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자에게 임하신 예수님 (눅2:8-14)
본문
이 세상에서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보면, ‘가난’은 또다른 의미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5:3절에 보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까 역설적으로 보면, 가난은 하늘의 축복으로 부요하게 채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부자라고 한다면 그는 부족함을 모를 것이고 결국 하늘의 복을 사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이 가난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까지 왔다가 거처할 자리를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어떤 집의 마굿간에 들어가서 거기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통 안에다 뉘웠던 것입니다. 구유통 속에 뉘인 아기 예수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결코 처음부터 그처럼 비천하게 태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태어날 때부터 이 땅의 모든 불행을 한 몸에 짊어 지셨습니까.
고후8:9절에 보면, 그분은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요,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가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가난한 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했던 사람들인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요셉과 마리아가 부자였다면 아기 예수가 그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해산을 금방 앞두고 남의 마구간에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당시 목수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남편으로 정했던 마리아 역시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로 부터 수태고지를 받고 나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눅1:48절에 보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비천한 일개 시골의 아낙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녀로 하여금 ‘여자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로(눅1:42) 존경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의 모든 존귀와 파멸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실로, 가난하여 내세울 것이 없는 자, 그리고 가난하되 겸손하며 경건한 자,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셋째로, 성탄을 축하한 목자들도 가난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그날 밤. 베들레헴 가까운 들판에서 밤새도록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몇사람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밤 사이에 가끔 사나운 짐승들이 양떼를 습격하거나, 더러는 부근을 지나는 사람들이 약탈해 가는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으례이 밤을 세우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는 고생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들은 뜻밖에 찾아 온 천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동리, 곧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태어난 아기 예수를 보면서 첫번 성탄을 감격스럽게 찬양한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토록 영광스러운 자리에 어찌하여 저 가난한 목자들이 맨 먼저 초대되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세상에는 권세 많고, 재물이 많은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셨습니까
그것은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부자들에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러한 가난한 자들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신 주님!. 이 사실은 영적으로 귀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가난’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연약성과 죄성을 통감하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간구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5:3절 말씀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고 하는 자아, 허울, 교만을 다 벗어버리고., 진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나의 죄성을 통감하며, 겸허하게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므로. 우리의 심령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놀라운 하늘의 은혜와 축복을 맛보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므온과 안나!
눅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2: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이 땅에는 50억이 넘는 무수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이들은 10억 정도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거의 예수님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저버리고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들은 그분을 만나게 되지만, 예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그분을 만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 이 두 사람이 메시야를 만났던 일들이 그점을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시므온은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므온은 무척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성전에 도착한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를 보고서 그 자리에서 즉시 이 아기가 메시야인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하여 아직 갓난 아기를 보고서 곧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 차렸습니까
본문 25절 말씀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때까지 줄곧 이스라엘의 위로, 즉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이 그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함께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살아 오는 날 동안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모두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에 바쳤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26절에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것도 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소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비장하게 살아 왔던 그의 앞에 드디어 메시야가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그를 알아 차리지 못하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더 중요한 사실, 곧 성령이 그에게서 항상 떠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쉽게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시므온은 아기를 받아 안고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평안히 놓아 주시는구나. 내 눈이 기어코 주의 구원을 보았구나.” 하고 고백하여 좋아했습니다.
2. 안나는 주야로 금식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그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점에서는 시므온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나의 경우에는 또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나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것은 고작 7년 동안 밖에 안 되었고 그후로 84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과부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종종 고아와 과부가 함께 불쌍한 사람들로 꼽히고 있는데, 과부 역시 고아의 불행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안나가 짧은 기간이나마 남편을 섬기던 동안은 메시야보다 남편을 더 의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을 잃고난 이후에 그는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후부터 한 세기가 가까운 긴긴 세월 동안. 줄곧 메시야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잠시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간절히 사모하는 심정은 달리 찾아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안나 역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안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메시야 탄생의 복음을 들은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널리 알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성령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이 아기 예수를 보고서 당장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 차렸던 사실이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아기 예수를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는 저 두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렘29:13절 말씀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찾는 심정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거룩하게 살고, 성령과 동행하며, 성결된 생활로서 마침내 구원의 주를 바라보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5:3절에 보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왜 가난한 자가 복이 있습니까 역설적으로 보면, 가난은 하늘의 축복으로 부요하게 채워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만약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부자라고 한다면 그는 부족함을 모를 것이고 결국 하늘의 복을 사모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실 당시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모두 다 가난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이 가난한 자로 태어났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호적을 하러 베들레헴까지 왔다가 거처할 자리를 찾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어떤 집의 마굿간에 들어가서 거기서 아기 예수를 낳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어난 아기를 강보에 싸서 구유통 안에다 뉘웠던 것입니다. 구유통 속에 뉘인 아기 예수의 모습을 마음 속으로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아무리 불행한 사람도 결코 처음부터 그처럼 비천하게 태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태어날 때부터 이 땅의 모든 불행을 한 몸에 짊어 지셨습니까.
고후8:9절에 보면, 그분은 이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요,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가난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하시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가 가난한 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부모였던 요셉과 마리아가 가난했던 사람들인 것을 입증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요셉과 마리아가 부자였다면 아기 예수가 그토록 초라한 모습으로 태어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두 사람이 해산을 금방 앞두고 남의 마구간에 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만큼 가난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당시 목수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이런 사람을 남편으로 정했던 마리아 역시 몹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마리아에게 아기 예수가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천사로 부터 수태고지를 받고 나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눅1:48절에 보니까, “이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비천한 일개 시골의 아낙네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그녀로 하여금 ‘여자 중에 가장 복이 있는 자’로(눅1:42) 존경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인생의 모든 존귀와 파멸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깨닫게 해 줍니다.
실로, 가난하여 내세울 것이 없는 자, 그리고 가난하되 겸손하며 경건한 자, 이런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 하겠습니다.
셋째로, 성탄을 축하한 목자들도 가난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셨던 그날 밤. 베들레헴 가까운 들판에서 밤새도록 양떼를 지키고 있던 몇사람의 목자들이 있었습니다.
밤 사이에 가끔 사나운 짐승들이 양떼를 습격하거나, 더러는 부근을 지나는 사람들이 약탈해 가는 수가 있었기 때문에 저들은 으례이 밤을 세우면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정작 들판에서 밤을 지새우는 고생을 무릅쓰지 않으면 안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 그들은 뜻밖에 찾아 온 천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동리, 곧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장 베들레헴으로 달려가 태어난 아기 예수를 보면서 첫번 성탄을 감격스럽게 찬양한 자들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토록 영광스러운 자리에 어찌하여 저 가난한 목자들이 맨 먼저 초대되는 선택받은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세상에는 권세 많고, 재물이 많은 사람들도 많은데. 왜 하나님은 가장 먼저 가난한 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셨습니까
그것은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비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상의 권세자들이나 부자들에게 소외를 당했습니다.
바로 주님은 이러한 가난한 자들을 찾아 오신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임하신 주님!. 이 사실은 영적으로 귀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가난’을 물질적인 차원에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연약성과 죄성을 통감하고 겸허하게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만을 간구하는 사람이 바로 '심령이 가난한 자'이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5:3절 말씀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라고 말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나’라고 하는 자아, 허울, 교만을 다 벗어버리고., 진실로 우리의 연약함을 시인하고, 나의 죄성을 통감하며, 겸허하게 주의 은혜를 사모하는 자가 되므로. 우리의 심령에 주님이 찾아오시고. 놀라운 하늘의 은혜와 축복을 맛보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므온과 안나!
눅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눅2: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눅2: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눅2: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눅2: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눅2: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눅2: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눅2: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눅2: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눅2: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눅2: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2: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눅2: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눅2: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2: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이 땅에는 50억이 넘는 무수한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예수님을
믿고 사는 이들은 10억 정도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거의 예수님을 섬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섬기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와는 반대로 예수님을 저버리고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을 전심으로 찾는 자들은 그분을 만나게 되지만, 예수님을 찾지 않는 자들은 그분을 만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 나오는 시므온과 안나, 이 두 사람이 메시야를 만났던 일들이 그점을 잘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1, 시므온은 죽기를 결의하고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살고 있던 시므온은 무척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어느 날 성전에 도착한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를 보고서 그 자리에서 즉시 이 아기가 메시야인 것을 알아 차리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하여 아직 갓난 아기를 보고서 곧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 차렸습니까
본문 25절 말씀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그때까지 줄곧 이스라엘의 위로, 즉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성령이 그 위에 있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사모하고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성령이 함께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자기가 살아 오는 날 동안 대부분의 시간과 열정을 모두 메시야를 기다리는 일에 바쳤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26절에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그가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것도 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굳건한 믿음과 소망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비장하게 살아 왔던 그의 앞에 드디어 메시야가 이르게 되었으니, 어찌 그를 알아 차리지 못하겠습니까
게다가 더욱 더 중요한 사실, 곧 성령이 그에게서 항상 떠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해 볼 때 그는 쉽게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이윽고 시므온은 아기를 받아 안고서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평안히 놓아 주시는구나. 내 눈이 기어코 주의 구원을 보았구나.” 하고 고백하여 좋아했습니다.
2. 안나는 주야로 금식하면서 메시야를 기다렸던 사람이었습니다.
안나 역시 그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던 점에서는 시므온과 다를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안나의 경우에는 또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나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 것은 고작 7년 동안 밖에 안 되었고 그후로 84년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과부로서 살게 되었습니다.
구약에 보면 종종 고아와 과부가 함께 불쌍한 사람들로 꼽히고 있는데, 과부 역시 고아의 불행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안나가 짧은 기간이나마 남편을 섬기던 동안은 메시야보다 남편을 더 의지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을 잃고난 이후에 그는 의지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 후부터 한 세기가 가까운 긴긴 세월 동안. 줄곧 메시야만 기다렸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가만히 앉아서 메시야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잠시도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렸다고 했습니다.
이보다 더 간절히 사모하는 심정은 달리 찾아 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야말로 이 안나 역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는 절대로 죽을 수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안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메시야 탄생의 복음을 들은 즉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모든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널리 알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귀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가 하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발견하며, 성령을 애타게 기다리는 자가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시므온과 안나 두 사람이 아기 예수를 보고서 당장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 차렸던 사실이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 자리에는 다른 사람도 많이 있었지만, 아기 예수를 보고서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는 저 두 사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렘29:13절 말씀에 너희가 전심으로 나를 찾고 찾으면 나를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도 시므온과 안나처럼 다시 오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사모하고 간절히 찾는 심정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삶을 거룩하게 살고, 성령과 동행하며, 성결된 생활로서 마침내 구원의 주를 바라보는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댓글목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