을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놔요. 그러고난 다음에 몽둥이를 아낍니다. 그 몽둥이를 함부러 쓰지 않아요. 진짜예요. 한번쯤 맞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게 그들을 흔들리지 않게 만듭니다. 자녀들의 문제가 뭐예요. 우리 아버지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 아버지야. 그리고서 혼자 결정하지요. 성도들 앞에서. 저는 때리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애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죽어도 때리지 않아. 그러면 망나니 됩니다. 망나니. 잊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잊지 마십시요. 우리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디가서 리더십 발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 두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정치학에서 나오는 얘기 아니예요 사탕과 채찍. 몽둥이. 이것 두개는 항상 같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쓰느냐 안쓰느냐는 두 번째 문제예요. 우리는 인도함을 받는 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께서도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체질을. 그래서 주로 주의 지팡이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요. 주의 막대기가 있다라는 것을. 그지요 막대기가 있다라는 것. 지도력은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화낼줄 알아야 합니다. 제재를 가 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모습이 있을때 멋지게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라는 겁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나 봅니다. 그죠. 1년 내내 부자 되세요. 하여튼 부자라고 쓰인 책들도 많이 팔렸고. 부자 되고 싶어 합니다. 물질의 축복.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같습니다. 명예에 대한 축복. 건강에 대한 축복. 이런 것들을 참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도 많은 것들이 좋은 거지만 최고의 축복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것. 그거 보다 더 큰 축복이 있을까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도들은 우리 안에 성령이 내조하고 계신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만 진정한 평안과 축복이 있습니다. 그게 뭔지를 잘 몰라요. 어 제가 오늘 차를 타고 다니면서 이렇게 사람들 만나지 않습니까 사람을 만나고 예배시간 10분전에 교회를 오는데 제 차가 분명히 그런 얘기를 합니다. 지금 가면 주차할 때가 없을 거라고. 사람들 구제사역갔다가 갈 때 없으니까 다 올꺼고. 갈 때가 있어도 교회가 좋아서 다 올 거라고. 아니나 다를까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열댓 명의 청년들이 모여 있는가 다 우리 삼일교회 청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얼굴을 보니까요. 좀 지쳐있고 깨재재 한 것은 있는데 머리 안감아가지고 조금 얼룩덜룩 한 것은 있는데. 뭐. 얼굴이 천사의 얼굴입니다. 그렇게 만족해 하는 얼굴. 그렇게 충만한 얼굴. 기쁨에 겨운 얼굴. 저는 월드컵 4강에 들어간 다음에 그런 얼굴 처음 봤습니다. 정말 기뻐하던 얼굴이더라고요. 이유가 뭡니까 새벽부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오전에 많은 사람들로 인해서 많은 위로 받고 오전에는 설교에는 은혜 못 받고 뒤통수 보고 은혜 받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봤습니다. 야! 사람이다. 사람이다. 하면서. 아마 우리 숙대 역사상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간 것은 처음이었을 겁니다. 조금만 움직이면 사고날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들었는데 그런것들에 대한 은혜. 그리고 구제사역에 대한 은혜. 성탄 오후에 우리만큼 기쁨에 뿌듯한 사람 참 드물거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쾌락과 즐거움에서 잠시잠간 즐거울 것 같지만 저녁쯤 되면 공허해지지 않습니까 공허함이 없는. 허전함이 없는 기쁨. 오직 성령만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여러분들 하나님의 일들 하고 허전함이 있던가요 공허함이 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상해요.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터져 나오는 기쁨이 있습니다. 기뻐할 이유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뻐해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없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뭐 잘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참 평안이 없습니다. 저는 어떤 부잣집 아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불면증에 걸려가지고. 몸은 편한데 잠은 잘수가 없다고. 밤낮 하드락이라는 것에 빠져가지고 그런 것 안들으면 잠도 안오고. 그리고 탐닉해가지고 눈이 충혈되어가지고 도와 달라고 하는 사람을 봤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자신의 분노를 이기지 못해가지고 눈이 쑥 들어간 사람도 있고요. 실패, 아픔 때문에 어떤 사람은 우울질에 걸려가지고. 벌써 감각에 걸려 있어요. 사람들에게 폭언을 가합니다. 그래서 주변에 있는 관계가 하나씩 하나씩 깨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참 무서운게 뭐냐면 마귀는요 마귀는 관계를 깹니다. 참 어떨때에는 우울질이라는 것으로 관계를 깨고요. 어떤 사람은 정의를 부르짖으면서 나는 정의의 사도다. 그래서 관계를 다 깨요. 자기 혼자 청청하리라 하면서. 관계를 깨는 일들. 그것은 물론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관계를 다 유지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정상적인 관계를 다 깨버리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지요 어떤 때는 온순하게. 원수로부터 존경받아 가면서. 그저 인정받아가면서. 그러면서 일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안에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안을 유지하면서 그런것들을 누리는게 가장 큰 축복이라는것. 그걸 누려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두려움이 사라지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 때문에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있게 서있을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이 없으면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항상 불안합니다 불안하고 항상 피곤한게 특징입니다. 그래서 피곤해요. 여러분이 새벽기도 나왔습니다 아침에 예배 나왔습니다. 오후에 구제사역갔습니다. 저녁때쯤 되면 제일 피곤할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여러분 주변에 믿지 않는 사람들 있으면 만나 보십시요. 그럼 오늘 저녁에 가보십시요. 누가 더 피곤한가. 하루종일 아무것도 안하고 tv본사람. 하루종일 누워 있던 사람. 그 사람이 훨씬 더 피곤합니다. 참 이상하지요 우리 늦게까지 주일 저녁에 예배 드렸는데 우리가 월요일에 더 피곤해 보입니까 아니면 두시쯤에 돌아가서 잠자는 사람이 더 피곤해 보입니까 한번 비교를 해보라고요. 저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4시쯤에 예배를 드렸던 것 같애요. 4시 반이나 5시쯤 되면 모든게 다 끝나버립니다. 그러면 집에 돌아오면 뭐 합니까 그때는 일요일밤에 대행진 이런 것 했었어요. 주일저녁에 뭐 하는줄도 모릅니다. 그게 마지막으로 봤던건데. 열심히 봤습니다. 난 텔레비전 좋아하니까. 뭐 영화 한편 보고. 히닥 거리는 거 보고. 그러고 월요일이 되면 일어날수가 없어요. 쇳덩어리예요. 쇳덩어리. 월요일날 뭐 한다고 하면 잠만 잤습니다. 잠만 자고 아무일도 못하고.
그런데 묘한게 뭐냐면 하나님께 찬미하고 새벽부터 기도하고 할때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큰 능력을 주시더라고요.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능력입니다. 여러분! 그런 영적인 능력을 추구하면서 나아가는것. 그맛을 세상에 알려주는것. 성도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능력있는 삶이 될 수 있다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에 대한 우리 특징들을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조해 계시면 우리안에 무슨 일을 하십니까 내안에 계신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 있다라는 거예요. 이런일도 하지만 제일 큰 일들. 죄악을 무너뜨리는 삶을 살게 합니다. 12절과 13절을 보십시요.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성령이 하시는 일이 뭡니까 영으로서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우리 몸의 행실의 죽이는 사역을 합니다. 한마디로 해서 죄악을 무너뜨리는 사역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라고 했죠.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인 성령을 보내주시면 우리안에 죽음의 세력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입니다. 전쟁을. 그래서 성령충만한 삶의 특징이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아파하고. 죄에 대해서 깨닫게 되고. 죄에 대한 고발이 있습니다. 죄에 대한 고백이 많이 나와 있는 것이 요한복음 14장과 16장에 많이 나와 있는데 16장 8절을 보면은 성령이 와서 하시는 일이 뭐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며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첫 번째 일이 뭡니까 죄에 대해서 책망하는것. 오순절날 성령충만함을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을 증거했습니다. 증거할 때 성령께서 그 자리에 임재하셨습니다. 성령의 임재가 있으니까 백성들의 첫 번째 반응이 뭐였습니까 사도행전 2장 37절을 보니까 저희가 이말을 듣고 하나님 말씀을 듣고 저희가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헝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면서 자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깨달으니까 제일 먼저 깨닫는게 뭐였습니까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었다라는 거예요. 깨달음. 회개하면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고.
그런데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직신학에서 보면은 조직신학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바라보는 어떤 연역적인 접근을 조직신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빠른 시간에 틀을 잡을려고 뼈를 잡을려고 조직신학을 읽을필요가 있습니다. 조직신학에서 구원에 서정이라고 할까. 조금 어려운데 구원의 단계가 있거든요. 우리 교회에서는 그렇게 배웠습니다. 성령에 그렇게 배웠었는데. 9가지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소중회. 소명 중생. 회개. 그다음에 신앙. 칭의. 수양. 그러니까 아들이 됨. 그다음에 성화. 그 다음에 견인. 그 다음에 영화.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가는 단계. 이렇게 9가지 단계가 있다고 하는데. 이 단계가 저는 상당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 처음에 보십시요. 처음에 소명. 하나님의 CALL
ING. 하나님이 부르셨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간거죠. 소명. 소명 다음에 뭐라고 합니까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에 들어갔습니다. 순서가 중생다음에 뭐가 와요. 회개가 온다니까요. 회개가. 내가 회개 할수 있다라는 것은 뭡니까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안에 들어가셔서 죄를 보여 주니까 회개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회개한다는 것 자체가 뭐에요. 내가 구원받았다라는 표징입니다. 표징. 구원 받은 백성만 회개합니다. 잊지 마십시요. 중생한 사람이 회개하는 거지. 회개해서 중생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육신의 육체를 따라가는 사람이 자기가 혼자 깨닫고 이게 죄구나 해서 회개해서 중생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중생. 본 어겐을 주시니까 죄가 보이고, 죄가 보이니까 울부짖으면서 하나님 나를 용서해 달라고 부르짖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회개할 맘을 가졌습니까 회개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졌습니까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이미 구원 받은 백성이니까 회개하는거지 바로왕처럼 버림받은 왕들 보십시요. 회개가 없습니다. 후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가룟유다를 보십시요. 후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성령의 역사라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우리안에 역사하면은 회개하게 하는 능력을 주신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6장을 보면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라고 나오는데 전신갑주를 입으라! 중에 하나가 뭡니까 성령의 검입니다. 성령의 검. 성령의 검은 보통 마귀와 싸우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암덩어리 같은 죄악들을 향한 말씀의 매스가 될 수 있다라는 겁니다. 수술해 버립니다. 우리의 죄악거리들을 끊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의지해서 우리가 매순간마다, 매 순간 마다 죄악을 무너뜨리는 그런 거룩한 사역들을 하는 믿음의 종들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죄악들을 끊어버리게 하기 위해서 어떤 때는 고난가운데 이끄실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의 어려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큰 것을 주시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일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에 우리의 인생들을 다시한번 회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넘어진 사람있지요 어려운 사람 있지요
그런데 목사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몇 번 사는 것 같습니다. 성도들의 일대기를 죽 들어보면은 하루아침에 능력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사람 별로없습니다. 처음에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수술하고 있는 건데. 수술하고 있는 건데 본인이 느끼기로는 수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패라고 느껴집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요. 어떤 사람이 암덩어리가 있습니다. 특출난 선생님 만나가지고 완전히 치유할수 있는 선생님을 만났다고 합시다. 뭐 내용은 잘 모르지만 어떻든간에 수술받게 되었다고 합시다. 그럴때 병상에 누워 있으면 더 아파지는 것 같지요 더 악화 되는 것 같지요 보통 멀쩡한 것 같은데 배를 짜르고 뭐 잘라내는 것 같지요 몸무게 도 몇그램 줄어들 것 아니예요 뭐 떨어져 나가니까. 손해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가 뭡니까 건강해 지는 겁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거예요. 저는 이런 영적인 역전에 대한 것에 제일 안타까운게 어거스틴이 썼던 신의 도성이라는게 있지요 The city fo GOD!-저는 신학대학원때 이책을 읽었는데 참 감명 있게 읽었습니다. 신의 도성에서 어거스틴이 딜레마가 이거였다는거예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지하고 순종했던 로마. A.D 333년에 대제에 의해 기독교 국가가 되었던 로마. 이 로마가 하나님을 전혀 하나도 알지 못하는 야만족 게르만 족에게 점령당할수 있냐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이땅에 살다보면은 이런일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지요 하나님의 능력있는 종들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완전히 대적해 보이는. 게다가 문화도 없어 보이는 야만족. 말도 안되는 일들이 일어나 보입니다. 게르만이 이겼어요. 로마를! 그 로마가 어떤 로마인데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 로마가. 기독교 로마가 그 야만족 게르만에게 잡아 먹혔습니다. 이게 딜레마 아니예요 이럴 수가 있습니까 이럴 수가. 저는 이런 사건들이 우리들 인생가운데 여러번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논리적으로 말이 되지를 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탄합니다. 그리고 밤낮 얘기하는게 어찌하여, 어찌하여 이런일이 벌어집니까 어거스틴만 그런게 아닙니다. 구약에 있는 선지자들도 똑같은 탄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우두커니 쳐다 보니 어떤일이 벌어져요. 믿지 않는 야만인들이 로마를 점령한 다음에 얼마지난다음에 그들이 회심하기 시작하더라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오더라는거예요. 조금 지나고난 다음에 신성로마 제국이라고 나오지요 새로운 로마를 만들자. 하나님을 섬기는 로마를 만들자. 그래서 이전에 타락한 로마의 모습보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는 모습으로 되더라는 겁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무릎을 친거예요. 아!-이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이구나!-그지요 우리 인간이 생각할때에 이것은 망한거라고 생각하고 무너진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거와 전혀 다른 방법으로 일하기 시작하는구나! 그걸 깨닫게 되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큰 빌딩을 짓는 계획이 있다라고 합시다. 그지요 5층이나 6층 건물. 비교적 깨끗하다는 건물. 주변보다 훨씬 나은 건물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설계자의 마음 가운데는 이것을 무너뜨리고 엄청난 고층 빌딩을 올려야 겠다라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림이 있습니다. 주변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볼때에는 멀쩡한 건물을 다 때려 부시는 것 같습니다. 다 부셔버립니다. 가슴 아파하지요 세상이 이럴수 있는냐 논리적으로 이해할수 없습니다. 주변에 있는 건물보다 아름다운 건물이요 멋있는 건물입니다. 주변에 허름한 건물들이 있는데 그것은 새 건물입니다. 그걸 왜 부십니까 그 좋은 것을 왜 부숩니까 이해를 못하지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난 다음에 어떤일이 벌어집니까 그걸 부수니까 높은 고층 빌딩이 나오는거 아니예요 하나님께서도 우리 인생을 그렇게 만드십니다. 우리는 이해를 못합니다. 하나님! 이 멀쩡한 것을 왜 깨부숩니까 깨는게 아닙니다. 그것을 통해서 더 큰 것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죄악적인 부분들을 잘 보면은 죄라고 하지만 우리 말로 관념적으로 죄라고 그러지만 죄라고 말하는 많은 부분이 우리의 기득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라는 이름으로 많은 부분들이 세워진 것이 많이 있습니다 죄의 기반에 세워진 것들. 주님께서 그것을 말씀의 기반에 세우기 위해서 무너뜨릴때가 있습니다. 참 묘해요. 우리는 죄는 싫어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기득권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사실 똑같은 건데. 그게 무너져야 합니다. 철저하게 무너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기반을 둔 새로운 건물들이 올라갈 때 승리할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할때 처음에 축복처럼 느껴지지 않습니다. 죄에 대한 새로운 은혜와 다시 세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꼭 붙드시고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다루실 때 감사함으로 어떤 때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힘있게 서 있는 우리 은헤의 종들 되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성령께서 하시는 방법. 나를 위해 행동하신다는 겁니다. 죄를 지적하시고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14절을 보십시요.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성령이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여러분! 21세기에 다른데서는 모르지만 우리 기독교에서의 최고의 화두가 뭔지 아십니까 리더의 대한 갈망이예요. 요즘에 제일 많이 나오는 책돌. 여러분! 미국에 대한 책방들 가보십시요. 그 중에 상당수의 주제가 리더십입니다. 리더십. 리더십이라는 얘기는 뭡니까 리더십에 대한 갈망이예요. 많은 교회에 대한 문제가 뭐냐하면 리더에 대한 갈망. 리더에 대한 갈망이예요. 리더가 없다라는 거예요. 리더가. 누가 우리를 이끌어 주실것인가!-라는 거예요. 서로 사람은 열심이 없다고들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들 열심이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이 있는줄 아십니까 주를 위해서 충성할 마음들이 다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 많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성도들 많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뭔줄 아세요 그런 사람들을 이끌수 있는 리더가 없습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줄 리더가 없다라는 거예요. 리더십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우리의 친히 리더가 되어 주신다는 거에요. 리더십이 뭡니까 요약하면 이겁니다. 성령따라 가는 겁니다. 성령. 우리의 리더되시는 성령. 인도하심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것. 우리 삼일교회의 리더가 누가 되시겠습니까 성령께 있지 않습니가 하나님께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무슨 장기 계획이 있습니까 성령이 인도하시는 대로. 또 다른 표현을 하면 파도를 타는것. 기도의 파도를 보내주시면 기도의 파도를 타고요. 구제의 파도를 보내주시면 구제의 파도를 타면 되는거고요. 선교의 파도를 보내주시면 선교하면 됩니다. 매 순간마다 주님께서 보내 주신것에 순종하는것. 잃어버린자들을 위해서 순종하는것. 그게 성령의 리더십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겁니다. 저도 가끔 외국이나 이런데 가면은요. 뭐 잘 모르는데 혼자 찾아가라고 하는 때가 있습니다. 참 매정합니다. 정말 그래요. 그리고 전 항상 다닐대 스탭들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가라고 하면은 잘 못해요. 물건도 잘 못사고. 돈을 주고도 받는건지. 안받는것인지. 하여튼 사회에서 전적 무능자가 되어 가고 있는데. 대개 불안합니다.
그런데 그럴때 대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목사님! 내가 모셔다 드릴께요. 그러면서 라이드 해서 데려다 줄때. 제일 안심이 됩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적당히 길만 알려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리이리 가면 돼. 하면서 약도 한 장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거예요. 친히 우리의 손 붙잡고 우리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참! 이런 리더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령 의지하면요 불안할 것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기때문에. 목자와 양 똑같아요. 목자와 양이 동행하잖아요. 목자가 아침에 다 집합. 차렷, 열중 쉬엇. 하면서 오늘 해야 할일. 거기 대장 하나 나와. 하면서 오른쪽 어디 가면은 푸른 초장이 있어. 먹고 안전하게 돌아올 것. 난 잠자고 있을테니까. 이런 목자 있습니까 목자는 그런게 아닙니다. 맨앞에 서가지고 이끌고 가는거지요. 같이 푸른 초장에 가서 뜯어 먹고. 그 다음에 맑은 시냇가에 물 퍼 먹고. 그 다음에 집에 돌아와서. 집이 있는지 모르지만 하여간에 자는것. 계속 같이 다니는게 목자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나를 이끄시니 목자같이 이끄신다는거예요.
그러므로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복잡한게 아닙니다. 우리 주님이 이끄시는 것에 대해서 매일 매일. 순간 순간마다 순종하면 된다는 겁니다. 순종.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방법. 우리 시편 23편을 보니까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우리를 안위하시나이다. 지팡이는 뭡니까 구덩이에 빠졌을때 긴 막대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긴것. 이렇게 기억자로 된것. 그것 갖다가 양 목덜미를 걸쳐다가 탁 건져내면 구원함을 받을 수 있는 막대기. 지팡이랍니다. 긴것. 막대기는 조금 짧은 것인데. 순경들. 요즘에 순경들이 있나요 순경들 옆에 차고 있는 것. 그런 것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말 안들을때 패는게 막대기예요. 그러니까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안위한다. 나를 인도해 주신다. 무슨 얘기입니까 어떤 때는 구원의 지팡이. 어떤 때는 징계의 막대기로. 진짜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때는 하나님께 맞을 때도 있잖아요. 이유가 뭡니까 사라으이 매지요. 사랑의 매. 그럴때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것. 참 여러분! 자녀를 키울때도 그렇고 리더십을 키울때도 그렇고. 다 그렇습니다. 저는 요즘에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잘 화가 안나요. 화가 안나는데. 제가 요즘 위기를 느끼는데 제가 너무 화를 안내니까 사람들이 긴장이 다 사라져 버리고 문제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혼자 결심을 합니다. 화를 내야지.
왜냐하면 제가 요즘 리더십 책들을 쭉 읽어보니까 지도자가 분노하는것도 지도력이래요. 분노할 때 분노할줄 알아야 합니다. 아무 때도 화를 낼줄 모르는 것은 지도력이 아닙니다. 분노할 때는 분노할줄 알아야 해요. 굉장히 중요한 거라고요.
그런데 그런것들을 없애버리면 아무것도 안된다는 거예요. 분노할 때 분노할줄 안다는 것. 저는 우리나라 정치에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대해서 햇볕 정책이라고 하는데. 다 좋아요. 우리가 평화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런데 우리나라에 지도력에 문제가 있습니다 햇볕 정책을 할려고 하면 속으로 해야 합니다. 햇볕정책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라고 다 말하는 것은 지도력이 아닙니다. 잊지 말라고요. 끝까지 그렇게 가더라도. 속에는 야! 우리 몽둥이도 있어 하면서 몽둥이를 안쓰는게 햇볕 정책이지. 자기 카드 다 보여주면서 우리는 다 퍼주기만 할 거야 이것은 지도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리더십 공부좀 다시해야 할 것 같애요.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냐. 오냐 라고 다 받아줘서 될일이 아니예요. 저요 사실 저희 애 태어난 다음에 애들을 때린적이 한번 있을 거예요. 한번. 한번. 몽둥이로 팬적이 있고. 우리 큰 애가 한 두 번 정도 맞았고. 작은 애가 한번 정도 맞았을까요 저는 때리는 아빠가 아닙니다. 폭력 아버지가 아니예요. 패는 사람을 무서워 합니다. 왜냐 언제나 팰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놓고든요. 정말 그렇습니다. 그런 다음에 언제든지 맞을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열어놔요. 그러고난 다음에 몽둥이를 아낍니다. 그 몽둥이를 함부러 쓰지 않아요. 진짜예요. 한번쯤 맞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에 그게 그들을 흔들리지 않게 만듭니다. 자녀들의 문제가 뭐예요. 우리 아버지는 절대로 때리지 않는 아버지야. 그리고서 혼자 결정하지요. 성도들 앞에서. 저는 때리는 아버지가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 애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죽어도 때리지 않아. 그러면 망나니 됩니다. 망나니. 잊지 말라는 겁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잊지 마십시요. 우리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이끌어 가신다는 겁니다. 여러분! 어디가서 리더십 발휘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팡이와 막대기 두가지가 다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상식입니다. 정치학에서 나오는 얘기 아니예요 사탕과 채찍. 몽둥이. 이것 두개는 항상 같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쓰느냐 안쓰느냐는 두 번째 문제예요. 우리는 인도함을 받는 다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성령께서도 우리의 체질을 아십니다. 체질을. 그래서 주로 주의 지팡이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나 잊지 마십시요. 주의 막대기가 있다라는 것을. 그지요 막대기가 있다라는 것. 지도력은 분노할 줄 알아야 합니다. 화낼줄 알아야 합니다. 제재를 가 할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모습이 있을때 멋지게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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