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부모를 공경하라 (출20:12)
본문
모든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두 관계 속에서 삽니다.
첫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둘째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십계명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나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명령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5계명부터 10계명에 걸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처음 관계를 갖는 것이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되지 못하고는 다른 모든 인간관계가 잘 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의 가장 중심이 되며, 가장 기초적인 관계입니다.
`공경하라'
허브리 원어에 `카베드(kabhad)'는 본래 `무겁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우리의 내장 중에 가장 무거운 간장(肝臟)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간장의 중요한, 간기능의 중요함과 같은 뜻입니다. 간(肝)은 신체의 여러 장기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모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
1. 엄숙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신5:1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주안에서 옳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의 가장 사악한 태도입니다. 말세의 특징 중에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억하며'(딤후3:1-3)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 때문에,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열심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해서 이것을 `고르반'(막7:6-13)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드렸노라'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이여!'라고 분노하셨습니다.
2. 권위에 대한 순종을 배우는 훈련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권위가 바로 이 부모의 권위입니다. 그 다음으로 숱하게 많은 권위를 만나며 우리의 삶을 형성시켜 나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에 대한 순종을 바르게 배운 사람이 이웃과 각 사람의 권위에게도 또한 하나님께도 올바른 순종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부모를 공경치 않은 자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 할 수 있느냐'고했습니다. 공경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3.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골로 새서 3:20절의 말씀은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요.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 순종이나 공경은 단순히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 영적인 하나님께 대한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비'는 여러 종류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단순히 자신의 육신의 부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넓고 포괄적인 면에서 `아비' 혹은 `부모'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트 124문에 보면 `제 5계명에 있는 부모는 누구를 뜻하는가' 제 5 계명에 있는 부모는 혈육의 부모뿐 아니라 연령, 은사의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가정, 교회,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 위에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라고 했습니다.
1)위에 있는 권세자들도 행정장관입니다.
그 나라의 권세자들은 그의 나라의 아비입니다. 성경은 왕들을 `아비들'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사49:23)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관리들입니다. 동리에서 동장, 면장,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등을 의미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2)연륜으로 보아서 윗사람들입니다.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레19:32)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이웃의 있는 연령자는 부모와 같이 공경하여야 합니다.
3)교회에 있는 성직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적 아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후4:15)라고 하였습니다.
토마스 왓스는 성직자들이 존경과 공경을 받아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비둘기처럼 감람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경하는 것입니까
1)가장 귀히 여길 것(살전5:12,13)
2)옹호자가 됨으로써 성직자에게 부당하게 닥쳐오는 비방을 씻어 줌으로써(딤전5:19)
3)그들의 교훈에 순종함으로써(살전2:19, 고후3:1)
4) 자연적인 육신의 아비들입니다(히12:9)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
육신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공경을 받도록 행동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의 모든 책임은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경을 받도록 살아야 합니다.
1) 주의 두려움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여야 합니다(엡6:4)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그의 자연 출산보다도 그의 영적 출산을 위해서 더 산고를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그를 어릴 때부터 교훈 하였습니다(딤후3:15) 그녀는 그에게 모유를 먹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씀의 순전한 젖'을 먹였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라고 하였습니다.
2)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부모의 모든 권고와 명령에서 그들로 하여금 사랑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부모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하는 자녀 양육법입니다.
3)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신중하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들을 노엽도록 격동시키지 않는 것이 신중성의 큰 핵심점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3:21)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자녀들을 격노케하기 쉬운가 그것은 자녀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함으로서 입니다. 사울은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패역부도의 계집 소생아'라고 말했습니다(삼상20:30)
어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저주와 악담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그들을 격노케 합니다. 사울은 아들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은 격노하였습니다. `요나단이.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고'(삼상20:23)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들의 자녀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을 거부할 때입니다. 자녀들에게 주기를 싫어하고 너무나 부족 한대로 내버려두었을 때입니다.
4)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분여재산을 저축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의 재산을 저축하여야 합니다.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기도와 눈물의 아들은 망하는 법이 없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부모들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부모들은 자녀들이 이 시대의 감염으로부터 보전되기를 위하여, 그들의 얼굴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와 그릇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5) 자녀들에게 선하고 칭찬할 만하다고 보는 바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덕성은 칭찬을 받으면 늘어납니다'(Virtus laudata crescit) 즉 선은 칭찬을 받을 때 늘어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선한 일을 칭찬하면 그들이 덕있는 행동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다함께 생각해봅시다.
5계명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교훈과 내 생활속에서 적용시켜야하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제 6계명: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지니라'(출20:13)
현대는 인명을 경시하는 시대입니다. 즉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죽이듯 앗아가는 시대입니다. 가스가 폭발해 죽거나 돈 몇 푼 때문에 제자까지 죽이는 시대입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을 볼 때마다 매일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대하고는 우리는 몸서리를 칩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는 휴머니즘이 판을 치고 있고 신학에서도 인본주의 신학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의 가치는 조금도 올라가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로 슬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T. V나라디오의 뉴스면의 시간을 지워 버리고 싶은 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사람의 그 영혼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값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체 먹지 말라'(창9:4)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2.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대표자입니다. 인간을 모독하고 살해함은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어기는 것은 결과적으로 곧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살인이 아닌 것
`살인하지 말라'는 이 말씀, 히브리어는 이 단어의 뜻에 몇 가지 경우에 해석이 따릅니다.
살인이 무엇입니까 살인이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살인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전쟁은 살인이 아닙니다.
다섯 나라의 연합군이 소돔 고모라를 쳐들어 와서 노략질하고 훼파하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붙잡아 갔습니다. 조카의 위급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 밑에 있던 부하 300명을 이끌고 다섯 왕의 연합군을 습격해서 그들을 쳐 승리하고 조카인 롯을 구출해 냈습니다. 이때 많은 다섯왕 연합 군사를 죽였는데 이것을 살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사무엘하 10장에 암몬족속이 못된 짓을 할 때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이 전쟁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라고 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허락하셨습니다. 전쟁이 터졌을 때는 자기 재산과 국토를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살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2. 정당방위는 살인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2:2절에 보면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처 죽이면 피흘린 죄가 없으나'라고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살인의 의도가 없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를 동기로 사람을 죽이게 된 이들을 위하여 그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도피성의 제도가 사회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침략하는 것을 살인이지만 쳐들어오는 적군에 대항하여 방어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으로 표시하지 않습니다.
3. 법의 집행을 위해서 실시되는 사형은 살인이 아닙니다.
창세기9: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삶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씀하심을 봅니다.
4. 동물 살생은 살인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이는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령 식물은 동물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죽여 음식을 만들어 먹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의 생활 방식입니다.
`살인'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살인의 동기까지도 미워하셨습니다.
1. 상대방의 이름을 손상시키는 것
자기 집에 중요한 물건을 도적 맞고 자살한 사람은 없어도 자기 이름이 모함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인격적으로, 말로 손상을 입을 때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살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처럼 쉽게 하는지요! 다른 사람의 인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 가면서 이것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없이 이야기하고 헐뜯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타인의 이름을 손상시키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타인의 육체를 살해하는 것
생명은 신성불가침입니다. 창세기 9:6절에 보면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데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분노입니다
사람이 분에 너무 복받치면 사람 죽이는 것쯤 쉽게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살인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살인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고 말했습니다.
2)시기와 질투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원흉입니다. 가인은 시기 끝에 자기 행동 아벨을 죽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시기해서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시조 아담의 무죄와 낙원의 영광을 시기했으며, 그래서 죄를 짖게 한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기를 살인과 동등시 하였습니다. `투기와 살인과'(갈5:21)라고 하였습니다.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27:4)
3)증오입니다.
미움은 피를 먹고 사는 해충입니다. `네가 옛날부터 미움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피를 흘렸음이라'(겔35:5)
하만은 모르드게가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으므로 그를 증오하였고 유대인의 전 족속과 자손을 멸하고자 한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이 먼저 죽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극기하고 자제할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날 때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물론 위대한 왕이었지만 술좌석에서 자기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였다고 화를 내고 그 자리에서 그 부하를 창으로 찔러 죽엿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는 기록하기를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는 다스릴줄 알았지만 자기 자신은 다스릴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이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주시는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타인을 타락시키는 것
인간의 중심은 육신이 아닙니다. 영혼입니다. 죽음이란 분리를 뜻합니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곧 죽음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일은 바로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영혼을 죽이는 데는 몆가지 구체적인 행위가 있습니다.
1) 다른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실이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하고자 하는 마음에 타격을 주어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행위를 성경은 무서운 범죄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실족케 아니할 수도 없지만 행제중에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강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실족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과 단절시켜 버리는 이 타락시킴, 이것을 성경은 `영혼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유혹하는 것입니다.
잠언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타인이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는 구체적인 유혹, 이것을 살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 속에 미혹의 영인 마귀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4:1)라고 하였습니다.
3)복음을 전파하지 않아서 타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못하여 죽을 때에 믿는 신자로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혼을 방조한 책임이 있어 간접살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소크라테서는 `이 성안에 굻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의 책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것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불고지 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네 이웃이 지옥으로 가는 피에 대가를 네게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1)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인격도 중요한것처럼 남의 인격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매우 무리한 말을 던져서 상대편에게 상처를 주고는 `미안해!' 한마디로 끝내버리고 곧 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있을 때는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못한 것을 갖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2)용서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자신을 판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주님의 명령인 동시에 성도의 의무입니다. 용서의 삶을 살 때 먼저 우리의 삶이 평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나니'(레19:17-18)고 하였습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다. 성경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즉 사랑은 행동이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 복종할 때 그 종이 비로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0장에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가운데 사랑은 실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생각해봅시다.
6계명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교훈과 내 생활속에서 적용시켜야하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제 7계명: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
현대를 흔히 `3S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학(Science), 스포츠(Sports), 성(Sex) 이 세가지는 확실히 현대인의 우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Sex)문화의 혁명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Sex)의 종교라고 말한 어느 언론인의 말에 우리는 공감을 합니다. 이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문학에도, 예술에도, 켐퍼스에도, 주점에도, 종교에도, 정치에도, 언론에도, 상업에도 성의 노골적인 유혹과 광기는 도처에서 현대인에게 `성을 숭배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성의 홍수속에 살고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시대를 볻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의 뜻
간음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히브리인들은 `간음'(Nahab)이란 말은 불법성교(不法性交)를 말합니다. 즉 `기혼자가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 이외에 이성과 맺는 불법적인 성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로 기혼자들의 성법죄를 알컽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미혼자들의 성적인 범죄를 일컽을 때 사용되던 `음행'이란 단어와는 그 뜻을 약간 달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성범죄, 즉 강간, 남색, 수음, 동성연애, 매음행위, 혼전 성관계 등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는 성적으로 혼란하여 과연 간음이 죄인가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간음이 과거에는 죄였지만 현대는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고 하나님도 영원히 같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변함없는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육체적인간음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욕이나 성적 생활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에서는 성욕을 죄악시 합니다. 모든 죄는 성적 욕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죄악히하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려면 성적 금욕생활으 하여야 한다고 주장힙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네 젊어서 얻은 아내와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성(Sex)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축복이요,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많은 신자를 포함해서 성에 대한 이해가 비성서적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즉 성이 개방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혼전 성적 경험률이 급증했고, 미혼모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혼휼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성도덕관이 이러한 세속주의에 영향을 받아 많이 저하디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2)마음적인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5:2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욕을 품었다는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마치 암닭이 병아리를 품은 것 같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가면 이미 결정된 그 결정으로 병아리가 되어 태어나듯 마음 속에 이미 간음하기로 작정해버린 그 마음이 바로 `음욕을 품었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잠언6:27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 하겠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 중심도 보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령님을 모시고 마씀을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3)영적인간음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우상에게 마음이 매혹되어 신앙의 순결을 저버릴 때 이는 지체없이 간음의 범죄로 정죄되었습니다.
`내가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다'(렘3:8)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배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선포되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9절에 `그가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렵혔거늘'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간음하는 여인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약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상을 섬기고 세속에 빠져서 살때 영적으로 간음한 것입니다.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상을 섬기고 세속에 빠져서 살때 영적으로 간음한 것입니다.
`간음'의 결과
세상에 모든 죄가 형벌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간음죄에 형벌은 더욱 중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죄를 결코 가벼운 죄로 보지 않습니다. `언제 네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욥31:9-11)
1)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안에 가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십니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잘 이것을 행하는 자는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9잠6: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의 육체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한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니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영혼이 이 죄에 빠지자 말자 그의 눈은 빛을 잃어버립니다. 음행의 늪에 빠지자마자 그의 인격은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잠언 성경에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아니라'(잠6:26)고 했습니다. 이 처럼 음행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사냥하여 우리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2)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따럼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결한 나라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6:9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주님의 나라는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염됨 성의 범죄를 정복하지 못하스스로의 마음속에 갈등과 더러힘을 당했던 영혼들은 이 나라에 참여할 수 없는 인격자입니다.범죄를 정복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갈등과 더러힘을 당했던 영혼들은 이 나라에 참여수 없는 인격자입니다.혼들은 이 나라에 참여할 수 없는 인격자입니다. 계시록에
둘째사망에 대가를 치뤄야 할 범죄를 열거하면서 `행음'기록하고 있습니다(계21:8)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3)가정과 사회를 파멸시킵니다.
이 범죄는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입니다. 성적인 범죄는 문화의 척도가 됩니다. 엘톤 트루물러드(Elton Trueblood)는 `문명의 부폐는 잘못된 도덕의 미화(美化)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 시대가,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바로 음행이였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의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어둡고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오래 살 수 없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
1)유혹이 있는 자리를 피하여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두가지 입니다. 대항하는 것과, 피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대항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물러갑니다. 그러나 성의 유혹은 피함으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라고'(딤후2:22)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피함으로서 승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디발 의 아내가 요셉에게 유혹할 때 그는 `네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가'(창39:9)라고 소리치며 그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망이 이 문제에 대한 초대에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모든 음란의 방편을 거부하여야 합니다.
2)부부의 사랑의 띠로 굳게하십시오.
결혼은 육체만의 결합이 아니라 전인격의 결합입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니라'(고전7:3)고 했습니다. 이 처럼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기도와 말씀으로 충만하게 채우십시요.
본질적으로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룩한 생활을 위한 두 수레바퀴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9-11)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사람의 거룩한 인격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4)한가한 시간을 우리 생활에서 없앨 것입니다.
이것은 음란하게 만들고, 범죄로 나아가게 하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왕도 왕궁을 배회하다가 그 한가한 눈에 목욕하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한가한 다윗왕으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제 8계명: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출20:15)
도적질의 범죄는 살인, 간음과 함께 현대의 삼대 범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제생활은 우리 삶의 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 계명은 사람이 구체적으로 생을 사는데 중요한 경제활동, 타인의 재산을 보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이 계명의 순종이 없이 우리 사회의 기초는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계명은 기독교 윤리의 근본이며 인간 공동생활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도적이란 말은 `옆으로 제처 놓는다'는 `가납(Ganaab)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도적질이란 잘못된 목적을 위하여 잘못된 수단으로 재물을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적질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범죄는 도적질에서 시작합니다. 아담과 화와는 하나님이 금 것도 바로 이 범죄였습니다. 아니리아 삽비라는 지능적인 도직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을 약속하고되로 자신을 위하여 주님의 것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求. 그들은 하나님께 헌금을 약속하고되로 자신을 위하여 주님의 것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적질때문이요, 예수님의 제자인 가롯 유다는 신앙을 빙자해서 도적질을 하였습니다(요12:6) 또한 초대 교회의 부흥에 찬물을 끼얹은 것도 바로 이 범죄였습니다. 아니리아 삽비라는 지능적인 도직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금을 약속하고되로 자신을 위하여 주님의 것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도적' 유형
1)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날을 도적질합니다.
하나님은 이 날, 하나님의 날로 드리도록 주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축복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한 날을 사사롭게 내 생각대로 이 날을 사용합니다. 이를 성경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합니다(말3:8-9)
`너희가 도적이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질에 복을 받을려면 올 바른 물질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것이 하나님의 것이란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는 어찌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3. 하나님의 신령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신령의 도적질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사용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 맹세하는 것, 이런 것들이 신령한 도적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내가 받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는 도적이 되고 맙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단5:22, 23)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취하고자 하는 것도 도적입니다. 그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즉시로 왕위를 빼앗겼으며 들로 쫗겨나가 소처럼 풀을 먹는 비참한 최후를 맛이하게 됩니다(단5:22, 23)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할 영광을 자기가 취하고자 하는 것도 도적입니다.
2)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정당하게 대하지 않는 모든것이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즉 부정직한 상거래도 도적질입니다. 레위기 19:35절에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는 `손에 거짓저울을 가지고'(호12:7)라고 하였습니다. 빌리고난 후 갚지 않는 것도 또한 도적질로 간주합니다. 성경에는 사랑읩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햇습니다. 또한 고용인의 삯을 떼어 벗는 자본주의 행위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5:4)라고 하였습니다.
부당한 뇌물을 받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성경은 뇌물을 금합니다(출23:8) `불로소덕'의 정신, 일하지 않고 부를 획득하려는 시도는 도적질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생명, 이웃의 정조, 이웃의 명예를 도적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자신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왜 도적질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것도 결국은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입니다(고전4:1) 청지기는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자들입니다. 청지기가 이 재산을 잘못 관리하는 것은 남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도적질의정신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돛岵막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악한 병이로다'(전6:2) 재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악한 병이로다'(전6:2) 재산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도적질하지 않기 위해서 가져야 할 자세
1)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자족하는 것을 배우고 현실에 만족하는 삶을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1절에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한국속담에 `올려다 보고 살지 말고 내려다 보고 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과 통합니다. 주님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롬12:16)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라고 했습니다. 재물에 지나친 욕심은 화근을 만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사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고 했습니다.
남에 생활과 비교하여 생각해서도 않됩니다. 현대는 절대적인 빈곤의 삶을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빈곤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웃이 아파트를 넓은 평수로 이사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같은 평수로 이사 할려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교하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 입니다. 행복했던 아담과 이브에게 사탄은 찾아 `네가 하나님 처럼 되리라'고 갑자기 비교하여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담의 행복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2)근면하게 일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일하기 싫기든 먹지도 말라'(살전3:10)고 했습니다. 주어진 삶에서 부지런하고 근면하여 사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3)이웃을 돌아보는 구제의 삶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우리속에 있는 도적의 심리가 치료되지 않습니다. 것뿐만 아니라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우리속에 있는 도적의 심리가 치료되지 않습니다.
구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히13:16) 살아있는 신앙입니다(약2:14-170 개인이나 국가나 교회도 이웃을 향하여 주는 삶이 없이는 그 삶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세시대 교회가 인류의 걸작품이며 중요한 문화의 업적으로 남아 있는 성 씨스틴 성당이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사원을 지은 후에 국가는 망하였습니다. 구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만을 치장할 때 중세의 암흑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고 하였습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의 기도가운데 이러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구제할지언정 구제받지 말게하시고 우리 자손이 꾸어 주지만 꾸임을 받지 말게 하옵소서. 나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대접할지언정 대접받지 말게하시고 남을 주면서도 우리의 창고가 넘치게 하옵소서!'
제 9계명: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
언어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언어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전쟁을 승리로 이끌 때 그의 연설은 북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그 미약했던 영국이 그 거대한 제 3공화국 히틀러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처어칠의 연설 능력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게르마니아 사람들을 그처럼 단합되게 만든 것은 히틀러의 연설이였습니다. 말에는 이 처럼 힘이 큽니다.
우리의 인격을 밖으로 표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언어입니다. 그래서 니이체는 언어가 인생의 2/3를 차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축복입니다. `로고스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로고스라는 언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표현으로 주셨지먄 타락한 사람의 혀가 저주와 참소와 악독과 거짓, 그런 것으로 그 기능이 바꾸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하교 어니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도적질하는 것과 거짖말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 아이에게 `그야 물론 조적질이 더 나브지'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에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니예요, 틀렸으요. 거짓말이 더 나빠요. 거짓말은 돌려 줄 수가 앖잖아요.'라고 했습니다.
8계명은 이웃의 유형(有形)의 재산에 대한것, 9계명은 이웃의 무형에 재산인 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1. 거짓 증거의 특성
1)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죄이다.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는 그 당시의 사회 부폐를 지적하면서, 사람들의 거짓됨을 공격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아모서 선지자, 아사야 선지자, 예례미야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 거짓의 본성을 지적했습니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시116:11)
그러므로 가장 고치기 어려운 영적질병이 거짓입니다.
2)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범죄입니다.
거짓말을 하기전에 거짓말장이의 품성을 지닌 것이 더 문제입니다. 거짓이라는 우리의 본성 때문에 거짓말은 불가피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과 증거와 훼방'(마15:19)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 부폐되괴 거짓된 성품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유발시킵니다. 이 죄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마귀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저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마'라는 말은 핼라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중상자, 비방자, 입이 험한자란 뜻입니다. 사단은 이 모든 거짓의 배후 조정자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마귀는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십니다(잠6:16) 따라서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라고 했습니다.
2. 거짓말의 유형
1) `참소'
참소란 말은 이웃과 벗에 대하여 고의적이고 파괴적인 거짓말을 뜻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 욕심대로 안되니까 요셉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그 남편에게 참소를해서 요셉이 무고히 감옥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대단히 내성적이고 말이 없으셔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심방가면 가민히 않아 있지 말고 그 집에 대해 무엇이든지 칭찬을 해주는 것으로 말을 시작하라고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심방 가서 눈에 띠는 것 중에 마음에 들기만 하면 칭찬을 합니다. 그 중에 한 집에 갔는데 참 가나한 집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칭찬할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 하나가 바로 예쁘게 수놓은 책상보였습니다. 사모님은 수를 참 잘놓았다고 한참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그 집에 선물이 왔는데 그 책상보를 잘 개어서 다리고 포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목사님 사모님이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겠습니까 그것까지는 참 아럼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돌기를 목사 사모가 얼마나 탐심이 많아서 그 가난한 집의 책상보를 빼았아 왔느냐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어서 거동을 못하고 말을 잘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이웃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없이 함부로 합니다. 참소는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참소를 버려야 합니다.
2) `헛소문의 유포'
소문이라는 것은 정확한 것이 못됩니다. 요사이도 그런 놀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람의 말이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놀이입니다.수 있는 놀이입니다.
사람이 삼사십명 둘러 앉아서 첫사람이 그 옆 사람에게 `저 사람이 너를 좋아한대'하고 귓속말로 하면 그 다음 사람엑 그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듣는데로 전하지 않고 자기 감정을 섞어서 전합니다. 그래서 이말이 마지막 사람이 귀에 전할 때는 처음 말과는 아주 다른 말로 전해질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너를 좋아한대'하고 전했는데 마지말 사람에게는 `저 사람이 너를 족일 놈이라고 해'라고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전하는 말, 소문이란 정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정확하다고 해도 좋지 않는 말은 아예 뭇어 버리고 잊어버리고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더 좋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두루 다니며 험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20:19)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서 1장에서는 `수근수근'하는 것도 죄라고 했습닏.
3)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것.
예수님께서 ` 이 성전을 흘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죽어야 할 그 몸과 부활을 의미하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중상자는 그것을 문자적으로 고자질 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조심하여야 합니다.
말에는 다리가 없다고 합니다. 다리가 없기 때문에, 가교밑에 세우는 밑받침이 없기 때문에 한번 거짓말을 하면 계속해서 밑받임을 세워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중을 그리고그 중심을 살펴야 합니다.
거짓에서 승리하는 비결
1. 거짓을 죄로 여기십시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며 합리화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십시요. 죄로 여겨지기 전까지는 해결이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2.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십시요.
많은 거짓말이 남의 일을 간섭하는 데서 유발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에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에 충실하고 이웃에 일은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사실을 다 알지도 못한체 남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타인이 깊은 사정, 아픈사정, 슬픈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들이 잘 될 때는 말을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못 될 때만 고라가면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중에 더 발로 밟고 있습니다.
오빠가 결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견디가 못한 가난한 누이가 몸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작 오빠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이야기를 하고 떠블었던지 그 사실이 오바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오빠는 그 충격으로 그만 자실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여동생도 자기가 몸을 팔아서 살려놓은 오빠가 목숨을 끊어버리자 따라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장례식날, 그 교회 목사님은 울면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날 `너 아무게 목사야! 네가 네 양때를 얼마나 돌아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예, 저는 양이 한마리도 없고 이리떼만데리고 있다가 여기 왔습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우리가 남의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해버리는, 쉽게 입으로 뱉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 생활을 위해서 진지히게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옵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기자도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잠30:8)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4. 날마다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누구와 만나서 어떤 말씨를 배우느냐에 따라서 내 말의 습관이 달라지지맙시다.어떤 모습으로 말을 배웠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우린 주님과 날마다 교제해야 합니다. 기와 찬송을 중심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는 생활을 살기를 바랍니다.
교제해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을 중심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는 생활을 살를 바랍니다.배워가지고 오는 것이라곤 욕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듣기 싫은 욕을 하든지 제가 매를 들었더니 `이 도독놈아!' 그러는 겁니다. 누구에게 이떤 모습으로 말을 배웠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우린 주님과 날마다 교제해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을 중심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는 생활을 살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만 죽이지만 말은 멀리 있는 사람도 죽인다. 화살처럼, 그렇지만 화살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화살은 손으로 막을 수 있지만 말의 쏘아대는 무서운 살상력은 피할 세력이 없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참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진리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결하고 아름다운, 그분께서 기대하시는 언어생활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니와 삽비라(행5:3), 그들은 거짓말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언어로 하나님께 영왕을 돌리십시다.
제 10계명: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지금까지 계명들은 다 우리 죄악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범죄 행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젼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열째 계명은 볼 수 없는 죄입니다. 탐심은 죄의 욕망이며, 죄악의 동기이며,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하고 있는 죄입니다. 이것은 행동과 관계이기
보다는 내적인 정서와 더관련이 깊은 죄입니다
성경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눅12:15)고 하십니다. 아간의 탐심은 은을 숨겨 놓았습니다. 이 범죄로 아이성에서 패배했습니다. 사울왕은 황소 몇마리를 탐하다가 그의 왕관을 잃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몇마리를 탐하다가 그의 왕관을 잃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입성했는데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진멸하고 아무것도 갖지 말라라고 그랬을 때, 아간은 외투와 은을 숨겨 놓았습니다. 이 범죄로 아이성에서 패배했습니다. 사울왕은 황소 몇마리를 탐하다가 그의 왕관을 잃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1. 탐심의 성격
1) 모든 죄에 뿌리가 됩니다.
앞에 있는 모든 계명이 바로 이 탐심의 결과로 옵니다. 그래서 탐심은 `모든 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탐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고 말합니다. 탐심 때문에 도적질도 합니다. 간음도 합니다. 싸움도 합니다. 심지어 살인까지도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여 간음죄와 살인죄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2)이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탐심이란 뜻은 `더 움켜쥔다'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골3:5)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탐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을 탐하던 사람들의 신(神)은 배'(빌3:19)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은 탐심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있기 때문입니다.
2. 탐심의 결과
1)신앙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욕망과 육적인 욕망이 동시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욕망이 커지면 다른 욕망은 좌절되고 맙니다. 탐심이 내 영혼을 물들게 하면 영적인 식용, 곧 말씀의 맛이 없어져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2) 육적인 건강을 파괴합니다.
잠언 성경은 `탐심을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잠28:16)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탐욕은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는 말입니다. 사람중에도 이런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루 동안에 밟고 걸어다니는 땅을 다 네 으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농부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해서 전력으로 달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 늦게까지 전력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의 많은 따을 차지하고 나서 그가 떠났던 출발점에 도착했을 때 기진맥진한 나머지 쓰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보다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3. 탐심의 죄를 극복하는 방법
1) 이 세상의 모든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성경은 말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돈가지고 만족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없습니다.
2)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욕심을 갖고 탐심의 죄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진정 만족은 행복의 면류관입니다(빌4:12,13)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3)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잠21:26)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배우기 전에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의 결론
십계명은 하나님을 하는 삶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매사에 이 계명을 중심해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주님께 드립시다.
첫째 관계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둘째 관계는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삽니다. 그래서 십계명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과 나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는 명령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두 번째로 사람과의 관계에 대해서 5계명부터 10계명에 걸쳐서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가장 처음 관계를 갖는 것이 부모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잘되지 못하고는 다른 모든 인간관계가 잘 될 수 없습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의 가장 중심이 되며, 가장 기초적인 관계입니다.
`공경하라'
허브리 원어에 `카베드(kabhad)'는 본래 `무겁다'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또 명사형으로 사용될 때에는 우리의 내장 중에 가장 무거운 간장(肝臟)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간장의 중요한, 간기능의 중요함과 같은 뜻입니다. 간(肝)은 신체의 여러 장기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모를 이렇게 귀하게 여기라는 뜻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할 이유
1. 엄숙한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신5:1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주안에서 옳다'고 하셨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태도는 인간의 가장 사악한 태도입니다. 말세의 특징 중에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는 것입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억하며'(딤후3:1-3)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열심 때문에, 하나님께 헌신하고 봉사하는 열심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는 것을 소홀히 했습니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해서 이것을 `고르반'(막7:6-13)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내가 드렸노라' 그래서 주님은 그 사람들을 향해서 `독사의 자식들아 회칠한 무덤이여!'라고 분노하셨습니다.
2. 권위에 대한 순종을 배우는 훈련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권위가 바로 이 부모의 권위입니다. 그 다음으로 숱하게 많은 권위를 만나며 우리의 삶을 형성시켜 나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부모에 대한 순종을 바르게 배운 사람이 이웃과 각 사람의 권위에게도 또한 하나님께도 올바른 순종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보이는 부모를 공경치 않은 자가 보이지 않은 하나님을 어떻게 공경 할 수 있느냐'고했습니다. 공경 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3.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골로 새서 3:20절의 말씀은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자녀들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요.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모 순종이나 공경은 단순히 부모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부모를 잘 공경하는 사람이 영적인 하나님께 대한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비'는 여러 종류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단순히 자신의 육신의 부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넓고 포괄적인 면에서 `아비' 혹은 `부모'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트 124문에 보면 `제 5계명에 있는 부모는 누구를 뜻하는가' 제 5 계명에 있는 부모는 혈육의 부모뿐 아니라 연령, 은사의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하여 가정, 교회,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 위에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라고 했습니다.
1)위에 있는 권세자들도 행정장관입니다.
그 나라의 권세자들은 그의 나라의 아비입니다. 성경은 왕들을 `아비들'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열왕은 네 양부가 되며'(사49:23)라고 하였습니다. 현대에 있어서는 사회와 국가에 있어서 관리들입니다. 동리에서 동장, 면장, 국회의원, 장관, 대통령등을 의미합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롬13:1)
2)연륜으로 보아서 윗사람들입니다.
`너는 센머리 앞에 일어서고 노인의 얼굴을 공경하며'(레19:32)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부모가 아니더라도 이웃의 있는 연령자는 부모와 같이 공경하여야 합니다.
3)교회에 있는 성직자들입니다.
이들은 영적 아비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비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서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후4:15)라고 하였습니다.
토마스 왓스는 성직자들이 존경과 공경을 받아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습니다. `그들은 비둘기처럼 감람나무 가지를 입에 물고 오기 때문이다. 그들은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공경하는 것입니까
1)가장 귀히 여길 것(살전5:12,13)
2)옹호자가 됨으로써 성직자에게 부당하게 닥쳐오는 비방을 씻어 줌으로써(딤전5:19)
3)그들의 교훈에 순종함으로써(살전2:19, 고후3:1)
4) 자연적인 육신의 아비들입니다(히12:9)
자녀를 양육하는 방법
육신의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공경을 받도록 행동하여야 합니다. 자녀들의 모든 책임은 부모들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경을 받도록 살아야 합니다.
1) 주의 두려움과 훈계로 자녀를 양육하여야 합니다(엡6:4)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4)라고 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어머니 모니카가 그의 자연 출산보다도 그의 영적 출산을 위해서 더 산고를 겪었다고 하였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는 그를 어릴 때부터 교훈 하였습니다(딤후3:15) 그녀는 그에게 모유를 먹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말씀의 순전한 젖'을 먹였습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라고 하였습니다.
2) 자녀들에게 사랑으로 양육하여야 합니다.
부모의 모든 권고와 명령에서 그들로 하여금 사랑을 알게 하여야 합니다. 부모 중심의 사랑이 아니라 자녀의 입장에서 이해하는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완성하는 자녀 양육법입니다.
3) 자녀들에게 부모로서 신중하게 행동하여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가 자식들을 노엽도록 격동시키지 않는 것이 신중성의 큰 핵심점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골3:21)라고 했습니다.
부모가 어떻게 자녀들을 격노케하기 쉬운가 그것은 자녀들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사용함으로서 입니다. 사울은 그의 아들 요나단에게 `패역부도의 계집 소생아'라고 말했습니다(삼상20:30)
어떤 부모들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저주와 악담을 사용하는데 이것이 그들을 격노케 합니다. 사울은 아들에게 단창을 던져 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은 격노하였습니다. `요나단이. 심히 노하여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고'(삼상20:23)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부모가 그들의 자녀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을 거부할 때입니다. 자녀들에게 주기를 싫어하고 너무나 부족 한대로 내버려두었을 때입니다.
4)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그들을 위하여 분여재산을 저축할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하여 기도의 재산을 저축하여야 합니다. 모니카는 아들 어거스틴을 위하여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많은 기도와 눈물의 아들은 망하는 법이 없다는 명언을 남기기도 하였습니다. 부모들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부모들은 자녀들이 이 시대의 감염으로부터 보전되기를 위하여, 그들의 얼굴에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게 하기 위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와 그릇이 되도록 기도하여야 합니다.
5) 자녀들에게 선하고 칭찬할 만하다고 보는 바를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덕성은 칭찬을 받으면 늘어납니다'(Virtus laudata crescit) 즉 선은 칭찬을 받을 때 늘어나는 것입니다. 자녀들에게 선한 일을 칭찬하면 그들이 덕있는 행동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다함께 생각해봅시다.
5계명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교훈과 내 생활속에서 적용시켜야하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제 6계명:살인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지니라'(출20:13)
현대는 인명을 경시하는 시대입니다. 즉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 죽이듯 앗아가는 시대입니다. 가스가 폭발해 죽거나 돈 몇 푼 때문에 제자까지 죽이는 시대입니다. 아침에 배달되는 신문을 볼 때마다 매일 일어나는 살인 사건을 대하고는 우리는 몸서리를 칩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철학에서는 휴머니즘이 판을 치고 있고 신학에서도 인본주의 신학이 활개를 치고 있지만 실제로 사람의 가치는 조금도 올라가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로 슬픈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T. V나라디오의 뉴스면의 시간을 지워 버리고 싶은 많은 사건들을 우리는 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 사람의 그 영혼을 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값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존중히 여겨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1.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레17:11)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체 먹지 말라'(창9:4)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의미합니다.
2.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창9:6)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손으로 직접 빚어서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지상에서는 인간은 하나님의 대표자입니다. 인간을 모독하고 살해함은 곧 하나님을 모독하고 하나님을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어기는 것은 결과적으로 곧 하나님의 주권을 도전하는 것이 됩니다.
살인이 아닌 것
`살인하지 말라'는 이 말씀, 히브리어는 이 단어의 뜻에 몇 가지 경우에 해석이 따릅니다.
살인이 무엇입니까 살인이 참된 의미를 알기 위해서 우리는 살인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하겠습니다.
1. 전쟁은 살인이 아닙니다.
다섯 나라의 연합군이 소돔 고모라를 쳐들어 와서 노략질하고 훼파하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붙잡아 갔습니다. 조카의 위급을 들은 아브라함은 자기 밑에 있던 부하 300명을 이끌고 다섯 왕의 연합군을 습격해서 그들을 쳐 승리하고 조카인 롯을 구출해 냈습니다. 이때 많은 다섯왕 연합 군사를 죽였는데 이것을 살인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또 사무엘하 10장에 암몬족속이 못된 짓을 할 때 다윗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내가 이 전쟁을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라고 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허락하셨습니다. 전쟁이 터졌을 때는 자기 재산과 국토를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하는 것, 그것을 하나님께서 살인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2. 정당방위는 살인이 아닙니다.
출애굽기 22:2절에 보면 `도적이 뚫고 들어옴을 보고 그를 처 죽이면 피흘린 죄가 없으나'라고 분명히 말씀하였습니다. 여호수아 20장에 보면, 살인의 의도가 없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방어를 동기로 사람을 죽이게 된 이들을 위하여 그들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도피성의 제도가 사회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던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가 침략하는 것을 살인이지만 쳐들어오는 적군에 대항하여 방어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살인으로 표시하지 않습니다.
3. 법의 집행을 위해서 실시되는 사형은 살인이 아닙니다.
창세기9:6절에 보면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삶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말씀하심을 봅니다.
4. 동물 살생은 살인이 아닙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죽이는 모든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령 식물은 동물의 생명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모든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죽여 음식을 만들어 먹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원래의 생활 방식입니다.
`살인'이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을 뿐만 아니라 살인의 동기까지도 미워하셨습니다.
1. 상대방의 이름을 손상시키는 것
자기 집에 중요한 물건을 도적 맞고 자살한 사람은 없어도 자기 이름이 모함 받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인격적으로, 말로 손상을 입을 때 자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은 살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그처럼 쉽게 하는지요! 다른 사람의 인격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혀 가면서 이것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없이 이야기하고 헐뜯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은 말하기를 타인의 이름을 손상시키지 말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2. 타인의 육체를 살해하는 것
생명은 신성불가침입니다. 창세기 9:6절에 보면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는데는 3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1) 분노입니다
사람이 분에 너무 복받치면 사람 죽이는 것쯤 쉽게할 수 있습니다. 분노는 살인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입니다.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살인의 첫 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육신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린다'고 말했습니다.
2)시기와 질투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죽이는 원흉입니다. 가인은 시기 끝에 자기 행동 아벨을 죽였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동생을 시기해서 자기 동생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기해서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시조 아담의 무죄와 낙원의 영광을 시기했으며, 그래서 죄를 짖게 한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시기를 살인과 동등시 하였습니다. `투기와 살인과'(갈5:21)라고 하였습니다. `투기 앞에야 누가 서리요'(잠27:4)
3)증오입니다.
미움은 피를 먹고 사는 해충입니다. `네가 옛날부터 미움을 품고 이스라엘 족속의 피를 흘렸음이라'(겔35:5)
하만은 모르드게가 자기에게 절을 하지 않으므로 그를 증오하였고 유대인의 전 족속과 자손을 멸하고자 한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자신의 영혼과 육신이 먼저 죽습니다.
우리의 감정을 극기하고 자제할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성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날 때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물론 위대한 왕이었지만 술좌석에서 자기 부하 가운데 한 사람이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말을 하였다고 화를 내고 그 자리에서 그 부하를 창으로 찔러 죽엿습니다. 자기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는 기록하기를 `알렉산더 대왕은 세계는 다스릴줄 알았지만 자기 자신은 다스릴줄 몰랐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감정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이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주시는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타인을 타락시키는 것
인간의 중심은 육신이 아닙니다. 영혼입니다. 죽음이란 분리를 뜻합니다. 육체와 영혼의 분리가 곧 죽음니다.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시키는 모든 일은 바로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영혼을 죽이는 데는 몆가지 구체적인 행위가 있습니다.
1) 다른 사람을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된 행실이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하고자 하는 마음에 타격을 주어 하나님 앞으로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행위를 성경은 무서운 범죄라고 말합니다.
`너희가 실족케 아니할 수도 없지만 행제중에 지극히 작은 소자 하나라도 실족케 하는 것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매고 강물에 빠지는 것이 낫다'고 했습니다. 실족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과 단절시켜 버리는 이 타락시킴, 이것을 성경은 `영혼을 죽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2)유혹하는 것입니다.
잠언 성경에는 구체적으로 타인이 하나님의 그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는 구체적인 유혹, 이것을 살인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그 속에 미혹의 영인 마귀에 속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딤전4:1)라고 하였습니다.
3)복음을 전파하지 않아서 타인이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을 방조하는 것입니다.
이웃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지못하여 죽을 때에 믿는 신자로서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영혼을 방조한 책임이 있어 간접살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소크라테서는 `이 성안에 굻어 죽는 사람이 있다면 모든 사람의 책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것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은 불고지 죄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네 이웃이 지옥으로 가는 피에 대가를 네게서 찾겠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까요
1)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여야 합니다.
자기의 인격도 중요한것처럼 남의 인격도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매우 무리한 말을 던져서 상대편에게 상처를 주고는 `미안해!' 한마디로 끝내버리고 곧 잊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례가 있을 때는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지 못한 것을 갖고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하여야 합니다
2)용서하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누구든지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표적인 사람이 요셉입니다. 그는 자신을 판 형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용서는 주님의 명령인 동시에 성도의 의무입니다. 용서의 삶을 살 때 먼저 우리의 삶이 평안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3)적극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랑이 없는 것을 회개하여야 합니다.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이웃을 인하여 죄를 당치 않도록 그를 반드시 책선하라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나니'(레19:17-18)고 하였습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애쓰고 사랑하려고 노력하십시다. 성경은 `결단'을 요구합니다. 즉 사랑은 행동이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 앞에 복종할 때 그 종이 비로소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랑을 고린도전서 13장에서 행동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0장에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가운데 사랑은 실천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함께 생각해봅시다.
6계명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교훈과 내 생활속에서 적용시켜야하는 말씀은 무엇인가요
제 7계명: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지니라'(출20:14)
현대를 흔히 `3S의 시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과학(Science), 스포츠(Sports), 성(Sex) 이 세가지는 확실히 현대인의 우상입니다. 그 중에서도 성(Sex)문화의 혁명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현대의 가장 강력한 종교는 성(Sex)의 종교라고 말한 어느 언론인의 말에 우리는 공감을 합니다. 이 종교는 가장 많은 숫자의 신도들을 거느리고 우리의 세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문학에도, 예술에도, 켐퍼스에도, 주점에도, 종교에도, 정치에도, 언론에도, 상업에도 성의 노골적인 유혹과 광기는 도처에서 현대인에게 `성을 숭배하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우리는 성의 홍수속에 살고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시대를 볻받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음'의 뜻
간음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히브리인들은 `간음'(Nahab)이란 말은 불법성교(不法性交)를 말합니다. 즉 `기혼자가 자기의 남편이나 아내 이외에 이성과 맺는 불법적인 성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로 기혼자들의 성법죄를 알컽을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미혼자들의 성적인 범죄를 일컽을 때 사용되던 `음행'이란 단어와는 그 뜻을 약간 달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모든 종류의 성범죄, 즉 강간, 남색, 수음, 동성연애, 매음행위, 혼전 성관계 등 광범위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는 성적으로 혼란하여 과연 간음이 죄인가 철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윤리적으로 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간음이 과거에는 죄였지만 현대는 죄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사람은 영원히 사람이고 하나님도 영원히 같으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불변하십니다. 변함없는 하나님께서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1)육체적인간음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성욕이나 성적 생활을 죄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떤 종교에서는 성욕을 죄악시 합니다. 모든 죄는 성적 욕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 나머지 그것을 죄악히하고, 참다운 신앙생활을 할려면 성적 금욕생활으 하여야 한다고 주장힙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하기를 `네 젊어서 얻은 아내와 즐기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성(Sex)는 하나님의 성스러운 축복이요,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많은 신자를 포함해서 성에 대한 이해가 비성서적으로 변질되고 말았습니다. 즉 성이 개방되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혼전 성적 경험률이 급증했고, 미혼모의 수가 늘어나고 있으며, 이혼휼도 급증하고 있습니다. 교인들의 성도덕관이 이러한 세속주의에 영향을 받아 많이 저하디어 가고 있는 현실입니다.
2)마음적인간음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5:2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마음에 간음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음욕을 품었다는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마치 암닭이 병아리를 품은 것 같다는 뜻입니다. 시간이 가면 이미 결정된 그 결정으로 병아리가 되어 태어나듯 마음 속에 이미 간음하기로 작정해버린 그 마음이 바로 `음욕을 품었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잠언6:27절에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아니 하겠으며'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 속 중심도 보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령님을 모시고 마씀을 묵상하며 살아야 합니다.
3)영적인간음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사랑하야 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이외의 우상에게 마음이 매혹되어 신앙의 순결을 저버릴 때 이는 지체없이 간음의 범죄로 정죄되었습니다.
`내가 배역한 이스라엘이 간음을 행하였다'(렘3:8)고 말씀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배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선포되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의 9절에 `그가 돌과 나무로 더불어 행음함을 가볍게 여기고 행음하여 이 땅을 더렵혔거늘'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간음하는 여인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약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상을 섬기고 세속에 빠져서 살때 영적으로 간음한 것입니다.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약4: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우상을 섬기고 세속에 빠져서 살때 영적으로 간음한 것입니다.
`간음'의 결과
세상에 모든 죄가 형벌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간음죄에 형벌은 더욱 중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죄를 결코 가벼운 죄로 보지 않습니다. `언제 네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기다렸던가 그리하였으면 내 처가 타인의 매를 돌리며 타인이 더불어 동침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는 중죄(重罪)라 재판장에게 벌받을 악이요'(욥31:9-11)
1)자신을 파괴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몸을 `하나님의 전'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 우리 안에 가룩한 하나님의 영이 거하십니다. `부녀와 간음하는 자는 무지한 잘 이것을 행하는 자는자기의 영혼을 망하게 하며'9잠6:32)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자기의 육체만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파괴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18절에서 `음행을 피하라 사람이 범하는 죄마다 몸밖에 있거니와 음행한 자는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니라'고 했습니다. 순결한 영혼이 이 죄에 빠지자 말자 그의 눈은 빛을 잃어버립니다. 음행의 늪에 빠지자마자 그의 인격은 정욕의 노예가 되고 맙니다. 그래서 잠언 성경에 `음녀로 인하여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계집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아니라'(잠6:26)고 했습니다. 이 처럼 음행은 인간의 육체와 영혼을 사냥하여 우리를 철저하게 파괴합니다.
2)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따럼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순결한 나라입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6:9절에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주님의 나라는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염됨 성의 범죄를 정복하지 못하스스로의 마음속에 갈등과 더러힘을 당했던 영혼들은 이 나라에 참여할 수 없는 인격자입니다.범죄를 정복하지 못하고 스스로의 마음속에 갈등과 더러힘을 당했던 영혼들은 이 나라에 참여수 없는 인격자입니다.혼들은 이 나라에 참여할 수 없는 인격자입니다. 계시록에
둘째사망에 대가를 치뤄야 할 범죄를 열거하면서 `행음'기록하고 있습니다(계21:8)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3)가정과 사회를 파멸시킵니다.
이 범죄는 개인적인 범죄가 아니라 사회적인 범죄입니다. 성적인 범죄는 문화의 척도가 됩니다. 엘톤 트루물러드(Elton Trueblood)는 `문명의 부폐는 잘못된 도덕의 미화(美化)에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한 시대가, 한 사회가 몰락하기 이전에 그 사회가 성의 문제를 어떻게 취급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의 원인은 바로 음행이였습니다. 폼페이의 최후의 로마의 멸망은 음란과 간음의 죄가 가져온 어둡고 무서운 최후였습니다. 부도덕을 정복하지 못하면 그 사회는 오래 살 수 없습니다. 개인에게도 마찬가지 입니다.
유혹을 이기는 길
1)유혹이 있는 자리를 피하여야 합니다.
죄를 이기는 방법은 두가지 입니다. 대항하는 것과, 피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대항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물러갑니다. 그러나 성의 유혹은 피함으로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라고'(딤후2:22)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피함으로서 승리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요셉입니다. 창세기 39장에 보디발 의 아내가 요셉에게 유혹할 때 그는 `네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가'(창39:9)라고 소리치며 그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도망이 이 문제에 대한 초대에 해결책입니다. 우리는 모든 음란의 방편을 거부하여야 합니다.
2)부부의 사랑의 띠로 굳게하십시오.
결혼은 육체만의 결합이 아니라 전인격의 결합입니다.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니라'(고전7:3)고 했습니다. 이 처럼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3)기도와 말씀으로 충만하게 채우십시요.
본질적으로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거룩한 생활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룩한 생활을 위한 두 수레바퀴는 말씀과 기도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119:9-11)라고 했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사람의 거룩한 인격을 우리는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51:10)
4)한가한 시간을 우리 생활에서 없앨 것입니다.
이것은 음란하게 만들고, 범죄로 나아가게 하는 첫걸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왕도 왕궁을 배회하다가 그 한가한 눈에 목욕하는 한 여자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 한가한 다윗왕으로 하여금 범죄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제 8계명:도적질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지니라'(출20:15)
도적질의 범죄는 살인, 간음과 함께 현대의 삼대 범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경제생활은 우리 삶의 한 중요한 부분입니다. 본 계명은 사람이 구체적으로 생을 사는데 중요한 경제활동, 타인의 재산을 보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하십니다. 이 계명의 순종이 없이 우리 사회의 기초는 든든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이 계명은 기독교 윤리의 근본이며 인간 공동생활의 필수적인 요건입니다.
도적이란 말은 `옆으로 제처 놓는다'는 `가납(Ganaab)이란 말에서 유래했습니다. 도적질이란 잘못된 목적을 위하여 잘못된 수단으로 재물을 다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도적질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것입니다.
인류의 모든 범죄는 도적질에서 시작합니다. 아담과 화와는 하나님이 금 것도 바로 이 범죄였습니다. 아니리아 삽비라는 지능적인 도직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을 약속하고되로 자신을 위하여 주님의 것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求. 그들은 하나님께 헌금을 약속하고되로 자신을 위하여 주님의 것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적질때문이요, 예수님의 제자인 가롯 유다는 신앙을 빙자해서 도적질을 하였습니다(요12:6) 또한 초대 교회의 부흥에 찬물을 끼얹은 것도 바로 이 범죄였습니다. 아니리아 삽비라는 지능적인 도직이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헌금을 약속하고되로 자신을 위하여 주님의 것을 빼돌리고 있었습니다.
`도적' 유형
1)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의 날을 도적질합니다.
하나님은 이 날, 하나님의 날로 드리도록 주일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 예배하도록 축복하신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귀한 날을 사사롭게 내 생각대로 이 날을 사용합니다. 이를 성경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말합니다.
2. 하나님의 소유를 도적질합니다(말3:8-9)
`너희가 도적이다' 이 말씀은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물질에 복을 받을려면 올 바른 물질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것이 하나님의 것이란 사실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는 어찌 잘 되기를 바라겠습니까
3. 하나님의 신령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신령의 도적질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게 사용하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 맹세하는 것, 이런 것들이 신령한 도적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내가 받으려고 할 때에 하나님의 영광을 도적질 하는 도적이 되고 맙니다. 다니엘서 5장에 보면 그 좋은 예가 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하나님의 (단5:22, 23)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취하고자 하는 것도 도적입니다. 그를 그냥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즉시로 왕위를 빼앗겼으며 들로 쫗겨나가 소처럼 풀을 먹는 비참한 최후를 맛이하게 됩니다(단5:22, 23)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할 영광을 자기가 취하고자 하는 것도 도적입니다.
2) 이웃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대인관계에서 정당하게 대하지 않는 모든것이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즉 부정직한 상거래도 도적질입니다. 레위기 19:35절에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호세아 선지자는 `손에 거짓저울을 가지고'(호12:7)라고 하였습니다. 빌리고난 후 갚지 않는 것도 또한 도적질로 간주합니다. 성경에는 사랑읩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고 햇습니다. 또한 고용인의 삯을 떼어 벗는 자본주의 행위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5:4)라고 하였습니다.
부당한 뇌물을 받는 것도 도적질입니다. 성경은 뇌물을 금합니다(출23:8) `불로소덕'의 정신, 일하지 않고 부를 획득하려는 시도는 도적질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의 생명, 이웃의 정조, 이웃의 명예를 도적질하지 말아야 합니다.
3) 자신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쓰는데 왜 도적질이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것도 결국은 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청지기입니다(고전4:1) 청지기는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것을 맡아 관리하는 자들입니다. 청지기가 이 재산을 잘못 관리하는 것은 남의 재산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도적질의정신과 상통하는 것입니다.
돛岵막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그 심령의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악한 병이로다'(전6:2) 재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능히 누리게 하심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악한 병이로다'(전6:2) 재산은 원천적으로 하나님의 것인 동시에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도적질하지 않기 위해서 가져야 할 자세
1)탐심을 버려야 합니다.
자족하는 것을 배우고 현실에 만족하는 삶을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11절에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습니다. 한국속담에 `올려다 보고 살지 말고 내려다 보고 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정신과 통합니다. 주님은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라'(롬12:16)라고 하셨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라고 했습니다. 재물에 지나친 욕심은 화근을 만듭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세사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고 했습니다.
남에 생활과 비교하여 생각해서도 않됩니다. 현대는 절대적인 빈곤의 삶을 사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인 빈곤층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이웃이 아파트를 넓은 평수로 이사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같은 평수로 이사 할려는 것이 현실입니다. 비교하는 것은 사탄의 속임수 입니다. 행복했던 아담과 이브에게 사탄은 찾아 `네가 하나님 처럼 되리라'고 갑자기 비교하여 하나님의 전능과,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비교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담의 행복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2)근면하게 일하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일하기 싫기든 먹지도 말라'(살전3:10)고 했습니다. 주어진 삶에서 부지런하고 근면하여 사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은 정직하게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3)이웃을 돌아보는 구제의 삶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주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우리속에 있는 도적의 심리가 치료되지 않습니다. 것뿐만 아니라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4:28)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주는 것을 배우기 전까지는 우리속에 있는 도적의 심리가 치료되지 않습니다.
구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히13:16) 살아있는 신앙입니다(약2:14-170 개인이나 국가나 교회도 이웃을 향하여 주는 삶이 없이는 그 삶은 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중세시대 교회가 인류의 걸작품이며 중요한 문화의 업적으로 남아 있는 성 씨스틴 성당이나 바티칸의 성 베드로 사원을 지은 후에 국가는 망하였습니다. 구는 것을 잊어버리고 자기만을 치장할 때 중세의 암흑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고 하였습니다.
옛날 히브리 사람들의 기도가운데 이러한 기도문이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구제할지언정 구제받지 말게하시고 우리 자손이 꾸어 주지만 꾸임을 받지 말게 하옵소서. 나와 우리 자손들이 남을 대접할지언정 대접받지 말게하시고 남을 주면서도 우리의 창고가 넘치게 하옵소서!'
제 9계명: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출20:16)
언어의 기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가장 고귀한 능력이요 축복입니다. 언어에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노예전쟁을 승리로 이끌 때 그의 연설은 북군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그 미약했던 영국이 그 거대한 제 3공화국 히틀러를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처어칠의 연설 능력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게르마니아 사람들을 그처럼 단합되게 만든 것은 히틀러의 연설이였습니다. 말에는 이 처럼 힘이 큽니다.
우리의 인격을 밖으로 표출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언어입니다. 그래서 니이체는 언어가 인생의 2/3를 차지한다고 하였습니다. 언어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대의 축복입니다. `로고스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로고스라는 언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원래 하나님을 찬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그런 표현으로 주셨지먄 타락한 사람의 혀가 저주와 참소와 악독과 거짓, 그런 것으로 그 기능이 바꾸어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주일하교 어니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엄마, 도적질하는 것과 거짖말하는 것과 어느 것이 더 나쁜 거예요' 엄마는 이 아이에게 `그야 물론 조적질이 더 나브지'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에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니예요, 틀렸으요. 거짓말이 더 나빠요. 거짓말은 돌려 줄 수가 앖잖아요.'라고 했습니다.
8계명은 이웃의 유형(有形)의 재산에 대한것, 9계명은 이웃의 무형에 재산인 명예에 관한 것입니다.
1. 거짓 증거의 특성
1) 인간에게 가장 보편적인 죄이다.
모든 구약의 예언자들는 그 당시의 사회 부폐를 지적하면서, 사람들의 거짓됨을 공격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 아모서 선지자, 아사야 선지자, 예례미야가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이 거짓의 본성을 지적했습니다. `내가 경겁 중에 이르기를 모든 사람은 거짓말장이라 하였도다'(시116:11)
그러므로 가장 고치기 어려운 영적질병이 거짓입니다.
2)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범죄입니다.
거짓말을 하기전에 거짓말장이의 품성을 지닌 것이 더 문제입니다. 거짓이라는 우리의 본성 때문에 거짓말은 불가피하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과 증거와 훼방'(마15:19)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이 부폐되괴 거짓된 성품이 우리에게 거짓말을 유발시킵니다. 이 죄의 근원은 궁극적으로 마귀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를 가리켜 `거짓의 아비'라고, `저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마'라는 말은 핼라어로 `디아볼로스'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중상자, 비방자, 입이 험한자란 뜻입니다. 사단은 이 모든 거짓의 배후 조정자입니다.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탄식하시며, 마귀는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거짓을 미워하십니다(잠6:16) 따라서 반드시 심판을 받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라고 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마12:36)라고 했습니다.
2. 거짓말의 유형
1) `참소'
참소란 말은 이웃과 벗에 대하여 고의적이고 파괴적인 거짓말을 뜻합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자기 욕심대로 안되니까 요셉에 대하여 앙심을 품고 그 남편에게 참소를해서 요셉이 무고히 감옥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님이대단히 내성적이고 말이 없으셔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심방가면 가민히 않아 있지 말고 그 집에 대해 무엇이든지 칭찬을 해주는 것으로 말을 시작하라고 권고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이 그렇게 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심방 가서 눈에 띠는 것 중에 마음에 들기만 하면 칭찬을 합니다. 그 중에 한 집에 갔는데 참 가나한 집이었습니다. 어느 것도 칭찬할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가장 눈에 띠는 것 하나가 바로 예쁘게 수놓은 책상보였습니다. 사모님은 수를 참 잘놓았다고 한참 칭찬을 해주었습니다. 그날 저녁이었습니다. 그 집에 선물이 왔는데 그 책상보를 잘 개어서 다리고 포장을 했습니다. 그러니 이 목사님 사모님이 얼마나 마음이 뜨거웠겠습니까 그것까지는 참 아럼다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런데 말이 돌기를 목사 사모가 얼마나 탐심이 많아서 그 가난한 집의 책상보를 빼았아 왔느냐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모님이 정신적으로 상처를 입어서 거동을 못하고 말을 잘 못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을 이웃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없이 함부로 합니다. 참소는 마귀가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나 참소를 버려야 합니다.
2) `헛소문의 유포'
소문이라는 것은 정확한 것이 못됩니다. 요사이도 그런 놀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사람의 말이 얼마나 정확하게 전달되나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놀이입니다.수 있는 놀이입니다.
사람이 삼사십명 둘러 앉아서 첫사람이 그 옆 사람에게 `저 사람이 너를 좋아한대'하고 귓속말로 하면 그 다음 사람엑 그 말을 전합니다.
그런데 사람이란 듣는데로 전하지 않고 자기 감정을 섞어서 전합니다. 그래서 이말이 마지막 사람이 귀에 전할 때는 처음 말과는 아주 다른 말로 전해질 수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저 사람이 너를 좋아한대'하고 전했는데 마지말 사람에게는 `저 사람이 너를 족일 놈이라고 해'라고 전해질 수도 있습니다.
전하는 말, 소문이란 정확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정확하다고 해도 좋지 않는 말은 아예 뭇어 버리고 잊어버리고 되풀이하지 않는 것이더 좋은 것입니다.
성경은 말하기를 `두루 다니며 험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잠20:19)고 했습니다. 또한 로마서 1장에서는 `수근수근'하는 것도 죄라고 했습닏.
3)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는 것.
예수님께서 ` 이 성전을 흘라. 내가 사흘만에 다시 일으키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죽어야 할 그 몸과 부활을 의미하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중상자는 그것을 문자적으로 고자질 했습니다. 그래서 말을 할 때 조심하여야 합니다.
말에는 다리가 없다고 합니다. 다리가 없기 때문에, 가교밑에 세우는 밑받침이 없기 때문에 한번 거짓말을 하면 계속해서 밑받임을 세워야 합니다. 말하는 사람의 의중을 그리고그 중심을 살펴야 합니다.
거짓에서 승리하는 비결
1. 거짓을 죄로 여기십시다.
어쩔 수 없으니까 하며 합리화시키려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정하십시요. 죄로 여겨지기 전까지는 해결이 안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1:9)
2.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마십시요.
많은 거짓말이 남의 일을 간섭하는 데서 유발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에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자기 일에 충실하고 이웃에 일은 하나님께 맡기도록 하십시다. 우리는 사실을 다 알지도 못한체 남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타인이 깊은 사정, 아픈사정, 슬픈사정을 잘 모릅니다. 그들이 잘 될 때는 말을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못 될 때만 고라가면서 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고통당하고 있는 중에 더 발로 밟고 있습니다.
오빠가 결핵으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견디가 못한 가난한 누이가 몸을 팔았습니다. 그래서 작 오빠를 구했습니다.
그런데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이야기를 하고 떠블었던지 그 사실이 오바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오빠는 그 충격으로 그만 자실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여동생도 자기가 몸을 팔아서 살려놓은 오빠가 목숨을 끊어버리자 따라서 죽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장례식날, 그 교회 목사님은 울면서 설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날 `너 아무게 목사야! 네가 네 양때를 얼마나 돌아보았느냐'고 물으신다면 `예, 저는 양이 한마리도 없고 이리떼만데리고 있다가 여기 왔습니다.'고 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으로 우리가 남의 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해버리는, 쉽게 입으로 뱉어버리는 일이 많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구함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께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언어 생활을 위해서 진지히게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주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워주옵소서'라고 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잠언 기자도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잠30:8)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4. 날마다 주님과 교제해야 합니다.
누구와 만나서 어떤 말씨를 배우느냐에 따라서 내 말의 습관이 달라지지맙시다.어떤 모습으로 말을 배웠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우린 주님과 날마다 교제해야 합니다. 기와 찬송을 중심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는 생활을 살기를 바랍니다.
교제해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을 중심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는 생활을 살를 바랍니다.배워가지고 오는 것이라곤 욕뿐이었습니다. 어떻게 듣기 싫은 욕을 하든지 제가 매를 들었더니 `이 도독놈아!' 그러는 겁니다. 누구에게 이떤 모습으로 말을 배웠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우린 주님과 날마다 교제해야 합니다. 기도와 찬송을 중심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는 생활을 살기를 바랍니다.
탈무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말은 손이 없지만 손이 하는 일을 한다.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손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손은 가까이 있는 사람만 죽이지만 말은 멀리 있는 사람도 죽인다. 화살처럼, 그렇지만 화살을 넘어선다.
왜냐하면 화살은 손으로 막을 수 있지만 말의 쏘아대는 무서운 살상력은 피할 세력이 없다'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참이신 하나님, 거룩하신 진리의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정결하고 아름다운, 그분께서 기대하시는 언어생활을 사모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니와 삽비라(행5:3), 그들은 거짓말 때문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언어로 하나님께 영왕을 돌리십시다.
제 10계명: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20:17)
지금까지 계명들은 다 우리 죄악의 행위와 관련되어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 범죄 행위를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젼적인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열째 계명은 볼 수 없는 죄입니다. 탐심은 죄의 욕망이며, 죄악의 동기이며, 보이지는 않지만 실제하고 있는 죄입니다. 이것은 행동과 관계이기
보다는 내적인 정서와 더관련이 깊은 죄입니다
성경은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쳐라'(눅12:15)고 하십니다. 아간의 탐심은 은을 숨겨 놓았습니다. 이 범죄로 아이성에서 패배했습니다. 사울왕은 황소 몇마리를 탐하다가 그의 왕관을 잃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몇마리를 탐하다가 그의 왕관을 잃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입성했는데 하나님께서 여리고성을 진멸하고 아무것도 갖지 말라라고 그랬을 때, 아간은 외투와 은을 숨겨 놓았습니다. 이 범죄로 아이성에서 패배했습니다. 사울왕은 황소 몇마리를 탐하다가 그의 왕관을 잃었습니다. 아합왕은 나봇의 포도원을 탐하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1. 탐심의 성격
1) 모든 죄에 뿌리가 됩니다.
앞에 있는 모든 계명이 바로 이 탐심의 결과로 옵니다. 그래서 탐심은 `모든 죄의 어머니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욕심(탐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약1:15)고 말합니다. 탐심 때문에 도적질도 합니다. 간음도 합니다. 싸움도 합니다. 심지어 살인까지도 합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를 탐하여 간음죄와 살인죄을 범하게 된 것입니다.
2)이 탐심은 우상 숭배입니다.
탐심이란 뜻은 `더 움켜쥔다'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니라'(골3:5)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탐심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을 소유하기 때문입니다. `쾌락을 탐하던 사람들의 신(神)은 배'(빌3:19)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사람들은 탐심을 자기의 하나님으로 삼고있기 때문입니다.
2. 탐심의 결과
1)신앙 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영적인 욕망과 육적인 욕망이 동시에 공존할 수 없습니다. 하나의 욕망이 커지면 다른 욕망은 좌절되고 맙니다. 탐심이 내 영혼을 물들게 하면 영적인 식용, 곧 말씀의 맛이 없어져서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게 합니다.
2) 육적인 건강을 파괴합니다.
잠언 성경은 `탐심을미워하는 자는 장수하리라'(잠28:16)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탐욕은 우리의 건강을 해친다는 말입니다. 사람중에도 이런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루 동안에 밟고 걸어다니는 땅을 다 네 으로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농부는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뛰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있는 힘을 다해서 전력으로 달릴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 늦게까지 전력을 다해서 뛰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최대한의 많은 따을 차지하고 나서 그가 떠났던 출발점에 도착했을 때 기진맥진한 나머지 쓰려져 죽고 말았습니다. 소유에 대한 욕심보다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3. 탐심의 죄를 극복하는 방법
1) 이 세상의 모든것은 무가치하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성경은 말하기를 `은을 사랑하는 자는 은으로 만족이 없다'라고 했습니다. 돈가지고 만족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없습니다.
2)자족을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욕심을 갖고 탐심의 죄 속에 빠지는 것입니다. 진정 만족은 행복의 면류관입니다(빌4:12,13)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히13:5)고 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6:7-8)
3)드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하느니라'(잠21:26)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배우기 전에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할 수가 없습니다.
십계명의 결론
십계명은 하나님을 하는 삶과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는 삶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모든 매사에 이 계명을 중심해서 날마다 승리하는 삶을 주님께 드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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