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는 (마5:4)
본문
오늘 말씀은 세상의 가치와는 다른 류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유쾌함과 기쁨을 추구합니다. 쾌락과 즐거움이 인생의 본질인양 추구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쾌락과 유쾌함을 위해 온 힘을 쏱습니다.
TV와 영화 그리고 모든 매스 미디어의 광고가 그러합니다.
애통과 슬픔을 쫒아내려고 모두가 일치 단결했습니다.
애통과 슬픔은 그 그림자라도 지우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이들을 정죄합니다.
(눅6: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성경은 세상의 피상적이며 맹목적 쾌락 추구를 경계합니다.
심각함이나 신중함이 없는 삶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값싸게 웃고 즐길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심각한 질병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질병 죽음의 목전에 있는 사람들이 값싼 웃음을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이 값싼 웃음에 자신을 잊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질병의 심각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죄의 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값싼 웃음을 애통으로 바꿔야 합니다.
값비싼 웃음을 얻기 위해 값싼 웃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기쁨 영원한 위로를 얻기 위해 값싸고 찰나적인 위로와 기쁨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사람들은 위로 받기에 앞서 근심해야 합니다.
시름을 잊고 기뻐하기 전에 애통해야 합니다.
이 애통을 지난 후에 위로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통을 아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고 슬픔을 아는 자만이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럼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이 애통은 “영적인 애통”을 말씀합니다.
단지 육신적인 슬픔을 뜻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슬픔, 잃어짐에 대한 슬픔이 아닙니다.
연속극을 보고 눈물짓는 그런 류의 애통이 아닙니다.
이 애통은 영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영적인 애통”이야 말로 진실된 애통입니다.
이 영적 애통은 사람들 누구나 꼭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이 영적 애통을 아는 자가 하늘의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영적 애통을 잘 이해하기 위해 잠시 지난 주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가 “영적 거지”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영적 궁핍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채워주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을 바라본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죄를 봅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나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팔복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곧 애통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사람은 “한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덟명의 사람이 아닙니다. 각각 행복한 여덟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행복한 “한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며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이며 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며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화평의 사람이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복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고 또 애통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한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온유한 사람이며 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며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화평의 사람이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 한 인격자에게 이 8가지의 품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성도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의 품성은 서로 연락합니다.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애통하는 사람은 또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령의 가난을 통해 애통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속에 의가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영적 거지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께 모든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청구권이 없음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께 도움은 커녕 진노를 받을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와 악함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슬퍼하며 자기 가슴을 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큰 죄인임을 자각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의 지극히 큼과 자신의 악함을 알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서울의 어느 교회에 있을 때 구역예배를 갔습니다.
그때 십계명을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말씀을 들은 한 자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그러니까 십계명에 의하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겠군요”
그 자매는 십계명을 잘 이해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죄입니다.
인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명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죄인이며 여러분 그리고 인류 모두가 죄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애통입니다.
성도 여러분!
애통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통한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을 보는 것입니다.
이 죄의 세력이 자신을 감싸고 휘몰아 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애통을 모릅니다.
자기 잘나고 자기 깨끗한 멋에 삽니다.
제 멋대로 생각하며 제 멋에 겨워 삽니다.
“나는 깨끗하다 내 손은 정말 희다”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뇌물을 받이 적도 없다. 물론 뇌물을 준적도 없다. 나는 서울 은행장(손홍균) 보다 깨끗하다” 고 생각합니다.
“나는 도둑질하거나 남의 물건을 탐낸 적도 없다. 더구나 살인 강도는 한 번도 안했다. 나는 지존파보다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거짓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고 남을 속여 본 일 조차 없다. 나는 전두환 노태우 보다 깨끗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는 상대적인 죄일 뿐입니다.
다른 큰 죄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을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누가 죄없다 하겠습니까
과연 어느 누가 자기는 무죄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욥기는 묻습니다.
(욥15:14)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욥15:15)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욥15:16)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인간 존재 자체가 죄요 죄덩어리임을 말씀합니다.
다윗도 말씀합니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막7: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은 마음의 부패로 인해 더럽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이렇게 더럽습니다.
우리 모두가 유죄합니다.
인간 존재가 유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롬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참으로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합니다.
인간 존재의 참상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정직히 대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상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구동성으로 인간 존재의 죄상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죄라고 밝히 증거합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애통하게 합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절망하며 애통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심각히 다루시는 뜻은 마침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하늘의 위로 감싸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먼저 애통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의 위로로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거임이요”
어떤 사람이 한 수련회에 참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자기 죄를 위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죄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엔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별 회개할 죄가 없었다. 교회 출석을 별로 빠진 적도 없다.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술 담배는 물론 안했다. 교회 집회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수련회도 오지 않았는가 나는 그런대로 죄짓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회개하고 애통하라니.”
그런데 그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죄의 어두움을 보았습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죄성과 그 악함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어두움과 시커먼 죄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애통했습니다. 진실로 애통했습니다.
자기 죄의 지극히 큼을 애통했습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임을 애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큰 죄에서, 자기의 죄된 존재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날으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죄짐이 그의 어깨에서 벗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늘 높이 날아 올랐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참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란 주님의 말씀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가 받는 행복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애통하는 자의 위로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 애통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습니까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 위로 충만케 하시는 역사가, 자신의 죄와 인간 존재의 죄됨을 깊이 깨달아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십자가에서 위로를 찾고 하늘의 위로로 즐거움을 얻어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기쁨으로 믿음의 삶을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세상은 유쾌함과 기쁨을 추구합니다. 쾌락과 즐거움이 인생의 본질인양 추구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쾌락과 유쾌함을 위해 온 힘을 쏱습니다.
TV와 영화 그리고 모든 매스 미디어의 광고가 그러합니다.
애통과 슬픔을 쫒아내려고 모두가 일치 단결했습니다.
애통과 슬픔은 그 그림자라도 지우려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이들을 정죄합니다.
(눅6:25)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이제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말씀합니다.
(약4:9)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성경은 세상의 피상적이며 맹목적 쾌락 추구를 경계합니다.
심각함이나 신중함이 없는 삶을 정죄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값싸게 웃고 즐길 존재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심각한 질병 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심각한 질병 죽음의 목전에 있는 사람들이 값싼 웃음을 즐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대부분이 값싼 웃음에 자신을 잊고 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질병의 심각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죄의 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값싼 웃음을 애통으로 바꿔야 합니다.
값비싼 웃음을 얻기 위해 값싼 웃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들은 영원한 기쁨 영원한 위로를 얻기 위해 값싸고 찰나적인 위로와 기쁨을 버려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실로 사람들은 위로 받기에 앞서 근심해야 합니다.
시름을 잊고 기뻐하기 전에 애통해야 합니다.
이 애통을 지난 후에 위로와 기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애통을 아는 사람만이 위로를 받고 슬픔을 아는 자만이 기쁨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이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럼 오늘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이 애통은 “영적인 애통”을 말씀합니다.
단지 육신적인 슬픔을 뜻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한 슬픔, 잃어짐에 대한 슬픔이 아닙니다.
연속극을 보고 눈물짓는 그런 류의 애통이 아닙니다.
이 애통은 영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영적인 애통”이야 말로 진실된 애통입니다.
이 영적 애통은 사람들 누구나 꼭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이 영적 애통을 아는 자가 하늘의 위로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영적 애통을 잘 이해하기 위해 잠시 지난 주 말씀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란 자기가 “영적 거지”임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영적 궁핍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채워주실 하나님만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막상 하나님을 바라본 그는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의 죄를 봅니다.
자기는 하나님께 무엇을 받을 만한 아무런 “의”도 없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고 바라나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을 자격이 없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합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애통하는 사람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이렇게 팔복은 서로 밀접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곧 애통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팔복의 사람은 “한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덟명의 사람이 아닙니다. 각각 행복한 여덟명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행복한 “한 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한 인격을 가진 “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며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온유한 사람이며 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며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화평의 사람이며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복있는 사람, 행복한 사람입니다.
잘 기억하십시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있고 또 애통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이 “한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요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온유한 사람이며 의를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긍휼히 여기는 사람이며 마음이 청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화평의 사람이며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 한 인격자에게 이 8가지의 품성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성도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이 팔복의 품성은 서로 연락합니다.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 애통하는 사람은 또한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심령의 가난을 통해 애통에 이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속에 의가 없음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영적 거지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분께 모든 도움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 청구권이 없음을 압니다.
그는 하나님께 도움은 커녕 진노를 받을 존재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죄와 악함을 애통하는 사람입니다.
“애통한다는 것”은 “슬퍼하며 통곡하는 것”을 뜻합니다. “슬퍼하며 자기 가슴을 치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큰 죄인임을 자각하며 슬퍼하는 것입니다.
자기 죄의 지극히 큼과 자신의 악함을 알고 애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애통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 서울의 어느 교회에 있을 때 구역예배를 갔습니다.
그때 십계명을 설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말씀을 들은 한 자매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사님 그러니까 십계명에 의하면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겠군요”
그 자매는 십계명을 잘 이해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죄인입니다.
인간 존재 자체가 죄입니다.
인간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계명에 걸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 내가 죄인이며 여러분 그리고 인류 모두가 죄인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것이 애통입니다.
성도 여러분!
애통은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것입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인임을 깊이 깨닫고 통한해 하는 것입니다.
자기 속에 있는 죄의 세력을 보는 것입니다.
이 죄의 세력이 자신을 감싸고 휘몰아 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탄식합니다.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 애통을 모릅니다.
자기 잘나고 자기 깨끗한 멋에 삽니다.
제 멋대로 생각하며 제 멋에 겨워 삽니다.
“나는 깨끗하다 내 손은 정말 희다”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뇌물을 받이 적도 없다. 물론 뇌물을 준적도 없다. 나는 서울 은행장(손홍균) 보다 깨끗하다” 고 생각합니다.
“나는 도둑질하거나 남의 물건을 탐낸 적도 없다. 더구나 살인 강도는 한 번도 안했다. 나는 지존파보다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거짓말을 한번도 한 적이 없고 남을 속여 본 일 조차 없다. 나는 전두환 노태우 보다 깨끗하다” 라고 생각합니다.
모두가 자기는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런 죄는 상대적인 죄일 뿐입니다.
다른 큰 죄인들보다 상대적으로 적을 뿐입니다.
그러나 절대적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비추어 누가 죄없다 하겠습니까
과연 어느 누가 자기는 무죄하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까
욥기는 묻습니다.
(욥15:14) 사람이 무엇이관대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무엇이관대 의롭겠느냐 (욥15:15) 하나님은 그 거룩한 자들을 믿지 아니하시나니 하늘이라도 그의 보시기에 부정하거든 (욥15:16) 하물며 악을 짓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겠느냐
인간 존재 자체가 죄요 죄덩어리임을 말씀합니다.
다윗도 말씀합니다.
“(시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우리 주님도 말씀하십니다.
(막7:20) 또 가라사대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막7: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적질과 살인과 (막7: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흘기는 눈과 훼방과 교만과 광패니 (막7: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사람은 마음의 부패로 인해 더럽습니다.
깨끗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이렇게 더럽습니다.
우리 모두가 유죄합니다.
인간 존재가 유죄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로마서에서 말씀합니다.
(롬3:1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롬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롬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롬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롬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3: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참으로 이 말씀은 듣기에 거북합니다.
인간 존재의 참상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바로 우리 자신의 속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씀을 정직히 대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 존재의 실상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이구동성으로 인간 존재의 죄상을 드러냅니다.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죄라고 밝히 증거합니다.
이 사실이 우리를 애통하게 합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절망하며 애통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위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심각히 다루시는 뜻은 마침내 우리에게 위로를 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마침내 우리를 하늘의 위로 감싸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먼저 애통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늘의 위로로 위로하십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말씀합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거임이요”
어떤 사람이 한 수련회에 참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때 그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기 죄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자기 죄를 위해 있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때 그는 자기 죄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과거엔 이렇게 생각해 왔습니다.
“나는 별 회개할 죄가 없었다. 교회 출석을 별로 빠진 적도 없다. 나는 모태신앙이었다. 술 담배는 물론 안했다. 교회 집회에 열심이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수련회도 오지 않았는가 나는 그런대로 죄짓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회개하고 애통하라니.”
그런데 그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죄의 어두움을 보았습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인임을 알았습니다.
자기의 죄성과 그 악함을 알았습니다.
자신의 어두움과 시커먼 죄를 보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애통했습니다. 진실로 애통했습니다.
자기 죄의 지극히 큼을 애통했습니다.
자기 존재 자체가 죄임을 애통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큰 죄에서, 자기의 죄된 존재에서 건져주신 주님의 십자가를 보았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날으는 기분이었습니다.
모든 죄짐이 그의 어깨에서 벗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그의 영혼은 하늘 높이 날아 올랐습니다.
그의 마음은 하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의 영혼은 참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는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나니 위로를 받을 것”이란 주님의 말씀을 체험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바로 애통하는 자가 받는 행복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애통하는 자의 위로를 아십니까
여러분은 이 애통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습니까
축 도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주시기를 원하노라(민6:24-26).
이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량없는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크고 영원하신 사랑과 성령의 교통 위로 충만케 하시는 역사가, 자신의 죄와 인간 존재의 죄됨을 깊이 깨달아 애통하는 사람이 되어, 주님의 십자가에서 위로를 찾고 하늘의 위로로 즐거움을 얻어 주님이 주시는 참된 위로와 기쁨으로 믿음의 삶을 기쁨 가운데 살아가기를 다짐하는, 모든 교회와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의 심령들 위에, 지금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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