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는 (마5:5)
본문
많은 불신자 중에 온순하고 온유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성적으로 온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온유한 자란 천성이 온순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온유한 자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의 하나입니다.
오늘의 이 온유한 사람은 이미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의 가난과 애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가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팔복의 말씀 중 “온유한 자”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럼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온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 온순하여 순복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온유하다고 하면 흔히 순한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 사람 참 착해 성품도 온순하고.” 이렇게들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의 온유는 그런 류의 온유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람들에게 온순하고 순하게 대하는 것을 뜻하지 않싑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온순하고 순해도 하나님을 불순종하며 하나님께 대해 온유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란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그 분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 온유한 사람이 되고 강퍅하고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는 하나님과 관계된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사람들의 천성이 아닙니다.
온유는 성령께서 주시는 품성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천성과는 다른 새로운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갈5:23)“오직 성령이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온유와 절제니.”
이런 온유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애쓰고 힘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속세를 떠나 중이된 가련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온유해 보려고 애를 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우리를 겸손하게 할 수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며, 우리의 죄성 때문에 우리를 애통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온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온유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온유는 성령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애통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심령의 가난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애통하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애통합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의 죄를 보고 세상의 죄를 보며 애통합니다.
자기를 살피고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고 애통합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 애통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죄를 아는 사람의 자기 발견의 결과입니다.
자기에게 의가 없고 자기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온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온유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이렇게 온유는 심령의 가난과 애통을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품성입니다.
이 새로운 품성인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품성입니다.
우리는 회심하기 전의 바울을 압니다.
그는 매우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에 속한 학자였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는 사깃꾼이며 신성모독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추종하는 기독교인을 박해했습니다.
그는 살기 등등하여 기독교인을 잡았습니다.
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사울은 기독교인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일 후 사울은 전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 대해 말씀합니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그는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괴로워 합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래서 그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가 없음을 애통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순종합니다.
여러분은 온유한 사람입니까
둘째로 온유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인내하며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저 온순하기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강한 인내와 충성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성령 안에서 외유내강(外柔內强)한 사람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은 그저 쉽게 타협하는 타협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란 쉽게 타협하고 심지가 흐린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 죽기까지 하는 강한 사람입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심지가 견고하여 주님을 향한 충성에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으로까지 충성스럽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온유의 충성스러움을 봅니다.
그는 원래 다혈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쉽게 결심하고 쉽게 뜨거워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유하기보다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남다른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쳐도 자기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자기 감정에 치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충성심은 온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혈기의 부산물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그의 칼 솜씨를 나타냈습니다.
그의 혈기에서 나온 충성심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하여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했다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저주까지 해댔습니다.
물론 그의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죽기가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 두려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때 재판받으시는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었습니다.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마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이 떠오르자 베드로는 곧 밖으로 달려나가 울었습니다.
통곡했습니다. 애통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별 수 없는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장담과 주님께 대한 충성심이 다 무너져내린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 자기 약속과 자기 말을 다 무효화시킨 자신의 비굴함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선한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무능력도 보았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 전적으로 비굴해진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울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장담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뜻 안에 자기를 맡깁니다.
주님의 처분에 자신을 넘길 뿐입니다.
모든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믿음을 지키며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성도 여러분!
온유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참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그 분의 공의의 처분을 기다리며 애매한 고난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부당한 처분과 불이익을 인내로 견디는 것입니다.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님을 향한 순전과 충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와 충성은 온유한 사람의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베드로는 진정한 순종과 인내 그리고 충성심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성스런 주님의 제자로 죽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기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거꾸로 매달라”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한 믿음과 충성심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써 주님을 순종하여 자신의 온유함을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란 그저 온순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전 순하고 순진한 것을 뜻하지 않싑니다.
나약하고 힘 없어 보이는 것은 결코 온유의 모습이 아닙니다.
쉽게 타협하고 “좋은게 좋은 거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강합니다.
온유는 성령 안에서 외유내강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위해 죽음으로까지 충성하는 품성이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지켜가는 것이 온유한 사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사람이 아닌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품성입니다.
온유는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 속에서 그 진리의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의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이런 온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 위로 충만케 하시는 역사가, 온유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며 어떤 어려운 처지와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주님을 위한 죽기까지 인내와 충성을 다하기를 다짐하는, 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천성적으로 온순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온유한 자란 천성이 온순한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온유한 자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즉 성령의 열매의 하나입니다.
오늘의 이 온유한 사람은 이미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심령의 가난과 애통을 통해 이루어지는 성령의 열매가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오늘 주님이 말씀하는 온유한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는 계속해서 팔복의 말씀 중 “온유한 자”에 대한 말씀을 듣고자 합니다.
그럼 온유한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첫째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온유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께 대한 사람들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께 온순하여 순복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랑입니다.
우리는 온유하다고 하면 흔히 순한 사람 온순한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그 사람 참 착해 성품도 온순하고.” 이렇게들 말합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의 온유는 그런 류의 온유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람들에게 온순하고 순하게 대하는 것을 뜻하지 않싑니다.
진정한 온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에게 온순하고 순해도 하나님을 불순종하며 하나님께 대해 온유하지 않다면 그 사람은 아직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란 하나님께 대한 성도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고 그 분을 어떻게 모시느냐에 따라 온유한 사람이 되고 강퍅하고 교만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는 하나님과 관계된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사람들의 천성이 아닙니다.
온유는 성령께서 주시는 품성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천성과는 다른 새로운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입니다.
(갈5:23)“오직 성령이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온유와 절제니.”
이런 온유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는 것도 아닙니다.
애쓰고 힘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로이드 존스는 그의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속세를 떠나 중이된 가련한 사람들은 자기 힘으로 온유해 보려고 애를 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 것도 우리를 겸손하게 할 수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며, 우리의 죄성 때문에 우리를 애통하게 하며” 우리 자신을 온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온유는 사람의 노력으로 얻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온유는 성령의 은혜로 가능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을 가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애통하게 하십니다. 그리하여 온유한 사람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심령의 가난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애통하게 됩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알고 애통합니다.
그래서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기의 죄를 보고 세상의 죄를 보며 애통합니다.
자기를 살피고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알고 애통합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로 이 애통하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 됩니다.
온유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무능과 죄를 아는 사람의 자기 발견의 결과입니다.
자기에게 의가 없고 자기는 무능력한 존재임을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온유하게 됩니다.
이렇게 온유하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께 순종합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맡깁니다.
이렇게 온유는 심령의 가난과 애통을 통해 얻게 되는 새로운 품성입니다.
이 새로운 품성인 온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품성입니다.
우리는 회심하기 전의 바울을 압니다.
그는 매우 종교적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리새파에 속한 학자였습니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기독교는 이단이었습니다.
예수는 사깃꾼이며 신성모독자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추종하는 기독교인을 박해했습니다.
그는 살기 등등하여 기독교인을 잡았습니다.
옥에 가두고 죽이는데 동의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반대하고 하나님을 거스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가 전혀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사울은 기독교인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사도행전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행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일 후 사울은 전적인 변화를 겪었습니다.
그는 심령이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애통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을 순종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온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순복하며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자신에 대해 말씀합니다.
“(롬7:1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7:19)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그는 자신에게 의가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기 속에 선한 것이 없음을 괴로워 합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래서 그는 주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롬7: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한 사람은 이런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가 없음을 애통합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 분을 순종합니다.
여러분은 온유한 사람입니까
둘째로 온유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죽기까지 인내하며 충성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그저 온순하기만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강한 인내와 충성심을 가진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성령 안에서 외유내강(外柔內强)한 사람입니다.
또한 온유한 사람은 그저 쉽게 타협하는 타협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란 쉽게 타협하고 심지가 흐린 것을 뜻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위해 죽기까지 하는 강한 사람입니다.
진리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던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심지가 견고하여 주님을 향한 충성에 변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온유한 사람은 주님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죽음으로까지 충성스럽게 주님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에게서 온유의 충성스러움을 봅니다.
그는 원래 다혈질의 사람이었습니다.
온유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쉽게 결심하고 쉽게 뜨거워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유하기보다는 혈기가 왕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겐 남다른 충성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도망쳐도 자기는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님을 위한다고 하였지만 자기 감정에 치우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충성심은 온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혈기의 부산물이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는 그의 칼 솜씨를 나타냈습니다.
그의 혈기에서 나온 충성심은 대제사장의 종 말고라는 사람의 귀를 베었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하여 사람들을 위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보호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예수님을 잡아가려는 자들 앞에서 자신의 충성심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못가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심지어 저주하며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죽을 각오를 했다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저주까지 해댔습니다.
물론 그의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지 죽기가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죽음이 두려워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때 재판받으시는 예수님과 눈길이 마주쳤습니다.
그리고 닭이 울었습니다.
닭이 울자 예수님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마26:34)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 말씀이 떠오르자 베드로는 곧 밖으로 달려나가 울었습니다.
통곡했습니다. 애통했습니다.
그는 자기도 별 수 없는 인간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모든 장담과 주님께 대한 충성심이 다 무너져내린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 자기 약속과 자기 말을 다 무효화시킨 자신의 비굴함을 보았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에게 선한 것이 없음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무능력도 보았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 전적으로 비굴해진 자신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는 자신에 대해 울었습니다.
자기 죄에 대해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온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는 이제 장담하지 않습니다.
그저 주님의 뜻 안에 자기를 맡깁니다.
주님의 처분에 자신을 넘길 뿐입니다.
모든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굳건히 믿음을 지키며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벧전2:19)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벧전2:20)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성도 여러분!
온유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참는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며 인내하는 마음입니다.
그 분의 공의의 처분을 기다리며 애매한 고난까지 인내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주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부당한 처분과 불이익을 인내로 견디는 것입니다.
결코 자신의 유익을 위해 주님을 향한 순전과 충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인내와 충성은 온유한 사람의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베드로는 진정한 순종과 인내 그리고 충성심으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충성스런 주님의 제자로 죽었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자기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죽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거꾸로 매달라” 했습니다.
그는 주님을 향한 믿음과 충성심으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죽었습니다.
그는 죽음으로써 주님을 순종하여 자신의 온유함을 보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란 그저 온순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전 순하고 순진한 것을 뜻하지 않싑니다.
나약하고 힘 없어 보이는 것은 결코 온유의 모습이 아닙니다.
쉽게 타협하고 “좋은게 좋은 거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강합니다.
온유는 성령 안에서 외유내강합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위해 죽음으로까지 충성하는 품성이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진리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며 지켜가는 것이 온유한 사람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온유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입니다.
온유는 사람이 아닌 주님을 위해 충성하는 품성입니다.
온유는 진리에 대한 강한 확신 속에서 그 진리의 주님을 위해 기꺼이 희생하며 죽을 수 있는 사람들의 품성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이런 온유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 위로 충만케 하시는 역사가, 온유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전적으로 맡기며 어떤 어려운 처지와 환경 속에서도 굳건히 주님을 위한 죽기까지 인내와 충성을 다하기를 다짐하는, 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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